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성의 이완 >ㅡ< 1627년 3월 3일
전쟁 얘기를 좋아하진 않겠지만 오늘은 전쟁 얘기를 해 봐야지.
언제 한 번 <역사 평설 병자호란> 두 권짜리를 읽어 보길 바란다.
사실 이집트에서 피라밋 쌓던 사람들이나 매일 직장에 나갔다가 퇴근하는 우리나 사람들이나 산다는 것 비슷한 것 같아.
그리고 꼭 자식이 자기 못난 점만 닮는 것처럼,
역사 속에서는 멋지고 본받을만한 일도 많지만
어떻게 저렇게 똑같이 한심한가 싶은 일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법이지.
그 중에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한 조선 조정은 더 이상 한심할 수 없어.
각설하고,
1627년 양력으로 3월 3일에 여진족이 세운 나라 후금의 3만 대군은 의주성을 함락시킨다.
이때 의주 부윤은 이완이라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완 대장이라고 불리는 그 사람은 아니야.
그 이완은 동 시대에 살긴 했지만 세대가 다른 사람이고 이 이완 장군은 이미 30년 전 임진왜란 때 이미 역사에 등장하는 사람이야.
1598년 무술년으로 가 보자.
풍신수길이 죽으면서 조선에서 철병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왜군은 차근차근 일본으로 건너간다.
경상도에 있던 왜군들은 별 문제가 안됐지만 문제는 전라도 땅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였어.
바닷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이순신이었거든.
뇌물도 주고 사정도 해 봤지만 이순신은 꿈쩍도 않았지.
진린은 소서행장에 동정적이었고 이미 눈치를 다 맞춘 판이었지만 이순신은 바위 같았어 그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구원을 청한 게 경상도 사천에 주둔해 있던 시마스 요시히로였지.
이순신이 이 시마스 요시히로, 임진왜란 전으로도 후로도 일본군 최고의 용맹을 떨친 시마스 요시히로의 함대와 정면으로 격돌한 게 노량해전이고 이순신의 배에 타고 있었던 게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야.
그는 일찍 죽은 이순신의 형의 아들이었지.
하지만 이순신은 조카들을 잘 거두었다고 해.
수령이 부임할 때 가족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흉이 됐던 시절이었지만 조카들을 데리고 다녔다지.
“형님들이 일찍 돌아가셨는데 조카들이 세상 천지 누구에 의존하란 말이냐.”
이완도 그 기대에 부응했고 이순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지.
그 이후는 우리가 아는 것과 같다.
이순신은 적선을 쳐부수던 도중 총탄을 맞아
“방패로 나를 가려라.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고 죽어갔고 그때 피눈물을 흘리며 방패로 이순신을 가리고 대신 북을 울리며 독전한 게 이완이었대.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 따르면
이완은 배를 지휘하여 명나라 장군 진린을 구해 줬어.
전투가 끝나고 진린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왔을 때에야 이완은 숙부의 죽음을 밝히지.
배 위에 몇 번씩 쓰러지면서 달려오는 진린을 보면서 이완도 그제야 통곡을 했을 거야.
아버지같은 숙부,
태산같은 장군,
비길데 없는 무사의 죽음 앞에서 말이지.
그로부터 수십년 뒤 이완은 중년이 되어 이번에는 압록강변을 지키고 있었어.
의주부윤.
고려 이래 전쟁이 났다 하면 외국 군대가 가장 먼저 들이치는 최전방 고을.
하지만 그는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던 후금보다 더 신경 쓸 일이 있었어.
바로 모문룡이라는 명나라 장수와 그를 따르는 명나라 사람들이었지.
임진왜란 때 피를 흘려준 댓가로 그들은 ‘조선을 다시 만들어 준’ 아버지의 나라 사람들로 자처했지만 그 아버지는 실속도 없고 밖에 나가서는 비리비리한 주제에 가족들 괴롭히는 데에는 도가 튼 악질이었어.
