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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러시아 혁명

by Ajan Master_Choi 2008. 2. 28.
러시아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弔鐘이었다.
러시아는 연합국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사기가 극도로 떨어진 러시아 군대에서는 종종 항명소동이 일어났다.
유럽의 다른 국가와 비교할 때 러시아는 후진국이었다
산업혁명이 제대로 시작도 안 된 상태였다
따라서 방대한 규모의 군대에 물자와 식량을 대줄 체제도 갖춰져 있지 못했다.1861년에 농노는 해방되었으나 농노제도의 뿌리는 깊었다
농민들은 아직도 지주에게 소작료를 물고 있었는데, 소출의 반을 소작료로 뺏기는 것이 보통이었다.
농민들의 3분의 1은 토지가 없었다.
1905년의 혁명은 지속적인 효과를 별로 남기지 못했다.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의 역대황제들이 누리던 권력을 계속 누리고 있었고 ,그가 구성하도록 허락한 국회는 의회정치를 향한 한낱 제스처에 불과했다.1917년쯤에는 러시아 국민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군대는 크게 동요하고 있었으며 식량사정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전국적인 소요의 중심지는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1917년 혁명운동을 지도하기 위해서 두 망명정객, 즉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레온 트로츠키가 돌아온 곳도 페트로그라드였다.
1억 6천만이 넘는 인구를 거느린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싸우기 위해서 1914년 러시아가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에 1,200만 이상의 대군을 큰 어려움 없이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인원을 어떻게 수송하여 효과적인 전투부대로 편성하느냐,러시아의 유치한 산업을 가지고 어떻게 군비와 물자를 공급하여 필요한 식량을 조달하느냐 하는 문제는 니콜라이 2세나 과거지향적인 그의 보좌관들의 머리로 풀기에는 너무 복잡한 문제였다.

서부전선에서 곤경에 몰려 있는 우방 영국과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은 거의 바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선전포고를 하고 불과 몇 달이 못 가서 러시아군은 수세에 몰렸다.
이따금 러시아군은 결사적인 공격을 시도했지만 호를 파고 들어앉은 적 앞에서 번번이 밀려났다.
적은 수적인 열세를 우수한 화력과 전술로 메웠다.

1917년초.
적군은 러시아 서부변경지방을 거의 다 점령하고 러시아 본토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900만 이상의 러시아 장정이 죽거나 부상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의지가 박약하고 명민하지 못한 니콜라이 2세는 아내 알렉산드라에게 쥐여 지냈다.
외모가 당당하고 신앙심이 깊은 황후는 집념처럼 강한 한 가지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혈우병에 걸린 아들,
즉 황태자에게 제국의 완전한 지배권을 고스란히 넘겨 주겠다는 야망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황후는 오래 전부터 괴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라스푸틴은 농민 출신으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언변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주정뱅이에다 추잡하고 음탕한 자칭 聖人이었지만 어린 황태자가 병으로 출혈을 일으킬 때마다 그 고통을 덜어주는 괴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라스푸틴은 완전히 황후를 사로잡고 있었으며 황후를 통해 황제에게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황후의 비호속에 권력을 손에 쥔 라스푸틴은 자기 마음대로 여러 명의 수상과 내무장관을 임명 파면하는 권력을 행사했는데 이는 능력과 인물됨에는 관계 없이 주로 라스푸틴에게 아첨하는 정도에 의해 좌우된 것이고 능력있고 책임있는 인물은 견뎌내지 못하였다.
역사의 격변기에 선 러시아는 유능한 정치에서 멀어짐으로써 국내적으로는 부정과 부패와 가난이 만연하였고 국외적으로는 잇따른 전쟁에서 연전연패의 굴욕을 맛보았으며 무수한 전사, 전상자들의 가족들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1916년 12월 17일 분노한 귀족들에 의해 라스푸틴은 살해되었다.
살해되기 두 달 전 라스푸틴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니콜라이 2세에게 편지를 남겼다.

