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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by Ajan Master_Choi 2019. 10. 11.

 

 

 

표현의 자유는 어느 선에서 제한되어야 하는가.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를 위한 백신주사의 항체라는 기본을 기억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해를 끼치면서까지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체제에서 100%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그 실천은 시민들의 건전한 양식으로 조절되는 게 좋다.

그래도 논란이 되는 10%는 여론과 논쟁의 용광로에서 부딪쳐야 한다.

이 논쟁의 수준이 높을수록 민주주의의 자양분이 된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사건으로 표현의 자유가 큰 이슈로 떠올랐다.

그 후에도 한국에서 일베, 대북 삐라, 국제영화제, 대통령 비판 전단 등의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문제가 되는가.

표현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 말할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예술의 자유를 모두 연결하는 넓은 권리다.

누구라도 마음속에선 자유로울 수 있다.

독재자 앞에서도 생각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생각의 자유가 사회공동체 내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이 말이나 행동으로 표출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 표현의 자유이다.

이처럼 중요한 표현의 자유를 인권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자.

 

표현의 자유가 늘 논란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인권 중에서도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형식적·절차적 차원과 내용에 대한 평가의 차원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구분된다.

고전적인 표현의 자유에서는 이 둘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어떤 표현의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얼마든지 다르게 내릴 수 있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형식적 차원의 자유는 옹호하자는 것이다.

흔히 인용되는 볼테르의 말은 정확히 이 지점을 겨냥한다.

이런 특성이 표현의 자유와 여타 인권들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예를 들어, 내용상으로나 형식상으로나 반대 논리가 일치하는 노예 문제와, 표현의 자유는 다른 구조를 지녔다.

 

또한 표현의 자유는 평상시에는 별로 거론되지 않다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과 행동이 나왔을 때에 갑자기 주목받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뒤집으면, 표현의 자유는 애당초 현상유지나 사회통념에 도전하는 ‘튀는’ 언어와 행동을 보호하기 위해 생겼다는 뜻이다.

일상적이고 순응적이고 무난한 행동거지는 표현의 자유가 있든 없든 별문제 없이 넘어갈 터이니 말이다.

따라서 비판적이고 파격적이고 도발적이고 과격하다는 이유로 표현 자유를 제한하자는 주장은 모순어법에 빠지기 쉽다.

그렇다고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 보장할 수도 없다.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과, 하면 할수록 좋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예를 들어, 고문받지 않을 권리의 경우, 고문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표현 자유를 ‘허용’하자는 것이지, 모든 표현의 자유를 무조건 ‘권장’한다는 말이 아니다.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도 있다.

이들은 타인을 불쾌하게 할 자유, 심지어 타인으로부터 불쾌함을 당할 자유(freedom to be offended)까지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입장이 바람직한지 혹은 가능한지를 따져 봐야 한다.

예컨대, 테러 후 복간된 샤를리 잡지의 표지에 피 흘리고 죽은 동료들을 풍자하는 그림을 실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샤를리의 기자들이라도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갈 데까지 가는 것이 다 좋은 건 아니고,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

 

표현의 자유가 극히 소중한 권리이긴 하나 몇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표현의 자유는 외견상 ‘보편적’ 권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특정한 맥락과 배경에 많이 의존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들은 수백년 동안 표현의 자유를 당연시하는 독특한 전통을 발전시켰다.

짓궂고 당돌하고 신성모독적인 조롱, 즉 ‘구아유’(gouaille)를 잘 받아넘겨야 세련된 사람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자기들끼리 통하는 전통이 다른 문화권의 역사적 경험과 감성에까지 통한다는 보장은 없다.

빈부격차가 심하거나 사회통합에 문제가 있거나 차별받는 소수집단이 존재하는 곳에선 표현의 자유가 심각한 역효과를 낼 수 있다.

동서독 통합 후 동독인들을 촌뜨기처럼 우스개로 삼은 코미디 프로가 나오곤 했다.

