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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ang Muaythai GYM/제왕회관 자료실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

by Ajan Master_Choi 2018. 8. 15.



철학은 ...

삶과 세계의 문제들 앞에서 불확실성과 모순, 역설과 우연들을 마주해서 혼란스러운 현상들에 질서부여, 그 질서의 부작용과 위험을 살피고 새로운 사고를 모색케 하는 친구같은 것..

 

인간이란...

길들이면(길들여지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단한사람인 어린 왕자, 또한 둘도 없는 여우..

'단 하나뿐인 나' '단 하나뿐인 너' '단 하나뿐인 만남'..

물을 주고 바람막이를 해 주며 돌보고 사랑한 장미꽃과 지구의 수많은 아름다운 장미꽃은 다르다.

사랑과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건 겉모습일 뿐이고,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린 왕자가 여우의 이름을 부르면 여우가 꽃이 되고,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의미'가 된다.

 

쉽게 변하고 곧 그 가치를 상실하는 아름다움 너머에서 영원한 아름다움을 찾자며 이데아론을 펼친 플라톤, 세계의 참된 본질은 구체적 사물들 안에 있다며 본질을 집요하게 찾으려 노력한 아리스토텔레스..

스승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바람직하나 절대적 신뢰는 금물...

틀린 답을 섬기고 따라가면 모두가 오류의 낭떠러지에 설 수도 있다.

다른 생각, 엉뚱한 생각도 나름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

 

천년 교회권력 중심으로 굳게 신념화된 천동설에 반기를 들었다가 화형당한 브루노와 감금당한 갈릴레이..

시대를 앞서거나 시대를 거스르는 새롭고 다른 비판적 사고와 마주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피노키오를 죽이면(해체하면) 유죄인가, 무죄인가?

살인죄인가? 손괴죄인가?

UFO 외계생명체와 어울려 놀다가 머리를 부딪혔는데 그만 그 생명체가 쓰러져서 죽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로보캅(두뇌만 보존하고 몸은 완전개조)이 총맞아 죽었다면 쏜 사람에게 살인죄 적용할 수 있나?

영화 <블레이드 러너> 속 복제인간(리플리컨트)이 매력적인 여성이라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 주인공은 인간을 위험에 빠뜨렸으니 유죄를 적용하는 게 옳은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피노키오는 사람답지 않은 존재였다가 사람다운 자질을 갖추게 되면서 유사사람이 아니라 참된사람으로 성장, 변모해간다.

사람들은 배우는 과정을 거쳐서 성장하기에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고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고래 뱃속에서 기막힌 꾀를 써서 할아버지를 구하는 사고능력을 발휘한다.

반성하고 좀더 나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가치판단 능력을 중시한다.

머리만 좋다고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거다.

 

복제인간은 어떤가?

입력된 기억을 마치 실제 경험처럼 외워 이야기하는 잘 만들어진 복제인간...

 

거짓말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면 못한다.

학교에 안 가고 다른 곳에 갔으면서도 마치 학교에 간 것처럼 꾸밀려면 엄마가

"너, 오늘 학교 안 갔지?"

라고 다그쳐도 시치미 딱 떼고 능청스럽게 거짓말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학교에 가서 누굴 만났고, 뭘 배웠으며, 자기가 있었던 곳과 한 일, 만난 사람에 대해 앞뒤가 맞도록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점...

 

시간과 사건의 전후관계를 잘 꿰맞추어 실제 경험한 것과 가짜로 경험한 것이 뒤섞이지 않게 잘 연결해야 한다.

거짓말을 체계적으로 하려면 머릿속에 당연히 두 세계가 공존해야 하므로, 진실만 말하는 사람보다 머릿속이 몇배 복잡할 거다.

숨겨야 할 진실을 모른 체하면서, 필요한 상황을 꾸며내야 하니 기억력도 여간 좋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거짓말하는 사람은 실제 세계에 살면서 동시에 자기가 꾸며낸 또다른 세계에서도 살아야 한다.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반성해서 착해지려 애쓰는 데 반해, 침돌이(거짓말 훈련시킨 침팬지)는 거짓말을 하고도 뻔뻔스러운 얼굴로 자기 재치와 오리발에 만족해하며 반성할 생각이 없다.

 

침돌이 같은 유형의 사람은 주변에 적지 않으며, 특히 높은 자리에 앉은 분들 중에 정말 많다.

 

인간은 거짓말을 하면서 그게 거짓말인 줄 대개 알고 한다(거짓말이 신념화된 경우도 있긴 함).

 

거짓말은 대부분 들통나게 마련이지만, 그 상대가 워낙 미련할(?) 경우 참으로 오랜 시간 들통나지 않기도 한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

 

인간은 먹거리를 직접 생산하고 입을 것과 잘 곳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생산적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생산의 역사, 노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노동은 인간과 그 대상이 되는 자연을 매개하는 활동(자연대상을 인간에게 쓸모있는 대상으로 변형하는 행위)..

물질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동하며, 도구의 도움을 받는다.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말을 하기 때문에 인간이다.

말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의미를 실어나른다.

