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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고려 제15대 숙종

by Ajan Master_Choi 2013. 9. 24.

휘는 옹(顒), 자는 천상(天常). 제11대 문종의 3남이었다.

숙종은 보위에 오른 조카를 반 강제로 내쫓고 권좌를 차지했다.

고려사에는 숙종과 대립하던
외척 인천 이씨 가문의 이자의가
왕위를 뒤바꿀 계산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숙종이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그를 살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학자들에 따라서는
오히려 숙종이 왕위를 차지할 목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이자의 등 자신과 정적 관계에 있었던
반대파들을 제거한 뒤 헌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일종의 친위 쿠데타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숙부인 숙종이
보위를 이어받은 것인데,
유교적인 부자 상속보다는
전통적인 형제 상속이 선호되었던
당시 고려시대에는 오히려 큰 비판을 받지 않았다.

숙종은 남경 수축, 서경 우대 등을 통해
개경 중앙 귀족을 견제했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며
대외적인 여진 정벌을 선포해 
북벌을 누차 시도한 강성 제왕이 되었다.

하지만 인천 이씨를 비롯한
중앙의 문벌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측근 위주의 정치를 펼쳐
점차 국왕 주변 측근 세력들의 힘이 커졌고,
여진과의 잦은 전투로 국력을 소비시킨 단점도 있었다.

뒤를 이은 예종은 
여진 정벌이라는 부왕 숙종의
의지를 이어갈 정도로 강경하고
명철한 임금이어서 괜찮았지만
손자인 인종 대에 이르러서는
측근 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져 폐단이 드러나게 되었다.

공식 묘호는 숙종(肅宗)이다.
복령궁주 묘지명엔 숙묘(肅廟)라고 나온다.
숙종은 이후 왕가의 시조이기 때문에
숙조(肅祖)라고도 불렸다.

숙종 → 예종 →인종 → 의종, 명종, 신종 → 희종, 강종 → 고종 → 원종 순으로 전부 숙종의 직계 자손들이다.

시호는 강정문혜명효대왕(康正文惠明孝大王)이다.
아들 예종(제16대)이 명효를 올렸고,
손자 인종(제17대)이 문혜,
5대손 고종(제23대)이 강정을 올렸다.

대표시호인 명효대왕(明孝大王) 중 효(孝)자는
'선왕의 대업을 효성스럽게 잘 받들어 이었다'는 뜻으로 받는다.
이는 가장 무난한 시호로 숙종 이후
모든 국왕이 효 자 시호를 넣어 받았다.
대표시호 중 명(明) 자는 밝을 명 자로 시법상으로 괜찮은 시호이다.

숙종의 능호인 영릉(英陵)을 칭호로 쓰기도 했다.
조카 헌종은 그를 번저의 중신(藩邸重臣)이자 천원의 기쁨(天源之發慶)이라 불렀다. 
숙종은 넷째 딸 복령궁주의 묘지명에서 천자(天子)로 불렸다.
아들 <왕효 묘지명>에서 예종이 숙종을 선제(先帝)로 불렀다.

숙종의 왕자 시절 처음 작위는 계림후(鷄林侯)였고 진봉하여 계림공(鷄林公)이 되었다.
문종(제11대)의 오등봉작제는 신하의 5등작, 왕족의 3등작으로 구분되는데
숙종은 왕족으로서 3등작에 봉해졌다.
봉국(封國)인 계림은 신라의 별칭 중 하나다.

幼而聰慧 及長 孝敬勤儉 雄毅果斷。五經子史 無不該覽 文宗愛之 嘗曰 後之復興王室者 其在爾乎。
어려서 총명했고, 자라서는 효성스럽고 근검했으며 성격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다.
5경(五經)과 제자백가서 및 사서를 빠짐없이 두루 공부해 문종이
“장차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바로 너다.”
라며 무척 아꼈다.

《고려사》 <숙종 본기> 중.

