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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ang Muaythai GYM/제왕회관 자료실

전략과 전술

by Ajan Master_Choi 2018. 10. 4.



병도와 병법


현존하는 역대 병서 가운데 수천 년 동안 가장 널리 읽힌 병서는 말할 것도 없이 《손자병법》이다.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손자병법》만큼 병가사상을 체계적으로 요약해놓은 병서가 없다는 데서 찾아야 하겠다.

 

첫 편인 〈시계〉의 첫머리는 병도의 이치와 전략전술의 큰 줄거리를 언급해놓았다.

일종의 총론에 해당한다.

병법 위에 병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유일한 사례에 속한다.

다른 병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손자병법》만의 자랑이다.

 

〈시계〉는 “전쟁은 국가의 중대사인 군국기무(軍國機務)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병가의 등장 배경과 존재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뒤이어 나오는 “백성의 생사 및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어 있는 까닭에 깊이 생각지 않을 수 없다”는 구절은 용병의 기본 도리를 언급한 것이다.

이것이 병도다.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군주와 실질적으로 병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병력을 동원하고 지휘하는 통수권 및 지휘권의 존재근거를 밝힌 것이다.

 

“전쟁은 국가의 중대사인 군국기무다”라는 구절을 대부분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끌어들여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에 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선에 있다는 지적은 옳다.

그러나 반만 맞는 말이다.

적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쟁론》 시각에 입각한 이런 해석은 《손자병법》의 기본 취지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전쟁 역시 사투(私鬪)와 마찬가지로 국리(國利)를 둘러싼 다툼에서 빚어진다.

모든 사적인 분쟁이 궁극적으로는 사리(私利)에서 비롯된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말로 해결이 되지 않으니 주먹다짐을 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 해당한다.

모든 우격다짐이 그렇듯이 공갈과 협박, 주먹다짐 등이 동원되면 깔끔한 해결이 불가능해진다.

굴복을 당한 사람에게 굴욕감과 적개심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원래 용병의 기본 이치를 밝힌 병도는 스스로를 낮추는 노자의 겸하(謙下) 및 남에게 먼저 양보하는 공자의 예양(禮讓) 이념과 취지를 같이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출현한 제자백가서 가운데 병서 이외에 용병의 원리를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노자의 《도덕경》과 법가사상의 완결판인 《한비자》다.

부국강병을 위한 강력한 법치(法治)를 역설했던 한비자가 사상 최초로 《도덕경》에 주석을 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손자병법》을 해석할 때 반드시 《도덕경》과 《한비자》를 곁에 두고 입체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노자와 공자 모두 《손자병법》과 마찬가지로 겸하와 예양을 역설하며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 전쟁에 나설 것을 역설했다.

《손자병법》의 첫머리는 바로 이를 언급한 셈이다.

‘백성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 운운한 것이 그렇다.

전쟁을 결정할 때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할 이유를 강조한 것이다.

국가존속의 배경을 국리에서 찾은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모든 전략전술이 〈시계〉의 ‘부득이용병’ 원칙에서 흘러나온 배경이 여기에 있다.

《도덕경》에 나오는 부득이용병 이치를 달리 표현했던 것이다.

조조는 《손자약해》 서문에서 이를 집이시동(戢而時動)으로 풀이해놓았다.

동서고금의 모든 병서를 통틀어 ‘부득이용병’ ‘집이시동’만큼 전쟁의 기본 취지를 잘 표현해놓은 것도 없다.

 

〈시계〉의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의 오사(五事)와 관련해 지금까지 다양한 해석이 나왔으나 아직까지 합의된 것이 없다.

무경십서에서 말하는 모든 전략전술은 〈시계〉의 오사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병도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도는 병도, 천과 지는 전략, 장과 법은 전술로 볼 수 있다.

모두 병도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같은 곡을 달리 연주한 동공이곡에 지나지 않는다.

무경십서는 전략을 전도(戰道), 전술을 쟁도(爭道)의 차원에서 풀이해놓았다.

무경십서에 나오는 병도와 전도 및 쟁도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병도(전쟁을 최대한 피하는 대원칙)

 

• 난세지도(亂世之道) - 난세에 적용되는 치도

• 무도(武道) - 뛰어난 무위(武威) 자체로 싸움을 멈추게 하여 무(武)의 기본 이념을 실현하는 도리

• 여취지도(予取之道) - 먼저 주어야 얻을 수 있다는 도가의 사상

• 취천하지도(取天下之道) - 폭력을 힘으로 제압해 천하를 호령하는 원칙

• 패도 - 힘으로 난세를 평정하는 패자의 도리

• 부득이용병 - 부득이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을 동원

• 집이시동 - 무기를 거두어들였다가 불가피할 때 움직이는 원칙

 

전도(전투를 최대한 피하는 대원칙)

 

