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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ang Muaythai GYM/제왕회관 자료실

축구의 역사

by Ajan Master_Choi 2018. 7. 8.

요즘 러시아 월드컵으로 밤잠을 설치며 축구에 빠져있다보니 문득 여러가지 궁굼하여 찾아보았다.^^



1. 축구의 종주국

 

일반적으로 축구의 종주국은 잉글랜드이다.

이탈리아에서는 14세기에 피렌체에서 하던 공놀이가 현대 축구의 모태라고 주장하며 축구를 '공 차기'라는 뜻인 칼초(calcio)라고 부르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추쥐(蹴鞠)가 기원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FIFA에선 중국 축협의 의견을 인정하기도 했는데, 발로 무언가를 차고 노는 행위는 잉카나 마야 같은 고립된 문명에서도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추쥐가 축구의 기원이라는 것에는 당연히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야구/기원 항목에도 나오는 미국 고고학자이자 스포츠 컬럼니스트인 존 폭스도 "중국이 축구의 원조라고 부르는 추쥐는 한국과 일본에서 축국, 케마리(또는 슈키쿠) 정도로 영향을 받았을 뿐, 동아시아를 넘어선 영향을 준 바는 없다고 봐야 한다"라고 깠다.

 

발로 무언가를 차는 놀이 형태의 문화가 고대부터 세계 여러 곳에 있었기 때문에, 축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견이 있다.

하지만 현대 축구의 모태가 되는 근대 축구의 종주국이 영국이라는 사실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1863년 프리메이슨 테이번이라는 선술집에 런던 축구 클럽과 학교 축구부들의 관계자가 모여 회의를 가졌고, 회의 결과 축구 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 약칭 FA가 탄생하였다.

이는 세계 최초 축구 협회였고, 그 뒤에도 잉글랜드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아닌 그냥 축구 협회라는 명칭을 계속 쓰며 자신들이 축구의 종주국임을 어필하고 있다.

 

또한 영국은 축구가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게끔 축구의 규칙을 제정하고, 체계적으로 행정 체제를 발전시켰으며, 세계 각국에 축구를 현대적인 스포츠로 널리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실제로 세계에 축구를 퍼트린 것은 잉글랜드인이었으며, AC 밀란, 레알 마드리드 CF나 민족주의로 유명한 아틀레틱 클럽도 그 시초엔 잉글랜드인들이 끼어 있었을 정도.

그리고 저 셋을 비롯해 영어권이 아니지만 클럽 이름에 영어가 포함된 경우가 많다는 점을 봐도 영국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아직도 영국이 축구계에서 가지는 실력이나 위치는 상당하다.

축구의 규칙 개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국제 축구 평의회(IFAB)의 의원 8명 중 4명은 영국 홈네이션 4개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에서 1명씩 선출된다.

FIFA에서 선정한 4명과 합해, 총 8명 중에서 6명이 동의를 해야지 규칙이 개정될 수 있다.

 

심지어 초기 FIFA 월드컵만 해도 영국에선 "그런 질 낮은 대회는 안 나감!"이라며 무시했고, 1950년 월드컵 때 '영국의 홈네이션 4개 팀을 전부 인정하고 자기들끼리만 예선을 치러서 2개 팀을 본선에 올려준다'는 굴욕적인 특혜를 주고서야 영국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1950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가 세미프로급 팀인 미국에 충격패하고, 1954년에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모두 시원찮은 성적을 보인 탓에 1958년 월드컵부터는 없던 일로 하고 홈네이션 모두 다른 예선 조에서 평범하게 예선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그 특혜를 철폐한 58년 월드컵에 홈네이션 4개국이 전부 본선 진출한 덕분에 오히려 티켓을 늘려준 꼴이 되었다(…). 리미터 해제!

 

2. 초기의 축구

 

축구의 전신은 고대 로마 제국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일종의 군사 훈련이었다는 듯.

하르파스툼이라고 불렸다.