1054년 9월 2일 문종(제11대)과 인예태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065년 공작위에 봉해져 계림(鷄林)을 분봉받았다.
원래 이름은 희(熙)였으나 
거란의 제9대 천조제의 이름과 발음이 같다 하여
천조제 즉위년에 개명하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신성대왕 왕건의
유훈이었던 <훈요 10조>에 따라
형제 상속이 어느 정도 일반화되어 있었기에
왕이 후사가 없거나 뒤를 이을 태자가
너무 어리거나 허약하면
왕의 형제들을 다음 후계자로 삼는 일이 공공연했다.

숙종의 아버지인 문종도 
정종(제10대)의 동생으로서
형제 상속을 통해 왕위를 계승했다.
형이자 선왕인 선종(제13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림공 왕희는
일찍이 아버지 문종이 아낄 정도로
재주가 출중하고 유능해서
신하들이나 종친들 모두
차기 왕위 계승자로 여기고 있었다.

별 어렵지 않게 다음 왕이
되겠거니 하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웬일인지 형 선종이 자신을 제치고
병약한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버린 것이다.

계림공 본인으로서는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어차피 본인이 왕을 꿈꾸는 야심가인데다 
조카인 헌종 역시 병약해서 왕위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계림공 왕희는
자신의 조카 한산후 왕윤을
왕위에 올려 실권을 잡으려고 하는 
외척 세력의 수장 격인 이자의와 대립한다.

그러다 1095년 7월,
결국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희는 소태보와 왕국모를 시켜 만월대의
선정문 앞에서 이자의를 살해하고 일당들까지 모두 제거했다.

그런데 이자의가 역모를 꾸민 것을 기회로 숙종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나 순서가 약간 애매하다.
이자의가 먼저 난을 일으키고, 숙종이 이를 방어하면서 제압한 형태인지 아니면 이자의가 역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을 사전에 눈치채고 숙종이 선제 공격을 행해서 제압한 형태인지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자의가 권세를 부리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역모 계획은 아직 세우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숙종이 이자의에게 역모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선제 공격했을 가능성도 제기해 볼 수 있다.
결국 두려움에 떨던 헌종이 재위 1년 만에 숙부인 계림공에게 양위하면서 고려의 제15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훗날의 조선 세조 이유와 다른 점이 있다면 상왕이 된 헌종을 시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헌종은 상왕으로 지내다가 곧 병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의 세조가 사육신의 복위 운동 이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서 영월로 유배보내고, 결국 사사까지 시킨 것과 달리, 고려 숙종은 굳이 조카를 죽이는 수고를 하지 않고 자연스레 왕권을 확립시켰으니 그나마 나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몰래 헌종을 죽이고 병으로 죽었다고 거짓말 한거 아닌가?'라는 의심을 할 수도 있다.
비슷한 예로 조선 《세조실록》에서는 단종이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나오지만 후대의 기록을 보면 세조가 직접 사사 명령을 내리고 단종이 이를 거부하자 목을 졸라 시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고려 헌종은 일단 공식적으로는 병사가 맞다.
숙종이 굳이 헌종의 목숨을 스스로 거둘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헌종이 병으로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복위 운동이 계속해서 벌어진 조선 단종과는 달리 헌종은 그런 지지 세력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본인도 나름 정통성이 있었고 지지 세력도 탄탄했기에 숙종 입장에서는 굳이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고려 숙종은 조선 세조와 달리 명분으로 꿇리는 편은 아니었다.
고려 숙종은 조선 세조와는 다른 방식으로 집권했는데 조선 세조는 반대 세력인 김종서와 황보인의 세력이 가만히 있었는데도 역모로 몰아서 제거한 뒤(계유정난) 집권한 반면 고려 숙종은 반대 세력인 이자의의 세력이 역모를 꾀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이자의의 세력을 제거한 후 집권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전략)
(이자의는) 이에 이르러 병사들을 궁궐 안에 모아 장차 거사를 일으키려 하니, 계림공(雞林公) 왕희(王煕)가 명복궁(明福宮)에 있다가 은밀히 이를 알아차리고는 소태보(邵台輔)를 깨우치기를, “국가의 안위가 재상에게 달려있소. 지금 일이 급하니, 공(公)이 도모해야 하오.”라고 하였다. 〈이에〉 소태보가 상장군(上將軍) 왕국모(王國髦)로 하여금 병사들을 이끌고 들어와 시위(侍衛)하게 하고, 장사(壯士) 고의화(高義和)로 하여금 이자의와 그의 당여인 합문지후(閤門祗候) 장중(張仲), 중추원당후관(中樞院堂後官) 최충백(崔忠伯)을 선정문(宣政門)에서 참하도록 하였으며, 이자의의 아들인 주부(主薄) 이작(李綽)과 장군(將軍) 숭렬(崇列)·택춘(澤春) 등 17인을 나누어 잡아 모두 죽이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이자위(李子威)와 소경(少卿) 김의영(金義英), 사천소감(司天少監) 황충현(黃忠現) 등 50여 인은 남쪽 변방으로 유배 보낸 뒤, 적당(賊黨)의 처자(妻子)들을 적몰하여 양계(兩界)에 있는 주진(州鎭)의 노비로 삼았다. 이자위는 이자의와 결탁하여 국정을 전단하고 권세를 부렸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선종이 총애하는 동생 5인이 있었음에도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여 이러한 난리를 초래하였다고 기롱하였다.