"나는 내년 1월 1일이 되기 전에 죽을것 같습니다.
만일 나의 형제인 러시아 농민들에게 살해된다면 당신은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옥좌에 앉아서 나라를 통치할 것이며 당신의 아이들도 두려워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수백년 동안 러시아를 통치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귀족들에게 살해된다면, 그들의 손은 나의 피로 젖을 것이며 25년동안 그 피는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러시아를 떠나게 되고 형제가 형제를 죽일 것이며, 그들은 서로를 죽이고 미워할 것입니다.
25년간 러시아에는 귀족이 없을 것입니다. 
ㅡ 중략 ㅡ
만일 나의 죽음을 가져온 사람이 당신과 친척 관계인 사람이라면, 당신의 자녀들과 친척들 모두 2년 후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1917년의 대변란은 자그마한 사건 하나가 발단이 되었다.
그해 겨울동안 페트로그라드의 빈민들은 악화되는 식량난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빵값을 올려 받으려는 것을 안
이 도시의 부녀자들은 정부에 대한 항의데모를 시작했다.
붉은 기를 든 수백 명의 철도 및 공장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부녀자들과 합세하여 거리를 행진하면서 빈민구호와 終戰을 요구했다.
황제의 돌격대인 코사크기병대가 곤봉과 회초리를 휘두르며 군중 속으로 돌진,데모대를 해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사람들의 눈에는 기병대가 전보다는 덜 무자비한 것처럼 보였다.

이튿날인 2월24일.
20만 명의 노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전선에서는 동료들이 무더기로 죽어 가고 후방에서는 국민이 신음하는 참상을 보고 분노한 코사크기병대는 아예 진압하는 시늉마저 하지 않았다
26일 황제에게 충성하는 친위사단의 소부대가 아직도 노도처럼 거리를 메우고 있던 군중에게 마침내 발포한 사실이 밝혀지자 병영에 있던 다른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거리의 군중과 합세했고 이 사태를 저지하려고 나선 장교들은 자기 부하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
황제는 국회해산을 명했으나 평소에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던 의원들도 해산을 거부하고 임시 집행위원회를 구성 도리어 질서회복에 필요한 권한을 요구했다.
그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다시 발족하여 그 지역의 육.해군 사병과 공장노동자들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 소비에트는 곧 국회가 구성한 집행위원회의 라이벌이 되었고 결국은 러시아의 의회정치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었다.
군대들과 함께 전선에 나가 있던 니콜라이 2세에게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가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황제는 곧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월1일 모스크바가 페트로그라드에 동조,
혁명에 가담했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는 모스크바를 진압하기 위해서 정예부대를 급파했다.
그러나 이 부대의 병사들도 탈주하여 그들이 진압해야 할 시민들과 합세했다.
1917년 3월2일 군대로부터 버림을 받고 퇴위 요구에 직면한 니콜라이2세는 심신이 피곤한 나머지 동생에게 양위하고 퇴위했으나 동생은 이튿날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수세기에 걸쳐 러시아를 통치해 온 로마노프왕조는 역사의 그늘 속에 묻혀 버렸다.
황제의 퇴위는 러시아 임시정부 구성의 길을 열어 놓았다.
국회의 지도자들이 임시정부의 각료가 되었다.

형식상의 수반은 온건파 귀족인 리보프공이었으나 정부를 사실상 영도한 것은 온건 사회주의자 알렉산더 케렌스키였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선발된 대표의 한 사람이며 노동자들에게 영향력이 큰 그의 권위에 대적할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일종의 의회민주정치 체제를 확립하려던 케렌스키의 기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부패한 러시아에 갖다 붙인 알량한 구형식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에 관여한 자들이 복잡한 제스처게임에 빠져 권력의 외양을 유지하고 있는 사이에 실제 권력은 소비에트의 손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V.I.레닌으로 알려진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랴노프는 냉혹한 눈을 가진 혁명 좌파의 지식인이었다.
1870년 장학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찌기 좌파운동에 이끌렸다.
레닌의 형제자매들도 급진 정치그룹에 가담했고 특히 그의 형은 알렉산더 3세 암살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했다.
혁명활동으로 두 번 체포되었고 두 번 유형에 처해졌던 레닌은 1900년 러시아를 떠나 망명했다가 1905년 페트로그라드에 돌아와 2년째 머물고 있었다.

