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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제 1차 세계 대전

by Ajan Master_Choi 2004. 3. 18.
사라예보의 총성

유럽과 문명세계의 대부분을 분열로 몰아넣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은 1914년 8월이었다.
이 운명의 8월 초에 유럽의 가장 평화로웠던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유럽 열강은 하나씩 하나씩 전화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당시 영국의 재무상이었으며 후일 영국 수상(1916~1922)를 지냈던 데이빗 로이드 조지는 8월 4일 밤의 참전결정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갑자기 악마의 손에 의해 궤도에서 떨어져 나와 미지의 공간으로 내동댕이쳐진 채 팽이처럼 미친 듯 돌아가고 있는 행성에 서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상대진영인 독일의 재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베를린에서 이렇게 예언했다.

"이것은 사나운 폭풍우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오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전쟁이 3개월 이상은 가지 않으리라고 본다. 한껏 길게 잡아도 4개월이면 끝날 것이다"

폭풍은 사납고 무서웠다.
그러나 독일 재상의 말은 그 대목밖에는 맞은 것이 없다.
그 사납게 몰아치던 폭풍이 가라앉는 데는 4개월이 아니라 4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약 800만 명의 군인이 죽었고,전쟁이 몰고온 혁명,기근,전염병에 휩쓸려 1200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
그리고 3개의 제국이 몰락했고 신흥국가들이 탄생했다.
승자의 사회도 패자의 사회도 똑같이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전쟁의 서막이 열린 것은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의 한 샛길로 차를 잘못 몰고 들어간 것이 화근이 되었다.

'세우시오!길을 잘못 들었소"

이곳을 예방한 귀빈 일행을 수행하던 장군이 소리쳤다.
운전수는 차를 세웠다.
그러나 그가 차를 돌리기도 전에 가브릴로 프린시프라는 19세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군중 속에서 나오며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총격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그의 아내인 호엔베르크 황태자비가 목숨을 잃었다.
한 달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작은 이웃 나라 세르비아 왕국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굴욕적인 요구조건 가운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리가 세르비아에 입국,암살에 관련된 자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왕국의 평화에 지속적인 위협이 되고 있는 그러한 음모들을 뿌리뽑을 수 있도록 하게 하라"는 대목들이 있었다.
세르비아측은 대부분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협상하여 결정하자는 내용의 유화적인 회답을 보냈다.
오스트리아측은 그들의 요구조건 중 그 어느 것도 양보하기를 거부하고 즉각 세르비아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1914년 7월 28일 프란츠 요셉 황제는 선전포고를 했다.

왜 세르비아가 표적이 되었을까?

표면상의 이유인즉 세르비아 관리들이 사라예보의 테러분자들과 결탁한 증거를 오스트리아 정부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제국이 파견한 조사관들은 세르비아 정부가 관련되었다는 흔적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진정한 동기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
프란츠 요셉과 그의 보좌관들 대다수는 세르비아-그리고 보스니아 및 그 밖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남부 여러 지방에서 세르비아가 선도하고 있는 범슬라브 분리주의운동-가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존속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1914년 프란츠 요셉의 정부는 잡다한 인종집단 간에 점증일로에 있는 민족주의 운동의 압력에 직면하여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비대한 제국의 판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5000만 신민의 반도 안되는 소수,즉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의 마자르인들만이 지배민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 밖에 840만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500만의 폴란드인,400만의 루데니아인,550만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77만의 이탈리아인이 영토 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크로아티아,달마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남부 발칸반도에 분포된 슬라브족이 가장 강력한 발언을 했고 조직도 잘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웃에 위치한 세르비아 왕국은 이들 슬라브인들에게는 자기네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옹호자였다.
6년 전에도 합스부르크 제국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는 것을 세르비아가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두 나라는 전쟁에 돌입할 뻔 했었다.

그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의 총참모부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보게 되었고 이 보잘 것 없는 이웃 왕국을 당장 깨끗이 짓이겨 놓을 구실만이 생기길 기다리고 있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사건이 그런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광신자 1인의 범죄가 아니다. 이 기회를 우리가 놓친다면 우리 제국은 남부 슬라브인, 체코인,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루마니아인,이탈리아인들의 야망의 폭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을 해야만 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참모총장은 경고했다.
그리하여 황태자 암살에 직접 세르비아 정부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병합하여 세운 이중군주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을 세르비아에 대한 응징전쟁을 정당화하는 구실로서 이용하였다.
  • 황태자 부부
  • 암살 직후 체포되는 가브릴로 프린시프
오스트리아-헝가리도,세르비아도 동맹국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전쟁을 치룰 엄두는 못 냈을 것이다.
세르비아에 대한 지원은 러시아에서 왔다.
양국이 분할한 폴란드,우크라이나 영토를 누가 더 많이 자국의 세력권 안에 넣느냐 하는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오랜 라이벌 관계에 있던 러시아는 발칸반도에서도 영토를 넓히려 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러시아도 흑해와 에게해를 잇는 중요한 수로인 다나넬스해협과 함께 전략적 요충인 반도를 직접 통치하거나 아니면 자국의 영향권 안에 두고 싶어했다.
러시아는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했을 때도 맹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1904~1905년에 있었던 러일전쟁의 패배로 군사력이 약화된 터라 개입은 하지 못했었다.
세르비아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러시아는 전략적인 이득 추구,범 슬라브운동에 대한 동정,숙적을 골탕먹이고 싶은 욕망의 충족이라는 세 가지 목적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미 이 제국의 큰형님 뻘인 독일로부터 비슷한 지원을 다짐받고 있었다.
독일도 러시아와 같이 동맹국 지원에 나선 동기가 단순치 않았다.

1914년의 독일은 전쟁을 걸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유럽의 통치자로서 자국의 무력에 대해 독일의 카이제르 빌헬름 2세처럼 큰 소리를 치는 군주는 없었다.
그는 독일제국이 완전히 지배하는 미텔오이로파(중앙유럽)을 꿈꾸고 있었다.
독일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국제적인 인정을 하루 뻘리 받아내고 싶은 나머지,그는 필요하다면 외국에서의 자국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칼을 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즐겨 말하곤 했다.
그의 극적인 선언을 뒷받침할 만한 사실이 있었다.

1914년에 이르는 4반세기 동안에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자라났다.
인구는 25%,자본력은 50%,국민소득은 100% 늘어났다.
강철 생산량은 영국의 3배,프랑스나 러시아의 4배가 되었다.
민족적 자신감이 팽배한 독일인들은 유럽 외부에서 영토를 넓히고 싶었다.
대영제국과 맞먹는 식민지제국과 해상항로망을 구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독일의 전례없이 빠른 성장에 그리고 카이제르 황제의 공격적인 태도에 놀란 유럽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은 독일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 독일이 한번 해볼지도 모르는 힘의 시험에 대비한 준비를 해나갔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알사스와 로렌지방을 빼앗긴 사실을 꿈에도 잊지 못했던 프랑스는 인구가 독일의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으며 공업력,군사력에서 점점 낙후돼 가고 있었다.
이 세력의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 1892년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인데,독일이 군대동원령을 내리면 두 나라가 같이 동원령을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독일인들이 자제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영국은 독일로부터 절박한 위협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어쨌든 카이제르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며 1910년 이후 영국을 통치하고 있던 조지 5세의 사촌이었다.
영국의 많은 귀족들은 공통된 전통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 혈연으로 서로 얽혀 있었다.
영국은 독일제국의 팽창을 다소 얕잡아보며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영국도 카이제르가 유럽대륙 최강의 육군을 가지고 있는 데 만족하지 않고 틀림없이 강력한 해군도 육성하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차츰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영국의 공포를 일으킨 것은 이 해군력의 경쟁이었다.
식량과 원자재 공급을 자국 선박의 해상로 확보에 의존하는 영국으로서는 그것은 생명을 좌우할 중대한 문제였다.
당시 영국은 전 세계에 걸쳐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이들 식민지는 제국의 기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적의 공격에 취약한 부분을 늘려주는 약점이기도 했다.

1906년 이후 영국이 최초의 초대형 전함인 '드레드노트'호를 진수시키면서 두 나라는 해군군비 경쟁에 돌입했다.
영국은 자국의 전함 총톤수가 강력한 경쟁상대국 두 나라의 전함 총톤수를 합친 것보다 적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에 따라 해군력의 우위를 계속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는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국은 프랑스와 러시아였다.

그러나 독일의 카이제르가 초대형 전함들을 건조하고 급격히 해군력을 증강하기 시작하자 독일이 영국의 가장 큰 바다의 적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전된 형세를 배경으로 나타난 것이 독일과 전쟁을 벌일 경우 영국,프랑스,러시아가 상호방위에 임하기로 약속한 3국협상이었다.
독일은 그때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2국동맹에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3국동맹으로 확대시켜 놓고 있었다.
이처럼 동맹,비밀협정,군사협약으로 얽히고 설킨 거미줄 같은 방위망이 1914년 이전의 국제적 긴장상태를 악화시키고 상호불신의 풍조를 고조시켰다.
중요한 사실은 전쟁이 실제로 일어날 경우 그 전쟁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 간의 국지전으로 그치지 않고 전 유럽이 자동적으로 말려드는 전면전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게끔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각국은 대전략(Grand strategy)의 개념 하에 개별 전선의 전황이 여타 전선에 미치는 영향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조율 관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1914년~1918년에는 이러한 대전략 개념은 알려지지도,사용되지도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의 각 전쟁들은 어떤 거대한 전쟁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각국이 자국의 개별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독자적인 생명력과 방향성을 가진 여러 전쟁들이 모여 결과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전쟁으로 융합되었다는 점에서 1차 세계대전은 최초의 세계대전이었다.
또 어떻게 보면 발칸 반도에서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은 1912년부터 연달아 발발했던 제 1,2차 발칸 전쟁에 뒤이어 발생한 제 3차 발칸 전쟁이라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발칸 전쟁에서나 제 1차 세계대전에서나 주요 발칸 참전국들의 관심사는 발칸 반도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세르비아,불가리아,루마니아 모두 발칸 반도에 국한된 목표를 추구했을 뿐,무슨 거창한 세계 전략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리스는 예외였다.