중세시대에도 금지령이 왕왕 보인다.

중세시대의 축구를 현재도 볼 수 있는데 이탈리아 피렌체 지방에서 칼치오 스트리코 피오렌티노(Calcio Storico Fiorentino)라는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유튜브로 검색해보면 일단 공 하나 던져주고 1:1로 격투기를 하고 있다.

미식축구 + 종합격투기

 

잉글랜드에서 축구는 일명 몹 풋볼(Mob Football)이라 불리는 축구라기 보단 패싸움에 가까운 살벌한 경기였다.

공기를 넣은 돼지 오줌보 등의 당시의 공을 상대방의 진영의 정해진 지점에 가져다 놓은 측이 이기는 것이 룰이었는데 그외의 룰, 그러니까 과도한 폭력 금지라거나 인원수의 제한같은 것은 사실상 없었다.

 

당시의 축구는 보통 인근 마을들끼리 벌어졌는데 인원제한도 제대로 된 룰도 없다보니 마을의 대다수의 청장년들은 총동원되었고 신부같은 성직자들까지 동원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차고, 때리고, 물어뜯고, 꼬집고, 찌르고 등등 온갖 폭력을 교환하였다.

무기 사용을 금하는 맨손으로 한다는 룰도 있었지만 몰래 무기를 숨기고 있다가 휘두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축구를 하면 보통 다음날 아침까지, 길게는 며칠이 걸리기도 했으며 한번 축구를 하고 나면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오죽했으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도 "이 축구나 하는 놈!" 이라는 대사가 있었을까?

축구쟁이라던가 축구하는 놈이라는 단어는 옛날 영어에서는 욕설로 쓰였다고 한다.

 

이렇듯 야만적인 경기이다 보니 당시 영국의 지배층은 축구를 하는 사람들을 좋게보지 않았고, 법으로 금지하곤 했지만 축구의 인기는 계속되었다.

 

때로는 15세기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 16세기 교황 레오 10세, 16세기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같은 사람들도 축구를 좋아했으며, 스페인-오스트리아의 국왕 합스부르크왕가의 카를 5세는 1528년 아즈텍 사람들을 궁정으로 초청해서 축구 경기를 열기도 하였다.

 

1526년 당시 35살이었던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는 자신을 위한 축구화를 한켤레 주문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축구가 피지배층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며 당시의 왕가와 귀족들 속에서도 축구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수세기 동안 수없이도 많이 축구를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축구의 인기는 꺾이지 않았던 것이며,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와 오늘날과 같은 인기 있는 스포츠로 성장하였다.

 

3. 근대 축구의 탄생

 

FA 결성 이전의 영국 축구는 지역별로 제각각 다른 규칙으로 경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역간 경기가 잦아지면서 통일 규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863년 잉글랜드의 런던 주변 11개 클럽이 참여한 FA가 결성되었다.

 

이듬해 FA는, 손을 쓸 수 있는 등 오늘날과 다른 최초의 통합 규칙을 제정하였다.

이후 FA는 가맹 클럽이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1871년 최초의 축구대회인 FA컵이 탄생하며 축구는 근대스포츠로서의 기틀을 갖추었다.

 

1886년 잉글랜드의 맨체스터에서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의 축협이 참여한 가운데 IFAB(국제축구평의회)가 탄생하여 국제 축구 규칙을 만들었고 1888년 역시 잉글랜드에서 최초의 축구 리그인 풋볼 리그가 탄생하였다.

 

당시 축구에서 "손을 사용할 수 있는가?"와 "전진패스가 가능한가?"의 축구의 자유도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거대한 두 가지 떡밥이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FA에선 "손을 사용하면 안 되며 전방으로 패스할 수 있습니다." 로 결정되며 여기에 반발한 집단이 떨어져 나가 럭비 유니온과 럭비 리그 등 럭비계 풋볼를 형성하게 된다.