1900년대 초기에 이미 레닌이란 이름은 과격파 사이에서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1903년 런던에서 회합한 러시아사회민주당은 레닌의 고집으로 인해 두 파로 분열되었다.
철저히 전투적이었던 레닌은 당을 음모공작 위주로 조직하고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각오가 되어 있는 열성 혁명분자만을 당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동조한 세력이 볼세비키(러시아말로 '다수파'라는 뜻)라고 불리게 되었다.
혁명운동의 대중화를 원했고 노동조합과 긴밀히 제휴하여 공개적인 개혁만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세력은 멘세비키(소수파)라 불리었는데 레닌은 이들을 몹시 경멸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레닌은 중립국인 스위스에 있었다.
거기서 그는 노동자들에게 황제를 타도하라고 종용하는 선동적인 기사를 혁명파 잡지들에 쓰고 있었다.
황제가 정말 타도되자 그는 1917년 4월 3일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다.
열광하는 지지지들에게 둘러 싸인 레닌은 열의에 찬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하고 나서 "전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을 제창했다.

그 이튿날 그는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를 "철저한 제국주의 정부"라고 규정짓고 소비에트공화국을 위해서 그 임시정부를 타도할 것을 요구했다.
정부에 도전하는 것과 정부를 타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에서조차도 볼세비키는 아직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제창한 계획은 전쟁에 지친 군인,굶주린 노동자,가난한 농민들 사이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평화와 빵과 토지"라는 슬로건을 채택함으로써 레닌은 서방의 연합국측과 맺은 조약,방대한 부채,체면 등에 얽매인 임시정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약속을 했다.
1917년에 접어들면서 점차 軍내의 하극상이 심해지고 전선에서 이탈하는 부대가 늘어남에 따라 전황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케렌스키가 남부전선에서 벌인 필사적인 공세는 파국적인 후퇴로 끝나고 말았다.
군대 내부의 사정과 마찬가지로 후방의 도시와 농촌의 사정 역시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는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와 밀가루 공급의 악화에 겹쳐 교통이 두절됨으로써 빵이 금처럼 희귀해졌다.
고용된 농민들이 땅을 가는 넓은 영지에서는 혁명이라는 말은 곧 토지개혁을 의미했다.
임시정부는 토지의 합법적인 재분배를 공약하고는 있었지만 결정적인 조치는 취하려 하지 않았다.
혁명을 외치는 선동자들에 의해 고무된 가난한 농민들은 자기들이 직접 문제해결에 나서기 시작했다.
영주의 저택에 불을 지르고 눈에 띄는 대로 영주인 귀족을 내쫓거나 살해하고 토지를 압수하여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레닌이 이끄는 극소수의 볼세비키당은 새로운 사회변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가장 뛰어난 정치선전의 명수를 발견한다.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일명 레프 트로츠키)은 1879년 남부러시어에서 부유한 유태인 농장경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 농장에서 고용인들의 파업을 조직한 경력이 있었고 레닌과 마찬가지로 제정러시아 경찰에
두 번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사이에 그는 급진파 그룹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로 등장했다.

