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구新羅寇 한구韓寇
통일신라 후기 9세기부터 후삼국시대 무렵 10세기 초반까지,
일본 헤이안 시대 중반기에 존재한 한국의 대표적 해적.
신라 쪽 해안을 근거지로 해서 일본을 약탈한 한국계 해적 집단이다.
일부 중국인이 포함되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이름 그대로 신라인 해적이었다.
신라어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도 여러 번 등장하기 때문.
이후의 왜구도 전부 일본열도 출신만 있던 건 아니었고,
일부 중국인이나 고려인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신라란 옛날 삼국시대 시절의 경상도에 있던 신라가 아니라 남북국시대의 신라이므로(그 당시 신라에 포함된) 백제계와 고구려계까지 모두 포함한 한반도 출신의 해적들을 뜻한다.
대부분 국적의 의미에서 신라 해적으로 표현하지만, <거타지 설화>처럼 백제 해적으로 쓴 기록도 있다.
일본에서 해적질하다 사로잡힌 현춘은 자신을 포함한 휘하의 해적들이 신라 왕의 명을 받고 쳐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진성여왕이 실제로 해적의 일본 약탈을 사주했거나 도와주었을 수도 있고 그냥 현춘이 변명을 대려고 왕명을 사칭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어 기록이 간략하게 전해오는 탓에 자세한 내막을 알기는 어렵다.
현춘의 진술도 그렇고 일본 사서의 몇몇 기록을 문구 그대로 받아들이면 무법자 해적이 아니라 '그냥 신라 해군'이었을 여지도 충분하다.
일본 기록에서도 '신라 해적'과 '신라'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신라라는 나라가 일본을 호시탐탐 노리고 계속 쳐들어온다는 식으로 써 놓은 게 대부분이다.
사략 해적과 전근대 해군의 경계가 모호한 건 세계사에서 꾸준히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만 해도 그렇다.
일부 신라구가 견훤처럼 신라군 정규군이 군벌화된 케이스라면 해적과 해군 둘 다였을 수도 있고.
통일신라 말기에는 중앙 정부가 정권 다툼으로 지방 통제력이 약화된 사이 지방 세력들이 호족으로 떨어져 나와 지방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누리게 되고, 동시에 붉은 바지단이 각지에서 창궐할 만큼 치안이 나빠졌다.
게다가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었다.
따라서 생업을 포기하고 도적으로 전락한 사람이 많았다.
신라구도 이렇게 생겨나 한반도 근해에서 활동하다 멀게는 가까운 일본 해안가까지 넘어가 약탈을 벌인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해적의 활동이 시작된 것은 대략 9세기 전반부터이다.
그러다가 장보고가 9세기 당시 당나라, 신라, 일본등을 오가며 한반도 근해에서 날뛰던 해적들을 완벽히 때려잡고 해상을 안정시킨 9세기 중반에는 일본 기록에서도 신라구의 약탈 기록이 크게 줄어든다.
그리고 장보고와 청해진이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9세기 후반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 후삼국시대 초기에 규모에서 절정을 찍게 된다.
게다가 당나라도 9세기 중후반이 되면 이사도의 난, 황소의 난 등을 거치면서 점점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신라 해적단에 일부 합류했고, 황해 바다는 해적의 천국이 되었다.
그리고 이 중 일부가 일본까지 원정을 뛴 것이다.
한반도는 매번 왜구들에게 털리기만 했다고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 반대도 존재하기는 했다.
일본 측 사서들에서는 신라가 일본을 침공한 기록들이 꽤나 많이 확인이 되며 또한 이후의 신라구들 때문에 규슈 지역의 일부는 한 때 사람이 못 살 정도가 되었고, 일본 정부에서는 신라인 입국 금지 조치를 내리며, 일부 지방에서는 징병제를 시행할 정도였다.
일본 측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구가 흥성할 때는 1,000명 단위로 되는, 사실상 군사집단이나 다름없는 신라구들이 규슈로 쳐들어 갔다.
이들이 규슈로 간 것은 규슈가 일본 본토 중 한반도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으로 보이며 신라인 이민자가 많아 정보를 얻기 쉬웠다는 점도 한 몫 했다고 보기도 한다.
한반도로부터 거리가 가장 가까운 쓰시마 섬, 이키 섬, 고토 제도도 주요 약탈 대상이었다.