《고려사절요》 헌종(獻宗) 1년 7월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키다-

화폐 발행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주장대로 '주전도감'을 설립하여 화폐인 해동통보, 삼한통보를 제조해 유통을 시도하는 한편 사찰도 많이 지어 불교 세력에 더 힘을 실어주었다.

이 부분도 조선 세조와 같지만 세조는 죄의식을 참회하기 위해 불교를 믿었지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세조는 불교를 개인 신봉한 경우이며, 이게 단종의 목숨을 빼앗은 것과 엮이는지는 애매하다.
그리고 조선은 국교가 유교지만, 고려는 국교가 불교라서 고려 왕실의 사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러니 공통점이라 보기에는 영 애매한 부분.

그런데 숙종의 지시로 만들어진 해동통보는 고려 사회에서 많이 통용되지 못했다.
화폐가 통용된 건 먼 훗날인 18세기다.
시대를 앞서도 너무 앞서나간 셈.
또 불교 진흥 정책에 대해서는 동생 의천을 통해서 교종을 통합하여 왕권 강화 시도를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인 견해이다.

근친혼 금지령
1096년 유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숙종은 6촌 이내 근친혼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근친혼을 막은 가장 큰 이유는 문벌귀족들의 혼맥의 난맥상을 막기 위해서였다.
유교적인 것은 나중 문제였다.
당시 신료들이나 백성들의 반응도 '중국 풍속 꺼져!'에 가까웠고...

그러니 시행되자마자 무시당한다.
당시 왕이건 신하건 백성이건
"그딴 중국 풍습을 왜 우리한테 강요하나요??"
하면서 무시하는 바람에 사문화되었다.
본인의 자식들만 해도 아들 예종은 두 명의 사촌을 왕비로 들였으며, 4명의 딸들은 모조리 6촌 이내의 종친과 근친혼을 했다. 
그렇지만 근친혼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는 현재의 관념은 통상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국자감 서적포 설치
서적 간행의 활성화와 관학 교육 진흥을 위해 국자감에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했다.
이는 부왕 문종 이후 지나치게 커진 사학 즉 사교육이 강화되는 풍토를 억제시키고, 관학을 부흥시키기 위한 의도이기도 했다.

기자 숭배
서경인 평양에 기자 사당을 건립하고, 기자에 대한 숭배를 강화했다.

남경 천도
숙종 재위기에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4]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풍수지리 전문가였던 김위제가 비기(秘記)인 《도선기》(道詵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인용하여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했다.

그리고 1104년에 남경 별궁이 준공되어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했으나, 이 때 남경은 서경처럼 지역 세력이라든지 지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크지 않아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났다.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왕궁 조성은 했는데, 그게 현재의 청와대 자리다.
300여년 뒤 태조 이성계가 이 터를 둘러보곤 그 남쪽에 경복궁을 지었다.

김위제가 이런 것까지 보았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쨋든 그의 풍수지리학적 분석처럼 조선시대부터 남경이 수도가 되고, 1945년 해방 이후에도 남경 별궁의 자리가 청와대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맞기는 맞은 셈이다.

특이한 것은 숙종의 동생 부여후 왕수가 세력을 키운다는 둥, 다음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둥의 소문이 무성하자 그를 역모죄로 잡아 들였다는 것이다.
왕수는 이후 바로 유배를 떠났고,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복권시켜 주었다.

