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도 등급이 있었으니
지금 우리의 관념으로는 어떻게 죽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죄의 경중에 따라 같은 사형이라도 교형, 참형, 능지처사형으로 나누어 집행하였다.
교형, 즉 교수형은 처형된 시신이 온존하다는 점에서 사형 중에서는 가장 가벼운 것에 해당하였다.
교형, 즉 교수형은 처형된 시신이 온존하다는 점에서 사형 중에서는 가장 가벼운 것에 해당하였다.
반면 참수, 즉 목을 베어버리는 참형은 이보다는 훨씬 무거운 것이었고, 능지처참으로 잘 알려진 능지처사형은 목, 팔, 다리 등 처형된 신체가 완전히 손상된다는 점에서 가장 무거운 사형으로 간주하였다.
여성 2명을 처형장으로 끌고 가는 장면 중국 청나라의 광주 순무가 형부의 명을 받아서 사형수 몇 명의 사형을 집행하였는데, 그 중에 부녀자 두 명이 남편을 살해한 죄로 처형되게 되었다.
한 사람은 말라 구부정했고, 다른 한 사람은 뚱뚱하여 그녀를 들어올린 밧줄이 팽팽하였다.
사형을 집행할 때 두 여인은 장관에게 욕을 해대면서 주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고 한다.
여기서 궁금한 사실 하나.
당시 조선에서 얼마나 많은 범죄자를 사형에 처했을까?
답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률에 규정한 전체 범죄 행위 가운데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의 비중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증보문헌비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당시 통용되던 『대명률』, 『경국대전』 등의 법전에 명시된 죄목과 형량을 뽑아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집계해 보면 전체 2,038개의 범죄 행위 가운데 태형·장형은 832개 조문, 도형·유형은 841개 조문, 사형은 365개 조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은 전체의 17.9%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현대 국가에서 형법상 사형의 비중은 극히 낮은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조선시대에 법률에 명시된 범죄 유형 가운데 사형에 처해지는 범죄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는 점은 전근대 엄벌주의적 형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점이 조선에서만 특수했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전근대 시기 동서양의 여타 나라에서도 사형에 처해지는 범죄의 비중이 대개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능지처사 거열처사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교형, 참형, 능지처사형 등 조선의 세 가지 사형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것이 능지처사형이었다.
그럼 어떤 범죄를 능지처사로 다스렸을까?
『증보문헌비고』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365개 범죄 행위 가운데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대명률』에 나오는 15가지 행위를 꼽고 있다.
즉 역모를 꾀한 모반·역죄인, 가족 3인 이상을 죽이거나 신체를 절단하는 등의 흉악한 살인범, 그리고 가족·주인 등을 폐륜 살해한 강상범 등이 능지처사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교형, 참형 등으로 처벌하는 범죄 유형이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추가로 규정되어 있는 반면, 능지처사의 경우 『대명률』 규정 외에 별도로 조선에서 새로운 입법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명, 청대에 사형으로 처벌하는 기준이 계속 확대되었고 능지처참으로 처벌하는 죄목이 증가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조선에서는 능지처참 형벌을 비교적 엄격하게 제한하여 적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체의 여러 부위를 칼로 잘라 죽게 하는 능지처참이 중국에서도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칼질의 횟수에 따라 8도, 24도, 36도, 72도, 120도 등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칼질의 횟수가 8도인 경우, 즉 8회에 걸쳐 살을 잘라내는 경우는 먼저 1·2도로 양 눈꺼풀, 3·4도로 양 어깨, 5·6도로 양 젖가슴, 7도로 심장을 관통하고, 8도로 목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의 경우는 능지처참의 방식이 중국과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1395년(태조 3)에 간행된 대명률의 해설서에 해당하는 『대명률직해』에는 대명률 원문의 ‘능지처사’는 모두 ‘거열처사’로 번역해놓았다.
‘거열’은 ‘환형’, ‘환렬’이라고도 하는데, 수레에 죄인의 몸을 매달아 수레를 끌어서 찢어 죽이는 것을 말한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대명률』을 형법으로 수용하면서 그 속에 기록된 능지처참 형벌을 사용하긴 하였지만, 능지처참 죄목을 추가한 중국과 달리 능지처참 형벌을 제한적으로 적용하였으며 집행 방식도 ‘거열’로 하여 분명한 차이를 보인 것이다.
원문에서는 ‘능지처사’로 되어있는데, 해설문에서는 ‘거열처사’로 풀이하고 있다.