아무래도 신라구가 날뛰는 시기는 워낙 혼란스러운 시기다 보니 한국 측의 사료는 견훤과 왕건이 당대에 날뛰던 한반도 서해와 남해의 해적을 소탕했다는 식의 기록을 제외하면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일본의 사서에서는 자세하게 나온다.
한국 측 사료에는 신라 말부터 전국 각지에서 도적이 날뛰어서 백성들이 힘들었다니, 세상이 혼란해졌다니 하는 기록은 있는데 도적의 목록이나 일본이나 중국으로까지 가서 약탈을 하거나 무역을 했다는 식의 활약상(?)까지 일일히 나오지는 않고 그냥 당대에 세를 떨쳤던 도적들에 대해서나 간략하게 나오는 수준이다.
장보고와 견훤, 왕건이 해적을 때려잡아서 기반을 다졌다고는 하나, 해당 해적조직들이 일본이나 중국에까지 가서
어떻게 노략질했는지에까지 대해서 적은 것은 아니다.
한국의 사료에서 기록이 소략하지만 일본 사서의 기록이 매우 상세하기 때문에 신라구의 해외 활동(?)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견훤이나 왕건이 해적을 소탕한 것을 공으로 내세웠을만큼 신라내에서도 해적이 상당한 골칫덩어리였던 것은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당시 당나라도 막장 상황이라 동아시아에서 당나라 해적들도 골칫거리였다.
장보고가 특히 당나라 해적들을 많이 소탕했다.
마찬가지로 13세기 이후 왜구 또한 일본 본토에서도 커다란 골칫거리여서 막부 정권에서도 왜구를 소탕하기위해 꽤나 노력을 하였다.
한국 고대사의 경우 동시기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사료가 너무 부족하여 교차검증이 매우 어렵다.
신라구는 현춘이나 능창처럼 후삼국시기 해적들이 유력 호족들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일종의 사략 집단이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견훤이나 왕건이 해적을 때려잡았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견훤의 후백제나 왕건의 고려 모두 호족연합국가적인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때려잡지 못한 해적들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반대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왜구도 일본 사서의 기록보다는 중국, 한국 사서에 훨씬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아무래도 피해를 준 쪽보다는 입은 쪽이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왜구나 신라구가 발호해서 그 규모가 커져 해외까지 원정나갈 정도면 이미 자국에서는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잃어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막장 상황 (일본의 남북조시대와 전국시대, 통일신라 말기의 후삼국 발호 등) 이라 국내 치안 문제조차 손도 못쓰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니 국내에서 사서 기록은 커녕 해적에게 신경쓰는 것 자체가 정권 능력 밖의 일이었다.
신라구가 규모가 커지고 일본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는 시기와 동시대인 진성여왕 치세는 지방 통제력이 무너져 신라 내륙 지방에서 세금 걷는 길이 막힐 정도였다.
신라의 일본 정벌과 신라구의 발흥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라는 강국들과 국경을 맞대었기에 늘 군사력의 한계에 직면해있었고, 이는 당시부터 대한해엽에 들끓고 있던 왜구들에게 있어 좋은 기회가 되었다.
고대 일본은 왜구를 통해 신라의 해안가를 약탈하였고, 때로는 일본 본국에서 정규군을 파병해 신라의 후방을 노략질하였다.
이에 신라는 서기 200년경 중반부터 국력을 일신한 후, 왜구의 발호에 1차적 책임이 있는 고대 일본 정권을 원정하기 시작했으며, 신라 유례왕(291년)부터 시작해서 진흥왕, 진평왕(583년)에 일본을 공격하였고, 또한 태종 무열왕(654~661) 시절에는 일본의 대마도를 공격하였으며, 통일신라의 성덕왕 시절에 또 다시 현재의 미야자키현과 일본의 서쪽 변방을 신라가 718년과 720년에 각각 한 번씩 총 두 차례 공격 하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신라는 1만리 길의 거대한 파도를 넘어 명석에 뛰어난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백마를 잡아 적관의 맹세를 받았다"
는 기록에 의한 바, 이미 신라는 유례왕 8년에 불손한 일본 조정을 토벌하고자 대군을 일으켜 나니와 근방의 아카시노우라까지 진출하여, 대판(오오사카) 근처에 포진, 오진 일왕에게 백마의 피를 마시는 적관의 맹세를 받아, 다시는 신라국에 불손하게 굴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다.
해동제국기에 의하면, 응신 22년은 신라 유례왕 8년에 해당하고, 중국으로는 진의 혜제 원강 원년이 되는 해인데, 그 사실이 동사에는 실려 있지 않는다고 했다.