숙종 자신은 조카 헌종으로부터 양위를 통해 형 선종의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다음 왕위는 자신의 큰아들 왕우에게 물려주고 싶어했다.
사실 이 때까지도 고려에서는 형제 상속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던 듯 하다.

이 때 형제 상속이 자연스럽게 보인데에는
고려 전기의 왕들의 수명이 대체로 짧았다는 점이 컸다.
그러다 보니 사후 자식의 나이가 제위를 잇기에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
40줄을 넘긴 왕들이 많치 않다.
왕들을 추려봐도 태조 왕건부터 시작해,
제4대 광종과 제8대 현종,
후대의 제11대 문종과 제13대 선종,
제15대 숙종,
제16대 예종을 빼고는 전부 40세 이전에 붕어했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근친혼으로 인한 후유증이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도 연달아 군주들이 이른 나이로 붕어했는데 근친혼의 후유증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반면 근친혼이 없었던 조선 국왕의 평균 수명은 만 47세로 통일신라와 고려보다 5년 가량 더 길다.

사실 5년 차이도 크진 않은 것이 의외로 조선의 군주들도 오래 산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국왕이라는 위치 자체가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올 수 밖에 없고, 정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과중한 업무로 인한 과로 등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는 요소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거기다 매일 앉아서 정무를 보던 임금들의 특성상 몸이 상하기 쉽다는 것도 플러스 요소.

그래도 선종이나 숙종,
더 나아가 예종의 경우를 보면
정작 왕 자신은 형제 상속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경위는 기록에 없지만 부여후 왕수가 형제 상속을 염두에 두고 나대기는 했던 것 같다.

말년에 고문개, 장홍점, 이궁제, 김자진의 반란을 겪기도 한다.
또한 재위 기간 중에 유독 우박이 많이 내렸고, 송충이가 들끓어 수도 개경의 소나무가 많이 피해를 봤다고 한다.

1105년, 탐라국을 '탐라군'으로 개칭하여 제주도를 중앙 행정 조직으로 편입시켰다.

한편 재위 말년에 들어 북방의 여진과의 전투에서 큰 코를 다친다.
여진 정벌의 총지휘관이었던 임간이 공에 정신 팔려 여진족의 강역에 깊숙히 들어갔다가 대차게 깨지며 망신을 제대로 당한 것이다.
그래도 여진족에 대한 정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이에 윤관을 기용해 별무반을 양성하며 여진과의 전면전에 철저히 대비했다.

당시 완안부 여진의 힘이 꽤 강해진 탓에 본 영역에까지 접차 유의미한 위협을 가해왔고,
이에 고려가 가지고 있었던 특유의 해동 천하관이 무너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고려는 이전까지 여진, 일본, 탐라, 우산국 등 주변 약소국이나 세력을 번국으로 취급하며,
고유의 외왕내제로 대표되는 체제 안에 편입시켰는데 그 질서를 완안부 여진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자연스레 거슬려 버린 것이다.

재위 10년째인 1105년 숙종은 
여진 정벌의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봉은사 등 여러 사찰에 제사를 지내고 태자 왕우를 시켜 도교 초제를 지내게 했다. 3월 국청사에 어머니 인예태후가 만든 금탑(金塔)을 세우기도 했다.
6월 점차 몸이 안 좋아지는걸 느꼈는지 태자 왕우의 관부인 수춘궁에 관리를 붙혀주었다.
8월 서경에 나아가 장락궁에 머물렀는데
9월까지 머무르며 군사 훈련을 주도했고 태자 및 중신들에게 활쏘기를 시켰다고 한다.
태자를 동명왕릉에 보내 제사지내게 했으나 9월 말부터 몸이 갈수록 안 좋아졌고,
황급히 어련을 탄 채 개경으로 환궁했다.
1105년 10월 2일, 환궁하던 중 본궐에 도착하지 못한 채 황성의 장평문에서 사망했으며 붕어 선포는 궁성 서문 서화문에서 했다.[5] 여진 정벌은 자신의 뒤를 이은 예종이 이어받아 진행하게 된다.