처형된 시신을 6개월이나 수습하지 못한 사연
『대명률직해』에서 보듯이 조선에서는 능지처참 집행 방법이 죄수를 거열하여 처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실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능지처참을 거열로 대신했다는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세조대 사육신에 대한 능지처참이다.
세조 2년(1456)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된 사육신을 능지처참으로 처단하면서 집행은 거열형으로 하였다.
당시 체포된 성삼문·이개·하위지 등은 군기감 앞길에서 환열, 즉 거열 당했는데, 세조는 관리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길에 빙 둘러서게 한 다음거열 장면을 보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머리는 3일간 저자에 효수하였다.
당시 고문으로 이미 숨진 자들의 경우도 시신에게까지 능지형을 시행하였는데, 박팽년·유성원 등이 바로 죽어서도 시신이 거열당하는 참화를 겪은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능지처사형이 여러 차례 칼질하여 신체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는 것과는 달리 조선의 경우 거열을 통해 목과 팔·다리 등 몸을 6등분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거열형은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
중국에서 고대에 이미 거열형이 시행되었는데, 『좌전』에 거열을 ‘환’이라고도 하였다.
대개 죄인의 몸을 묶는 수레는 오차, 즉 다섯 대의 수레가 이용되었고, 죄인의 목과 팔·다리를 각각 다섯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조선에서도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열형을 집행할 때 여러 대의 수레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거열형은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미 집행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즉 공민왕 때에 반역 죄인인 홍륜 등에게 환형을 가했다는 『고려사』의 기사에서 보듯이 고려 말에 거열이 집행된 적이 있다.
왜 조선에서 능지처참을 거열로 했는지 분명치는 않다.
또한 이것이 중국과 한국의 법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명확치 않다.
왜 조선에서 능지처참을 거열로 했는지 분명치는 않다.
또한 이것이 중국과 한국의 법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명확치 않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거열형의 역사가 고려시대까지 소급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조선에서의 ‘거열’ 방식과 유사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거열형이 유럽에서도 시행되었던 처형 형태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다른 사례를 들 필요도 없이 저 유명한 푸코의 『감시와 처벌』 앞부분에 거열이 등장한다.
책에서는 1757년 프랑스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다미엥이란 인물에게 네 마리의 말에 몸을 묶어 사지를 절단하여 처형하라는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거열형의 전통이 중국이나 조선에서만 있었던 처형 방식이 아니라, 과거 동서양 여러 나라에서 함께 공유한 잔혹한 사형 집행 방식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사형 집행 장소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시대 사형은 대부분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그 중 교형이나 참형이 주로 도성 밖의 당고개에서 행해진 반면 능지처참, 즉 거열은 도성 안 군기시, 저자 거리, 무교 등에서 행해졌다.
특히 능지처참이 가장 많이 행해진 장소는 군기시 앞길이었지만, 꼭 정해진 것은 아니어서 혜민국 거리나 도성 밖의 서소문, 동작진 근처, 지방 감영 등에서도 행해진 적이 있었다.
거열형이 끝나고 나면 거열 후 잘린 머리는 효시 혹은 효수라 하여 대개 3일간 매달아 두었으며, 잘라낸 팔과 다리도 팔도에 돌려보이게 하였다.
그런데 『묵재일기』에서 보듯이 조선시대에 지방을 순회하며 처형된 시신을 전시하는 기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것 같다.
『묵재일기』의 주인공 이문건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도 성주에서 평생 유배 생활을 한 인물인데, 그는 일기의 전반부에 조카 이휘가 능지처참되는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다.
주요 내용을 보면 명종 즉위년(1545) 9월 11일 조카 이휘가 어두워질 무렵에 군기감 앞길에서 능지처참에 처해졌으며, 3일 후인 9월 14일 집안에서 머리와 팔다리를 뺀 나머지 이휘의 시신을 수습하여 9월 16일에 가매장을 하였다가, 이듬해 4월경 팔도에 전시되었던 나머지 시신을 수습하여 다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또한 일기의 1545년 11월 26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이문건은 성주 유배지에 있다가 여러 군현에 순회 전시되던 이휘의 시신이 성주에 도착하여 인동으로 옮겨진다는 소식을 듣고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안타가워 하였다.
『묵재일기』를 통해 우리는 당시 능지처참으로 절단된 시신이 실제로 각 지방에 운반되었고, 6개월여에 걸친 전시가 마무리된 후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계되어 장례가 치러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가족들은 처형된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으니, 한 마디로 당시 처형된 죄수의 몸은 냉엄한 법의 현존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던 셈이다.