그리스는 대전 중 발칸 참전국 가운데 가장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소아시아 지역을 차지하겠다는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패전으로 약화된 오스만 투르크와 단독으로 전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리스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 간의 전쟁 역시 그 하나만 놓고 보았을 때는 하나의 지역적 분쟁에 불과했다.
그리스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 간의 분쟁은 1914년 이전에 시작되었지만 1918년에 이르러서도 종결되지 않았고,1923년 근대적은 터키공화국이 수립되고 나서야 전면적인 전쟁은 겨우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양국의 정치적,군사적 대립관계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의 경제 위기의 큰 원인 중 하나인 국방비의 과도한 지출은 이런 배경때문이다.그리스는 유럽에서 무기를 가장 많이 구입하는 국가 중 하나이다.

1차 세계대전 때는 수많은 국가들이 전 세계의 여러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참천국들 가운데 개별 전선들이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해야 했던 것은 독일과 영국 두 나라뿐이었다.
이 국가들은 각각 동맹국(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투르크,불가리아)과 연합국의 핵심을 구성하던 3국협상의 주축으로서 전 세계의 모든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전쟁은 소수의 교전국 간에 제한된 지역에서 벌어진 국지적 분쟁이었던 반면,1차 세계대전에서는 다수의 주요 강대국들이 유럽,아프리카,중동,
동아시아,대서양,인도양,태평양 등 전 세계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쟁 발발의 가장 큰 원인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였지만 이들도 처음부터 세계대전을 일으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원래 목적은 유럽 대륙에 국한된 제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후의 세계 정치 무대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1914년 8월,이러한 동맹국들의 움직임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게 되자 영국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동시에 동아시아의 영국 동맹국이었던 일본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영연방의 일원이었던 호주도 영국이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언한 지 1시간 만에 호주 영해에 억류되었던 24척의 독일 선박을 나포했다.

8월 23일에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던 일본은 중국과 북태평양 지역의 독일 세력을 일소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해군 쪽에서는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독일이 더 강력한 육군을 갖고 있다는 판단 하에 동맹국에 서는 길을 택했다.
당시 해군 함선의 주 연료가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되던 시기였기 때문에,해군이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던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 남동부의 변경 지역이었던 페르시아 만 일대의 지배권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이런 상황들은 1차 세계대전의 양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발칸 전쟁
(1912년과 1913년,두 차례에 걸쳐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전쟁
제 1차 발칸 전쟁은 발칸 동맹국들과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서 벌어졌으며,제 2차 발칸 전쟁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되찾은 땅의 분할을 둘러싸고 동맹국 가운데 하나인 불가리아와 다른 세 나라(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사이에 일어난 전쟁)
 
프랑스의 주요 동맹국이었던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언젠가 러시아와 투르크가 코카서스 일대에서 맞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독일과 프랑스가 격돌했던 서부 전선과 독일,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맞붙은 동부 전선은 1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을 중요한 전선이었다.
그러나 보다 대국적인 측면에서 이 전선들은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전 세계의 여러 전선 중의 두 전선에 불과했다.
전쟁 초기,동맹국들은 유럽의 이 2개 핵심 전선에서 순조로운 승리를 거두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동맹국이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자원을 입수할 수 있는 통로가 막히게 되자,전황은 서서히 영국,프랑스,러시아와 다른 연합국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져갔다.

한편, 유럽에서 터진 전쟁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던 미국 정부는 제 3자의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벌이면서 미국에도 서서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미국의 상공업계가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공해상에서의 자유로운 항행이 가능해야 했지만,1915년부터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벌이자 이러한 자유가 위협받았기 때문이었다.
또 미국은 이해관계상 독일보다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던 독일이 연합국으로 가는 물자를 실어 나르던 미국 상선들을 공격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결국 궁지에 몰린 독일이 미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또다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감행함에 따라 미국은 마침내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1914년 무렵,무기의 기술 발달과 그에 수반된 전술 및 전략의 발전으로 인해 전쟁 참가국들은 모든 국력을 쏟아 넣는 국가 총력전을 벌이지 않고서는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다.
또 연일 격전이 지속되면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유럽 지역의 인적자원도 곧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현명한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과 식민지 주민의 요구와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가 정착됐거나 정착 중인 국가들은 전제적인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던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비해 전쟁으로 인한 부담에 대해 훨씬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개전에서 종전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국가적 단합을 유지했지만,뒤에 언급된 4개 제국은 모두 전쟁 중,혹은 종전의 여파로 붕괴되고 말았다.

1917년,혁명이 일어나면서 전쟁에서 발을 뺀 러시아는 동맹국이 발트 해에서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영토와 자원을 탈취해 가는 것을 사실상 보고만 있었다.
1918년,러시아가 연합군의 전열에서 이탈하자 동부전선의 막대한 병력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게 된 독일 사령부는 서부 전선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레닌이 러시아의 내륙 지역에서 공산당 지배를 위한 체제 정비에 힘을 쏟고 있는 동안 독일군 지휘자 루덴도르프는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독일 최후의 도박인 미하엘 작전을 발동했다.
하지만 끝도 없이 계속되는 전쟁으로 독일은 이미 각 가정들까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하엘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독일 장병과 국민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독일군 병사와 노동자,여성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1918년 패전이 기정사실화되자 독일 왕가도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후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0여 년 후 바이마르 시대 역시 나치즘의 대두로 종말을 맞는다.
전쟁이 가져온 또 다른 변화 중 하나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의 확대였다.
장기적인 전쟁으로 인력 부족이 심화되자 산업 노동력에 있어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또 물자 부족이 심화되고 전장으로 나간 남자들이 많이 전사하면서 그때까지 가족과 가정을 돌보는 일만을 전담했던 여성들이 더 많은 사회적 부담과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은 가장 발달된 선진 민주국가에서조차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여성이 전쟁 수행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각국 정부는 정치 참여를 위해 투표권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더 이상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은 기술의 개발과 실용화가 역사상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 중 하나였다.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발명된 비행기는 대전 중 교전국들의 주요 무기가 되었다.
비행기의 잠재력에 매료된 열강들은 순식간에 수만 대의 비행기들을 생산해냈고,이와 더불어 비행기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전략폭격(Strategic bombing)'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대형 폭격기를 동원해 적국의 후방을 폭격하여 전쟁 수행 의지와 능력을 파괴한다는 전략폭격 이론이 실행에 옮겨지며서 이제 후방의 민간인들도 전쟁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육지의 전쟁에서는 독가스가 최초로 실전에 투입되면서 대규모 화학전이 벌어졌다.
해상 강국들은 해군의 함대 및 해상 무역로에 막대한 위협을 가해오는 잠수함들 때문에 전전긍긍해야 했다.
대포의 사정거리와 위력도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무선통신의 발달로 이제 지휘관들은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부대들을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엄청난 화력을 내뿜는 기관총이 대량으로 사용되고 보병들이 훨씬 정확해진 소총으로 무장하게 되면서 강력한 방어진지를 돌파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졌다.
신무기가 지키고 있는 강력한 방어진지를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공격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전술이 필요했다.

또 전투가 벌어졌을 때 전선 지휘관들이 효과적으로 병사들을 이끌 수 있는 수단도 시급하게 마련되어야 했다.
이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사지도자들은 고민을 했지만 새로운 전술과 지휘방식을 개발하고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실전에 투입하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때까지 각국의 보병들은 탁 트인 개활지를 무작정 돌격하다가 도살이나 진배없는 대학살을 당해야만 했다.
동맹국과 연합국 양측 모두 효과적인 새로운 전투 기법을 개발하여 적용한 덕분에 전쟁은 더욱 장기화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살상무기와 군사전술이 실전에 사용되면서 인명과 자원의 손실도 무지막지하게 늘어났다.
그러나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치열한 난타전에서 마침내 연합군이 가진 수와 화력의 우세가 동맹군의 방어 능력을 넘어서면서 전쟁은 동맹국의 패전으로 끝나게 되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 피해를 본 각국의 여론과 실용주의적인 정치인들은 이후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공격적인 군사력 사용을 터부시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에 기반하여 국제 분쟁이 발생할 경우,협상과 중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주도하에 최초의 국제적인 연합체인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창설하기 위한 국제연맹 규약이 제정되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국제연맹은 비록 별 구실도 못하고 1930년대에 해체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지만 1920년대에는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많은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교훈은 국제연맹의 후신인 국제연합(United Nations)의 조직과 창설에 밑거름이 되었다.
 
