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와 함께,
자욱한 물안개를 뚫고 나룻배가 구두레 나루터에 도착하자,
김삿갓은 몽중몽이라는 술집을 찾아 나섰다.
퇴물 기생이 운영한다는 몽중몽이라는 술집은 노인산 기슭에 있었다.
뜰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고 주위에는 복숭아나무도 몇 그루 있어서 제법 운치가 있는 술집이었다.
40가까이 되어 보이는 주모는 성품이 서글서글하여 김삿갓에게 술을 따라 주며 익살까지 부렸다.
"옛날부터 ‘못난 색시가 달밤에 삿갓 쓰고 다닌다.’ 하는
속담이 있는데, 손님은 멀쩡한 양반이 어째서 삿갓을 쓰고 다니신다오?"
그러자 김삿갓은 술을 마셔가며 주모를 이렇게 나무라 주었다.
"이 사람아! 이 삿갓은 내게는 둘도 없는 소중한 물건이네. 그러니 남의 삿갓을 함부로 깔보지 말게."
"아따! 다 해진 삿갓이 소중하기는 뭐가 소중하다고 그러시오?"
"모르는 소리 그만하게! 이 삿갓은 오늘처럼 비가 올 때는 도롱이 구실도 하고, 해가 쨍쨍 내리쬘 때는 차양 노릇도 하여주지, 어디 그뿐인 줄 아는가? 길에서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났을 때는 눈을 가리는 가리개 구실도 하여주는, 내게는 친구같은 존재라네."
그러자 주모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만했으면 됐어요. 삿갓 자랑은 그만하시고 어서 술이나 드세요."
"기왕 말이 나왔으니 자네가 아무리 듣기 싫어해도, 이 삿갓이 소중한 이유를 하나만 더 말해야겠네."
"그처럼 소중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하나만 더 들어보기로 하지요."
"내가 이 삿갓을 쓰고 다니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주모가 알게 되면 무척 섭섭할걸?"
주모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시다면 그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한 번 들어볼까요?"
"내가, 오늘처럼 돈이 떨어져 공짜 술을 마시고 도망갈 때는 무엇보다 소중한 게 이 삿갓이란 말일세. 무전취식을 한 뒤에 삿갓을 깊숙이 눌러쓰고 도망가면 얼굴이 가려져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단 말일세! 안 그렇겠나? 하하하~"
김삿갓이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방안에는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주모는 웃으면서 김삿갓의 농담을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제가 사람 하나만은 제법 잘 알아본답니다. 손님은 삿갓이나 쓰고 다니면서 무전취식 할 분으로 보이지 않네요. 그런 느낌이 손님의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는걸요."
"사람, 모르는 소리 그만하게. 유전강산에 다호걸이요, 무전천지에 무영웅이라고, 무전취식을 하는 종자가 따로 있는 줄 아는가?"
"손님이 정말로 돈이 없으시다면 제가 얼마든지 대접할 테니 안심하고 드세요. 호! 호! 호!"
"그거참, 고마운 말일세그려."
"그건 그렇고, 자네 집 옥호가 몽중몽이던데, 그 이름은 누가 지어 준 이름인가?"
김삿갓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궁금했던 일을 기어코 물어보았다.
"몽중몽이라는 이름은 제가 직접 지은 이름이랍니다."
주모는 정색하고 대답했다.
"허어! 몽중몽이라는 이름을 자네가 직접 지은 이름이라고? 그렇다면 자네는 책을 많이 읽은 모양이네그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몽중몽이라는 말은 몽중점몽이라는 말의 준말이 아닌가? 이 말의 본뜻은 꿈속에서 꿈을 점쳐보는 또 하나의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이라네, 몽중점몽이라는 말에는 아주 흥미로운 유래가, 있지."
김삿갓이 그렇게 말을 하자 주모는 술상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매우 흥미로운 듯 말했다.
"저는 그런 유래있는 말인 줄 모르고 내 멋대로 몽중몽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어떤 유래가, 있었다면 제게 꼭 좀 말씀해 주세요."