짐(朕)은 덕이 없지만 대업(大業)을 이어 수호하니 만사(萬事)를 통치했다.
그러니 하루도 편안히 있지 않고 몸을 숙여 정치를 펼치니 밤을 센지가 10여 재(載)이다.
생각컨데 중외(中外)의 사람과 같이 인수지역(仁壽之域)을 모험했으나 질병에 걸릴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천명(天命)은 알기 힘들다.
짧게 살든 길게 살든 그저 하늘에 맡길 뿐이다.
허나 방기(邦基)는 지중(至重)하니, 전하는 말을 잊을 수 있겠는가? 
왕태자(王太子)는 인의(仁義)를 알고 효우(孝友)를 안다.
태어날 때부터 똑똑했고, 따뜻했고, 자애롭고, 온화하니 백성의 소망을 채울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묻히기 전 얼른 군위(君位)를 잇도록 하라.
모든 군국대사(軍國大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맞긴다.

방진주목(方鎭州牧)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어라.

오호라(於戲)!
시작과 종말의 시기를 아니 죽는 자는 아무 후회가 없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산 자는 오래 살도록 하라.
이제 고굉대신(股肱大臣)과 백벽(百辟)과 경사(卿士)들은 왕실(王室)을 보좌하고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도록 도와라.

그리한다면 짐은 눈을 감더라도 마음은 족하다. 국내(國內)에 선포하여 짐(朕)의 뜻을 알리도록 하라.

- 《고려사》 <숙종 세가>에 기록된 유조.

2017년 8월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개성시 선적리에서 숙종의 왕릉을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5월~6월에 20여 일에 걸친 작업으로 발굴된 유물의 연대, 묘지 양식, 문헌 기록의 대조를 통해 확정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신라의 제41대 헌덕왕 김언승, 조선의 제7대 세조 이유처럼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강제로 왕위에 오른 것 때문에 도덕적인 면에서는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일단 즉위한 후 본인의 출중한 능력으로 인해 많은 업적을 남겨서 옥좌에 오른 이후 훈구파 등 부패 세력들을 양성하여 조선의 정치를 썩게 한 세조와는 달리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다가 대부분 반박을 당한 세조 이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및 변호들이 정작 숙종 왕희에게는 정말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세조 이유를 비교하면 세조가 훨씬 못하다고 평가받듯이 고려사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광종 왕소와 비교하며 숙종 왕희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역시 대후배 세조처럼 광종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는 것이다.
광종은 피의 개혁을 통해 고려라는 국가의 기반을 단단히 쌓았던 반면 숙종은 측근 정치를 행하여 외척이나 권신들의 권한이 커지게 만들었으며 여기에다 20세기 후반의 고려사 연구자 중에서는 숙종이 시작한 여진 정벌마저 '국내 정치의 난맥을 수습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한 엄청난 삽질'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존재한다. 
남경 건설 및 여진 정벌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만들었기에 《고려사》에는 이 때에 '열 집 중 아홉 집이 비었다'라고 기록했는데 전부 부역에 동원되거나 심지어는 부역과 징병을 피해 도망쳐 유랑민이 된 경우였다.

근신 정치로 인해 숙종 다음 예종 시기부터 경원 이씨(인천 이씨 또는 인주 이씨)들이 득세하며 문벌귀족의 고착화가 심해져 그의 손자인 인종 대에 여러가지 혼란이 찾아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부왕 문종 대부터 있어 왔던 경향이며, 오히려 숙종보다는 문종이 경원 이씨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자연[9]을 등용해 힘을 실어주는 등 대놓고 문벌귀족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는 모습을 보여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문벌귀족 세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이 모두 문종의 탓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도 많은데 문제의 근원만 따지고 보자면 오히려 고려 초기인 성종(제6대) 때부터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북진 정책은 완안부 여진족의 팽창(여진족이 고려의 변경을 먼저 침)으로 고려의 변경이 위험해졌으므로 숙종의 탓으로만 볼 수 없다는 시각도 많은 편이다.
일단 집권할 때부터 이자의와 그 끄나풀들을 철저히 뿌리뽑아서 경원 이씨의 득세에 제동을 건 장본인도 바로 숙종이었다.
집권한 후부터는 왕권을 강화하는데 있어서도 화폐를 제조하거나 6촌 이내 근친혼을 금지시키고 승려가 된 동생 의천을 통해 불교를 통합하려 시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기도 하다.

