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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노블레스 오블리주

by Ajan Master_Choi 2022. 2. 23.
 
원래 노블레스(nobless)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블리주(oblige)는 ‘달걀의 노른자’를 의미한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닭의 사명이 자기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지도층이 사회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레스)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는 부유한 사람이 그 부를 자랑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 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알기 전에는 그를 칭찬하지 말라고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초기 로마 사회에서는 사회 고위층의 공공봉사와 기부·헌납 등의 전통이 강하였고, 이러한 행위는 의무인 동시에 명예로 인식되면서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귀족 등의 고위층이 전쟁에 참여하는 전통은 더욱 확고했는데, 로마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15분의 1로 급격히 줄어든 것도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귀족들이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귀족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잡을 수 있었으나, 제정(帝政) 이후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되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면서 발전의 역동성이 급속히 쇠퇴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칼레는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 본토와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백년전쟁 당시 칼레를 차지하는 것이 프랑스군과 잉글랜드 군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1347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군대가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약탈행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칼레 시를 점령했고, 1년 여에 걸쳐 잉글랜드 군에 저항했던 칼레의 시민들은 학살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프랑스 작가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의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의 지도자급 인사 6명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살려주겠다는 뜻을 전달했는데,
이에 시민 대표 6명은 다른 시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교수형을 각오하고 스스로 목에 밧줄을 감고 성문의 열쇠를 가지고 에드워드 앞으로 출두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에드워드 3세는 임신한 태아에게 해가 될 것을 우려한 왕비 히놀트의 필리파(1328년 결혼, 1369년 사망)의 간청을 듣고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칼레의 시민 일화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시민 대표들이 도시민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놓았다는 기본적인 줄거리는 거의 같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상류층이 지니는 도덕적 의무를 가리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전형적인 예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이 일화가 실화라기보다는 시민 대표들이 항복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행한 형식적인 의례가 후대에 점차 애국적이고 희생적인 미담으로 부풀려진 것으로 보고 있다.

1845년에 칼레 시는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민 대표들의 지도자였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의 상을 제작하기로 결정했으나, 제작을 맡았던 조각가 다비드 당제의 죽음과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1871)의 발발로 계획은 오랜 기간 실행되지 못했다.

1884년에 칼레 시는 고심 끝에 로댕에게 제작을 의뢰했지만, 로댕이 1889년에 완성한 기념상은 사람들이 기대한 애국적 영웅의 늠름한 모습이 아니었고, 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을 하고 있는 6인의 인물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거나 곧 닥칠 죽음에 침통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초인적인 영웅이라기보다는 극히 인간에 가까운 이 모습은 곧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그래서 이 기념상은 당초 세워질 예정인 칼레 시청이 아니라, 한적한 리슐리외 공원에 세워졌다가 나중에야 다시 칼레 시청 앞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공공 기념상들이 높은 받침대 위에 위풍당당하게 설치되는 것과 달리 로댕은 칼레의 시민 상을 최대한 지면에 가깝게 세워 마치 지면 위에 평범한 인간들이 고뇌하며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어 했으나, 시의회의 반대로 1895년에 제작된 기념상 아래에는 1.5m 높이의 받침대를 두어야 했다.

그러나 1924년 기념상이 시청으로 옮겨지면서 받침대의 높이도 로댕의 원래 바람대로 최대한 낮춰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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