말은 사고를 담는 그릇이기도 하지만, 그것 덕에 우리의 사고도 일정하게 조직될 수 있다.

혼자 있을 때도 '말하는 나'와 '듣는 나'로 나눠 두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듣는 상황을 만들기도 함...

복잡하고 정교한 언어가 현재의 복잡한 인간 문명과 사고 수준을 가능케 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월드컵, 바둑, 노름 등에서 보듯 놀이는 재미와 긴장을 주며, 열광하거나 몰두하게 만든다.

억지로 명에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인 거라 자체를 즐길 수 있고, 육놀이, 농구, 기차놀이 등 자유롭고 일시적인 영역으로 간다.

 

실제 삶의 영역을 벗어나 일상과 다른 시간, 공간에 들어가는 것..

놀이 공간 안의 절대적이고 고유한 규칙이 있어서 똑같이 적용되므로, 공정하게 놀면서 '승리'를 추구하며, 용기, 끈기,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정해진 규칙은 절대적인 건데, 이게 어긋나면 놀이를 망치고 만다.

어기면 놀이세계는 무너진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도 참과 거짓의 놀이의 일종이며 그 안에서 진리를 찾고자 함.

 

 

호모 데지데란스(homo desiderans)...

 

그냥 욕망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망'은 좀 다르다.

음식을 필요한 만큼 먹었다 치자.

우리는 배가 부르니까 삶의 목표를 달성한 건가?

그냥 배불리 먹는 것뿐 아니라 좀더 맛있고 영양가 있고, 심지어 먹어도 살찌지 않는 음식을 먹고 싶어한다.

배가 부를수록 욕망은 다채로워질 수밖에 없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욕망은 잠잠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 다양해지고 까다로워진다.

 

걸어다니던 사람이 자전거를 바라고,

자전거가 생기면 자동차를 바라고,

자동차를 사면 더 좋은 차나 새 차를 바란다.

차에 대한 욕망 곁에 또다른 욕망들이 줄을 잇는다.

 

집없이 사는 사람은

'아쉬운 대로 15평 아파트라도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15평 아파트를 마련하면

곧이어 25평 아파트를 장만하려고 새 각오를 다진다.

25평 아파트가 손에 들어오면 '적어도 40평에는 살아야지'하고 생각한다.

 

욕망은 항상 내 손에 쥔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고 다른 것을 선망한다.

욕망은 내가 소유하는 속도보다 항상 몇 걸음 앞에서 손짓하며 부른다.

 

물질적 소유욕만이 아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랑하고 싶은 욕망,

좋은 학교나 회사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

자신보다도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욕망(이게 부모와 자식 모두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음),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

무거운 짐을 벗고 누군가에 기대거나 어딘가에 귀속되고 싶은 욕망,

권력, 명예, 성, 진리에 대한 욕망 등

욕망의 목록은 수없이 많다.

 

지상의 욕망을 다 달성하고도,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사후세계에 대한 욕망까지 갖는다.

잘 먹고 잘살았으니 내친김에 천국에 가야 하고,

못 먹고 못한 사람은 억울해서라도 천국에 가고 싶다.

 

천국행 기차표를 파는 역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누가 표를 파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욕망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불만족과 결핍감이 따라다닌다.

욕망이 조금 작으면 더 행복해질 틈이 생기지만,

바라는게 많으면 아무리 벌어도 항상 허전하고 모자라기 마련..

욕망에 시달리는 한, 만족과 행복은

항상 저만치 앞에서 웃으며 손짓한다.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잡히고 나면 시들해진다.

 

욕망의 이런 점 때문에 욕망을 무조건 억제하거나 없애야 할 것으로 봐야 하나?

 

전통적 도덕이나 종교는 욕망을 적절하게 억압하고, 잘 관리하는 것을(때로는 욕망을 '악'으로 보고 극혐하기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인간의 욕망은 어떠한 금지나 비난으로도 없앨 수 없고, 설령 욕망을 완전히 제압해도 어느 순간 다시 고개를 들고 새로운 사건을 만든다.

 

 

귀납명제

 

'까마귀는 검다'는 명제는 실제 까마귀가 검다는 사실과 일치할 때 참이다.

비가 오는데 '오늘 날씨가 맑다'라 하거나, 강아지를 보고 '저건 망아지다'라고 하면 사실과 어긋나므로 진리일 수 없다.

 

반대로 '가발은 가짜 머리카락이다'라는 명제는 참이다.

진리는 모든 경우에 참이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맞다가 다른 경우에는 틀리다면 진리라 할 수 없다.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항상 참이어야 한다.

장소나 시간에 따라서 변하지 않고, 그걸 말하는 사람이 누구이건 사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주관적 감정이나 이해관계, 가치관 등에 따라 바뀌어서는 안 된다.

진리=보편타당하고 필연적으로 참=모든 경우에 한결같이 타당!!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귀납명제(전칭명제)가 참이 되려면, 과연 몇 마리쯤 조사해야 할까?

과연 한 마리도 빠뜨리지 않고 조사할 수 있을까?