 
길고 참혹한 전쟁의 시작

1914년 6월 28일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은 세르비아 정부 자체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이러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고 더 나아가 소극적이나마 오스트리아에게 암살 위협에 대한 경고를 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암살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의 기를 꺾어 발칸지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권위에 대한 세르비아 도전의 싹을 잘라버리고자 했다.
이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 오스트리아는 먼저 독일에게 향후 오스트리아의 행동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세계 열강의 지위를 확보하는 동시에 동맹국을 포위하는 형세를 취하던 연합국을 분열시키고 러시아의 근대화를 저지하고 싶었던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분쟁을 이용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위협을 근절하고 국내 반정부 세력을 소탕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유럽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젼유럽이 전화에 휘말릴 우려가 있었지만,독일은 자국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위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7월 5일과 6일에 독일은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해 취할 일체의 조치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낼 것을 약속했다.
독일의 지지를 확보한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에 10개 항목으로 구성된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는 그중 9개 항목은 수용했으나,암살사건 수사에 오스트리아 관리가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사항은 국가주권에 대한 침해로 보고 거부했다.
7월 25일,세르비아는 군 동원령을 내렸고,러시아도 7월 26일 전쟁 준비 기간에 들어가기 전에 부분적인 군 동원령을 내렸다.
이와 같은 세르비아와 러시아의 움직임에 대해 오스트리아도 같은 날 군 동원령을 발령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7월 28일,결국 오스트리아의 대세르비아 선전포고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문제를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만의 분쟁으로 끝낼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줄곧 완고한 태도로 긴장의 수준을 계속 높이면서 발칸의 위기를 국제적인 위기로 몰고갔다.
1914년 7월 29일,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쏜 포탄이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튿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은 전쟁을 발칸반도에 국한시켜 볼 생각으로 러시아에 대해 동원령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8월 1일,러시아가 그 요구를 거부하자 카이제르는 독일군에게 동서 양 전선에서 동원태세를 갖추라고 명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조약의무에 따라 취해진 독일의 결정은 조약상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한 프랑스로 하여금 독일에 대적하는 동원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경우를 피하기 위해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즉각 프랑스 쪽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러시아가 병력을 충분히 동원하기 전에 프랑스전에서 재빨리 승리를 거두려는 속셈이었다.
8월 1일 독일군은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어 진격했다.
3일 후에는 벨기에를 침공했고 프랑스로부터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얻어내지 못하자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은 얼마나 빨리 또 어느 정도의 병력으로 프랑스와의 양해사항을 실천에 옮겨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도발하지 않은 벨기에에 대한 독일의 공격이 마침내 균형을 깨뜨렸다.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버해협에 면한 벨기에의 항구들이 독일군에게 함락된다면 전략적으로 크게 불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벨기에 영토에서 철수하라는 영국의 요구를 독일이 묵살하자 8월 4일 영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6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12일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유럽 각국 수도의 큰 역마다 흥분한 군중들이 몰려들어 환성을 지르며 외쳤다.

"파리로 쳐들어가자"

도시에 따라 구호의 행선지가 베를린,페테르스부르크,베오그라드로 바뀌었다.
열차는 군인을 가득 싣고 전선으로 달렸다.
  • 개전선언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황제의 사진을 들고 환호하는 베를린 시민들
아래 사진 모두 총동원령에 따라 전선으로 향하는 각국 군인들의 모습입니다.
다들 크리스마스 이전에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개전을 촉발한 요인으로는 혁신적인 군함의 등장을 비롯한 군사기술의 비약적 발전,식민지를 둘러싼 경쟁의식,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경쟁과 상충되는 각국의 야망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에 일어난 유럽 여러 지역의 분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1870~1871년에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졌던 보-불 전쟁이었다.
일종의 제한 전쟁이었던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프랑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주면서 통일 독일 제국의 탄생을 주도했다.

독일은 전리품으로 프랑스의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차지했고 독일 제국의 갑작스런 대두는 유럽 대륙 전체의 힘의 균형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보-불 전쟁 이후 독일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력까지 급격하게 증가하자 주변국과 경쟁국들의 우려는 더욱 커졌다.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교묘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면서 유럽은 1871~1890년 사이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가 퇴임하고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시대적 조류가 닥쳐오자 비스마르크가 맞춰놓은 유럽 대륙의 세력 균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은 반면,제정 러시아와 프랑스 간에는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이젠 입장이 역전되어 오히려 독일이 고립될 위기에 빠졌다.
결국 독일은 동유럽 지역에서 믿을 만한 동맹국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노쇠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정점 강해져가는 남서 유럽 지역에서 이를 억제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던 발칸 반도의 정세는 발칸 지역에 대한 투르크의 영향력이 약화됨에 따라 더욱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투르크의 세력이 약화되자 러시아는 얼씨구나 하고 오스트리아와 남동 유럽에 거주하는 슬라브 민족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발칸 지역에서 영토와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에 나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발칸을 둘러싸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세르비아가 부상하면서 불안정한 발칸 지역의 위기는 한층 더 심화되었다.
비스마르크가 퇴임하고 호전적이며 변덕이 심한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로 즉위하자 독일은 점점 더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게 되었다.

보-불 전쟁에서의 굴육적인 패배를 설욕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겠다는 열망에 불타고 있던 프랑스에게 경제적,군사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던 독일은 점점 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오스트리아-독일 동맹이 러시아의 서부 국경지대에 막대한 위협이 되거나 발칸 지역에서의 이해관계를 두고 러시아와 충돌한 가능성에 대해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교묘한 외교정책을 바탕으로 안정된 유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안정된 유럽이라는 구조물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프랑스의 고립이었다.

그러나 1892년 프랑스가 고립상태를 벗어나면서 유럽의 안정은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1892년 러시아와 프랑스는 군사협력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만약 한쪽이 독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다른 한쪽이 바로 구원에 나서기로 약속했다.
영국의 경우,영국과 러시아 및 프랑스 사이에는 과거 몇 차례에 걸쳐 긴장 관계가 조성된 적이 있었고 이에 더하여 프랑스는 해군력 증강과 관련해 영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에게 해상 교통로의 안전 확보는 국가의 안보와 번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영국은 1889년 영국 해군이 항시 2,3위 국가의 해군력을 합친 것보다 우월한 해군 전력을 확보할 것(2국 표준주의)을 규정한 해군방위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이 영국과 맞먹는 산업화를 이루고 대양해군을 건설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이와 같은 '2국 표준주의'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은 1875~1900년 사이의 기간 동안 독일과 비교적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여기에는 1888년 독일 황제르 즉위한 프리드리히 3세의 부인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라는 사실도 작용했다.
그러나 프리디리히 3세는 황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사망했고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빌헴름 2세가 즉위했는데,빌헬름 2세는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독일을 세계 열강의 반열에 올려놓기를 원했다.
이처럼 야심이 가득 찬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로 즉위하면서 해외 시장과 식민지를 둘러싸고 영국과 독일 간에 새로운 경쟁이 시작되었다.
영국과 독일 양국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킨 것은 1898년과 1900년에 제정된 독일의 해군법이었다.
독일의 해군법은 향후 20년 내에 38척의 전함을 포함한 대함대를 만든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 해군 장관이었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는 영국을 '독일에게 가장 위협적인 해상세력'으로 간주했으며 대함대 건설이 세계무대에서 독일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켜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시작된 군비 경쟁은 1906년 영국이 증기 터빈 방식의 추진 기관과 대구경의 포를 장착한 혁신적인 개념의 새로운 전함 '드레드노트'를 진수하면서 한층 더 격화되었다.
1899년~1902년 사이에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어전쟁에서 독일이 보어인을 지원하자,영국은 이제 더 이상 고립주의 정책을 고집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1901년 영국은 미국과의 해군력 경쟁을 포기했다.
이는 독일과는 달리 미국의 해군력 증강이 영국의 이해관계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다음해 '영일동맹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은 극동 지방에 대해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게 된 동시에 더 많은 전함을 유럽 해역에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인도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1907년,영국은 이제 충돌할 거리가 없어진 러시아와도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이 프랑스 및 러시아와 맺은 협약은 공식적인 협정도 아니었고 이들이 전쟁에 돌입했을 때 영국이 반드시 이들 편에서 참전해야 하는 의무도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제 최소한 의리상으로는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의 반대편인 프랑스와 러시아 편에 서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와 러시아,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서로 반목하는 2대 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만약 이들 중 어느 한 국가라도 예상치 못한 분쟁에 휘말린다면 이는 동맹국 전부가 참여하는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컸다

20세기 초 화약고 같던 유럽의 분위기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면서 각국 정부와 국민을 전쟁으로 몰아갔던 요인들은 단순히 외교적인 움직임이나 양대 동맹의 반목,혹은 해군력 경쟁만이 아니었다.
1900년경부터 191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럽 각국에서는 교육이 확대되고 성인층의 식자율도 크게 늘어났지만,동시에 전쟁을 미화하거나 국제 정세를 보도하면서 거리낌 없이 맹목적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대중매체의 숫자도 크게 늘어났다.

자본주의의 발전 역시 열광적 애국주의와 공격적 제국주의를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국가적 효율성'과 '사회적 다원주의'와 같은 시류에 영합한 사조들 역시 국제 정치는 적자생존의 원칙이 지배하는 무차별 경쟁의 장이며 전쟁이라는 시련을 통해 국가적 퇴폐와 도덕적 타락을 정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부채질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부분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은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단기간 내에 종결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국제적 분쟁도 외교적 수단보다는 군사력을 동원해 해결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커져만 갔다.
비록 참전국 모두가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고 전 세계가 전쟁의 심연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이 어느 한 국가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제1차 세계대전 개전의 주요 책임이 독일에게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독일은 자국 내에서 세력을 점점 키워가고 있던 사회당의 영향력을 쓸어버리고 국내의 불만사항으로부터 국민의 주의를 돌리기 원했던 프로이센의 귀족층과 장교단,사업가들에게 전쟁은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이들은 전쟁을 통해 1916년이나 1917년에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는 러시아군의 전력 증강과 근대화 작업을 무산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독일은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국제적 발언권을 가진 열강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독일의 지도부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세계 정치무대에서 국력에 걸맞는 영향력을 가지길 원했다.

