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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삶 이야기

우리는 사랑의 크기만큼 산다

by Ajan Master_Choi 2018. 9. 23.

 

가을이 오면 수확의 기쁨과 더불어 텅 빈 들판을 보면서 무언가 허전하기도 하다.

노랗고 빨갛게 단풍이 들었던 잎새들이 땅바닥을 구를라치면 마음은 더욱 더 우수에 잠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우수.향수.애수 등의 글자에 가을이란 글자를 넣었나 보다.

그 푸르던 잎새들이 모두 땅 바닥을 구르는걸 보면 무언가 인생과 통하는 면이 있기에 그런 것 아닐까?

 

우리는 어느날엔가로 흐르고 흘러 낙옆처럼 구르게 될날이 올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 일지도 모르겠다.

 

세월의 흐름은 참으로 빠르고 빨라 앞으로 줄달음 치기만 한다.

지난해 말 제야의 종소리를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추석이 오고 가을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니 세월이 무상하기도,

속절없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누구든 산다는 것은 일정한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고 그 수명이 다하면 도리없이 떠나야만 한다.

 

어떤분의 말씀대로 사랑의 크기만큼 수명이 주어진다는데

이 지구별 에서는 그저 7~80, 백세 안팎의 세월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왜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야만 할까?

죽고 싶지 않은데 왜 죽어야만 할까?

 

모든게 이기심 때문이다.

나와 남을 가르는 이기심과 분별심 때문이다.

사랑결핍증, 지혜결핍증 환자들 때문이다.

 

모두들 죽음을 싫어하지만 생자필멸이라 했다.

어떤 존재든지 태어난 이상 죽을 수 밖에 없고 자신이 지은 공덕 따라 지혜 따라 자신의 별을 찾아 간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이 죽음을 결정 짓는다는 것은 준엄한 현실이자 진실이다.

 

육지전생사 면 금생수자시 라...

 

전생을 알고자 하면 금생에 받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나의 모든 것이 전생에 지은바 대로라면 내생 역시 금생에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있다.

 

사랑의 크기만큼 수명이 주어진다는데 어떻게?

내 생에 자신 있나?

 

그 사람의 현재의 모습은 지나온 과거의 모습이고 그 사람의 생각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가 보인다고 한다.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 태어날만한 지혜를 닦았기에 이 별에 왔고, 전생에 지은 복업따라 주어진 수명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은 화살과도 같이 빨라 잠깐이 60이고 잠깐이 70이다.

시간이 금이라는 예기처럼 진실로 시간은 소중하고 소중한 것 이어서 참으로 잘 보내야만 한다.

여기서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다면 미래 또한 기대할 게 있을리가 없다.

누구든지 이기심과 욕심따라 살다보니 모든게 고통이요 스트레스인 것이다.

베풀기 싫어하고, 공부하기 싫어하고, 공덕 짓기를 싫어하니 그의 앞날은 가시밭길일 수 밖에 없다.

 

고통은 죄값이라 하듯 인생고해는 모두다 자승자박이요, 자업자득 이요, 자작자수 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 많고 많은 고통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라, 자비로워라라를 가르치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실천하며 사는 분들이 얼마나 계실까?

 

고통이 결국 인생의 동반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왜일까?

우리 모두가 사랑결핍증, 자비결핍증 환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 결과를 피할래야 피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래도 탁월한 인물들의 특징은 그들이 그들에게 닥쳐오는 고통의 탁월한 관리에 있다.

 

자기에게 덮쳐드는 고통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그의 운명이 걸려 있다.

그의 인생이 달려 있다.

 

잘 알려져 있듯 유럽이나 구미각국에서 저 먼 과거로부터 유대인들은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었다.

베니스의 상인 샤일족의 예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멸시와 그로 인해 초래되는 열등감을, 성장을 위한 기회로 활용했다.

그들에게 고통은 고통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통을, 멸시를 싫어하지 말라. 기회로 활용하라"하면서 나아갔다.

지금 IT세계를 유대인들이 주름잡고 4차 산업혁명의 총아로 치부되는 것도 모두 그들 특유의 "고통 극복의 철학"때문 이었다.

 

인간의 삶에서 고통이 사라질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스트레스를 떼어놓고 인생을 예기할 수 있을까?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지만 피할 수 없고 스트레스를 싫어하지만 면할 도리가 없다.

결국 어떻게 하면 고통을 잘 관리하고 이겨낼 수 있는가?

그것이 우리 모두의 숙명적인 과제다.

 

결국 고통을 이겨낼 때마다 우리는 진보하고 성숙해 진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반추해 보자.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을 터득하고 그 같은 습관에 익숙할 때 그 사람은 발전한다.

 

누구나 성불하기 전까지 인간의 삶에서 고통을 떼어놓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결국 고통을 통해 끊임없이 진보하고 성숙해져 가는 비법을 깨달아야 한다.

그 같은 비법을 우리들 모두에게 가르쳐 주신분이 바로 부처다.

4성제 8정도만 하더라도 그렇다.

결국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깨달음을 얻으신 내용도 우리네 중생들의 고통을 제도하려함이 목적이셨다.

 

고통을 잘 이겨내자.

잘 관리하자.

모든 고통도 때가 되면 흘러가고 사라지고 지나간다.

낙옆처럼 말이다.

계절의 흐름처럼 말이다.

 

모두들 즐거운 중추절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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