2월 혁명의 소식을 들었을 때, 트로츠키는 뉴욕에서 러시아 이민의 신문을 편집하고 있었다.
1917년 5월 4일 그는 페트로그라드에 돌아왔다.
트로츠키는 당의 구조와 이론에 관해서 과거에는 레닌과 의견이 팽팽히 맞섰었지만 이제는 레닌과 완전히 정치적인 합의에 도달하여 곧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대표에 선출된 트로츠키는 그 무서운 설득력을 사용하여 임시정부 전복에 나섰다.
그와 레닌이 결속하여 내건 슬로건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였다.
처음에는 이 슬로건은 볼세비키당원들이 지지하기에는 좀 이상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1917년 6월3일부터 6월 24일에 걸쳐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1차 全러시아 소비에트대회에서 볼세비키는 1090석 가운데 겨우 137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처럼 변동이 심한 분위기에서는 오늘의 멘세비키(소수파)가 내일의 볼세비키(다수파)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가두데모의 압력,공장에서의 항의,軍내의 불안 때문에 파벌동지간의 이합집산이 난무했다.
7월 2일 수만 명의 병사들과 수병들이 가두시위에 가담했다
그들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자리잡고 있는 토리드궁으로 쇄도하여 지도자들을 위협했다.
케렌스키정부는 그 폭동을 구실로 트로츠키와 그 밖의 볼세비키지도자들을 체포했다.레닌은 핀란드로 탈출했다.
7월 8일 수상으로 정식 취임한 케린스키는 사회주의 정당내의 급진파와 온간파의 연합을 도모하기 위해서 손을 썼다.
우파를 무마하려고 그는 불법적인 토지 점거를 금지시켰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는 그 본부를 市동부 외곽에 자리한 스몰니학교로 이전시켰다
그때 우파로부터의 일격이 가해졌다
케렌스키는 그 타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8월 28일 러시아군 사령관 라브르 코르닐로프장군은 페트로그라드를 일격에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이 위협에 대해 케렌스키는 현명하지 못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코르닐로프의 정규군과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지급했던 것이다.
쿠데타는 실패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공작원들의 선동으로 코르닐로프 휘하의 장병들이 속속 탈주했다.
케렌스키 자신이 코르닐로프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볼세비키는 그 풍문을 이용하여 새로 무장한 노동자들과 불만에 가득찬 병사들을 선동했다.
페트로그라드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어버렸다.

9월쯤에는 볼세비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다수파로 부상했다
필사적으로 사태수습에 나선 케렌스키는 9월 14일 러시아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핀란드로 탈출했던 레닌은 이러한 사태진전을 낙관적으로 관망하고 있다가 10월 7일 몰래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10월 9일 다수의 과격파 군부대에 대한 市外로의 철수명령이 떨어지자 볼세비키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려고 정부가 이 도시를 독일군에게 그냥 내줄 계획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에 따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의 구성을 승인하고 수도방위의 지휘권과 공장노동자를 무장시켜 적위대를 조직하는 권한을 이 위원회에 위임했다.
그 무렵부터 볼세비키는 케린스키정권을 우습게 보았고 공공연히 반란을 선동했다.
트로츠키는 이 공장에서 저 공장으로 이 병영에서 저 병영으로 뛰어다니며 노동자들과 군인들에게 전투를 하라고 호소했다.
10월 23일 적위대는 총 한 발 쏘지 않고 페트로그라드의 유서깊은 피터-폴 요새를 점령했다.
당시는 이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이로써 볼세비키혁명은 막을 올린 것이었다.
 

10월 24일 밤 11시 레닌은 은신처에서 나와 스몰니학교로 향했다

반란의 진행이 지지부진했고 소비에트내에서의 다수세력확보에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는 이미 시민들에게 봉기하라고 직접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해 놓고 있었다.
무장한 볼세비키의 소집단들이 조심스럽게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저항다운 저항에 부딪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각 기관은 맥없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10월 25일 새벽 6시쯤 중앙전화국,국립은행,재무성,중앙우체국,
중앙역,시내에 있는 발전소들이 모두 볼세비키의 수중에 들어갔다.
거의 총 한 발 쏘지 않고 접수는 진행되었다.
반란의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순양함 '오로라'호가 네바강에 정박했다.
함포들은 모두 冬宮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 곳은 결단력이 없는 케렌스키가 어떤 조치를 취할까 망설이고 있는 곳이었다.
25일 이른 아침 부관 하나가 그가 처해 있는 곤경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정부가 믿을 만한 부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교외에서 정부에 충성을 바칠 군대를 찾아 보려고 정오가 되기 직전 케렌스키는 궁을 떠났으나 지원군을 규합하는데 실패했고 그 길로 망명해 버렸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행한 최초의 공식연설에서 레닌은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국가권력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이양되었다.
노동자,군인,농민의 혁명만세!"어둠이 깔리자 정부에 충성을 바치는 부대들이 동궁 안과 주위에 포진했다.
저녁 9시 35분 순양함 오로라호는 일발의 경고탄 발사에 이어 동궁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다.
대부분의 관리는 즉시 적위대에 투항했다.
그러자 볼세비키들이 동궁으로 돌진해 들어갔고 정부군은 결국 항복했다.