기존 전함의 2배 이상의 화력을 갖춘 '두려움 없는 전함'
Dreadnought
이후 세계의 해군은 거함,거포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1914년의 서전

헬무트 폰 몰트케가 지휘하는 독일 참모본부는 바보라도 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다고 믿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1905년 탁월한 전략가인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이 작성한 청사진에 기초한 이 작전계획은 7개 군 병력을 투입하여 서부전선에 일대 공세를 취하도록 되어 있었고,나머지 1개 군은 요새화된 동부 프러시아에 배치, 러시아군의 침공을 저지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공격군의 우익을 맡은 5개 군은 메츠-티온빌 지역을 축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서진하거나 남하하여 벨기에 혹은 프랑스로 들어가며 좌익을 맡은 2개 군은 메츠-티온빌 남쪽의 프랑스군을 공격,알자스-로렌 지방에서 포위 섬멸하기로 되어 있었다.
최북단에 위치한 2개 군은 중립국인 벨기에를 거쳐 방어가 취약한 프랑스-벨기에 국경선을 돌파,프랑스 영내로 진격한 후 크게 서쪽으로 선회하여 파리 남쪽으로 돌아서 프랑스군의 배후를 찌른다는 계획이었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된다면 프랑스는 6주일이면 항복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 작전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독일군 총동원이 진행되고 있을 때인 8월 5일 한 특수부대가 리에지에 있는 벨기에 국경요새를 공격했다.
이틀 후 시와 내성은 함락시켰지만 벨기에 방어부대는 외곽을 둘러 싼 요새에서 항전하며 투항을 거부했다.
독일군은 거포를 동원한 포격으로 외곽요새를 하나씩 파괴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요새가 파괴된 것은 8월 16일이었다.
그제서야 리에지를 통과하는 도로가 뚫려 독일군은 벨기에로 밀고 들어갔다.
벨기에의 잔여병력은 독일 공격군의 외곽선 밖으로 후퇴하여 안트워프시 주위에 포진했다.
한편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셉 조프르 대장은 자신의 마스터플랜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모두 5개 군이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중 4개 군은 알자스-로렌 지방의 메츠-티온빌요새 진지의 북쪽과 남쪽에서 독일군에 대한 일대 공세를 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1개 군은 예비병력으로 남겨 두었다.
공격이 성공하면 전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 투입하고,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만약 독일군이 벨기에로 침공해 올 경우에는 전선을 북쪽으로 연장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조프르는 독일군의 주력부대가 알자스-로렌으로 쳐내려올 것이라고 확신한 나머지 벨기에에 적의 대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여러 보고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8월 15일 그는 제 5군에게 명령을 내려 상브르강과 뫼즈강 사이의 벨기에 국경지대에 포진하도록 했다.
그보다 북쪽에는 존 프렌치 경 휘하의 소수정예 영국원정군이 8월 20일에 르까또 지역에 도착했다.
조프르는 진격해 오는 독일군에 대한 양국군의 협동공격을 명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 우익군의 병력을 과소평가했다.
이 국경전투(8월 20일~24일)로 독일군의 진격이 저지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전세는 마른강에서 역전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측의 행운과 결단력 그리고 독일측의 자만과 오판이 빚은 결과였다.
연합군의 공격이 실패하자 조프르는 마른강으로의 후퇴를 명하고 그쪽 전선을 고수할 수 있도록 강력한 병력을 집중 투입했다.
한편 몰르케는 적의 공세를 유린한 데 만족하고 우익측면에 배치했던 공격부대에서 2개 군단을 빼내어 동부의 러시아전선을 보강시켰다.
이 결정으로 서쪽 날개를 맡았던 독일군의 귀중한 병력이 빠져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벨기에 요새를 포위하기 위해 수개 군단이 뒤에 처진 까닭에 독일군은 병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몰트케가 안은 문제는 그의 허술한 지휘방법,통신체제의 마비로 더 악화되었다.
그 결과 참모총장은 그때그때 자기 병력이 어디 있는지 그 위치를 알지 못하여 각부대의 진격을 통제 조정할 수 없었고,자기 휘하의 일선 지휘관들에게 사활이 걸린 중요한 정보를 전해 줄 수도 없었다.
게다가 병사들은 벨기에에서 묶여 지연된 날짜를 메꾸려고 거듭된 강행군과 악화된 보급품 부족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9월 6일~9일에 걸친 마른강 전투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독일의 공세를 저지하고 그들을 엔강으로 쫓아버렸다.
첫 5주 간의 전투에서 교전국은 모두 50만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독일군은 프랑스 수도 부근까지 진격,택시를 징발하여 병력을 전선으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독일이 단기긴에 승리를 거둘 가능성은 무산되었다.
10월과 11월에 걸쳐 전선은 도버해협의 해안까지 확대되었고 10월 9일에는 안트워프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벨기에군은 탈출에 성공,플란더스 지역에서 영국군과 합류하여 1개월 간 계속된 제 1차 이프르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독일군과 여러 차례 격전을 벌였다.
11월 말 전선은 스위스 접경의 벨포트에서 영국해협까지 뻗어 있었다.


동부전선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는 결정적인 승리를 놓치고 말았지만 동부전선에서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러시아조약에 따르면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군은 동원령을 내린 지 16일 이내에 독일군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초의 러시아군 부대가 국경을 넘어 동부 프러시아로 들어온 것은 동원 후 불과 8일 만인 8월 7일이었다.
러시아군은 두 갈래로 공격해 왔다.
레네캄프 장군 휘하의 1개 군은 안게라프강 동쪽으로 프러시아 국경을 넘었고 삼소노프 장군 휘하의 러시아군은 훨씬 남쪽에서 월경했다.
러시아군은 철저히 요새화된 동프러시아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 남방에서 거대한 가위처럼 독일군을 협공할 계획이었다.
겁많은 독일군 사령관 프리트비츠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더라면 러시아군의 이 대담한 계획은 성공을 거두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후퇴하거나 비스튤라강 동쪽의 영토를 아예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몰트케와 프리트비치의 유능한 작전장교인 막스 호프만 중령은 견해가 달랐다.
8월 20일 몰트케는 프리트비츠를 해임하고,벨기에의 요새 공략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루덴도르프 장군을 급파,동부전선의 참모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그의 사령관으로는 급히 현역으로 복귀한 명성 높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 장군이 임명되었다.
두 사람이 새로운 임지에 부임한 것은 8월 23일이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보유한 병력 전부를 남쪽에 있는 삼소노프군 공격에 집중적으로 투입한다는 호프만의 작전계획을 채택했다.
레넨캄프의 군대가 동북방에서 내려오기 전에 남쪽의 러시아군을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남쪽에 있는 독일군이 재편성을 하고 있던 결정적인 3일간 레넨캄프의 군대는 꿈쩍도 안하고 있었다.
(우리한테 싸움을 걸기만 했더라면 우리는 지고 말았을 것이다:후일 루덴도르프는 이렇게 말했다)
훈련이나 화력이나 전술면에서 독일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 삼소노프의 군대는 타넨베르크 근처에서 측면을 포위당하며 참패했다.
10만 명 가까운 러시아군이 포로가 되고 삼소노프는 자결했다.
이곳은 수세기 전 독일의 기사들이 슬라브인들에게 살육당한 바로 그 지점이었다.
1주일 후 서부전선으로부터 막 도착한 증원부대로 보강된 독일군은 레넨캄프를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마수리아湖 전투에서 수만 명을 포로로 더 잡았다.
이리하여 9월 중순쯤에는 동프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사라졌다.
한편 남쪽에서 러시아군은 갖춘 장비가 그들 자신보다 별반 나을 게 없는 적수를 만났다.
참모총장 콘라트 장군 휘하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그 동맹국인 독일이 갖추고 있는 능률적인 철도망과 고도로 훈련된 포병들이 없었다.
8월 하순 러시아 국경을 넘은 콘라트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키에프와 바르샤바를 잇는 철도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예리한 반격에 밀려 남쪽 국경 밖으로 쫓겨난 그들은 갈리시아 깊숙이 들어왔다.
9월과 10월에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협동작전을 펴 남부 폴란드와 갈리시아에서 광역에 걸친 반격을 시도했다.
그때는 러시아도 이미 동원령을 마쳐 총병력 130만에 이르는 7개 군으로 두터운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그 방어선은 대체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자재손실,부족한 실탄의 소모, 그리고 전투경험이 있는 장교들의 전사로 입은 타격은 러시아군이 독일군보다 더 컸다.
한편 거의 잊혀진 발칸 반도의 전쟁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이끌고 세르비아 정복에 나선 포티오렉 장군은 장비가 빈약하고 규모가 작은 세르비아의 보잘 것 없는 군대쯤은 2주일 내에 무찌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은 그리 쉽게 항복하려 들지 않았다.
포티오렉군은 두 번 세르비아에 쳐들어갔지만 두 번 다 세르비아군의 기습에 걸려 패퇴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세르비아를 응징하겠다고 나선 지 4개월 만인 12월 중순쯤에는 세르비아군은 적들을 자신의 영토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유럽열강의 육군들이 대륙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영국과 독일의 해군은 제해권을 놓고 도처에서 전투를 벌였다.
최초의 시험은 전쟁이 일어난 첫 번째 주일에 지중해에서 있었다.
우세한 영국의 지중해 함대를 피하기 위해 독일 해군성은 전투순양함 ‘괴벤’과 그를 호위하는 경순양함 ‘브레스라우’에게 즉시 중립국인 오스만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직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 군함들은 영국 함대를 철처히 피하여 전혀 피해 없이 다다넬스해협으로 들어섰다.
거기서 그 2척의 군함은 터키정부에 매각되었다.
터키는 영국에서 건조중이던 2척의 터키함을 영국이 정당한 이유 없이 억류한 사실에 분노하고 있던 터였다.
순양함 ‘괴벤’호의 오스만제국으로의 도주는 오스만제국이 11월 초에 독일을 지원하고 참전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다른 해역에서는 독일의 해상기습부대가 영국의 상선단을 찾아 일대 타격을 입혔다.
10월 중순까지 그들은 영국 및 그 동맹국들의 선박을 40척 이상 격침하거나 나포했다.
한편 영국과 그 동맹국 해군은 태평양의 독일 기지들을 점령하고 독일의 동아시아함대가 그 모항인 중국의 청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봉쇄했다.
독일 동아시아함대의 함대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슈페는 모국으로 귀항하기로 결정했다.
귀로에 오른 그는 11월 1일 칠레 근해 코로넬에서 영국 군함 2척을 격침시켰다.
그러나 그 뒤부터 해상에서의 독일의 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영국은 기습공격을 일삼던 독일함들의 대부분을 추적 나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2월 9일 포클랜드섬 근해에서 벌어진 치열한 해전에서 영국 해군은 슈페의 동아시아함대를 전멸시켰다.
1914년말 경에는 전쟁의 양상이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국이 바다는 장악하고 있었지만 지상전에서는 어느 쪽도 우위에 서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프랑스,러시아에 대항해서 오스만제국이 병력 동원을 시작하면서 아프리카,수에즈 및 흑해에도 전선이 형성되었다.
유럽에서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가 갈리시아에서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고,서부전선에서는 독일,영국,프랑스의 대군이 기나긴 악몽과 같은 소모전을 위해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에 관한 종전의 모든 개념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무력충돌의 개념을,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정도의 끔찍한 것으로 바꿔 놓은 것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이었다.
처음 동원령이 내렸을 때 거의 모두가 보였던 열광과 안도감이 차츰 심각한 환멸감,혐오감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살육이 계속되면서 승리,영웅심,영광 등 전쟁과 연관된 전통적 관념들이 하나하나 부서져 버렸다.
참호가 파이고 철조망이 둘러쳐지고 포탄이 떨어진 구멍과 썩어가는 시체가 널린 서부전선 일대에서 전쟁은 의미를 잃고 부질없는 야만행위로 전락했다.