"자네가 꼭 알고 싶다면 말해 줌세. 옛날에 왕적이라는 시인이 길을 가다 보니 길가에 몽중몽이라는 술집이 있었네. 그러나 그는 그 술집에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네. 그리곤 잠시뒤에 나무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점을 쳐보았더니, 몽중몽이라는 술집에 꼭 들르라는 점괘가 나왔어, 그래서 꿈에서 깨어난 왕적은 몽중몽이라는 술집을 다시 찾아오면서 이런 시를 지었다네.
몽중점몽파 (夢中占夢罷)
◎ 꿈속에서 꿈을 점쳐보는 꿈을 꾸고 ◎
환향주가래 (還向酒家來)
◎ 그 술집을 다시 찾아오노라. ◎
이렇게 꿈속에서 꿈을 점쳐보고 그 술집을 찾아온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주모도 고개를 끄덕이며,
"옛날에도 우리 집처럼 몽중몽이라는 술집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렇지만 제가 우리 집 이름을 몽중몽으로 지은 데도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아요."
"자네는 어떤 연유로 그런 이름을 지었는가? 이왕이면 그 얘기도 한번 들어보세그려."
그러자 주모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5~6년전 주모가 연월이라는 기명으로 기생 노릇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연월은 그녀를 짝사랑하는 칠십 객 부자 노인이 한 사람 있었다.
물론 연월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늙은이였다.
그런데 그 늙은이가 어느 날 밤 꿈속에 나타나더니 잠자리를 같이하자고 치마끈을 부여잡고 성화같이 졸라대는 것이 아닌가!
연월은 거절을 하다못해, 늙은이 소원을 들어주는 셈 치고, 꿈속에서 늙은이에게 깨알 같은 재미를 안겨 주면서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러고 잠에서 깨어나 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꿈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비록 꿈속이었지만 늙은이에게 몸을 허락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 아니었던가!
그러자 연월은 그날로 그 부자 늙은이를 일부러 찾아가,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스스로 몸을 허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게 된 이유는 꿈속의 일이었지만 신의를 꼭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단다.
이렇듯 꿈이 인연이 되어 연월은 노인에게 많은 돈을 받아 술집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때 문을 열게 된 술집 이름은 꿈 때문에 시작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몽중몽으로 했다는 것이었다.
"음 ~ 기가 막힌 인연이군 그래. 그럼 자네에게 술집 밑천을 대 준 노인은 아직도 생존하여 있으신가?"
그러자, 주모는 얼굴에 슬픈 빛을 띠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어른은 5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저런 5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그렇다면 자네에게 술집을 차릴 수 있는 돈을 내어주신 그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그 노인이 돌아가셨을 때 상복을 입어 드리는 게 도리였을 텐데 자네는 어찌하였나?"
"그야 물론이죠. 그 어른은 양기가 워낙 신통치 않으셔서 우리가 육체관계를 가진 것은 단 한 번뿐이었지요. 그러나 제게는 바깥어른이나 다름없는 어른이셨기에 돌아가신 뒤에는 3년 상을 치르느라고 저는 술장사도 하지 않았답니다."
화류계 여성으로 일을 하면서도 노인에 대한 은혜와 도리를 생각해 3년 동안이나 절개를 지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음! 요즘 세상에 자네처럼 의리와 은공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게 정말 놀라운 일인걸!"
"사람이 동물과 다른 건 서로가 신의를 소중히 여기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옛글에 이르기를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 사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
여위설기자용(女爲說己者容) 원문(原文)
여위열기자용(女爲悅己者容) 수정(修訂)
◎ 여인은 자기를 기쁘게 하여주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가꾼다. ◎
는 말이 있지 않아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또 한 번 놀랐다.
"지금 자네가 한 말은 예양전에 나오는 말인데, 자네는 그런 책도 읽었는가?"
"저는 그런 책은 읽어보지 못했어요. 그러나 기생질을 오래 하다 보니 귀동냥으로 못 들어 본 말이 없답니다."