후금군에게는 덤비지도 못하는 주제에 제멋대로 평안도 일대를 휩쓸고 다니면서 물건을 빼앗고 조선 사람을 죽이고 곡식을 싹슬이해 갔지.
각처의 수령방백이 속수무책이던 때 이를 못 참고 행동에 나선 게 이완이었어.
의주성 병사들은 신이 나서 이 빌어먹을 ‘아버지의 나라’ 깡패들을 잡아들였지.
“우리 사람 명나라 장군 모문룡 장군의 부하다 해 이게 무슨 짓인가 해!”
“아가리 닥티구 할 말이 있으문 우리 사또 앞에 가서 하라우.”
이완 앞에서도 이 대국의 깡패들은 큰소리를 높였을 거야.
사또 너 죽으려고 환장했어 해?
이러면서.
그때 이완은 이렇게 호령을 했겠지.
“내가 남쪽 바다에서 구한 명나라 사람들 일렬로 세우면 북경에서 여기까지 줄을 선다. 이 망할 놈들아.”
그리고는 곤장을 친다.
그때 이완은 숙부를 떠올렸을 거야.
남해 바다 고금도에 명나라 수군의 행패가 자심하자
“당신들은 여기 있으시오. 우리는 같이 못살겠소.”
하고 진영을 옮기는 강수를 둬 명나라 사령관 진린이 싹싹 빌게 만들었던.
하지만 이완은 떠날 수도 없었고 옮길 곳도 없었지.
자기 부하가 곤장을 맞은 모문룡은 펄펄 뛰었고 조정에서는 이완을 잘라 버리려다가 변경의 장수를 함부로 바꾸기도 뭐해서 한 등급 벼슬을 깎아 버리는 걸로 대신하지.
1627년 정묘년이 밝자마자 청 태종은 조선 침공을 명하고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그리고 바로 의주성을 들이치지.
어떤 기록에 의하면 이완이 술에 취해서 아무 것도 못했다거나 심지어 술에 취해 불화살을 쏘다가 엉뚱하게 화약에 떨어져 폭사해 죽었다지만 그럴 거 같진 않아.
아무렴 3만 대군이 압록강 밖에 집결하는데 술 퍼마실 사람이 어디 있겠어.
실제로 의주성의 조선군은 열 배 넘는 후금군을 맞아 하루를 버티면서 잘 싸워.
병자호란 때 며칠만에 청나라 기병이 한양 근처에 육박한 걸 볼 때 최전방 요새의 하루는 짧은 시간이 아니지.
이때 의주성을 위기에 빠뜨린 건 청나라 군대가 아니라 조선 사람이었어.
인조 임금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이괄의 난 당시 주모자였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
일가가 쑥밭이 된 뒤 후금으로 도망갔던 그는 철저하게 후금의 앞잡이가 되지.
청나라 특공대를 이끌고 의주성 수문을 통해 성내에 침투해서 불을 지른다.
“의주가 무너지면 안주도 어렵지 않습니다,”
라고 호언장담했던 것처럼.
후금군은 다시 일제히 총공격을 퍼부었고 의주성은 결국 떨어지고 말아.
이완의 최후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듯 말이 많다.
술에 취해 뭐 어쨌다는 말 말고도 최후까지 서문 다락에서 군대를 지휘하다가 청나라 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도 하고 마지막 순간에 화약에 불을 붙여 죽었다고도 하고 청나라군에 사로잡혀 가마솥에 삶겨 죽었다고도 해.
그 어느 쪽이든 이완은 30년 전 자기 품 안에 안겨 죽어간 숙부의 마지막을 떠올렸을 거야.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던.
안하무인으로 자기네 땅을 휩쓸고 자기네 백성을 잡아 죽이는 대국인들에게 누구도 제대로 항거하지 못할 때 그들을 잡아들 볼기짝을 쳤던 강단있는 ‘장군의 조카’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정확히 알리지 않은 채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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