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하면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서, 유관순 열사가 먼저 떠오른다.
우리는 3.1 운동에 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기 진실로 알고 있는 거와는 많은 것이 다르다.
3.1 운동을 직접 기획하고 계획하여 주도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1918년에는 만주에서 대종교 인사를 중심으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는 국내에 영향을 끼쳤다.
또 하나의 계기는 앞 편에 썼던 파리강화회의 참석이다.
1919년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시키기 위해 여운형이 주도하여 급하게 만든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김규식은 출국 전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의 주문을 한다.
"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
이처럼
김규식의 독립시위 주문도
3·1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3.1 운동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에서는 학생들의 주도로 1919년 2월 8일에는 독립 선언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선언 직전 인쇄비용이나 행사비용이 부족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유학생이었던 송계백은 인쇄비용을 구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한다.
송계백은 모교 보성학교의 은사이자 중앙학교 교사였던 현상윤을 만났다.
송계백으로부터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거사 계획을 들은 현상윤은 천도교 지도자인 보성학교 최린 교장 그리고 중앙학교 송진우 교장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이 소식을 듣은 이 둘은 천도교의 수장인 손병희를 찾아가 상의한다.
이미 천도교에서는 오래전부터 동학농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 국민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천도교 수장 손병희는 일본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한다는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면서 급히 독립선언을 준비한다.
천도교는 처음에는 민족대표로 4명 정도를 생각하고 구 대한제국의 유명 정치인들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먼저 한규설 등 을사조약을 반대한 대신들에게 접근하였지만 그들 모두에게 거절 당한다.
그들은 현 상황에서 독립은 당치도 않고 괜히 자기 자신들만 다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손병희가 이완용까지 찾아가 민족대표와 독립선언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완용은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나 이완용은 이를 고자질하지는 않았다고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손병희 행적이 상당히 헷갈린다.
한규설 등은 몰라도
친일매국민족반역자 대표 인물인 이완용에게까지
민족대표로 부탁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의 이완용 이미지가 아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이완용 이미지가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이완용이 이 사실을 일제에 고자질 하지 않았다는 것도 의외이지만 이완용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되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완용은 당시에 매국노로 욕도 많이 먹고 있었지만
조선의 초지식인 이었고 나름 조선을 위해서 여러 일을 하기도 했다.
당시는 나름대로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완용은 현실의 권력 힘에 따라 움직이는 전형적인 태양만 쫒는 권력추구자 였다.
아래는 이완용이 조카에게 직접 했다는 말이다.
" 나는 처음 스물다섯 무렵에 종래 조선사람들이 목적으로 삼던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류가 점점 요긴했기 때문에, 그런 때에 신설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여 공부하고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뒤 을미년에 이르러 아관파천 사건으로 인해서 친러파라 일컬어졌다. 그 뒤 러일전쟁이 끝남을 알릴 즈음에 친러파에서 전환하여 현재의 친일파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무릇 천도에는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것을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에도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을 또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에 때를 따라 변역이 없다면 이것은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될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는 서양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 목하 시세가 또 돌변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이런 기회를 타서 인사의 적의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
이런 상황의 이완용은
누구보다 대외정세를 잘 알고 있었기에
현 세계정세에서 혹시나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눈치를 보며 일제에 고자질은 안 했다고 보여진다.
3.1 운동이
겉으로 실패로 돌아간 후
이완용이 한 행적을 보면 거의 확실하다.
이완용은 3·1운동을 비난하는 경고문과 담화를 3차례에 걸쳐 매일신보, 경성일보에 발표했다.
그리고 청년 · 학생들이 학업에 열중하지 않고 가산을 탕진하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조선독립은 실력양성이 있은 뒤에 이루어진다고 떠벌렸다.
이른바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실력양성론을 들고 나오기 전에 그가 먼저 조선총독부의 눈치를 살펴 이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천재적 변신술이요 출세수단이었다.
이런 공로 탓인지,
이듬해 그는 백작에서 후작으로 뛰어 올랐다.
이처럼 대한제국 당시 고위관료나 양반사대부들은 모두가 손병희의 제안에 거절하고 소극적으로 나왔다.
이에 손병희와 천도교는 개신교, 불교등 종교지도자들과의 연대하기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래서 33인 민족대표는
모두 평민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지도층 역할을 했던 자들의 기회주의적 야비함을 다시 한 번 보여 주는 일이었다.
당시 개신교에서는 일제에 의해 일제 검거된 소위 105인 사건 등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 고조된 가운데 관서 지방의 대표적 기독교 지도자였던 이승훈이 천도교 측과 접촉하여 운동에 참여하기로 한 가운데 개신교 학교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1911년에 발생한 105인 사건이란
일본이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운동가 105명을 체포한 사건을 말한다.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
이라고도 한다.
1910년경 신민회와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일본이 이를 막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여 애국계몽운동가들을 탄압함과 동시에 신민회를 제거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암살미수죄에 해당된다고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이에 따라 윤치호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600여 명을 검거했다.
105인 사건에 대한 재판의 최종 판결에서는 윤치호 등 6명에게 징역 5~6년형이 선고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통해 신민회를 해체시키는 등 비밀항일단체를 제거했으나, 이와 연루되었던 많은 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불교 또한 한용운을 중심으로 반일의 분위기가 있었고 최린이 한용운과 접촉하여 불교와의 연대도 성사되었다.
최린이 이때만해도 정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후에 극성친일파로 변신하고 만다.
한용운이 추진한 유림과의 연대는 무산되었다.
그런데
독립에 대해 독립선언을 할 것인가?
독립청원을 할 것인가?
로 말들이 많았다.
지금 판단으로는 당연히 독립선언이 맞지만
당시 민족대표 일부에서는 독립을 청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청원은 일제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니 말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독립선언으로 정리된다.
자칫 잘못했으면
독립선언서가 아니라
독립청원서가 될 뻔도 했다.
어쩟든 이처럼 민족대표 33인이 확정되었고
거사 날자도 고종 장례식 3.3일 이전인 3.1일로 잡혔다.
이렇게 해서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3.1운동은
그 날 하루만 일어난게 아니었다.
약 3개월 가량,
전국적으로 시위가 발생하였다.
그럼 이제 3.1운동 그 현장으로 들어 가 보자.
아래는 유관순열사의 흑백사진을 보고 누군가 적어준 글이다.
" 새삼, 뭉클하다. 숭고한 사명감에 목숨을 내놓은 자의 눈빛, 서슬퍼럴 만도 한데 슬픔이, 고요에 닿은 슬픔이 느껴진다. 슬픔마저도 초극한 결기 위대성을 넘어 신성이 느껴진다. 내 마음에 멘토로, 또 한 분으로 천사로 모시고서 기도를 바치고 싶은 분이다. 나약해지는 나에게 19세 소녀는,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싸고 있네 일갈을 던질 것이다. 오금이 저릴 것 같은 그의 눈빛만 떠올려도 나는 그냥 퍼뜩 정신을 차리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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