한말 외국인들이 목격한 끔찍한 처형 장면
앞서 본 것처럼 사형 중에서도 참수형, 능지처사형은 신체를 절단하여 처형한다는 점에서 끔찍한 처형 방법이었다.
19세기 말까지 지속되던 참수형, 능지처사형은 마침내 낡은 형률과 형벌 개혁이 추진된 갑오개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아무튼 정확히는 1894년 12월 27일에 능지처참형은 참형과 함께 금지되었다.
대신 이후부터는 민간인에게는 교수형, 군사범죄에서는 총살형으로 사형 집행 방식이 통일되었다.
이는 이웃 중국이 1905년에 능지처사형을 폐지한 것과 비교할 때 10여년 앞선 것이었다.
그런데 바꾸어 말하면 적어도 1894년까지 수도 한양에서 죄수를 잔혹하게 처형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실제 이 무렵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죄인 처형 현장을 목도하고 남긴 기록들에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사진은 박물관 경내에 있는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먼저 프랑스의 선교사 샤를르 달레(Ch. Dallet) 신부가 1874년 집필한 『한국천주교회사』에 조선의 능지처사형에 대한 흥미로운 언급이 있다.
달레는 조선에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은 19세기 프랑스 성직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직접 보고 들은 생생한 경험들을 달레가 모아서 편찬한 책이다.
달레는 이 책에서 군문효수, 죄인 참수, 능지처참 등 조선의 공개 사형 집행법에 대해 소개하면서, 모반죄인과 대역죄인의 능지처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모든 것이 방금 말한 것과 같이 진행되나 머리가 몸뚱이에서 떨어진 뒤에 사지를 자른다.
그러면 머리와 몸뚱이와 합하여 여섯 토막이 된다.
옛날에는 팔다리를 잘라내는 데에 도끼나 칼을 쓰지 않고, 팔다리를 소 네 마리에 잡아매고 소들이 사방으로 달려 가도록 채찍질을 하여 목 잘린 사람의 사지를 찢었었다.
글의 내용을 종합하면
조선에서 능지처참은 참수를 먼저 한 뒤 사지를 절단하였다는 것,
사지 절단의 방법은 과거에는 수레를 이용했으나 최근에는 도끼나 칼로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달레의 언급의 사실이라면 조선에서 능지처참할 때 참수하여 죄수를 죽인 후에 팔다리를 절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단 번에 목을 베어 죄수의 숨을 끊는다는 점에서 능지처참형이 우리의 예상과 달리 죄수를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죽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달레에 따르면 사형수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어서 1839년 천주교 박해 때에는 처형된 천주교인들의 절단된 팔이 거지의 차지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거지들은 팔에 줄을 매어 동네를 다니면서 동냥을 했다는 것이다.
샤를르 달레가 선교사들이 보낸 자료를 바탕으로 글을 작성했다면, 영국의 화가이자 여행가 아놀드 새비지-랜도어는 직접 한국에서 19세기 말 죄인을 참수하는 장면을 보고, 이를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글로 남겼다.
1891년 2월 6일 랜도어가 본 장면은 모반을 꾀한 대역죄인 7인이 시구문 밖 외딴 언덕에서 참수되는 장면이었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사형수들은 웃통이 벗겨진 채 소달구지의 나무 십자가에 결박된 채 사형장으로 이송되었고, 이송 도중 주막에서 푸짐하게 술과 음식을 먹은 망나니가 술에 취해 칼을 잘못 휘둘러 사형수의 목이 아닌 어깨를 잘라 버리는 실수를 범했으며, 죄인의 시체가 개와 표범의 먹이로 방치되는 사이 망나니들은 일을 마친 후 주막에서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고 흥청거렸다고 한다.
그가 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실려 있다.
그런데 랜도어는 이와 같은 ‘불쾌한’ 처형 장면을 기록하면서 조선 사람들에 대한부정적 편견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즉, 조선 사람들은 서양인들과 체질이 달라 고통을 덜 느끼므로 용감하게 참수를 당하며 죽어갈 수 있다거나, 중국 망나니들의 참수 기술은 탁월한데 조선인들은 잔인무도하고 서투르게 처형을 한다고 비아냥거렸다.
요컨대 랜도어는 잔혹한 죄수 처형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는 모습에 의아해하며 조선인에 대한 외국인으로서의 편견을 보여주었다.