10월 26일 새벽 2시 10분.
임시정부 최후의 각료들이 마침내 정식으로 투항했다.
한편 스몰니에서는 全러시아 소비에트대회가 개막되었다
트로츠키는 국가반역죄를 저질렀다고 볼세비키를 공격하는 反볼세비키파 대의원들의 비난에 욕설과 멸시로 응수했다.
"당신들은 불쌍한 파산자들이오."하고
그는 외쳤다.
"당신들의 역할은 이제 끝났소.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시오"
볼세비키가 좌지우지한 이 대회는 반란의 정당성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레닌을 의장으로, 트로츠키를 외무담당 인민위원으로,레닌의 심복이며 초대 '프라우다'지 편집인인 스탈린을 내무담당 인민위원으로 하는 신정부의 권위를 인정했다.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10월혁명에 뒤이어 찾아온 것은 유혈,결핍,비참,죽음의 파괴적인 물결들이었다.
반란은 페트로그라드로부터 다른 도시들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모스크바에서는 케렌스키파의 사관생도로 구성된 부대가 크레믈린궁을 점령하고 생포한 적위대원들을 학살했다.

10월 29일.
적위대는 포격으로 크레믈린의 두꺼운 벽을 파괴했다.
4일 후 그들은 크레믈린을 강습하므로써 마지막 저항거점을 분쇄했다
국가의 미래는 광대한 농촌지역의 향배에 달려 있었다
볼세비키가 권력을 계속 장악하기 위해서는 농민의 충성을 확보해야 했다
그들의 1차적인 과업은 전쟁을 끝내겠다는 약속을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1918년 3월.레닌은 격렬한 반대의견을 누르고 정부로 하여금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에서 독일이 제시한 가혹한 요구를 받아들이드록 했다.
러시아는 핀란드지방.우크라이나,폴란드에 있던 소련령,에스토니아, 라트비아,리투아니아를 잃었다.
인구의 34%.석탄광의 90%,농경지의 32%를 상실한 셈이었다(러시아는 후일 잃었던 것을 대부분 회복했다)
한편 전국은 파국적인 내란에 휩쓸렸다.

1918년 5월에 코사크의 白군(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군대)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른 백군부대들도 속속 반란에 가담했다.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는 러시아의 중심 도시들만 장악했을 뿐이었고, 지방과 농촌지대에는 로마노프 왕조를 복권시키려는 왕당파 군벌과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도 상당했다. 
때문에 볼세비키 정권이 러시아 전역을 통제하려고 하자, 반볼세비키 진영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내전이 발발한다.
1차대전 중 러시아의 맹방이었던 나라들은 혁명의 전염을 두려워한 나머지 러시아에 해상봉쇄를 가하는 한편,백군에게 무기와 보급품을 대여했고 나중에는 병력을 파견해서 그들을 도왔다.
동쪽에서는 일본이 군대를 파견,시베리아의 전략적인 요충지를 점령했다
서쪽에서는 새로 독립한 폴란드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赤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3년여에 걸쳐 당시 군사위원이었더 레프 트로츠키는 제한된 병력으로 이 새로운 위협에 대처했다.대치할 때마다 막대한 희생을 치루면서도 그는 하나하나 적대세력을 격파했다.
자연의 여신까지 러시아를 파괴하려드는 것 같았다.