1914년 9월의 마른전투는 전쟁의 양상이 종래의 대열행진과 정면충돌의 결전에서 악몽 같은 참호전으로 뒤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
연합군의 마른공세로 단기간에 승리를 거두는 데 실패한 독일군은 일단 후퇴해서 스위스 접경 벨포트에서 북해에 이르는 전선을 따라 철통 같은 방어선을 구축했다.
첫 5주일 동안의 전투에서 빼앗은 벨기에와 프랑스 영토를 고수하기로 결심한 그들은 정교한 참호망과 지하통로,대피호와 철조망 뒤에서 수비태세에 들어갔다.
그것은 교묘한 착상의 독창적인 전법이었다.
그것은 또한 엄청난 살육을 가져오는 전쟁방식이었다.
참호에 들어박힌 독일 병사들은 할 수 없이 자기네들도 파놓은 참호 속에서 뛰어나와 대치한 양군 사이의 무인지대를 가로질러 진격을 시도하는 연합군의 공격부대를 조준사격으로 쓸어버릴 수 있었다.
일제히 퍼붓는 기관총,박격포,야포의 사격으로 목표지점에 도달해 보지도 못하고 전연대병력이 궤멸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참호에서 지키고 있는 수비부대의 인명피해는 처음에는 비교적 경미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과 9월 처음 몇 주 동안의 전황을 두고 사람들은 전쟁이 기동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과 프랑스 양쪽 모드 초기의 병력 전개와 작전시간표는 광범위하고도 신속하며 결정적인 공세에 기초하고 있었다.
1914년 10월 말경에 이르자 벨기에와 프랑스의 戰域 전체가 고착되어버렸다.
현대식 라이플,기관총,포병대를 앞에 두고 정면으로 돌격하는 보병전은 헛된 노력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양측은 깊은 구덩이를 파지 않을 수 없었다.
양쪽 군대는 그후 4년,1460일 동안 이 구덩이에 머물렀다.
수백만 명의 병사가 좁고 길게 형성된 이곳에 묶인 채 움짤달싹 하지 못했다.

참호를 방어하는 10명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50명의 공격을 쉽게 저지할 수 있었다.
비록 어쩌다가 공격부대가 철조망을 뚫고 들어오는 데 성공,최전방 참호선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그 뒤에 또 두세 개의 요새화된 방어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방어군은 반격부대를 조직하여 이미 강타당한 공격군을 그들이 막 건너온,수십 명의 전우가 죽거나 부상하여 그대로 누워 있는 무인지대로 다시 내몰아 버렸다.
이처럼 겹겹이 이어져 나간 방어선의 측면을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오직 한 가지 가능한 작전은 방어선의 정면을 돌파하여 적의 후방을 노출시키려는 침투공격뿐이었다.
기습은 가능했고 가끔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의 방어선이 두터운데다가 지원포대를 황폐화한 무인지대를 건너 점령한 참호로 이동시키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기습의 성과가 감소되었다.
독일군의 전선이 연합군의 방어진지 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돌출부에만 다소 취약점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만 정면공격이 아닌 협공을 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 지휘관들은 그런 지점들에서 그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다 줄 돌파작전을 펼 생각이었다.
양측 지휘관들은 다같이 이 전혀 새로운 전쟁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그 결과 처절한 소모전이 벌어졌다.
연합군 지휘부가 자기들보다 월등히 우세한 독일의 참호포와 방어시설을 유린할 수 있는 공격전략을 개발했다면 교착상태는 좀더 일찍이 타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무기를 개발,생산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양측 지휘관들은 전통적인 공격방법에 의존하거나 현지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다만 현수준에서 지속하는 데 필요한 방대한 병력을 조달하여 훈련시키고,그들이 가지고 싸울 충분한 총과 탄환을 생산하는 작업에 불가피한 차질이 생겨 지연됨으로써 지휘관들의 어려운 입장은 더 악화되곤 했다.
공격이 성공하여 최초의 목표를 점령하고서도 전방과 사령부와의 연락이 두절되어 유리한 기회를 놓치는 수가 많았다.
무선장비는 전진부대가 가지고 다니기에 너무 거추장스러웠고 야전통신선은 포격에 약했다.
통신이 두절될 경우 지휘관들은 신호탄,전령,통신용 비둘기로 명령을 하달했는데 그만큼 전달이 늦어지고 의사전달에 혼란이 일어났다.
당시의 교착상태를 타개할 수 있었던 무기는 오로지 탱크와 항공기뿐이었는데 그 무기들은 전쟁말기에 가서야 실전에 사용되었다.
영국이 배치한 탱크가 전선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16년 솜전투에서였다.
그러나 성능은 보잘 것 없었다.
탱크가 마침내 독일군 참호진지 공격에서 위력을 발휘한 것은 1918년 여름이었다.
그때까지도 탱크는 여전히 느렸고 기계는 믿을 수 없었으며 조작하기가 어려웠다.
대공세를 전개하는 데는 쓸모가 있었지만 지속적인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전쟁초기에는 정찰임무와 포격을 위한 관측용으로만 이용되었던 항공기가 지상포와 보급망에 대한 공격에 대대적으로 동원된 것은 1916년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항공기도 탱크처럼 느린 편이어서 보병화기로도 쉽게 공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화력과 정확성도 신통치 못했다.
전술상의 제약을 보완하기 위해 병사들은 최선을 다했다.
막대한 인명피해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프랑스 군인들은 1870~1871년의 보불전쟁에서 겪은 수모를 설욕하려고 목숨걸고 공격했지만,독일군이 쏘아대는 십자포화에 걸려 베를린까지 진격하겠다던 그들의 야심은 차츰 프랑스 영내에 침입한 적을 격퇴하겠다는 단순한 욕망으로 대체되었다.
결국에는 그런 욕망마저도 현재의 방위선을 어떻게 해서든 고수하겠다는 독일군의 굳은 결의로 퇴색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용맹한 영국군을 우군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저격의 명수인 이들도 독일군의 수적인 우세에 몰려 전쟁발발 후 8개월이 되자 거의 궤멸상태에 빠졌다.

지옥같은 참호의 실상을 독일 정부는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베를린에 만들어 놓은 참호모형을 구경하는 베를린 시민들