해동기에 의하면,
"달민천황 계묘년에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 해는 신라 진평왕 5년에 해당하고, 또 원정천황 경신년에도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때는 신라 성덕왕 19년이다. 지금 동래 바다 절영도에 옛 진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종이 왜국을 정벌할 때 쌓은 것이라 하여, 이에 태종대라고 불린다."
라고 하였다.
고대 일본은 신라의 수차례의 대규모 정벌과, 신라 해적들의 발흥에 두려움에 떨었으며,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동맹관계를 맺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침공당하자, 백제를 도와 백강구 전투에 참전했으나, 대패한 뒤 일본은 신라와 당이 연합해 곧바로 일본으로 쳐들어올 것을 두려워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신라 해적의 빈번한 침입은 일본을 공포에 떨게 했다.
왕성국 사건 '왕성국'이란 중국의 옛 유교 경전인 서경에서 비롯된 세계관에 기인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왕성(수도) > 왕기(수도 근처) > 6복(지방) > 번국(제후국) 즉, 신라는 스스로를 '왕성국'이라 칭하고, 일본을 제후의 국가인 '번국'으로 하대한 것이며, 이는 신라와 대등한 관계를 주장하는 일본 조정을 크게 자극하여, 신라 사신을 강제 추방한 사건이다.
통일신라의 성덕왕 시절에 또 다시 현재의 미야자키현과 일본의 서쪽 변방을 신라가 718년과 720년에 각각 한 번씩 총 두 차례 공격 하였으며, 이에 대한 항거로 731년에 일본의 장군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300여척의 군선에 병력을 실어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군에 의해 궤멸당하였다.
신라는 백제, 고구려, 당나라 등 대륙의 강국들과 전면전을 벌여 이들을 패퇴시킬 정도의 실전능력이 축적되어 있었으며, 대륙의 국가들로부터 다량의 이주민 및 포로, 선진 기술력이 유입되어 뛰어난 군사기술, 높은 수준의 병법을 구사할 수 있던 발달된 선진 국가였던 반면, 고대 일본은 일본열도 서쪽 일부에 고립되어 군사력도 기술력도 신라에 비해 뒤쳐진 후진 국가였기에, 신라는 이러한 군사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일본국을 하찮게 보고 '신라의 제후국'이라며 하대를 한 것이다.
왕성국 사건 이후, 일본은 신라의 재침공을 크게 두려워하여, 신라 해적과 신라 해군의 침공루트였던 세토해주변에 20여개의 성채를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사천왕상을 서국 각지에 배치하고 신라를 바라볼 수 있는 고지에 사원을 세워 부처의 보호에 의하여 신라의 침입을 방위하고자 했다.
신라구에 맞서 신의 힘을 구하기 위한 봉폐기원문에
"우리 일본의 조정은 소위 신명지국이라"
라는 사상이 보여, 신의 힘을 받아 싸우지도 않고 이길 수 있다는 주창이 쓰여있다.
엔기 3년 7월에는 오키노쿠니에 신탁이 있어, 신의 바람이 적선을 표몰시켰다는 풍문이 돌고 있다.
또한 신라구를 비난하는 다양한 언사가 보인다.
한국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
삼국사기 등 한국측 사료에는 신라의 일본국에 대한 토벌과 신라 해적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고, 거꾸로 왜구에 시달렸다든가, 백성이 왜구에게 납치되었다든가 하는 식의 피해 기사가 많다.
그 이후는, 신라 해적 뿐 아니라 당대부터 신라의 후방을 교란하던 일본 해적들에 대한 신라측의 피해도 상당했기 때문에, 굳이 신라의 역사 기록관이 신라 해적의 이야기를 기술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며, 반대로,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일본 해적이 신라의 후방을 약탈하고 노략질 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역사는 늘 상호주의적 관점에서 볼 필요성이 있다.
또한, 신라가 불손한 왜왕을 여러번 토벌한 역사적 사실이 신라측 사서에 남아있지 않는 것은, 신라 왕조의 수도 서라벌이 후백제의 왕인 견훤에게 점령당하면서 대량의 신라 역사서들이 불태워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며, 이후 거란과 몽골과의 전쟁 등, 섬에 고립되어있는 일본에 비해 외세와의 전쟁을 거듭하며 다량의 고대 역사서들이 소실된 역사와 무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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