1921년의 한발은 특히 심각했다.
赤군과 도시 주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볼세비키(그 무렵에는 공산당이라고 불렀다)는 농민들이 보유하고 있던 얼마 안되는 곡물들을 징발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공산당도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백군을 더 혐오했다.
농민들은 적군이 적어도 자기들의 토지소유권은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을 지지했던 것이다.
1921년말까지 공산주의세력에 대한 대부분의 위협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국민의 시련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레닌의 치하에서 정치적 반대세력을 처치하는 방편으로 테러가 도입되었던 것이다.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 치하에서는 테러가 괴이한 경찰국가를 건설하는 보편적인 수단이 되었다.
러시아혁명 이후의 적백내전
 
러시아혁명 이후의 러시아에서의 내전은 향후 세계정세에 미친 영향도 컸고, 내전양상도 무척 복잡하게 진행되었지만 학교 교과서에는 상세한 서술이 안 되어 있을 겁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라라의 연인이었던 빠샤가 적군의 지역사령관으로 변신해서 우연히 지바고와 만나는 장면이 있죠.
그리고 영화에서 후반부 쪽은 혁명 이후의 내전상황이 배경이고 더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내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의 국제전이었습니다.
적백내전은 상세한 서술을 하려면 상당히 긴데 간단하게 한 편으로 정리했습니다.
일본은 이 적백내전에도 뭐 먹을 거 없나 하고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했습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대부분의 군대는 볼세비키의 휘하에 들어갔지만, 군대에 남아있기보다는 집에 간 병사가 훨씬 많았다.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는 러시아의 중심 도시들만 장악했을 뿐이었고, 지방과 농촌지대에는 로마노프 왕조를 복권시키려는 왕당파 군벌과 볼세비키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도 상당했다.
때문에 볼세비키 정권이 러시아 전역을 통제하려고 하자, 반볼세비키 진영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내전이 발발한다.

볼세비키 정부군(공산당)은 붉은 색을 상징으로 썼으므로 적군(Red Army), 반군은 흰 색을 상징으로 써서 백군(White Army)이라 불렀다.
볼세비키 혁명에 실망한 남 우크라이나에 활동하는 무정부주의 무장단체를 흑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봉기를 녹군,
생태주의 정치세력 반 혁명봉기군이자 녹군의 한 분파들을 청군.
여기에 폴란드, 코사크, 각 지역의 부농들의 사병이나 타타르인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등 종교적 봉기세력과 발트, 캅카스 지역의 민족주의 세력 봉기까지 겹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직들이 적군에 대항했다.
또 1차대전이 끝나기 이전에는 독일군이 계속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했고, 레닌은 한숨 돌리기 위해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트로츠키 등의 반대 속에도 강행했다. 

게다가 연합국 역시 종전을 전후하여 볼세비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독일군과 계속 싸우는 정권을 세울 목적으로 반볼세비키 세력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적백내전 초기에는 중앙 라다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적군에 반기를 들었고 돈 쿠반 지역의 코사크도 반기를 들어 러시아 제국의 편에 섰다.또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맞서 싸웠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적군이 강제로 무장 해제시키려고 들었다가 오히려 역으로 자극시켜 그들이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등의 불리한 전황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협상국(간섭군)은 러시아에 지원했던 장비와 물자, 그리고 협상국 내에 남아있던 러시아 지원용 물자를 백군에게 넘겼다.
이를 통해 백군은 오히려 적군보다 우월한 장비를 보유하게 되어 전투효율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콜챠크의 시베리아 백군은 차차 서쪽으로 점차 모스크바를 향해 오고 있었다.