프랑스 역시 참호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은 초기에 훈련된 병력과 장비,특히 기관총에서 유리했다.
그리고 그들은 영국군과 프랑스군보다 참호전에의 적응이 빨랐다.
독일군은 그들의 방어진지를 십분 활용했다.
독일군이 3년 동안의 교착상태에서 이 방어 위주의 전략을 포기한 것은 1915년 4월 이프르전투와 1916년 베르덩전투,단 2번뿐이었다.
1914년 9월의 마른전투 후에 헬무트 폰 몰트케의 후임으로 독일군 총사령관이 된 에리시 폰 팔켄하인 장군의 지휘 아래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는 유리한 방어전략을 채택하는 한편,러시아군을 상대로 한 동부전선에서는 성공적인 공세를 펴고 있었다.
영국군 야전사령관 존 프렌치경이 프상스군 참모총장 조셉 조프르 원수의 지휘를 받게끔 되어 있던 연합군의 전략은 플란더스 저지대와 베르덩을 잇는 독일군 방어망의 불쑥 튀어나온 커다란 돌출부 측면에 대하여 영불 양국군이 협동공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은 1915년 한 해 동안 내내 돌출부 남쪽 측면인 샹빠뉴에서 일련의 공세를 취하였으나 실패로 끝났고 아르또와 돌출부 북쪽 측면에 가해진 영불 양군의 협동공격도 역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2월과 3월에 걸쳐 프랑스군은 상빠뉴에서 폭이 1.5km로 채 못 되는 지역을 탈환하느라고 24만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영국군은 벨기에 국경 부근 뇌브샤펠에서 그보다 더 조금 진격했다.
영국군은 1km를 전진한 3일 전투 첫 3시간 동안에 1만 명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
4월 중순 독일군은 벨기에 국경 바로 너머에 있는 이프르를 공격했는데 이때 최초로 염소가스를 무기로 사용했다.
프랑스 방어군은 숨이 막히게 하고 눈이 멀게 하는 그 무서운 가스 앞에 무더기로 쓰러졌지만 독일군은 그들의 유리한 입장을 이용하는 데 실패했다.
그 후 양측은 더 효과적인 독가스를 개발하여 1915년 중반 이후로 양측이 예비 포격에 쓴 포탄에는 여러 종류의 가스탄이 들어 있었다.
5월과 6월,프랑스군은 큰 희생을 무릎쓰고 아르뜨와의 수세에 공격을 가했으나 실패했고 영국군은 뇌브샤펠 남쪽의 페스튀베르에 공격을 가했다.
연합군은 9월 대공세를 계획하고 그에 투입할 새 병력을 훈련시키는 데 여름을 거의 다 보냈다.
9월 25일 프랑스군은 상빠뉴에 파고 든 독일 방어선에 일대공세를 가했고 영불 연합군은 아르뜨와에서 공격을 전개했다.
아무 전과도 없이 11월 초에 전투는 끝났다.
양측이 다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9월 아르뜨와의 로스전투에서 패전한 다음 영국군 사령관 프렌치 원수는 물러나고 부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헤이그 장군이 그 자리에 앉았다.
프랑스는 거듭된 패전으로 라파엘 비비아니의 내각이 무너지고 아리스띠드 브리앙이 수상이 되었다.
전쟁노력을 가일층 강화하기 위해 영군은 10월 더욱 광범한 모병제도를 도입하여 이듬해 1월 드디어 전국민 모병제가 실시됐다.
동시에 영국은 무기와 탄약 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1915년 12월 연합군 지도자들은 프랑스에서 회동했다.
1916년 여름으로 예정된 전면공세 계획을 토의하기 위해서였다.
그 계획에 의하면 영국과 프랑스는 서부전선에서,러시아와 이탈리아는 동부전선에서 각각 공격을 가하되 전전선에서의 상호조정 노력이 뒤따라야 했다.
1915년 5월에 이미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에 앞서 이탈리아는 런던비밀협정에 조인했는데,그 조약에서 연합군측은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가담하여 참전하면 그 대가로서 종전과 동시에 오스트리아 영토를 분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16년 8월까지 이탈리아는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는 하지 않았다.
1916년 서부전선의 공세는 아르뜨와의 솜강을 따라 7월에 시작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계획이 구체화되기 전에 독일군은 로센전선의 뫼즈강을 낀 프랑스 요새 도시 베르덩에 대규모 공격을 가해 왔다.
독일군 사령관 팔켄하인은 프랑스군으로 하여금 요새를 방어하기 위한 사생결단의 전투에 대병력을 집결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듦으로써 프랑스군의 진을 뺄 생각이었다.
프랑스-독일 국경을 지키는 일련의 요새의 하나인 베르덩은 세계 최강의 요새로 알려져 있었다.
베르덩은 도시를 둘러싼 구릉 일대에 무수히 구축된 외곽요새로 방어되고 있는 데다가 그 전방에는 호를 파 놓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막상 공격해 왔을 때 베르덩은 매우 취약했다.
그 지역의 전선은 여러 달 동안 조용했었다.
그리고 벨기에의 요새도시 리에즈가 함락당한 후 재래의 중세기적 요새는 쓸모없다고 확신한 프랑스군 참모총장 조프르가 요새수비 병력 대부분과 거기 비치해 두었던 많은 대포를 더욱 전황이 활발한 전선으로 이동시켜 놓았던 것이다.

1916년 초의 수주일 동안에 팔켄하인은 황태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휘하 제 5군 14만 병력에 1400문의 대포를 지급했다.
그 가운데는 600여 문의 거포와 12문의 구경 16.5인치짜리 곡사포가 들어 있었다.
2월 21일 독일군 포병부대는 프랑스군 진지에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포격은 9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 포격으로 1차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 포격의 위력을 한 프랑스 병사는 이렇게 썼다.
“무서운 포격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주위의 대지가 지진을 일으킨 듯 우리를 들어올려 이리저리 내동댕이쳤다.
부상당해서 앞을 보지 못한 채로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소리지르던 우리 병사들이 계속 우리 머리 위에서 굴러 떨어져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그날 오후 포성은 멎었다.
독일군 선발대는 뫼즈강의 동쪽 제방을 따라 진격해서 마비된 프랑스군의 전방진지들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 후 3일간 그들은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을 되풀이했다.
먼저 프랑스군 방어진지를 맹포격으로 두들겨 놓고 보병이 진격해왔다.
25일경 독일군은 최강의 외곽요새 두오몽을 점령하고
그 안쪽에 있는 요새로 진격하고 있었다.
악화하는 전황에 놀란 조프르는 유능한 앙리 뻬땅 장군을 현지에 급파해서 효과적인 방어망을 구축하도록 했다.
요새사수를 결심한 뻬땅은 부하들에게 한 치의 땅도 더 내주지 말라고 명령한 다음 요새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를 보급로로 확보하고 대대적인 병력과 대포를 요새로 끌어 들였다.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 생명선으로 매일 3000대의 차량수송대가 적의 포격을 계속 받으며 두 번씩 왕복했다.
이런 필사적인 보급의 결과,프랑스 진지는 다시 활기를 찾았고 독일군의 전진속도를 하루 수m로 억제함으로써 팔켄하인으로 하여금 뫼즈강 서안을 따라 제 2차 공세를 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독일 황태자의 군대는 진지에서마다 치열한 저항에 부닥쳤지만 천천히 전진해 나갔다.

모르똠(죽은 사람의 산)과 304고지를 둘러싼 1개월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에서 수개 연대가 전멸했다.
5월 말 독일군은 마지막 서쪽 방어선을 돌파하고 6월 9일에는 필사적인 유혈전 끝에 동쪽에 있는 보(Vaux)의 큰 요새를 점령했는데 공수 양쪽에 피해가 격심했다.
독일군이 베르덩의 성문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이 계획하고 있던 공격을 개시했다.
팔켄하인은 동부전선에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베르덩에 대한 압력을 다소 완화할 수밖에 없었다.
소규모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은 영국군은 5일간에 걸친 포격에 이어 솜에 대한 예정된 공세를 결행했다.
팔켄하인은 솜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베르덩에서 병력을 더 빼돌렸다.
7월 1일 영국군 부대는 강의 북안을 따라 진격하고 그보다 수가 적은 프랑스군 부대는 남쪽을 공격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시간 영국군의 선도포격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은 안전한 지하 벙커 속에 숨어 있었다.
머리 위에서 포탄이 작렬하는 데도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말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상처 하나 없이 숨어 있다가 진격해 오는 적을 맞아 싸우러 지하에서 나왔다.
영국군 제 1진은 독일 기관총의 밥이 되고 말았다.
헤이그는 2차 공격을 명령했다.
영국군의 사상자는 첫날 많았다.
전사 2만,부상 및 실종 4000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격을 계속했고 이 살육행위는 8월,9월 두 달 동안 계속되었는데 영국군의 손실은 매일 늘어났다.
영국군은 천천히 독일군 방어선에 물어 뜯은 듯한 넓고 얕은 이빨자국 하나를 남겼을 뿐 그들의 전략목표는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
9월 15일 그들은 처음으로 탱크를 사용해서 독일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처음 등장한 탱크는 너무 수가 적은 데다가 기계의 성능도 너무 미흡해서 적진돌파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11월 중순에 전투는 끝났다.
인명피해는 소름 끼칠 정도로 엄청났다.
독일군 사상자는 65만이었고,연합군도 사상자와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힌 자가 61만 5000명이었다.
한편 베르덩에서는 아직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해 가을에 프랑스는 강력한 반격을 가함으로써 失地를 일부 되찾았고 보요새와 두오몽요새를 탈환했다.
12월 중순이 되자 베르덩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다.
10개월에 걸쳐 거듭된 이 공방전은 1차대전 사상 가장 오래 끌었고 쌍방의 피해가 가장 컸던 단일 전투로서 100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했다.

https://youtu.be/eJEwB8AvzHo

https://youtu.be/5x-BBHBtEZs

제1차 세계대전은 全사회를 전쟁 속에 끌어들인 최초의 전쟁이다.
독일,프랑스,영국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병력과 화력을 조달하기 위해서 모든 자원을 동원했다.
18세부터 40세까지의 신체 건강한 남자가 모두 소집되었고 산업은 전시체제로 들어갔다.
경제통제가 실시되어 식품,의류는 배급제가 되었으며 여자들이 공장노동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제반 노력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1914년에서 1918년 사이에 프랑스군의 총병력은 2배로 늘어났고 독일 병력은 1.5배로,영국군은 9배로 늘어났다.
이 3개국의 무기 및 탄환 생산량은 급증했다.
여성들에게 노동을 시키고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정부가 규제를 가함으로써 동원령은 사회적 변화를 촉진했다.

