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 전쟁이 터지고 사흘도 안 돼 서울은 함락 위기에 처했다.
서울 대학로에 있는 서울대학교 병원은 전방에서 실려 온 국군 부상병들로 가득했다.
대통령은 일찌감치 남쪽으로 튀었고
한강 다리는 끊겨버렸지만 의사와 간호사들 대부분은 환자를 두고 갈 수 없다며 자리를 지켰다.
당시 간호학교 사감은
휘하 간호사들에게 이렇게 훈시했다고 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깨끗한 속옷을 입어라. 죽어 누가 우리 시체를 보더라도 깨끗한 모습이어야 한다. (···) 여러분들이 담대한 마음으로 백의의 천사답게 일하길 당부한다(당시 서울대학교 병원 간호사 배명애씨의 회고).”
병원에 적십자기를 올리며 제네바 협약에 호소했지만
인민군은 병원에 입성한 후 국군 부상병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말았다.
간호사 사감이 훈시한 내용에 들어 있는 ‘백의의 천사’는 19세기 중반 크림전쟁에서 부상병들을 위해 헌신했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로부터 비롯된 상징적 단어다.
나이팅게일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지만
간호사들은 정식으로 간호사가 되는 자리에서 나이팅게일 선서를 한다.
그중 마지막 구절이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6·25 전쟁 때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경계로 둥글게 진을 친 채 치열한 공방을 거듭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가
“Stand or die(서 있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이라고 했던 건 정확한 표현이었다.
산 사람은 싸웠고 죽은 이들은 묻혔지만
서 있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한 부상병들과 의료인들은
또 다른 전투를 치러야 했다.
영화 포화 속으로를 기억하겠지?
학도병들이 치른 전투는 포항여중 전투였다.
영화에서 보듯 포항 일대에서는 격전이 벌어졌고
그중 국군 수도사단 18연대(이후 3사단으로 소속 변경)에는 오금손(1931~2004)이라는 간호장교가 있었다.
간호장교 오금손의 이력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적(的)’이다.
오금손의 부친은
오수암이라는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갓난아이 때
부모를 모두 잃은 오금손은
중국인 손에서 자랐다.
그가 아는 건 독립운동가였다는 아버지의 이름뿐.
한국이 중국과 국교를 맺은 뒤
그는 중국을 찾아 아버지의 흔적을 더듬었는데
당시까지 살아 있던 독립운동의 노병들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증언을 듣게 된다.
“아버지 오수암은 독립군의 일원으로 전투 중 부상을 입고 목수 집에서 치료를 받다가 일본군에 끌려가서는 돌아오지 못했다(서울신문 1996년 12월5일).”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에 숨졌다고 한다.
그렇게 부모를 잃었기 때문일까,
중국인 손에서 자랐지만 오금손은
한국 광복군의 일원이 돼 일제와 맞서기 위해 맹훈련을 받았다.
해방은 광복군이 활약할 기회를 갖기 전에 ‘도둑처럼’ 왔고
오금손은 하릴없이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개성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개성도립병원 간호사로서 새로운 인생을 꾸려가던 오금손 앞에 또 한번 큰 사건이 ‘강도처럼’ 찾아왔다.
6·25 전쟁이었다.
오금손은 김순애, 김정자 등 단짝 친구들과 함께 국군 수도사단 18연대에 간호장교로 현지 입대했고 부대를 따라 포항 일대까지 내려와 있었다.
포항을 잃었다가 다시 찾는 혼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급기야 야전병원에 인민군들이 쳐들어왔다.
악몽이 스쳐가는 순간, 오금손은 총을 잡았다.
광복군 훈련이 몸에 배 있던 간호장교 오금손은
무려 인민군 6명을 쏘아 쓰러뜨리면서
자신이 돌보던 부상병들을 지켰다.
