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때의 일이다.
친구 몇몇이 나더러 펑크록 밴드에 가입하라고 꼬드겼다.
한 친구는 리허설에서는 노래를 썩 잘했지만 무대공포증 때문에 정작 관객 앞에는 설 수가 없었다.
나는 정반대였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다른 사람이 비웃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 따위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첫번째 리허설이 끝난 뒤
우리는 우리 음악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둘러 앉아 있었다.
바로 그때 친구팀은 내가 밴드에 합류해서 얼마나 행복한지 말해 주었다.
나는 아직도 그의 말이 내 안에 일으켰던 강한 반응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따뜻한 파동이 나의 아랫배로부터 바깥쪽과 위쪽으로 퍼졌으며 빠른 속도로 윗몸 전체를 감돌았다.
그 느낌은 기쁨의 일종이었지만
그때까지 느껴왔던 그 어떤 기쁨과도 달랐다.
내가 친구들이라고 부르기를 자랑스러워하는 집단에 의해 내가 인정받고 거기에 내가 속해 있으며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고
전혀 새로운 감각에 충격을 받았다.
그 후 그 느낌이 똑같이 반복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때의 느낌을 결코 잊지 못한다.
나만 이런 특정한 감정을 경험한 것은 분명 아니다.
수백만 축구팬들과 종교 신자들은 유사한 감정을 매주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 영어에는
그 당시 느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바로 지금
나는 당시 감정을 묘사하면서
몇 개의 단어를 사용해야 했다.
즉 일종의 기쁨.
인정받았다는 느낌.
소속감.
집단에 의해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
등등 아마도 그때의 감정에 가장 근접한 말은
로맹롤랑의 대양의 느낌(oceanic feeling)이라는 구절일 것이다.
그러나 롤랑의 시적인 표현조차 두 단어를 필요로 한다.
만약 그것이 하나의 단어라면
그 감정을 더 쉽게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일본인들은 그것이 가능한 듯 싶다.
'아마에'라는 단어는
팀의 말을 듣고 내가 느꼈던
다른 사람이 완전히 인정해 주는 데서 느끼는
일종의 편안함을 의미한다.
일본인들이 '아마에'라 읽는 중국의 표의문자는
원래 아기가 빠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나타낸다.
'아마에'가 의미하는 감정은
분리의 상실, 즉 생명이 시작되는 몇달 동안
어머니와 아기를 융합시켰던 하나됨의 느낌으로 돌아가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왜 영어에는
'아마에'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을까?
다양한 언어들이
세계를 표현하는 여러가지 방식에는
각기 다른 문화적 필요성이 반영된다.
일본인들은 '아마에'라는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마에'가 가리키는 감정은
일본 문화의 근본 가치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독립성, 자기주장, 자율을 찬미하는 영어권과 달리
일본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 조화로운 집단속에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에는 사람들이 조화의 가치에 동의하도록 도와주는 감정이다.
영어와 일본어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특정한 차이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것이 영국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영어 사용자인 나에게는
당시 팀의 집에서 느꼈던 감정을 묘사할
정확한 어휘가 없지만
그 때문에 내가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예고없이 찾아온 그 감정 때문에
나는 그 느낌을 묘사할 말을 찾아야 했다.
몇 년이 지나 아마에라는 표현을 읽었을 때
그 자리에서 나는 이 말이
팀의 집에서 그날 저녁 내가 느낀 감정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 세계 사람들이 '아마에'라는 감정을 경험하지만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가진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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