1916년의 희생이 컸던 교착상태는 지휘체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8월 카이제르 빌헬름 2세는 팔켄하임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독일 동부군 사령관 파올 폰 힌덴부르크 원수를 임명했으며 그의 참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을 서부전선으로 함께 데려가도록 명령했다.
12월에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가 퇴임하고 로베르.G.니벨 장군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니벨 장군은 베르덩에서 프랑스의 반격작전을 지휘하여 성공을 거둔 바 있었다.
같은 달 영국에서는 허버트 아스퀴드 정부를 대신해서 데이빗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새 자유당 정부가 들어섰다.
전선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군 총사령관 니벨은 1917년 아르뜨와의 엔강을 끼고 연합군이 또 한 차례 전면공세를 펼 것을 제의했으나 그의 계획은 힌덴부르크에 의해 저지되었다.
힌덴부르크의 명령에 따라 솜지역의 독일군 부대들은 평균 45km 후퇴하여 아라스와 엔강을 잇는 100km 전선에 걸쳐 종전보다 더 짧고 견고한 방어진을 쳤던 것이다.
그 지역에서 철수하기 전에 독일군은 전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그 일대에 지뢰와 부비트랩을 촘촘히 심어 놓았다.
독일군의 그 새로운 진지를 독일군은 ‘지그프리트 진지’라고 불렀고 한편 연합군 쪽에서는 힌덴부르크 라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니벨은 예정대로 그가 입안한 작전계획을 밀고 나갔다.
4월 9일 영국군은 아라스의 독일 진지에 대해 14개 사단을 투입했다.
영국군의 첫날 공격은 성공했으나 이튿날부터 서서히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빼앗기지 않고 남은 것은 영국 제 1군 우익을 담당한 캐나다군단이 용감하게 공격하여 점령한 비미능선 하나뿐이었다.
니벨은 100만 명이 넘는 프랑스군 4개 군을 집결시켜 스와송과 림스를 잇는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
보름동안 계속된 싸움에서 프랑스군은 중요 목표를 하나도 못 빼앗고 약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프랑스 군부 내 여기저기서 항명폭동이 일어나자 5월 초 프랑스정부는 전투중지를 명하고 5월 중순에는 니벨을 해임했으며 그 후임으로 뻬땅을 임명했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서부전선의 전투는 그 태반을 영국군이 떠맡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6년 후반 원수로 승진된 헤이그는 프랑스 사령관의 지휘를 받을 필요 없이 플란더스의 해안지대에서 독일군을 몰아낸다는 기본목표를 소신껏 밀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6월 초 허버트 플러머 장군 휘하의 영국군 제 2군은 이프르 남방 10km 지점의 독일군 진지 메신능선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500톤 이상의 TNT를 매설,폭파한 끝에 플러머의 9개 사단은 적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그 전략적인 요충을 점령했다.
공격의 주목표는 이프르였지만 오래 계속된 예비포격으로 위태롭던 플란더스 저지대의 배수시설이 파괴되었다.
8월에는 유난히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에 진흙구렁에 발이 묶여 진격이 여의치 못했다.
그러나 헤이그는 공격을 계속했다.
그 결과 이프르 동북방 11km 지점인 빠상댈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12월 초까지 영국군은 30만 명을 잃고 전투는 다시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1917년의 마지막 전투 역시 승패가 판가름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베르덩의 소규모 공세에서 성공했다.
영국은 200대가 넘는 대규모 탱크부대로 아라스 동쪽 32km 지점인 깡브레의 독일군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기습공격의 효과가 대단했으나 이프르 3차 공격전에서 막대한 병력을 손실한 헤이그에게는 그 기습공격의 전과를 이용할 만한 예비병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영국의 공세는 힘이 빠졌고 독일군의 강력한 역공세에 밀려 결국 거의 공격 출발지점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11월 전세 역전의 시도가 번번이 실패한 데 당황한 연합국측의 정부 수뇌는 이탈리아의 라팔로에서 회합을 갖고 군사행동의 조정을 개선하기 위해 최고군사협의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심각한 궁지에 빠져 있었다.
뻬땅은 사병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주모자 대부분을 처벌했으나 프랑스군의 사기는 여전히 저조했고 심각한 병력부족에 직면해 있었다.
영국도 병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사기만은 여전히 높았다.
이탈리아는 10월 카포레토전투에서 참패를 당했고 러시아는 10월 볼세비키혁명이 성공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단독강화를 체결하고 전쟁에서 손을 떼었다.

1918년에 대한 연합군측의 전망은 구구했다.
러시아의 붕괴는 독일군으로 하여금 동부전선에 대해선 안심하고 서부전선에서의 대공세를 위한 병력을 강화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연합군이 一敗塗地(싸움에 여지없이 패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함)를 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1917년 4월 6일에 이미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 바 있는 미국이 서부전선에서 결정타를 가하는 데 필요한 병력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병력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데는 수개월이 걸릴 것이고 전투에 투입하려면 또 몇 달이 걸릴 것이었다.
그동안 연합군은 교착된 전선을 현위치에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었다.
이렇다 할 전과 없이 계속된 3년간의 전쟁에서 이미 그들의 힘만으로는 서부전선에서 결정적인 전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이었다.
서부전선에서의 전쟁이 끔찍한 교착상태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을 무렵,전쟁은 곳곳으로 번져 나갔다.
발트해에서서 카르파티아산맥까지,그리고 알프스,발칸,터키,중동,아프리카에서도 전투가 재개되었다.
교전국의 군대는 누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는가를 가름하는 대접전을 벌였고,승리와 패배의 개념은 아직 본래의 뜻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또한 교전 양측이 중립국가들을 유혹하여 전투에 끌어들임에 따라 전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1914년 오스만제국은 중앙제국(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측에 가담했고 1915년에는 불가리아가 그 뒤를 따랐다.
1915년 5월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했으며,그 이듬해 8월 루마니아가 그 뒤를 이어 연합국 측에 가담했다.
1917년 4월에는 중립을 지켜 온 나라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미국이 참전,방대한 물자와 인력을 연합국 측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중립국 중에서 제일 먼저 참전한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흑해에서 페르시아만,코카서스산맥에서 홍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오스만제국이 참전하기 전에 이미 독일은 오토 리만 폰 산데로스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고문단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여 터키 황제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의 개편작업을 돕도록 했다.
1914년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터키의 국방상 엔베르 파샤는 군대를 동북쪽으로 파견,터키와 접경한 러시아의 코카서스 산악지대를 공격했다.
엔베르는 작전이 신속히 성공하여 러시아의 코카서스와 그루지아지방을 터키가 점령할 수 있으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눈보라와 질풍이 몰아치고 영하의 기온이 계속되는 추운 겨울날씨 때문에 공세는 좌절되었다.
1915년 1월 러시아군은 터키군을 아르메니아로 몰아냈다.
엔베르의 15만 병력은 궤멸했다.
그 해 겨울의 시련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5명에 1명 꼴이었다.
1915년 내내 터키는 아르메니아의 트레비존드와 반湖 사이에서 접전을 벌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령 아르메니아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러시아를 지원하고 다수가 러시아군에 가담하여 싸웠다.
이 반역에 대한 보복으로 터키인들은 터키령 아르메니아에 있는 수십만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수천 명을 사막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쫓아냈다.
그러나 결국 니콜라이 N.유데니히 장군 휘하의 러시아군은 1916년 말까지 터키령 아르메니아 전역을 석권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엔베르는 영국으로부터 수에즈운하를 빼앗으려고 또 다른 부대를 파견했다.
독일군의 프리드리히 크레스 폰 크레센슈타인 대령 지휘하에 병력 2만의 터키군은 시나이사막을 건너 수에즈운하로 진격해 들어갔지만 격퇴당했다.
1916년 봄,아치볼드 머리 경 휘하의 영국군은 점차 시나이반도에서 터키군을 몰아냈다.
뒤이어 공병대와 이집트 노무자들이 들어와 메마른 사막에 철도를 부설하고 급수관을 설치했다.
1917년 3월쯤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해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자-비어세바 지구의 터키군 방어진지를 돌파하려던 두 차례에 걸친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6월에 머리 경의 후임으로 지휘를 맡은 에드먼드 알렌비 경은 11월 초 가자와 비어세바를 점령했다.
예루살렘은 12월에 함락되었다.
알렌비의 군대는 터키에 항거해서 1916년에 반란을 일으킨 아랍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의 보급 및 자금 지원을 받은 그들은 유명한 T.E.로렌스 대령과 같은 모험적인 영국군 장교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 아랍인들은 터키 본토에서 다마스커스,암만,메디나를 연결하는 생명선인 헤자스철도를 습격함으로써 터키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영국 정부는 그 댓가로 전후 아랍인들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약속했고 한편 사이크스-피코협약을 맺어 시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전후 요구를 비밀리에 인정했다.
그런데 영국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됨으로써 후일 아랍세계에서는 서방측에 대한 뿌리깊은 원한과 불신이 생겨났다.