• 지피지기 - 상대방과 나를 안 연후에 용병하는 원칙

• 오사칠계(五事七計) - 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의 오사를 검토하고 상대방과 내가 처해 있는 7가지 상황을 비교한 후 비로소 용병하는 원칙

• 모공용병(謀攻用兵) - 최선책인 벌모(伐謀)와 차선책인 벌교(伐交), 차차선책인 벌병(伐兵)을 포함해 전투하는 원칙

• 속전속결 - 최단기간 내에 승부를 결정지어 전승효과를 극대화하는 원칙

• 국용유족(國用有足) - 국가재정과 재화의 확충을 전제로 백성의 요역을 최소화하는 원칙

• 무사법치(無私法治) - 공평한 법집행의 도리

• 신상필벌 - 공과 과에 따라 상과 벌을 엄히 시행하는 도리

 

쟁도(전쟁의 화를 최대한 줄이는 대원칙, 전술)

 

• 궤도 - 속임수로 적을 함정에 빠뜨리는 전술

• 권도 - 상황에 따라 도덕과 정반대되는 계책을 과감히 구사하는 전술

• 권변 - 상대방의 변화를 좇아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전술

• 임기응변 - 적의 움직임이 빚어내는 계기에 올라타 계책을 달리하는 전술

• 허허실실 - 상대방이 허와 실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전술

• 기정병용 - 통상적인 용병과 변칙적인 용병을 섞어 사용하는 전술

• 결기승승(決機乘勝) - 때가 오면 놓치지 않고 결단하는 전술

• 병무상형(兵無常形) - 무궁무진한 포석으로 전개하는 전술

• 인리제권(因利制權) - 아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주도권을 쥐는 전술

• 면후심흑(面厚心黑) - 두꺼운 얼굴과 은밀한 속셈으로 상대방을 착각하게 만드는 전술

• 도광양회(韜光養晦) - 달빛 아래 은밀히 칼을 갈며 때를 기다리는 전술

 

〈시계〉의 첫머리에 나오는 ‘도’는 《도덕경》이 역설하고 있듯이 덕(德)의 본원을 뜻한다.

《주역》의 도체(道體)가 바로 그것이다.

도체는 천지만물에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덕의 근원인 까닭에 머릿속으로만 상상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덕은 생명을 지닌 모든 만물의 생장소멸(生長消滅) 과정에 그대로 투영되는 까닭에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덕의 내용이다.

 

제자백가 모두 도와 덕을 언급하고 있음에도 그 내용만큼은 차이가 크다.

각기 다른 시각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노자는 무위지치, 장자는 무위자연, 공자는 인, 묵자와 맹자는 의, 순자는 예, 한비자는 법, 손무는 무로 보았다.

과연 덕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까?

 

주목할 것은 제자백가 모두 노자의 무위지치를 최상의 통치로 간주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해와 달이 만물을 고루 비추듯이 제왕의 통치가 지극히 공평무사한 것을 말한다.

인위(人爲)를 뜻하는 유위(有爲)가 개입되면 무위지치가 불가능해진다.

노자가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예지 등의 인위적인 덕을 하덕(下德)으로 깎아내린 이유다.

노자가 볼 때 하덕은 치국(治國) 단위에서만 통용될 뿐이다.

덕이 치천하(治天下) 단위에서 통용되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 쳐놓은 국가 단위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마다 다른 ‘유위’의 덕목이 아니라 도의 본체에 가까운 ‘무위’의 덕목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상덕(上德)에 해당하는 ‘무위지치’다.

 

인의예지 등의 인위적인 덕목은 아무리 높은 수준의 윤리도덕을 표방할지라도 역사문화의 전통에 따른 차이를 극복할 길이 없다.

전쟁 당사국 모두 의전(義戰)을 외치는 것이 그렇다.

막강한 힘을 배경으로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기꺼이 승복할 수 있는 공평무사한 중재를 할 수 있어야 지역 단위의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졌을 때 많은 나라가 미국이 진정한 G1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이라크 사태 때는 오히려 전쟁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쇠락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손자병법》이 병도를 역설한 것은 이 때문이다.

완력만 믿고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면 이내 부메랑이 되어 자신을 해치게 된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시계〉의 ‘도’를 ‘부득이용병’과 같은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다.

 

이는 공자가 역설한 인의 개념과 통한다.

《도덕경》은 인의예지를 ‘하덕’으로 깎아내렸지만 인만큼은 하덕의 명단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의미가 크고 넓기 때문이다.

수신제가에서 치국평천하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 이상의 인간이 모여 꾸려가는 모든 공동체의 덕목이 그 속에 다 있다.

인은 남을 내 몸처럼 생각해 배려하는 것을 말한다.

남을 나보다 앞세우며 겸양하는 예양(禮讓)이 그것이다.

노자가 말한 겸하(謙下)의 취지와 일치한다.

