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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예종의 여자들

by Ajan Master_Choi 2004. 5. 30.

 

ㅡ 제8대 예종(이황)의 여자들 ㅡ

장순왕후 한씨!
안순왕후 한씨!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은 후궁이 없었다.
후궁을 안 좋아해서가 아니라 후궁을 둘 시간이 별로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 세조도 엄마인 정희왕후을 매우 사랑했고,

후궁 하나 있는 근빈 박씨도

신하들의 지극한 충성심(?)에서 할 수 없이 예비대로 맞았을 뿐이다.^^

예종은 여자를 멀리 했다.
이유는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만에

갑자기 고질병인 족병으로 급사를 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지금까지 최단명 왕이 되었다.

그러니 왕비가 무슨 힘을 쓰겠는가?
남편이 비록 맘에 들지 않더라도 고위직에 있으면 부인들이 호가호위 할 수도 있다.

장순왕후, 아쉽다.

장순왕후 한씨!
저 유명한 한명회의 셋째 따님이시다.


권력의 단맛을 본 한명회가 세조의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에게 나이 열 여섯에 시집을 보낸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가 죽으니 당연히 둘째 해양대군이 왕이 되었다.
예종으로...

장순왕후 한씨는 남편 해양대군이 왕이 되기 전에

아들 인성대군(3살 때 졸)을 낳고 산후 후유증으로 1개월 만에 하늘로 갔다.
꽃다운 나이 열아홉에...
그래서 남편이 왕이 되고 나서 왕후로 추존된 것이다.

비록 왕비는 못했지만 이름만이라도...

왜 조선왕조 왕비들이 산후 후유증으로 많이 돌아가셨을까?

답은 명확하다.
일과 운동을 안 해서...^^

생각을 해보라.


왕비라면,
밥을 해..
빨래를 해..
청소를 해..
시장을 가나..
밭을 매나..
담박질을 하나..
봄에 산에 들에 나물을 깨러 가나..
그냥 매일 가만히 놀고 먹었다.


그러니 운동도 부족할 것이고,
먹어도 소화도 잘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허약체질이 될 수밖에...

저 장수왕, 영조를 보라.


엄마 최무수리!
원래 빨래 담당 무수리였다.
그러니 얼마나 튼실했겠는가?
그래서 영조 같은 애를 낳은 것이다.

지금의 여자들의 삶도 왕비와 비슷하다.


밥은 전기밥솥이..
빨래는 세탁기가..
청소는 청소기가..
설거지는 세척기가..
아궁이 불은 보일러가..
돈은 남편이...

현재 세상이 왕비 천지다.
그런데 왕들은 다 어디 가고
지금 천지에 머슴들만 있을까?^^♡

결론은
여자들은 열심히 일을,

아니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건강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장순왕후 한씨!
한명회 이야기를 빼면 앙꼬 없는 찐빵이 된다.

장순왕후에 대해 할 말이 없으니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본다.

한명회!
우선 간신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줄타기를 매우 잘한 광대가 연상되고,

마지막에는 죽어서 부관참시 당하는 것이 생각날 것이다.


희대의 처세의 달인이시다.

한명회(韓明澮), 1415년 11월 26일 칠삭둥이로 태어나서 1487년 11월 28일 73세로 장수했다.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다.

본관은 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장량이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겠지만...^^

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이 되고,

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하였고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조상 빽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

1456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세 번씩이나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다.


그 잔칫날 치는 장막(텐트) 때문에...

달도 차면 기울고,

권세도 시간이 가면 약해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세상 이치다.^^

오가작통법과 면리제(面里制)를 창시한 인물이며,

그가 만든 행정제도인 면리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한말의 불교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은 그의 동생 한명진의 후손이다.

한명회는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두 딸을 삼촌과 조카한테 보내, 조선왕조 유일한 두 왕의 장인어른이 되었다.
참 대단한 분이시다.

그는 모사에 능했으나

그것을 자신의 영달에만 사용하여

이후 조선의 정치에서 벼슬을 사사로이 사고파는 일을 처음으로 행한 자로서

결국은 조선 전체의 국가 시스템을 망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더불어 성종 때 사림의 정계진출 이후 도학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그가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주도한 점이 집중 부각되어

비판과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처세의 달인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정도전과 한명회를 모르면 간첩이다.

그렇게 살아도 한명회는 갔다.
아무것도 못 가지고...

안순왕후 한씨!

예종의 후비다.
한명회의 세째 딸인 장순왕후가 죽자 해양대군의 세자빈으로 들어왔다.
슬하에 제안대군과 현숙공주를 두었다.

