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창시절 배운 역사 상식으로 조선시대 최악의 왕을 뽑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연산군과 광해군이었다.
그리고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최대 전란과 위기를 이겨낸 훌륭한 왕으로 배웠다.
그래서 묘호도 종이 아닌 조가 붙고 선조대왕으로도 불리워 진다.
그러나 나는 조선 최악의 왕을 다시 뽑으라고 한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인조를 뽑는다.
그리고 다음이 선조이다.
연산군은 폭군인 것은 확실하지만 선조나 인조처럼 백성들을 전란 속에 빠지게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연산은 우리가 그 당시 상황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연구해 볼 만한 인물이다.
광해는 폭군이기는 커녕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 중 한 분이다.
나는 광해를 부르는 호칭도 광해군이 아닌 광해대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당시 상황을 세세히 실펴보면 인조 한 사람 잘못은 아니었다.
인조와 그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들의 문제였다.
그래도 책임은 인조가 제일 크다.
조선실록에 보면 인조는 너무 조용한 군주였다.
하루에 단 한 마디도 안 할 정도로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나온다.
산하들의 말도 잘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한산성에서 최명길과 김상현이 대표하는 주화파와 척화파 사이에서 수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 상황에서 인조의 고민도 이해가 간다.
소통과 독단!
나라의 엄청난 위기 시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어떤 행태가 올바른지 조금 헷갈리는 부분이다.
선조는 참 복합적인 인물이다.
물론 역사상 어떤 영웅도 일방적으로 좋은 점만 있을 리 없다.
우리가 성웅으로 모시는 이순신, 조선 왕 중 대표 성군인 세종도 정책적으로 문제도 있었고 인간적 결점도 있었다.
선조는 이런 인간적 장, 단점이 누구 보다 확실하게 나타나는 인물이었다.
선조는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조선 최초 방계혈통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방계혈통이란 당시 왕의 직계 자손이 아닌 사촌이나 더 먼 혈족이 왕이 되는 것을 말한다
선조는 1552년(명종 7)에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과 정세호의 딸 하동부대부인 정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67년(명종 22) 6월에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인순왕후가 선조를 지목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았다.
덕흥군에게는 아들이 세 명 있었다.
첫째 아들이 하원군
둘째 아들이 하릉군,
셋째 아들이 하성군으로
이 하성군이 바로 선조다.
선조 한 참 위인 성종도 느닷없이 왕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종은 세조의 직계 자손이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를 때 덕흥군은 이미 죽고 없었다.
후에 선조가 즉위하고 나서 덕흥대원군의 시호를 받았다.
조선 역사상 최초 대원군이다.
대원군이란 조선시대 왕이 형제나 자손 등 후사가 없이 죽고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 신왕의 생부에게 주던 존호이다.
나도 역사를 잘 몰랐을 때 대원군하면 고종 아버지 흥선대원군 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대원군은 선조 아버지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한 데서 비롯해서 4인이 대원군에 봉하여졌다.
인조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 아버지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으로 추존하였다.
또 1849년(헌종 15)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전계군의 아들 덕완군 승이 왕위에 올라 철종이 됨에따라 전계군을 전계대원군으로 추존하였다.
마지막으로 1863년(철종 14)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흥선군 하응의 2남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자 하응은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에 봉하여졌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대원군에 봉해진 사람은 모두 4인이지만 흥선대원군을 제외한 3인은 그들이 죽은 뒤 추존 되었고 오직 흥선대원군만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져 왕 대신 섭정을 하면서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다.
이처럼 선조는 조선에서 왕의 적자나 적손이 아닌 방계에서 왕위를 이은 첫 번째 왕이 된 것이다.
조선에는 적장자 왕위 계승의 원칙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불변의 원칙은 아니었다.
실제로 조선 27명의 왕 중에서 이 원칙에 의해 왕위에 오른 경우는 10명에 불과했다.
왕위를 이을 적장자가 없는 경우나 적장자가 있더라도 결격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차자나 형제가 왕위를 이었다.
세조, 중종, 인조 등과 같이 찬탈이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경우도 있었고, 선조나 철종, 고종과 같이 방계승통의 경우도 있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를 당시 그 나이는 16세였다.
친부인 덕흥대원군은 이미 죽고 없었다.
친모인 하동부대부인 정씨도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 직전에 죽었다.
선조는 세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왕으로 즉위했기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들의 도움으로 국사를 돌보았다.
그러다 1년이 지난 17세가 된 이듬해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선조는 1569년(선조 2)에 박응순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가 의인왕후다.
의인왕후는 몸이 약하고 후사도 잇지 못했다.
그 사이 선조는 공빈 김씨와 인빈 김씨를 비롯한 8명의 후궁에게서 13남 10녀의 자녀를 낳았다.
이때만 해도 왕들의 생산력이 왕성했다.
이후로 갈수록 왕들의 자녀 생산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13남 10녀의 자녀 중 당시 왕비 다음으로 두 번째 순위였던 공빈 김씨가 낳은 둘째 아들이 조선 15대 왕인 광해군이다.
한편 선조는 의인왕후가 죽은 지 2년 만인 1602년(선조 34)에 김제남의 딸을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선조의 나이는 51세,
인목왕후는 19세였다.