다른 지역에서 펼친 영국의 對터키공세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터키가 선전포고를 하자 영국은 인도에 있는 소규모 부대를 메소포타미아로 파견했다.
남부 페르시아에 있는 영국의 유전을 보호하고 페르시아에서 아바단섬으로 가는 송유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페르시아만 입구에 상륙한 영-인도 연합군은 티크리스강을 따라 북상,바스라에 기지를 설치했다.
바스라市를 점령하고 터키군의 반격을 격퇴한 그들은 계속 북쪽으로 진격하여 1915년 9월까지 알쿠르나,아마라,쿠트알이마라를 차례차례 점령했다.
그들은 이어 바그다드 점령를 시도했으나 바그다드를 불과 32km 앞에 둔 크테시폰에서 터키군에게 격퇴당했다.
영국군은 쿠트알이마라까지 후퇴했다.
기진맥진해서 후퇴를 더 계속할 수 없게 된 8900명의 영국군은 그곳에 참호를 파고 주저 앉았다.
그들을 구출하려던 노력은 모두 실패했고, 1916년 4월 12일 찰트 타운잰드 장군은 터키군에게 항복했다.
쿠트알이마라의 패전이 있기 직전 영국군은 다다넬스에서도 대패했다.
러시아는 1915년 9월 코커서스에 들어온 터키군을 견제해 줄 것을 연합군에게 요청했다.
그러자 영국 해군성은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전략적인 해협 다다넬스와 보스프러스를 포위하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러시아로 가는 연합군의 전쟁보급품 수송을 신속히 하기 위해 해협을 개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1915년 2월과 3월에 걸쳐 영불함대는 터키의 외곽요새를 포격하고 다다넬스로 들어갔으나 바다속에 기뢰가 잔뜩 설치되어 있었다.
3척의 배를 잃고 함대는 후퇴했다.
그러자 영국 국방상 키치너 경은 반도에 대한 육해공 협동작전을 펴기로 결정하고 이언 해밀턴 경을 파견,그 작전을 지휘하도록 했다.
4월 25일,7만 5000명의 병력이 두 지점에 상륙했다.
영국군은 갈리폴리 반도 남단의 헬레스 곶에 상륙했고, 앤잭부대(호주-뉴질랜드 연합군)는 북쪽으로 약 24km 떨어진 아리부르누에 상륙했다.
그 후부터 아리부르누를 앤잭灣이라 부르게 되었다.
공격군은 처음에 좀 밀고 나갔으나 이내 제자리에 주자앉고 말았다.
오토 리만 폰 산데르스가 지휘하는 터키군이 해안을 내려다보는 고지를 완강히 지켜 연합군은 돌파해 나갈 수가 없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이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갈리폴리의 구세주’라고 불리게 되었고 전후 터키의 통치자가 되었다.
교착상태는 여름까지 끌어 더위,벌레,말라리아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8월에 보다 북쪽인 수블라灣에 상륙한 다른 연합군 부대도 기대했던 적진돌파에 실패했다.
그리하여 공세는 둔화됐다.
그 해 가을에 해밀턴이 해임되고 찰스 몬로 경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는 12월 1일 후퇴를 명령하는 현명한 조치를 취했다.
갈리폴리에서의 영국의 실패는 또 하나의 중립국 불가리아를 중앙제국 편에 가담하여 싸우게 만들었다.
교전 쌍방이 서로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1915년 가을 불가리아는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 편에 운명을 걸기로 했던 것이다.
그때는 이미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피 폰 팔켄하인 장군이 터키와의 육상 통신로를 열기 위해 세르비아를 분쇄하기로 결정인 내린 다음이었다.
팔켄하인의 계획은 세르비아를 공격하는 데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불가리아 3개국의 합동작전을 편다는 것이었다.
10월 6일 아우구스트 폰 마켄센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부대는 북쪽으로부터 세르비아를 침공,2일 후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불가리아는 10월 14일 동쪽에서 세르비아를 공격했다.
11월 2월 말경 2대 1의 열세에 놓인 세르비아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험준한 산을 넘어 이웃인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로 들어갔다.
결국 코르푸섬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중앙제국은 추격을 계속,몬테네그로를 침공했다.
몬테네그로는 1916년 1월 항복했다.
그보다 앞서 1915년 가을,세르비아군은 국경지대에 적의 대병력이 집결하는 것을 보고 연합국에 원조를 요청했었다.
10월 5일 1만 3000명의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프랑스의 모리스 사라예 장군의 지휘하에 세르비아 국경 남쪽에 있는 살로니카에 상륙했다.
이 연합군 부대는 북진하여 세르비아를 도우려 했으나 불가리아군에 의하여 저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연합군은 다시 살로니카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그들은 앞으로 있을 발칸반도 공략에 대비해서 서서히 병력을 증강시켰다.

쿠트알이마라,갈리폴리,살로니카에서 패전을 거듭한 연합군의 사기는 1916년이 시작될 무렵에는 밑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은 베르덩을 공격하고 있었고,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그해 6월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이 벌인 러시아군의 공세로 연합군의 사기는 되살아났고 팔켄하인은 베르덩의 독일군을 러시아전선으로 빼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14년 러시아군은 타넨베르크전투에서 무참한 패배를 겪고 그해 말쯤에는 독일군에게 쫓겨 동프러시아 국경 가까운 마수리아湖 너머로 후퇴했다.
이 작전을 지휘한 독일군 총사령관 파울 폰 힌덴부르크 장군과 그의 참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그 승리를 가져온 전략으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1915년 5월,2차 공세를 명한 그들은 8월에는 바르샤바와 브레스트-리토프스크를 점령,러시아 영토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다.
10월경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북으로는 리보니아의 리가로부터 남으로는 루마니아의 체르노비츠에 이르는 선까지 진격해 있었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쿠얼란드,폴란드와 그전에 갈리시아에서 얻은 영토까지 다 잃어버렸다.
거기에다 200만의 러시아군이 사상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남아 있는 부대도 보급품과 탄약이 위험할 정도로 바닥이 나 가고 있었다.
1916년 여름,러시아가 계속 전투에 지는데다 점차 식량사정이 악화되어 갔기 때문에,페트로그라드에서는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7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는 총사령관 니콜라스 대공을 해임하고 자신이 직접 러시아군의 지휘를 맡았다.
이것은 이중의 과실이었다.
첫째,인기있고 유능한 지휘관을 군사적으로 무능한 인간으로 갈아치웠다는 것이었고,또 전황이 계속 악화될 경우 황제 자신이 비난을 모면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잘못이었다.
그 다음 6개월 동안 전투는 소강상태에 빠졌다.
러시아는 그동안 병력을 보강하고 보금품을 비축했다.
1916년 초 최고사령부는 예상되는 英佛연합군에 의한 솜공세에 시간을 맞춰 하기대공세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월 독일군의 베르덩에 대한 기습공격이 있자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셉 조프르는 동부전선에서 즉각 공격을 가하여 베르덩을 공격하는 독일군을 견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니콜라스 2세는 이 요청에 의해서 폴란드 동북부 나로크湖 부근의 독일군에 대한 정면 공격을 명령했다.
10일간 계속된 끝에 좌절된 그 공세에서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5배가 넘는 7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그 공격은 베르덩의 전황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고 러시아군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한편,러시아군의 하기공세 계획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7월 1일을 기하여 동부전선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A.E.에버트 장군 휘하의 서부방면군이 중앙에서 주공격을 맡고 북부 및 서남부 방면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전선에 고착시킬 2차 공세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러시아군의 준비가 완료되기 전인 5월 중순 오스트리아군은 트렌티노전선의 이탈리아군에 공격을 가해 왔다.
그러자 이탈리아 왕은 러시아 황제에게 오스트리아군을 견제하는 조치를 즉각 취해 줄 것을 간청했다.
에버트와 북부 방면군은 때이른 공격을 하기를 꺼렸지만 에버트가 뒤이어 공격한다는 조건부로 서남부 방면군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은 6월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동의했다.
브루실로프는 6월 4일 공세를 개시,저항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방어선을 사실상 짓이겨 놓았다.
에버트가 효과적인 지원을 제공하지는 못했지만 9월 내내 러시아군은 전진을 계속 카르파티아산맥 깊숙이 쳐들어갔다.
브루실로프는 1차대전 중 단 하나뿐인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공세를 지휘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브루실로프는 서전을 승리로 장식함으로써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그 승리는 이탈리아 전선에 대한 오스트리아군의 압력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베르덩에 가해진 독일군의 압력도 풀어 주었다.
그 승전을 보고 루마니아는 8월 27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했다.
루마니아는 즉각 남부 헝가리의 트린실바니아를 치기 위해 군대를 북진시켰다.
연합군측에게 전략적 가치는 거의 없는 곳이었지만 루마니아는 이 지역을 오래 전부터 탐내 왔었다.
루마니아군은 9월 초 그 지방의 수도를 점령했지만 강력한 반격을 받고 국경 밖으로 밀려났다.
12월 초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시티가 중앙제국군에게 함락당했고 루마니아군은 자국의 동북 변경으로 후퇴했다.
그 결과 동부전선은 루마니아를 거쳐 남부로 연장되어 흑해에 닿았고 터키와 그 동맹국 간의 통신이 용이해졌으며 루마니아의 풍부한 유전과 곡창지대가 중앙제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브루실로프의 공세로 가중된 부담은 러시아 황제의 군대를 붕괴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겹친 피로와 만성화된 보급부족은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후방에서는 노동자,농민들이 강요된 내핍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항의했다.
1917년 3월 초 반란이 일어났다.
대다수의 의원 및 軍과 민간의 지도자들이 반란을 지지했다.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빵과 평화와 토지’를 요구하는 공장노동자와 여자들의 데모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군 참모부에서 수도로 귀환하는 황제가 탄 열차를 반란군과 철도원이 도중에서 저지했다.
3월 15일 니콜라이 2세는 황제의 자리를 물러나고 막 해산된 의회지도자들과 소비에트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온건한 임시정부에 권력이 이양됐다.
그해 4월 독일은 러시아의 전쟁노력을 와해시켜 보려는 희망에서 망명중이던 볼세비키 당원 레닌이 열차로 독일영토를 지나 러시아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알렉산더 케렌스키가 수반이 된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하고 그해 여름 새로운 공세를 명령했다.
그러나 브루실로프 휘하의 병사들은 승산없는 전투를 계속하기보다는 오히려 빨리 귀국해 약속된 사회개혁의 혜택을 누리고 싶어했다.
그해 8월 대병력을 동원한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반격으로 공세가 좌절되자 사기를 잃은 러시아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케렌스키는 브루실로프를 해임하고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을 후임으로 임명했지만 軍의 와해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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