이런 식의 표현 자유가 당사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둘째,

표현의 자유 논리에는 자체모순이 있다.

내용과 상관없이 사람들의 주장을 보호한다고 할 때, 표현의 자유 원칙을 반대하는 주장까지 보호해 주어야 하는가.

네오나치처럼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증오를 퍼붓는 집단에 어떻게 대처해야 옳은가.

이것은 자유주의의 전형적인 딜레마이다.

이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철저하게 일관성을 지키기 어렵고, 이중적이라거나 위선적이라는 비판 앞에 취약하다.

 

셋째,

내용상의 가치판단과 형식상의 자유보장을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다.

볼테르를 온전히 따르려면 일베들의 행동이 아무리 못마땅해도 내 목숨까지 걸고 보호해 주어야 옳다.

그런데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그걸 실천하기는 솔직히 어렵지 않겠는가.

아마 이때 보통 시민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함부로 법적 처벌의 칼을 휘두르지는 말자고 하는 정도일 것이다.

또한 표현 자유에 관한 한, 진보-보수의 진영 논리로 접근할 때 양쪽 모두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다.

표현의 자유는 이념적 가치판단을 적용하기에 적합한 개념이 아니다.

어떤 언행의 내용적 가치는 그것이 인간의 일반적 자유, 공익, 민주주의 원칙, 헌법 가치, 예술의 내적 요구에 부합하느냐, 아니면 무모하고 우둔하고 사려가 부족한 아집이냐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물론 조롱과 풍자를 포함한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누려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권력 없는 사람들이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권리가 아무리 주어져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녹슬기 쉽다.

표현의 자유는 꾸준히 사용해야 하고 사람들이 그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표현의 자유가 갈등을 일으키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평화를 보장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갈등이 있을 때 상대의 신체에 직접 해를 입히지 않고, 말과 비폭력 행동으로만 비판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모든 인권은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두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취지에서 생긴 인권이 분란의 원천이 되는 상황은 역설적이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가 어느 선에서 제한되어야 하는가.

우선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를 위한 백신주사의 항체-그 자체로선 좀 심하다 싶어도 결국 건강을 돕는-라는 기본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해를 끼치면서까지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의 마지막 조항은 어떤 국가, 집단, 개인도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럴 때에도 시민의 공적 이성으로 통제를 할 수 있으면 제일 낫다.

강제조치는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지식인, 여론주도층, 언론이라면,

아니 그 누구라도, 표현 자유의 논쟁에 뛰어들 때엔 첫마디,

첫 줄에서부터 밝혀야 할 점이 있다.

자신의 비판이 어떤 사안의 내용에 대한 규범적 비판인 것인지, 아니면 규범적 비판에 더해 제도적 금지, 검열, 법적 제재와 처벌까지 하자는 주장인지를 정직하게 선언해야 한다.

이 둘을 두리뭉실하게 얼버무리면서 온갖 교묘한 언설로 비난을 퍼부은 다음, 사법당국의 결정을 기다려 보자고 뒤에 숨는 것은 지적 비겁함이자 정치적 교활함의 극치라 할 만하다.

헌법상의 자유 민주주의자를 판별할 때에도 이 질문을 리트머스 테스트처럼 활용하면 좋겠다.

 

비유로써 결론을 내리자.

표현의 자유는 민주체제에서 100퍼센트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그것의 실천은 시민들의 건전한 양식으로 조절되는 것이 좋다.

그래도 논란이 되는 10퍼센트는 여론과 논쟁의 용광로에서 치열하게 부딪쳐야 한다.

이 논쟁의 수준이 높을수록 민주주의의 자양분이 된다.

그래도 안 되면 그중 1퍼센트 정도가 법정으로까지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0.1퍼센트 미만이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 순서가 바뀌면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모두 위협받는다.

결국 문제는 사람이다.

표현의 자유를 전적으로 옹호하면서도 자기절제가 가능한, 수준 높은 시민들이 있어야 표현의 자유가 바벨탑의 비극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