선조의 왕성한 자녀 생산력이 요즘 세상에도 놀랍게도 19세에 선조의 왕비가 된 계비 인목왕후로 부터 영창대군과 최근 '화정'이라는 드라마 주인공인 정명공주를 낳았다.
50대가 넘은 선조로서 대단한 생산력이었다.
선조의 그 왕성한 생산력이 조선에게는 불행이 되었다.
서자인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활약으로 세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차에 자기 아들보다 더 나이가 어린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난다.
이에 조정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심한 갈등이 불거진다.
그리고 비극은 시작 되었다.
선조의 즉위로 사림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선조가 장가 가기 전이라 당시에는 외척세력도 없었다.
훈구파의 시대를 열었던 세조는 훈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을 대신해 신진 사류를 등용했다.
이후 사림들은 예종, 성종 조를 거치면서 점차 입지를 넓혀 갔고, 연산군 조에 두 번의 사화로 인해 크게 세력이 위축되었지만 소멸되지는 않았다.
중종때는 오히려 왕의 지지를 받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이 개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눈치없는 과격한 개혁을 감당하기에는 중종 자질이 미흡했다.
결국 훈구 세력이 반격을 가해 사림들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도 뜸해졌다.
그러나 지방에서 힘을 쌓던 사림은 중종 말기부터 다시 활발하게 중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종은 비록 짧은 치세였지만 사림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한 후에는 사림을 옹호했던 대윤 세력이 소윤 세력에 의해 제거되면서 활동 폭이 또 줄어들었다.
이 시기에는 그동안 조정에 힘을 발휘했던 기존 훈구세력은 거의 죽는다.
그 빈 공간을 왕의 외척으로서 왕에만 기대던 척신 세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척신세력 중 문정왕후 친가인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다 문정왕후가 죽고 소윤 척신세력이 제거된다.
이때부터 사림이 정계의 중심 세력으로 새롭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사림은 한 갈래가 아니었다.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이의 '이기일원론' 등
사상적으로 막 나뉘어져 가던 시기였다.
정권을 잡은 사림은
우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을 신원하고, 을사사화로 귀양을 갔던 노수신, 유희춘 등을 다시 기용했다.
또한 그동안 관직에 나아가기를 꺼려했던 이황 등 명망 높은 사림들도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했다.
이렇게 선조 때 이르러 사림은 드디어 역사와 권력의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훈구파나 척신세력의 견제 세력이 없어진 사림은 곧 스스로 분열해 붕당을 일으킨다.
붕당의 조짐은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선배사림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후배사림의 갈등에서 시작 되었다.
심의겸은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동생으로 마지막 척신 세력이다.
그러나 심의겸은 사림을 배척했던 소윤일파와 달리 사림들의 관계 진출을 도왔고 이로 인해 그를 중심으로 선배사림 세력이 형성 되었다.
그리고 이들과 관계없이 선조 즉위 후 관계에 진출한 사림들이 후배사림 세력을 형성했다.
후배사림은 심의겸이 척신인데다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선배사림들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두 세력이 극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들은 이조전랑 천거를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어쩌든 동서분당 이후 한 동안은 동인이 득세했다.
선조는 이 붕당을 잘 이용하며 왕권강화에 나선다
사실, 선조는 최초의 방통승계라는 점에서 신하들에게도 항상 열등감에 시달렸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사회라 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참 뒤인 영조도 그 열등감으로 자기 친자식마저 죽이는 비극을 만들고 만다.
그런 열등감으로 선조는 즉위 초년에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매일 강연에 나가 경사를 토론하며 신하들에게 틈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선조는 본래 학문을 좋아하기도 했고 성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선조는 선조의 열등감을 너무 잘 아는 구세력을 멀리하고 싶어 했다.
선조는 구세력을 물리치고 자기가 직접 뽑아 자기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림을 대거 등용한다.
선조는 명유名儒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 일으키고자 했다.
여기까지 선조는 참 잘했다.
그래서 '선조의 치' 라고 불리울 정도로 선조는 성군의 역할을 했다.
선조는 또한 두 대비 모시기를 친어머니 섬기듯 효도가 지극하기도 했다.
'선조는 성품이 본디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색聲色이나 오락에 괘념하지 않았다.
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비빈이나 궁인들이 감히 사치하지 못하게 하였다. 항상 절용節用하고 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해 한 톨의 낟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
실록에 나오는 선조 이야기이다.
허준의 '동의보감' 도 선조가 백성들의 아픔을 생각해서 시작했다.
단지 광해군 1년 때 완성되어 광해군이 동의보감이라는 큰 열매를 따 먹은 것이었다.
선조는 정말 선조 초기는 성군의 모습이었다.
아마 선조가 임진왜란을 만나지 않았다면 윗 글에 나온 것처럼 우리 역사 상 세종대왕 다음가는 성군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리더는 위기 때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데 선조는 정반대였다.
선조는 일반 평상시에는 정말 괜찮은 지도자였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나라의 큰 위기 시에 최악이 되고 만다.
나라의 최고 위기 때
나라 최고 지도자가 최악이었다는 것은
나라의 큰 불행이다.
우리나라는 이상하리 만큼 지금까지는 나라 큰 위기 때 최고 지도자 복이 없었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구한말, 6.25때를 봐도 그렇다.
안타깝지만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도 코로나19로 나라가 큰 위기이다.
위에 말힌 징크스가 이번에는 없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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