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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덕수궁

by Ajan Master_Choi 2004. 5. 30.

서울을 한 번도 구경하지 않은 할머니도 아는 궁궐이 있으니 바로 덕수궁입니다.
덕수궁을 알아서가 아니라 덕수궁 돌담 길이 워낙 유명하여 아는 것이지요.
중구 정동 입구에서 종로구 신문로 1가 를 잇는 이 도로가 정동길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산책길 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함께 걸으면 반드시 헤어 진다는 속설이 있는 이유가 뭘까요?
아마도 예전에 덕수궁을 지나 면 가정 법원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 니다.
암튼 나는 이 덕수궁 돌담길을 참 많이 걸어 보았습니다.
가을에도, 초겨울에도 혼자 걷기에 좋았는데 지금 은 모르겠습니다.
덕수궁의 다른 이름 은 경운궁입니다.
조선 초기, 세조가 홀로 된 며느리 수빈한씨에게 개인 사저로 내어준 별궁이었지요.
이후 자을산 군이 보위에 오르고 장남인 월산대군의 집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덕수궁은 원 래 면적의 3/1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임진왜란때 의주까지 몽진하였다가 환도한 선조는 거의 모든 궁궐이 불타고 파괴된 처참한 광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왜군들의 소행도 있었지만 도성을 버린 임금에게 분노한 백성들의 원한이 그만 큼 처절했던 것입니다.  

결국 선조는 겨우 남아있던 덕수궁으로 들어가 정릉 행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창덕궁의 중건이 다 되기 전에 정릉 행 궁에서 승하한 선조를 뒤이어 등극한 광해군이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내리지요.
인목대비가 그 얼마 후 바로 이 궁에 유폐됩니다.
그 후 인조반정때 또 다시 창덕궁이 전소되어 인조는 이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후 경운궁은 사람이 찾지 않는 폐궁처럼 되었다가 고종의 아관파 천 후 중요한 궁궐이 됩니다.
러시아 공사관과 불과 십여미터 거리였던 경운 궁에 거처를 정한 고종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육로 탈출이 불가능할 경우 도망 갈수 있도록 지하도까지 개설합니다.
일제의 암살 위협에 얼마나 두려워했는지가 느껴져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고종은 좁은 경운궁에서 기거하면서 석조전, 돈덕전, 정관헌 등을 세워 궁을 중수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경운궁의 원래 정전은 즉조전입니다.
고종이 1902년 즉조전 앞에 인정전을 본따서 정면 5간, 측면 4간의 중층의 중화전을 신축한 것도 이 궁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1904년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 여 중화전을 비롯한 목조 전각들이 소실 되고 맙니다.  
이 화재는 일본인들이 고종을 암살하기 위한 방화라는 설이 끈질기게 백성들 사이에 떠돌았습니다.
일제의 눈엔 자신들을 싫어하고 멀리하 는 고종이 눈엣가시였던 겁니다.
덕수궁은 그 이듬해 조선의 궁궐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치욕적인 일을 당하게 됩니 다.  
1905년 11월 7일, 을사늑약이 덕수 궁에서 체결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을사조약이라고 하는데 부디 그 말 만은 해서는 안됩니다.
조약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위임, 조인, 비준의 세 단계 를 거쳐야하고 어떤 무력의 개입도 없어 야 합니다.
제목, 날짜조차 없는 문서가 어찌 조약이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그 후 고종은 러시아, 프랑스, 독일등 세계의 힘있는 정상들에게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친서를 보냅니다.
이 년후 일제는 기어이 고종을 강제 퇴 위시키고 말지요.
유폐되다시피 덕수 궁에 갇혀 지내던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함녕전에서 암살로 여겨지는 죽임 을 당합니다.
이와같이 덕수궁은 조선의 마지막을 그대로 받아 안은 비통한 한이 서리어 있는 궁궐입니다 .    
덕수궁의 정문이 바로 대한문입니다.
궁궐의 문 중에 가장 잘보이는 곳에 자 리잡고 있습니다.
대한문은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된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습니다.
원래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이었습니다.
대한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근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매일 세 번씩 왕궁 수문장 교대식이 치뤄지고 있습니다.
눈이 즐거워지는 교대식을 구경할만합니다.

또 볼만한 건물로는 석조전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정면 54미터,너비 31미 터의  웅장하달 수 있는 이 건물은 한국 에서 가장 오래 된 유럽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입니다 .
콜로리얼 스타일의  이 건물은 영국인 하딩이 설계, 심의석, 사이턴, 오가와, 데이비슨등이 감독하여 1900년 기공.
1909년에 준 공됩니다 .
조선 고유의 건축 양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지만 그 자체로는 볼만 합니다.
그러나 석조전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볼품없습니다.
궁에서 전이라는 이름이 붙을 때는 임금 이나 왕비가 주인일때만 입니다.
그런데 석조전은 말 그대로 돌로 만들었다는 는 뜻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궁궐의 전각에 붙이는 이름으로는 정말 아니올시다.
건축할 당시부터 온 갖 외세의 힘의 각축장이었던 이 석조전 은 그 이후에도 계속 외세와 불가분의 관계가 이어집니다.
2004년 복원 공사를 마치고 현재는 대한제국 역사관으 로 쓰이고 있습니다.

중화전은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 는 전각입니다.
1902년 처음 건축 당 시는 중층이었으나 1904년의 화재로 단층으로 다시 지었지요.
중화전 뒤 쪽 으로 돌아가면 서북쪽으로 석조전이 있 고 그 오른편으로  준명당, 즉조당, 석어당이 나란히 있습니다.
준명당은 고종 이 대신들과 국사를 논하던 곳으로 편전 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즉조당은 덕수 궁의 침전으로 고종의 후비였던 엄비가 1911년 7월 사망할 때까지 기거하던 곳입니다.
그 앞뜰의 괴석들은 1984 년 창경궁에서 옮겨다 놓은 것입니다.
석어당은 중청 건물로 단청이 없는 건물 입니다.
역대 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고 난을 되새기며 선조들을 추모하던 곳이 어서 그런 듯 합니다.
1911년에 지어 진 덕흥전은 내외귀빈이 고종을 알현하 던 곳으로 함녕전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 다.
함녕전은 덕수궁의 침전으로 고종 이 말년의 대부분을 머문 곳입니다.
1897년도에 건축된 이 침전은 보물 82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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