남을 내 몸처럼 생각해 배려하는 인은 문덕과 무덕을 하나로 녹인 것이다.

《손자병법》이 말하고자 한 ‘병도’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이처럼 《도덕경》의 도치(道治)와 《논어》의 인치(仁治), 《한비자》의 법치(法治), 《손자병법》의 무치(武治) 모두 같은 곡을 달리 연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맹자와 묵자를 제외한 제자백가 사상이 예외 없이 노자의 ‘무위지치’ 사상 속에 수렴되는 이유다.

치천하 단위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는 도치야말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통치라는 데 모두 합의한 결과다.

인격신에 해당하는 천지(天志)를 신봉한 묵자와 그의 사상적 후계자인 맹자가 인의(仁義)를 이야기하며 도치에 승복하지 않은 것은 무오류의 도그마 때문이다.

묵자와 맹자 모두 의(義)에 방점을 찍고 있다.

유가에서 갈라져 나온 묵자와, 묵자가 창안한 ‘인의’ 개념을 차용한 맹자 모두 공자의 권위를 이용하기 위해 ‘의’ 앞에 접두어로 ‘인’을 사용했을 뿐이다.

정의로 번역되는 ‘의’는 강조하면 할수록 인위적인 구분만 늘어나게 된다.

 

전쟁을 포함해 모든 갈등과 대립은 도그마인 ‘선악’과 그 사촌 격인 윤리도덕의 ‘시비’ 잣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양에서 그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묵자와 맹자다.

공자가 《논어》에서 충서(忠恕)를 역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의 충(忠)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입장(中)에서 정성을 다하는 마음(心), 서(恕)는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은 입장(如)에 서서 배려하고 사양하는 마음(心)을 뜻한다.

 

공자도 《논어》에서 ‘의’를 말하기는 했으나 이는 묵자와 맹자가 말한 ‘정의’가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호리지성(好利之性)에 휘둘리지 않는 절도를 뜻한다.

《손자병법》 〈병세〉에서 군주와 장수의 리더십 덕목으로 절도를 역설한 것과 같다.

최고통수권자인 군주와 일선의 장수가 호리지성에 휘둘릴까 경계했던 것이다.

《손자병법》이 《전쟁론》과 똑같이 전쟁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그 해법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다.

 

순자가 맹자는 공자사상을 왜곡한 속유(俗儒)에 지나지 않는다고 질타하고, 《손자병법》이 송양지인을 비판하고, 《한비자》가 성선설을 통박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공자의 인을 ‘의’의 부속 개념으로 만든 것에 대한 비난이다.

《한비자》가 법치의 궁극적인 이상을 노자의 ‘도치’로 풀이하고, 《손자병법》이 무력을 동원하지 않은 가운데 상대방을 심복하게 만드는 전승(全勝) 개념을 병도로 간주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기가 《오자병법》에서 문덕무비(文德武備)로 적을 미연에 제압하고, 상앙이 《상군서》에서 압도적인 무위로 폭력을 제거하는 이강거강(以彊去彊)을 역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기는 비록 병가로 분류되고 있으나 초나라에서 행한 일련의 변법은 상앙의 변법을 방불케 한다.

상앙 역시 위나라 땅을 공략할 때 병가의 궤도를 방불케 하는 궤사(詭詐)를 구사했다.

오기를 ‘법가적 병가’, 상앙을 ‘병가적 법가’로 분류하는 이유다.

《상군서》는 절반가량이 전쟁 및 군사와 관련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하나의 병서가 될 만하다.

내용도 매우 방대해 《손자병법》의 근 2배에 달한다.

필자가 《손빈병법》의 부록으로 《상앙병법》을 덧붙인 이유다.

 

《전쟁론》과 《전쟁술》

 

병서에 대한 칭송은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일본은 전설적인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가 쓴 《오륜서(五輪書)》를 《손자병법》 못지않게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서구는 전통적으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최고의 병서로 평가하고 있다.

일각에서 《오륜서》와 《전쟁론》을 《손자병법》과 더불어 ‘세계의 3대 병서’로 부른다.

그러나 《오륜서》와 《전쟁론》은 《손자병법》처럼 치도 차원의 병도(兵道)와 전략 차원의 전도(戰道) 및 전술 차원의 쟁도(爭道)를 하나로 꿰어 보지 않는다.

 

《오륜서》의 경우는 나름대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미야모토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전설적인 검객이다.

일본에서는 그를 검성(劍聖)으로 부른다.

그는 장검의 달인 사사키 고지로(佐佐木少次郞)와의 최후의 결투를 끝으로 69회의 무패신화를 남긴 뒤 이내 숨을 거두었다.

사망하기 2년 전인 1643년에 그는 구마모토의 영주 호소카와 다다토시(細川忠利)의 부탁을 받고 운간사라는 절에 머무르면서 《오륜서》를 집필했다.