적당한 수의 까마귀를 조사하는 것으로 충분하진 않을까?

n=15로 부족하다면 n=200만마리라면?

n=5억마리로 넓혀서, 타당한 범위가 아주 넓어졌고 신뢰도가 엄청 높아졌다면?

 

'모든 백조는 희다'는 명제는 호주에서 실제로 검은 백조가 '한 마리' 발견됨으로써 틀린 명제가 되었다.

 

이처럼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귀납명제도 충격적 '검은 백조 사건'처럼 엉뚱한 곳에서, 과거나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한 번이라도 반대 사례를 발견하는 날이면, 그 명제를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보편적 진리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과학적 귀납법'은 세계의 규칙성과 질서를 '고도의 근사치'로 보여준다.

물론 거의 틀림이 없지만, 틀리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진리는 아니지만 매우 유용하고, 고도의 개연성을 지닌 근사치의 참을 보여준다.

 

확률로 이야기하면 맞을 확률이 99.999999%에 이른다.

놀랄 만한 정확도이지만 어쨌든 100%에는 못 미친다.

물이 섭씨 100도에서 끓을 확률은 100%에 '가깝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의 확실성을 확보하려는 과제 앞에서 과학이 귀납법을 사용하는 불행한 운명을 저주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납법을 버릴 수는 없다.

완전한 검증은 불가능하지만 점점 증가하는 확증 과정은 가능..

 

모든 이론은 가설이고, 그것이 반박당하지 않는 한에서 참일 뿐이다.

검증 과정에서 반증을 견딜수록 그만큼 이론은 단단해진다.

한두번의 반증에 기존 이론이 단박에 엎어지기는 힘들다.

천년을 버틴 천동설이 수차례 강력한 반증에도 견뎌냈던 것처럼...

 

이론을 단련하는 과정은 바로 이론에 대한 칭찬보다는 비판을 견뎌내는 것인데, 이런 사정을 모르는 고집쟁이들은 자기 이론이 비판받는 것을 참지 못하고 비판자를 '적'으로 몬다.

 

가장 위험한 명제는 자기가 주장하는 이론이 '틀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우기는 경우다.

 

이런 주장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존경할 준비를 할 게 아니라 뭔가 위험한 일이 숨어있음을 알고 경계해야 한다.

 

반증되거나, 적절하게 비판받으면 언제든지 기존 이론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반증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비판과 토론의 막힌 사회에서 하나의 진리가 어떠한 결함도 없는 것으로 자부, 신격화되면 부패하기 십상..

 

지동설을 주장한 브루노가 화형장으로 끌려간 게 그 때문..

 

자기의 진리로 다른 사람의 진리를 없애려 하기 전에 자기 진리가 얼마나 비판을 잘 견딜 수 있는지 한번 살펴보는 게 좋다.

 

 

이데아

 

이데아는 참된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사고의 올바름은 이데아를 드러내는 것이고, 이데아를 숨기는 것은 그릇됨..

선한 행위는 선의 이데아와 비슷할 수는 있으나 이데아에 비해 불완전..

우리 행위는 선을 추구할 뿐, 선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도 완전한 인간, 인간의 이데아를 그 자체로 보여주는 경우는 없다.

 

이데아는 사물들의 근거, 사물들은 이데아에 의해 존재..

이데아와 사물은 원본과 복사물의 관계..

수많은 삼각형은 서로 다르지만 원본을 선명하게, 또는 흐릿하게 복사한 것이라는 점에서 같다.

 

이데아를 보지 못하고 현실의 감각적 사물에 정신이 팔린다면, 동굴 벽면 그림자에 정신 팔려있는 어리석은 자들과 마찬가지..

 

감각적 세계에서 명예와 현실적 위세를 쌓는 것은 허공에 탑을 쌓는 것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림자에 둘러싸여 그 세계를 탐닉하며 그 안에서 권력과 명예를 나누고 즐거워한다.

 

권력의 가파른 정상에 올라가도 곧이어 그 아스라한 곳에서 급속하게 떨어질 거면서...

 

동굴밖의 환한 세상을 보고 온 에피는 청년들을 가르치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동굴 속 현실에서 무능한 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참된 것을 전하고 기존 견해들을 바로잡는 데 모든 것을 바치느라 현실의 행복과 안정을 멀리하지만

"알량한 진리로 현 세계를 허깨비 취급하며 오류의 늪에 던지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면 진리의 이름으로 처벌하겠소"

라는 경고를 받고 결국 처벌된다.

 

감각적인 불완전한 대상들과 대비되는 완전한 이데아..

책상의 이데아, 물고기의 이데아, 소나무의 이데아, 인간의 이데아, 국가의 이데아, 선의 이데아 등..

 

자연의 보편적 세계와 달리 인간세계(규범과 가치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보편적 기준도 없다.

단지 인간세계에서 인간의 기준에 따라 만든 기준(피레네 산맥 이쪽의 기준과 저쪽의 기준이 다른 것과 같이 다양한 척도)만 있을 뿐..

 

'선의 이데아'에 비춰볼 때 불완전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최고의 이데아(선의 이데아)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