숙종과 대립했던 이자의에 대해 살펴보면 유명한 이자겸의 사촌으로 경원 이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당연히 숙종 대에는 이자의의 반란과 숙청으로 경원 이씨의 기세가 한 풀 꺾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숙종 사후 3년 뒤 예종이 자신의 2번째 왕후로 이자겸의 딸을 들이면서 경원 이씨의 전횡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에 이르게 된다.
아이러니한 점은 예종 역시 부왕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신하들을 휘어잡은 강성 군주라서 이런 전횡이 벌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예종은 도리어 아버지 숙종을 능가할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는데 앞서 경원 이씨들이 난립했다고 하는 부분마저도 정작 예종 시기에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정작 백관들은 경원 이씨가 외척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는데 이것도 무시하고 강행 처리를 할 정도로 예종의 권력은 막강했다.

반면 다음 왕조의 국왕인 세조는 숙종보다 왕권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고, 이후 세조 다음의 왕들이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는 왕들로 전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쓰디 쓴 평가를 듣는다.
더욱이 숙종은 위협이 될 만한 일부 척신들만을 제거했을 뿐 신하들을 그렇게 도륙내지는 않았던 반면 세조는 집현전 출신 사대부들이 단종 복위 운동에 많이 가담했다는 이유로 아예 집현전을 해체시켜버리는 치명적인 실책까지 저지르며 악평을 듣게 된다.

사실 고려의 왕과 조선의 왕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다.
고려와 조선은 국가 자체가 다르고 환경, 사상, 정치적 배경 등 모든 것이 다르다.
고려는 중세와 근세를 잇는 과도기적인 시기에 있던 국가이고, 조선은 과도기를 지난 근세의 국가이다.
이는 마치 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분청사기, 백자를 단순 비교하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아래의 내용은 단순히 재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정통성 문제
조선 세조(이하 세조): 장자 세습제가 확실히 자리잡은 조선에서 세조는 어디까지나 부왕(세종)의 둘째아들일 뿐이지, 원손-세손-세자-왕 단계를 탄 단종의 정통성을 결코 넘보아서는 안될 위치였다.
고려 숙종(이하 숙종): 고려 초~중기의 경우에는 아직 장자 세습제가 확립되지 않았고, 형제 상속제도 병행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숙종은 선종의 동생이므로 조카인 헌종과 비교했을 때 정통성이 완전히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미 왕자 시절부터 종친과 신료들에게 강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허약한 왕권 문제
세조: 선왕인 단종이 가지고 있는 약점은 수렴청정을 해줄 왕실 어른이 없었다는 것과 나이가 어리다는 것 그 자체였다. 단종이 가지고 있는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통성, 증조부인 태종부터 부왕 문종까지 거치면서 탄탄하게 구축된 유능하고 충성심 강한 인재풀이 이미 존재함을 생각하면 이는 시간이 흐르고 단종이 성장해가면서 자연히 해결 가능한 문제였다.

숙종: 선왕인 헌종은 나이도 어린데다 이미 건강 문제로 인해 제대로 정무를 볼 수 없어서 모후인 사숙태후가 수렴청정을 해야 했다.
이미 선종 시기부터 그가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 기대하는 신하나 종친들은 별로 없었으며 오히려 건강하고 유능한 숙종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종은 헌종에게 양위를 강행한 것이다.
게다가 이미 권신들의 전횡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자연히 헌종의 왕권은 약해질 수 밖에 없었으며 이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아예 회복이 불가능해질 수 있었다.