"기생 노릇을 오래 했다면 돈도 많이 벌었겠군그래?“
"저는 돈에 대해서는 별로 욕심이 없어요. 사람이 죽고 나면 그만인데 무슨 돈이 많이 필요하겠어요."
"허 어! 자네는 금과옥조 같은 말만 하고 있네그려. 대단 허이! 하긴 시인이었던 백낙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네.
신후퇴금 계북두 (身後堆金桂北斗)
◎ 죽은 뒤에 돈을 하늘까지 쌓아 보아도 ◎
불여생전 일배주 (不如生前一杯酒)
◎살아생전에 술 한 잔만도 못하니라.◎ 라고 그러나 그처럼 간단한 진리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그렇게도 어리석은 것이 인생이 아니겠어요. 그러기에 옛날부터 미자불문로(迷者不問路)◎ 길을 잃은 자가 어리석게도 길을 물어보려고 하지 않는다. ◎는 말이 있지 않아요."
한다는 소리가 모두 도통한 소리뿐이었다.
"여보게! 이런 시골에서 자네같이 도통한 여인을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기분이 매우 좋으니 오늘은 술을 마음껏 마시기로 하세!"
김삿갓이 잔을 비워 주모에게 건네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러자 잔을 받은 주모가 또 한마디 하는데,
"'세사는 금삼척이요, 인생은 주일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 또한 멋진 풍류남아를 만나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둘이 함께 마음껏 취해 봅시다.”
그리고 주모는 술상을 새로 봐오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본시 두주불사하는 호주가가 아니던가.
그러나 주모, 연월도 술에는 강호인지, 아무리 마셔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여자로서 자네같이 술이 센 사람은 처음 보았네.“
"술이라는 것은 상대방에 따라 주량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까. 미운 사람을 상대하려면 첫 잔부터가 역겨운 것이지요."
"나 같은 걸객이 백마강 나루터에서 자네와 같은 미인과 더불어 인간사 진리를 논하고 호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아마도 이것도 우리 두 사람의 전생의 인연일 걸세."
이렇게 오가는 술잔에 정이 오가다 보니 방안의 취흥이 점점 도도해 왔다.
김삿갓이 활짝 열려 있는 방문의 밖을 내다보니, 무심한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데, 풀밭에서는 누렁 송아지가 풀을 뜯다 말고 허공을 보고 "음~메~"하고 엄마를 불러댔다.
취기가 도도해진 김삿갓의 눈에는 그러한 전원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어 보였다.
더구나 강의 이름이 백마강인데 송아지의 빛깔은 누런 것이 무척 대조적이어서 무심결에,
백마강두 황독명 (白馬江頭黃犢鳴) 원문(原文)
백마강변 황독명 (白馬江邊黃犢鳴) 수정(修訂)
◎ 백마강가에 누렁 송아지가 울고 있네, ◎
하고 한마디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자 주모 연월도 맞은편 노인산에 소년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노인산하 소년행 (老人山下少年行)
◎ 노인산 밑으로 소년이 걸어가오. ◎
하고 대뜸 대구를 놓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이 백과 황을 대조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주모는 노와 소를 대조적으로 표현해 놓았던 것이었다.
김삿갓은 주모의 절묘한 화답에 크게 감동되었다.
본인의 말로는 책을 많이 읽지 못하고 술자리에서 귀동냥만 많았을 뿐이라고 했지만, 화답을 응구첩대로 멋지게 하는 것을 보니, 시재가 비범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뜰에 있는 연못을 내다보며,
택리부용 심불견 (澤裡芙蓉深不見)
◎연못 속의 연꽃은 물이 깊어 보이지 않네.◎
하고 또 한 구절 읊조렸다.
그러자 주모는 즉석에서 복사나무를 내다보며,
원중도이 소무성 (園中桃李 笑無聲)
◎뜰에 있는 복사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소.◎
하고 또다시 멋들어진 대를 놓는 것이 아닌가!
"여보게! 자네는 술보다도 시를 더 잘하네그려!"
"마음이 통하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삿갓은 주모 연월의 그 대답이 더욱 멋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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