 

나아가 럭비에서 손 사용을 따오고 축구에서 전진 패스를 따온 혼돈스러운 바리에이션이 캐나다식 축구와 미식축구등의 그리드아이언 풋볼계.

 

아이러니하게 이 때문에 미식축구는 (FA식) 축구와 럭비의 활동성과는 완전히 다른 첨예한 전선 공방식 스포츠가 되었다.

 

또 럭비에서 제한적인 손 사용 규칙을 걸기 위해 농구마냥 일정 걸음마다 공을 튕기게 만들고 핸드볼처럼 공을 쳐서만 전달하게끔 만든 게 오스트레일리안 풋볼과 게일릭 풋볼.

 

영국인들이 즐겨 하던 축구는 마침 대영제국의 전성기와 맞물려 급속도로 전세계에 보급되기 시작한다.

영국의 상인, 군인, 선교사, 유학생들은 자신이 가는 나라마다 축구를 보급했고 20세기 초가 되면 전세계에서 축구를 하지 않는 나라를 찾기 힘들게 된다.

 

이후 1904년 프랑스에서 FIFA가 설립되면서 축구는 국제적인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고 1930년 제1회 FIFA 월드컵이 열리게 된다.

 

위에 서술한 대로 세계 최초 리그가 생긴 잉글랜드에서도 가난한 노동자들 대회로 무시당하고 심지어 FA컵도 초창기에 엄청 무시당했던 역사가 있다.

 

참가팀인 대학팀이 조정 경기를 보러간다고 기권하는 일도 있었으니...

이러다보니 초기 축구선수 수입은 엄청 적었는데 1900년대 초반 축구선수 평균 월급은 5파운드 수준이었다.

물론 당시 물가로 치면 헐값은 아니라도 거액은 더더욱 아닌 수준으로 보통 직장인 월급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1913년 구디슨 파크에 조지 5세가 축구 경기 관람을 위해 처음으로 영국 왕족이 축구를 공식적으로 보러 방문하면서 시각이 달라진다.

 

1920년대에는 선수 평균 월급이 100파운드 이상으로 확 뛰어오르기 시작했고 그 즈음,스페인,이탈리아에서도 차례로 프로 축구리그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축구와 리그 붐은 서서히 더 퍼져갔고 월드컵의 탄생 및 여러 우여곡절로 축구 인기는 세계적으로 더 자리를 잡게된다.

 

4. 한국

 

고대로부터 공을 차고 노는 구기 스포츠가 전승되고 있으며 축국이라 불렸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이는 신라가 당나라로부터 들여온 것인데 이걸 근거로 중국은 아이들에게 축구의 종주국은 중국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실질적으로 축구와 놀이였던 축국과 비슷하나, 그것이 어떤 형태로 있었는지, 어떤 규칙이 있었는지 현대에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한국에서 현대축구는 개화기에 처음 전해졌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1883년에 인천 항구로 들어온 영국의 해군들이 축구경기를 했던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2003년 120주년 기념행사로 인천에서 당시 해군복 차림 영국인들과 한복 차림의 한국인들이 축구대회 이벤트를 하기도 했었다.

 

옛날 한국의 구기 스포츠는 장대에 망을 쳐놓고, 그곳에 공을 넣으면 점수를 먹었기 때문에 막 축구가 들어왔을때도 높이 차는것이 인기였다고 한다.

뻥축구 와 홈런,대기권 돌파슛은 이때부터였던거다.

 

일제강점기 때 축구는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적이 있었다.

 

특히, 일본팀들을 상대로 격파하는것을 본 한국인들은 희열감을 느끼고 축구장에 모여들어 독립 정신을 품었다.

일본은 1992년 J리그가 창설되기 전까지 한국에게는 역대 성적에서 크게 뒤쳐졌었다.

 

당연히 총독부는 1934년에 축구통제령을 계획했고, 조만식 선생은 이에 반대하여 결국 축구통제령을 철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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