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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철학, 과학, 칸트 그리고 인과율

by Ajan Master_Choi 2004. 3. 7.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왜 공부하냐고 생각합니다.

실생활에 필요하지도 않은데 말이지요.

인과율도 그런 종류의 주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인과율처럼, 철학과 과학이 실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도 드물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인과율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확실하게 알 수도, 믿을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원인-결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믿고 있습니다.

전원을 누르면 스마트폰이 켜질 것이고 내일 태양이 떠오를 것을 잘 아는 것도 인과율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도, 시를 쓰는 것도 모두 인과율을 믿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물론 인과율은 넓은 의미로 또는 좁은 의미로 또는 다양한 다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세상은 원인-결과의 이치에 의해 움직이거나 인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정말 필연적인가?

 

철학은 오래 전부터 “무슨 근거로 그러한가?”를 따져왔습니다.

아주 골치 아픈 주제이지요.

하지만 골치 아픈 만큼 이것만 제대로 이해해도 철학적 흐름의 큰 줄기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칸트의 철학을 포함해서이지요.

칸트 자신도, 처음에는 흄의 인과율 비판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해결하려 덤벼들었지만, 해결책을 좀처럼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오랜 시간동안 이 문제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고 그 연구의 결과로 나온 것이 ‘순수 이성 비판’입니다.

순수이성비판은 인과율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해명하려고 내높은 책입니다.

그래서 과학, 지식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 즉 보편적 객관타당성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 인식에 작동하는가를 밝히려 했습니다.

 

성공했을까요?

 

칸트는 성공했다고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물리학은 이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위대한 학문인 과학을 난처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도 바로 이 인과율 문제입니다.

양자역학은, 비록 미시적인 세계이기는 하지만, 인과율을 부정한 데이비드 흄의 입장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듯 인과율 문제는

철학의 오랜 주제이고 과학의 토대이지만,

예전에도 혼란스러웠고

오늘날도 여전히 해결책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는 철학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설명되어야 할 인과율 문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칸트가 그나마 나아보였는데 현대의 과학은 칸트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과학도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고전 물리학과 양자역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과학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인과율 문제를 제대로 해결(설명)할 수 있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마르크스, 뉴우턴이나 아인쉬타인보다 더 천재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