김옥균, ‘육시’에 처해지다
이제 마지막으로 능지형과 참수형이 폐지되기 직전인 1894년 처형 기록을 좀 더 뒤져보기로 한다.
지금부터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이 해 있었던 동학교도에 대한 효시, 김옥균의 시신에 대한 능지처참 기록인데, 특히 김옥균의 시신에 대한 능지처참, 즉 ‘육시는 조선에서 공식적으로는 거의 마지막으로 집행된 것이다.
먼저 영국의 지리학자로 1894년 2월에 한국에 처음 도착한 후 1897년까지 네 차례에 거쳐 한국을 방문한 비솝여사의 동학군 효수 장면에 대한 설명을 보자.
그녀는 1894년 12월에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전라도에서 붙잡혀 처형된 동학군 지도자 김개남(金介男) 등의 목 잘린 머리를 목격하였다.
한말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다가 1897년 여행기를 남긴 영국의 지리학자.
그녀에 따르면 그들의 머리는 세 발 장대에 묶여 허공에 매달려 있었는데, 장대가 쓰러져 먼지투성이의 길 위에 버려진 머리를 개들이 뜯어먹고 그 옆에서 어린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 후에 능지형, 참형의 폐지가 『관보』에 공표되었고, 그녀는 이와 같은 개혁이 조선인 스스로가 아닌 일본인 고문에 의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다음,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을 능지처참한 상황에 대해서는 외국인들의 더 생생한 기록이 확인된다.
주지하듯이 김옥균의 경우 갑신정변 실패 후에 중국 상해에서 1894년 3월에 홍종우의 손에 암살되었고 그 시신은 조선으로 운구되어 4월에 처참하게 능지처참 당했다.
김옥균 시신에 대한 능지처참, 즉 육시는 양화진 강변 백사장에서 행해졌다고 하는데, 일본인들이 묘사한 처형 현장은 다음과 같다.
양화진 형장
“모반대역부도죄인 옥균을 당일 양화진두에서 곧바로 능지처참한다"는 처형선고를 기록한 푯말을 세우고 시체의 목과 손·발을 잘라 3개의 나무토막을 세 발로 세운 곳에 목과 손·발을 하나씩 매달고 그 옆에는 발가벗긴 몸통을 엎어 놓은 채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몸통 잔등부위에 칼자국 세 곳이 있었고 또 그 옆에는 빈 관이 있었으며 관 옆에는 피에 물든 일본식으로 명주안을 받친 잠옷이 있었는데 이것은 아마 옥균이 임종할 때 입고 있었던 옷일 것이다.
그 밖에 손과 발 하나씩이 보이지 않았는데, 풍설과 같이 본보기를 삼기 위해 그것들을 전국 8도에 회람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처형 당시에는 장위사 이종건과 의금부 도사 모가 입회하고 처형이 끝나자 곧 서울로 돌아갔다고 한다.
1894년 4월 24일자 일본 『지지신보』에 실린 김옥균 처형 그림.
이처럼 육시된 김옥균의 머리는 ‘대역부도옥균’이라 적힌 흰 천과 함께 백사장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당시 김옥균 시신에 대한 효수를 중단할 것을 서울 주재 각국 외교관들이 조선 정부에 권유하였지만, 또 다른 외국인에 따르면 김옥균의 시신은 16일 동안이나 효수된 채 방치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를 ‘구역질나는 과정’이라고 극언하고 있다.
이상으로 폐지 직전 조선에서 벌어진 능지형, 참수형 집행 장면에 대한 외국인들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끔찍한 처형 장면이지만, 실제 목격담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이들 기록에는 외국인이 갖는 조선 형벌과 법문화에 대한 선입견이 드러나기도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참수형, 능지처사형 등은 구례의 낡고 잔혹한 사형 집행 방법으로서, 근대적 사법개혁의 와중에서 당연히 폐기되어야 할 것임에 분명하다. .
실제로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을 거쳐 이 형벌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전통시대 한국은 동아시아사의 흐름 속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완성도가 높은 중국 법률을 받아들였으며, 한국에서 참수형, 능지처참형은 그 과정에서 사형 형벌의 하나로서 채택한 것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곤란하다.
따라서조선에서 시행된 사형 중 참수형, 능지처사형을 가학적이고 잔인한 육형으로만 단순하게 이해하기 보다는 당시 법률 및 형벌체계 내에서 정당하게 자리매김하는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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