권신들의 전횡과 국정 농단 문제
세조: 세조 일파의 선전과는 달리
단종 시기 황표정사로 국정을 운영한 김종서, 황보인 등은 세종 때부터 활동하며 능력과 충성심을 이미 검증받은 인사들이었다.
실제 기록에서도 그들이 국정 운영에서 권력을 농단했다는 근거는 없다.
오히려 권력 남용은 세조와 세조의 공신들이 더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숙종: 헌종의 외숙인 이자의는
자신의 누이동생이자 선종의 후궁인 
원신궁주의 아들로 헌종의 이복동생이 되는 
한산후 왕윤을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당시의 유력 가문인 경원 이씨 가문의 수장이기도 했고
재력도 상당했으며, 조정 내에서도 중추원사라는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헌종이 병석에 있으니 만약을 대비해 옥새를 한산후 왕윤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노골적으로 왕윤을 후계자로 밀고 있었다.

친족 살해 등의 윤리 문제
세조: 자신의 피를 나눈 동생들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죽이고
단종 역시 영월로 귀양을 보냈다가 사사했다.
게다가 단종의 유모이자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를 죽였는데
세조의 서모이니 자기 어머니뻘 된다는 것으로
이전에도 이후에도 조선에서 자기 어머니뻘 되는 사람을 죽인 왕은 없다.
자신의 친구이자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정순왕후 송씨의 아버지),
단종의 자형인 정종 등 단종과 연관된 인척들도 살해했으며
이후에도 사육신 등 자신에게 저항하던 신하들을 대거 살육하였다.

숙종: 이미 역모를 계획하고 있던
이자의와 그의 세력을 처단한 것 외에는 그다지 피를 흘리지 않았다.
헌종 역시 굳이 죽이려들지 않았고 그대로 병사했으며,
애초에도 헌종은 병약해 오래 살기는 틀리는 사람이었다.
이미 왕자 시절부터 숙종은
종친과 신하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굳이 피를 흘릴 필요도 없었다.
이 때문에 종친 한정해서는 세조도 할 말은 있는데 
정변을 안 일으켰으면 모르되 정변을 일으킨 이상,
자신과 라이벌인 동생 안평대군과 조선판 주공인 금성대군은 죽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세조도 숙종 못지않게 종친 내에서는 세력이 커서 인망이 없어도 왕실의 제일 웃어른인 양녕대군이나 세종의 서자(자신의 동생들) 등 종친 내 지지자들이 컸다.
즉, 종친 한정으로는 대부분 죽일 사람만 죽이고 말았는데
문제는 꼭 죽일 놈만 죽인 게 아니라 이놈 저놈 다 가리지 않고 죽인 것이다.
심지어 종친 한정으로 봐도 단종까지 죽였다.

집권 기간 동안의 성과
세조: 무리한 집권 과정의 대가를 치뤄야 했다.
경국대전 편찬과 왕권 강화 등 업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결국 함부로 조선의 시스템을 파괴하여 후대에까지 두고 두고 악영향을 끼친 왕이 되었다.
숙종: 내치/외치 항목에 나오듯이
고려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여진 정벌을 준비하는 등의 성과가 분명히 있다.
이 때문에 숙종의 집권 이후에도
고려의 국력과 왕권은 큰 문제가 없었다.
숙종의 손자 대인 인종 시절에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이는 숙종 이전부터 누적되어오다가 터진 고려의 적폐 전체에 가깝다.

여색(女色) 문제
이 부분은 세조와 숙종 모두
여색에 별다른 관심이 없이 본부인에게만
충실한 애처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숙종은 정실 왕후인 명의태후만 있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무려 7남 4녀를 보았다.
세조 역시 대군 시절 첩으로 들였다가
즉위 이후 격상한 예를 제외하면 후궁을 새로 들이지 않고, 정실인 정희왕후에게만 충실했다.

숙종은 1명의 왕후와 결혼했으며,
이는 고려 왕조의 다른 왕들이 적어도
후궁을 1명이라도 둔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물론 어린 나이에 즉위했던
헌종, 충목왕, 충정왕, 창왕은 제외.
자식은 아들이 7명, 딸이 4명으로 총 11명이 있었다.

숙종의 아들은: 태자 왕우 : 이후 예종 문효대왕.
상당후(上黨侯) 왕필, 원명국사(圓明國師) 왕징길 → 왕징험, 대방공(帶方公) 왕보, 대원공(大原公) 왕여 → 왕효, 제안공(齊安公) 왕서, 통의후(通義侯) 왕교인데, 전부 정실 명의태후 소생이다.
태자 왕우, 즉 미래의 예종은 강력한 왕권을 자랑해 동생들을 누르고
그들의 근신들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었다.
특히 숙종의 둘째 아들 상당후 왕필이 경쟁 요소가 있었다.
그나마 왕필은 1098년에 사망했으며,
나이로는 통의후 왕교가 22세인 1120년에 사망했다.