전황이 워낙 다급한 나머지 적군은 백군이 차르를 되찾고 자신들을 역적으로 선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그 결과 1918년 7월엔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전원 처형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백군은 전차와 항공기를 장비하는 등 적군보다 장비도 좋은 편이었고, 각 부대의 훈련 및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계도 잘 잡힌 편이었다. 
허나, 적군이 가장 몰렸을 때도 모스크바 등지의 주요 도시와 거점은 적군이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으며, 각 거점도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 점은 사방에서 몰려들고는 있지만 각지에 분산돼서 통일된 명령체제가 없는 백군보다 확실하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에 더해 레프 트로츠키가 1918년 6월에 강제 징병을 실시하였다.
그 이전까지 적군의 주축은 혁명의 지지기반이었던 도시 노동자였으나, 이후로는 빈농에 대해서도 강제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징병제에 대한 농민의 반대는 즉결처분으로서 억눌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리수가 발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5백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편성, 물량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고질적인 지휘관 부족 및 군사적 능력 보충을 위해 과거를 묻지 않고 구제국 장교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들 중 볼세비키의 이념에 공감해서 지원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많은 수는 기회주의자거나 잠재적 반역자였다.
실제로 내전 시기에 구 제정 장교들에 의한 적군에의 반란 내지 사보타주 행위는 결코 적지 않았고, 이런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정치장교의 배치는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전투력이 개선되자 전황은 공산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반해 백군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것만 빼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다른 집단의 합이었으며, 심지어 서로 싸우기도 하는 등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원래 백군의 각 부대는 장비도 좋고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제도 확실했지만 각 부대를 통합지휘할 최고사령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게다가 백군은 주로 러시아의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한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었으므로 최전성기에도 25만 이상의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본 일이 없다. 
이래서야 장비가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좋은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니 안 그래도 강한 적군이 더 강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백군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적군은 기왕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깨졌으니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흡수하고 더 나아가서는 독일 등지까지 팽창하려는 야심을 보였고, 이는 조약 체결 때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발트해 국가들은 연합군(소비에트에게 있어서는 간섭군)과 함께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동부 우크라이나 이외에는 영국이 찝쩍거렸던 코카서스 지역만을 다시 점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적군이 패배한 이유는 백군측과는 달리 발트3국이나 폴란드 등은 이미 자체 정부가 수립되었고, 일치단결해서 저항했기 때문에 아직 훈련도나 장비가 그렇게 좋지 않은 적군이 이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연합군 입장에서 보자면 1차 대전에서 다 함께 연합해서 싸우던 와중에 난데없이 혼자 제멋대로 독일하고 화해하더니 조약까지 맺고 전선 이탈해놓고, 이제와서 조약이 잘못 됐다면서 도로 물리려 드는 소련이 밉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이 해군을 파견하거나 일본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에 의해 7만명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러시아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였으나 기나긴 전쟁을 이미 치른 터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엔 어려운 처지였던데다 간섭군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나왔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요량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여하간 1920년까지 백군의 조직적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철수하고 만다.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해 있던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까지 공산군에게 분쇄되었고, 마지막 외부 간섭군이자 블라디보스토크에 장기주둔할 속셈이었던 일본군도 철수했으며, 1924년에는 사할린 북부에서도 철수하면서 러시아의 영토는 소비에트 정권이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 때 몽골(외몽골)이 정식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국가가 되었다.

이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훈은 소련식 기동전에 대한 교리가 정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 때 러시아 내외의 반볼세비키 세력을 제거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첩보 능력이 발달해 냉전 때의 소련의 악명높은 첩보전 능력에 일조하기도 했다. 소비에트 내의 합의적·민주적 분위기가 약화되고, 일사불란한 군대식 관료체제가 대세가 된 것도 이 시기로 여겨진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 적백내전이 볼세비키의 성격을 바꾸었고, 이것이 소련의 관료독재화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반볼세비키 세력들이었던 러시아 귀족들과 기존의 지주층, 러시아 정교 사제들이 해외(주로 유럽)로 쫓겨났다. 이들은 당연히 극도의 반소·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반공정서 형성에 기여했다.
소련은 이때 외국의 침공을 받은 경험이 충격으로 남아 두고두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공을 두려워하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특히 스탈린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적으로 공업화에 집착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 실패와 적백내전의 위기는 트로츠키의 사회주의 혁명 확산론을 좌절시키고, 자국 공업화 및 생존을 주장한 스탈린의 주장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게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불러들였다.
일본은 이 전쟁을 계기로 연해주 일대와 중국 일대에서 자기들의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때까지 일본의 뒤를 봐주던 미국의 반감을 사게 되어 1930년대 미일의 관계는 전쟁만 없을 뿐이지 서로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게 되었고 결국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