억울한 왕비이자 억울한 대비였다.
왜?
남편 예종이 죽었으면

당연히 적장자인 자신의 아들 제안대군(3살)이 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왕비 생활도 예종이 1년 2개월만에 죽자 왕비 끗발도 제대로 못부렸는데,

이제 대비가 되어 수렴청정도 해야 되는데

모두가 저 바닷가의 거품처럼 되어 버렸다.
억울하다!

누구 때문일까?

저 한명회다.
꾀돌이며 권력냄새에 개코를 가진 한명회 때문이었다.

한명회는 알고 있었다.
무릇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임을...


당시는 모택동이가 없었지만

한명회는 권력을 유지하려면 왕과 가깝게 관계를 맺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략적으로 세조와 사돈관계를 맺는다.


해양대군에게 시집간 딸 장순왕후가 죽자, 잔머리(JQ)를 굴린다.
그래서 수렴청정하시던 세조의 본부인 정희왕후에게 잘 보이는 한편,

도원군(덕종)의 미망인인 소혜왕후에게 접근,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에게 막내딸을 시집보낸다.


이렇게 되면 족보가 어떻게 되나?

세째딸 장순왕후(예종비)는 작은 엄마,
막내인 공혜왕후(성종비)는 조카 며느리.
참 거시기 하다.
꼭 콩가루 집안 같다.^^♡

둘이 만나면 <언니와 동생>으로..
공식적으로는 <시조카와 시숙모>로..

매사불여탄탄!
"요렇게 엮어놔야 안심이 되지!"^^♡
한명회는 알았다.
왕실외척이 되어야만

자기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안순왕후(예종비) 한씨!
당근 아들 제안대군이 왕이 되고 자신이 수렴청정해야 하는데...
청천벽력이 떨어진다.

조카인 자을산군, 예종이 급사한 날 바로 왕위에 오른다.
장인 덕을 본 것이다.
참~ 전광석화 같다.
번갯불에 콩볶아 먹는 속도로 말이다.

자을산군(성종)은 1467년(세조 13년) 왕이 되기 2년 전에 한명회의 막내딸과 결혼했다.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후에 인수대비)와

한명회가 정치적으로 야합(?)한 것이다.

이때 이미 예종의 비극은 시작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예종 독살설이 사실이라면...
물론 야사다.

정사에는 독살 근거가 없다.

만약 예종독살설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본다면,

예종 부인 한명회 셋째 딸 장순왕후가 오래 살았다면 예종독살도 없었을 것이다.

한명회는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딸이 죽어버리자 새로운 인물을 물색한다.

그러던 중 정치적 야심이 큰 여성이었으나

당시에는 과부가 되어 한스런 세월을 보내고 있던 소혜왕후 한씨(후에 인수대비 )와 정치적 야합을 해

그녀 아들들 중 더 나이가 어린 둘째 자을산군(성종)과 정략결혼을 시킨다.

그들이 나이가 어린 자을산군을 선택한 이유는?
어린 왕을 즉위시켜야만 정치적 야합을 한 한명회, 정희황후, 인수대비와와 함께

수렴첨정을 통해 권력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한명회 막내딸과 결혼한 자을산군이

예종이 급사하고 바로 그 날 13세의 나이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선 9대 왕 성종이다.

이처럼 예종독살설은 확인된 정설은 아니지만

당시 정치적 여러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한명회 막내 딸 공혜왕후가

성종이 즉위한 지 5년 만에 자식도 없이 죽었다.

때~~~~~~앵 ! !


한명회 땡하고 종칠 시간이 다가온다.

안순왕후(예종비) 한씨!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처럼

한명회가 주연, 정희왕후의 조연으로

왕의 자리는 도원군(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에게 넘어갔다.


자신은 자식을 왕도 못시키고,

힘(수렴청정) 한번 제대로 못하고 왕후로서의 삶을 마쳤다.

그래도 성종이 즉위하자 명의대비가 되어 53세로 잘 살다 가셨다.
속은 좀 쓰렸겠지만... ㅠㅠ

"선한 일을 하면 선하게,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


당대에 아니면 자손대라도...
저 한명회를 보라.
살아 생전에는 두 딸을 잃었다
자신은 비록 73세까지 천수를 누렸지만,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덤이 파헤쳐지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아울러 그의 손자였던 '한경기'라는 인물은

젊은 나이에 '여자를 두려워하는 병'에 걸려서

여성들과 전혀 접촉하지 못하는 바람에

후손을 얻지 못하여 집안이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사육신 등 원한이 많은 혼들이 달라붙어서

그런 경기를 일으킨 모양이다.^^

그러니 우짜야겠는가?

차카게 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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