《오륜서》는 도가사상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노자와 장자를 추종했던 결과다.

《손자병법》이 도가사상과 맥을 같이하는 것과 닮았다.

 

《전쟁론》은 과대평가된 측면이 짙다.

이 책은 저자인 클라우제비츠가 1831년 콜레라에 감염되어 51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부인 마리가 3년 뒤 남편의 유고를 모아 출간한 것으로 미완성 작품이다.

그는 23세에 베를린 군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전투에 참여했다가 나폴레옹 군의 포로가 되어 이듬해인 1807년 말에 귀환할 수 있었다.

1812년 프랑스 군과 싸우기 위해 러시아 군대에 들어갔다가 1814년에 프로이센으로 복귀한 뒤 이듬해에 제3군단 참모장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830년까지 12년 동안 베를린 군사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다.

《전쟁론》 유고는 이때 만들어졌다.

그가 병서를 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여러 군경력을 거친 것이 사실이나 《전쟁론》을 군사전략 및 경영전략의 명저로 손꼽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다.

 

《전쟁론》은 내용도 난삽하고 전쟁 자체를 즐기는 느낌마저 주고 있다.

일례로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이는 비록 인구에 회자하고 있으나 그 내막을 보면 적잖은 문제가 있다.

《손자병법》이 부득이한 상황일 경우 전쟁에 나서는 신전론(愼戰論)을 펼친 것과 대비된다.

《전쟁론》의 전략이론을 경영전략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세계경제 위기의 배경이 된 지난 2008년의 월가 금융위기와 같은 파탄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데 과도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전리품에 혈안이 되어 마구 전쟁을 벌이는 것과 같다.

 

엄밀히 말하면 클라우제비츠 자신은 전략가가 아니다.

실제로 《전쟁론》의 내용 자체가 전투상황별로 기록한 전사 사료에 가깝다.

단락별로 전쟁과 관련한 유명한 명구를 덧붙여놓은 점이 약간 다를 뿐이다.

그럼에도 21세기 현재까지 병서의 고전인 양 과찬하는 것은 아편전쟁 이후 2세기 가까이 서양이 세계사의 중심이 된 사실과 무관치 않다.

《전쟁론》을 칭송하는 군사전문가 가운데 《손자병법》의 병도와 전도 및 쟁도 원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서양에는 전사(戰史)만 있을 뿐 동양에서 말하는 의미의 병서는 없다.

《손자병법》과 같은 ‘병도’ ‘전도’ ‘쟁도’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론》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론은 이른바 ‘무게중심 이론’이다.

이는 전쟁 당사국들의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힘과 움직임의 중심을 의미한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아군의 군사력을 총결집시켜 적의 무게중심을 강타한다는 것이 골자다.

해당 대목이다.

 

“전쟁을 기획할 때 첫 번째 임무는 적의 무게중심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한 후 될 수 있는 한 그것을 단순화시키는 일이다.”

 

이는 외양상 《손자병법》이 전술의 요체로 거론한 ‘집중과 분산’ 이론과 닮았다.

그러나 근본 취지가 다르다.

《손자병법》은 적의 투항(投降)을 염두에 둔 데 반해 《전쟁론》은 적의 섬멸(殲滅)을 겨냥하고 있다.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서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등장했던 독일의 슐리펜 플랜(Schlieffen Plan)을 뛰어난 전략전술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또한 공격과 방어에 대한 전술 지침에 불과하다.

 

호전론에 입각한 《전쟁론》보다는 차라리 나폴레옹의 참모로 참전했던 앙투안 앙리 조미니(Baron de Jomini Henri)의 《전쟁술(The art of War)》이 더 낫다.

《전쟁술》은 《전쟁론》보다 4년 늦게 출간되었다.

조미니는 이 책에서 전쟁의 기본 원리가 시공과 무기체계의 변화를 초월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역설한 전쟁의 기본 원리는 “모든 작전은 결정적인 지점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데 있다”는 주장에 집약되어 있다.

이는 《손자병법》이 역설한 것이기도 하다.

장군의 덕목과 관련해 결단을 역설한 것도 마찬가지다.

《손자병법》을 탐독한 나폴레옹이 그를 전격 발탁한 것도 결코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조미니가 참모로 활약할 때 나폴레옹을 지켜보며 사숙(私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크게 보아 클라우제비츠가 호전론에 입각해 전쟁과 정치의 상호관계를 논한 데 반해 조미니는 용병 자체에 초점을 맞춰 필승의 기본 원리를 찾아냈다.

서양에서 사상 처음으로 병서다운 병서가 나온 것이다.

큰 틀에서 볼 때 서양에서 동양의 역대 병서와 유사한 내용을 담은 책은 《전쟁술》이 유일하다.

동양보다 2,000여 년 늦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