생전에 그의 강연을 들었던 사람 말에 따르면
“환자들(부상병들) 다 죽인다 생각하니 눈에 보이는 게 없더라”
고 회고했다더군.
이후 그가 소속한 18연대는
국군 가운데 최북단이라 할 함경북도 부령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된다.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인
철원과 김화 부근에서 격전을 치렀는데
K고지라는 곳에서 오금손은 그만 인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치아가 다 빠지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오금손은 탈출을 시도했고
다리 관통상과 허리 파편상을 입었지만 끝내 탈출에 성공했다.
부상 치료차 요양하던 경북 김천 직지사 부근에서도
그는 간호를 멈추지 않았다.
장티푸스가 퍼져 죽어가는 주민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다.
그 후 오금손은 군에 복귀했으나 부상 악화 때문에 군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다.
근무 중 만난 군 장교와 결혼했지만
끔찍한 부상의 흔적에 질겁한 남편과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혼자 이것저것 장사를 하면서 삶을 꾸려가다가
남편이 나타나서 전 재산을 홀랑 들어먹는 일도 있었다.
우여곡절을 겪던 그는
옛 격전지인 강원도 파로호 근처에서 터를 잡고 살게 됐다.
전쟁 영웅이라 불러 마땅한 이 예비역 간호장교는
군의 협조를 받아 배를 이용한 이동병원을 운영하면서
파로호 주변 오지의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했다.
그 와중에 엄청난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수상한 여자’
라는 편견에다가
‘군인들과 친한 재수 없는 여자’
라는 전방 지역 특유의 시선(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전방이다보니 군의 통제가 심했고 그러다보니 민간인들과는 사이가 원만하지만은 않았음) 까지 두루 가해졌으니 견디기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금손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 마을 생활개선 운동을 하고
함께 선착장 건설을 통해 관광객을 유치했다.
늙고 가난한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시설인
정양원을 운영하는가 하면
파로호 주변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자연보호를 외치는 억척꾼으로 살았다.
“파로호의 파수꾼 오금손씨는 파로호를 찾는 낚시꾼들이나 관광객들을 상대로 상오 9시와 하오 6시에 15분씩 자연보호 방송을 하고 있다. (···) 소각장을 설치, 관광객들이 비닐에 쓰레기를 담아 오도록 권유, 일일이 확인한 후에야 호수를 건널 수 있는 배를 타게끔 하여 ‘억척 할머니’로 불린다(경향신문 1987년9월21일).”
기사에 따르면
그나마 방송을 한 건 1983년부터였다.
그전에는 마분지를 돌돌 말아서 소리를 지르고 다녔는데
이를 보다 못한 나이 든 독립운동가들이 술·담배를 끊고 메가폰을 사서 선물했다고 한다.
더 나이가 들어서도 오금손은
백골할머니(6·25 전쟁 중 18연대는 3사단 백골부대로 소속 변경)로 불리며 백골부대를 비롯하여 수천 번의 강연을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전하다가 2004년 일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2월3일 국군간호사관학교 60기 졸업생 75명이
졸업 및 임관식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대구로 향했다는 뉴스를 들으며
나는 오금손을 떠올렸다.
원래는 9일로 예정된 임관식을 앞당겨야 했을 만큼 의료진 충원이 급박한 상황이었고 갓 계급장 단 소위를 최전방 전투에 투입하는 격이 됐다.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간호사관학교를 방문해 격려하는 가운데 이혜민 소위는 이렇게 다짐했다.
“군 의무 요원으로서 우리 국민과 군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임무를 수행하겠다.”
그 다짐을 이 소위의 대선배인 오금손이 들었다면 얼마나 기쁘고 뿌듯했겠는가.
자신의 환자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고,
군을 나와서도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욕이든 시선이든 개의치 않고 산지사방을 누볐던 오금손은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라는 나이팅게일 선서를
그들과 함께 합창했을지도 모르겠다.
고인의 명복, 그리고 신임 소위들의 안녕과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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