사실 예종도 쉽사리 왕위에 올랐다고는 볼 수 없다.
부왕 숙종의 치세 때 예종에게는
숙부가 되는 부여후 왕수가
대놓고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등의
소문에 얽혀 유배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를 보면 예종 역시 맏아들이었음에도
형제 상속이라는 가능성 때문에 마음 놓고 지낼 순 없었다.

하지만 예종의 아들이자 숙종의 손자였던 인종은
작은 아버지들과 그 근신들을 제압하지 못하면서 매우 불안한 상태로 즉위한다.

이들 숙종의 아들들은 모두가 적자였는 데다가
고려는 형제 상속이 더 선호되다 보니 어린 인종의 입지는 더욱 작았다.
당장 조부였던 숙종부터가 형제 상속을 주장하며 왕위를 조카 헌종한테서 뺏어왔고,
조정 내에서 별다른 반항도 없었다.
인종의 근신인 이자겸은 이 숙종의 왕자들과 끝없는 정쟁을 벌여 결국 승리하고, 뒤이어 막강한 권력을 잡는다.

숙종의 딸은: 대령궁주(大寧宮主), 흥수궁주(興壽宮主), 안수궁주(安壽宮主), 복령궁주(福寧宮主)들이다.

복령궁주는 묘지명이 현존하고 있다.
숙종의 넷째 딸이며 진강백(晋康伯) 왕연에게 시집갔다.
궁주는 묘지명에서 '왕희'(王姬), '종실현녀'(宗室賢女), '천자지녀'(天子之女)란 별칭으로 불렸다.
만 38세에 죽었으며, 묘지명엔 '제향'(帝鄕)으로 돌아갔다고 표현됐다.
제향은 황제가 아닌 '상제의 고향'을 말한다.
고려시대 왕족의 죽음엔 단골로 등장하는 비유이다.
후대의 <명종 애책문>에도 이 비유가 나온다.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숙종은 태묘의 아홉번째 방에 모셔져 있었고,
악장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종 대 숙종 왕옹의 찬가 제목은 <중광>(重光)이다.
'거듭 빛나다'라는 뜻. 
만월대에 같은 이름의 편전이 있었다.
네 글자 운구이다.

생각컨데 황숙고(皇肅考)께선 의과 인와 함께 하셨습니다.
구가의 임무가 나에게 왔는데, 위엄있는 영혼이 마치 신과 같습니다.
경기(慶基)를 중흥(重興)시키니 뛰어난 갑옷을 남기셨습니다.
종과 북을 두들겨 때에 맞추어 도와주셨습니다.

우리 아름다운 황고(皇考)께선 청명하시고 하늘의 법을 지켰습니다.
도를 위해 존경하고 근면하셨으니 그 마음이 연못을 채울 수 있습니다.
뛰어난 계획과 신령한 판단은 바람을 불게하고 천둥을 울리게 합니다.
제가 그 덕을 잇고 싶으니, 부디 축복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들 예종이 아버지 숙종에게 올린 태묘 악장.
사촌인 헌종은 당연하게도 건너 뛰었다.

숙종의 대선배는 바로 신라 제41대 국왕인 헌덕왕이다.
그런데 신라의 헌덕왕은 조카 애장왕을 제 손으로 직접 시해했는데,
고려의 숙종과 조선의 세조는 조카를 쫓아내기만 했지 제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
다른 점은 헌덕왕은 신라를 말아먹은 암군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이다.
신라는 헌덕왕 즉위 전부터
제36대 혜공왕을 시발점으로 이미
조금씩 조금씩 답이 없어지기 시작한 국가였기는 했지만...
또 조선의 세조는 쫓아낸 이후에 이미 반란에 연루되었던 조카를 귀양지에서 암살했다는 설도 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공식적으로는 자살인데,
사실은 사약 먹고 죽었거나
혹은 사약을 거부한 교살로 죽었다는 의심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