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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당멸망 송건국

by Ajan Master_Choi 2021. 12. 23.
 
▲ 은밀하게 피어난 금단의 사랑, 시아버지 현종과 사랑을 키워가는 양귀비로 뛰어난 연기력을 뽐내고 전국 스타로 부상한 은도.

◆ 당(唐) 멸망 → 5대10국 → 송(宋)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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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8년 당 고조 이연, 태종 이세민의
폐륜으로 시작해, 무측천의 아들 예종의 셋째 아들로 태평공주와의 권력투쟁에서 이긴 현종(이융)이 며느리를 빼앗은 추잡한 당 나라가 초라하게 멸망했다.

763년 안사의 난을 가까스로 진압했다.
사병 모집권한까지 부여하여 강성해진 지방 절도사들을 통제하고자 중앙 정부군을 증강 하려고 많은 돈이 필요하여 가혹한 세금읕 거두어 반란이 이어졌다.
소금 가격이 원가의 30배까지 뛰자 생겨난 소금 밀매업자를 '염적'이라며 엄벌하여 874년 왕선지가 하남에서, 소금 밀매업자 황소는 산동에서 농민군을 모아 봉기했다.
878년 호북에서 왕선지가 전사하자 부하들 이 황소에게 의탁해와 갑자기 세가 커졌다. 
879년 광주를 함락하고 더욱 커진 세력은 880년에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낙양을 점령하고 동관을 공격하자 희종은 사천으로 도망가고 황소는 마침내 장안에 입성하여 황제가 되어 국호를 대제(大齊)라 하고 10년을 통치하다가 당에게 진압됐다.

◆ 한 번 배신한 자는 또 배신한다. ◆
상양을 재상으로, 주전충(주온)을 대장군 으로 임명하고, 당 왕조의 고위 관료와 부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백성에게 나눠 주며 민심을 안정시켰지만, 도망 간 희종을 쫓지 않아 화근이 됐다.
자신의 군사력을 강화하기는 커녕 당의 금군과 번진 세력을 무장 해제 시켰다.

▶ 방심은 금물, 대장군 주전충의 배신
점령한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는 실수는 당 왕조가 반격할 빌미가 됐고, 대장군 주전충이 당에 투항한 보상으로 낙양의 절도사가 되어 황소의 난을 진압한 돌궐족 장군 극용과 북부 지배권 쟁탈전 에서 승리했다.

▶ 배신자 주전충의 업보
투항해 온 반란군의 대장군이 오히려 당을 쥐락펴락 손아귀에 넣어버린 주전충.
20대 황제 소종(888~904)에게 당 수도를 자기가 있는 낙양으로 강제로 옮기게 하고 904년 소종을 시해하고, 소종의 13살짜리 아들 소선제만 남기고 나머지 아들을 모두 죽이고 소선제 21대 애종(904~907)으로 옹립했다가 907년 폐위하고 화북에 후량을 건국하고 황제가 된 5년 후, 하필 큰 아들 에게 죽임 당하고 옥좌를 빼앗겼다.
주전충의 후량(907~923), 이존욱의 후당 (923~937), 석경당의 후진(937~946), 유지원의 후한(947~851), 곽위의 후주 (951~960)는 4년에서 길어야 20년이다.
반딧불처럼 생겼다가 사라진 오대는 후량과 후주만 한족이고 나머지는 돌궐족이다.
한편 강남에서는 10국이 생겨나서 5대 10국의 군웅활거 시대가 시작됐다.
후당의 친위대장 조홍과 부인 두 씨는 광제 광윤 광의 광찬 광미 등의 아들을 낳았으나 맏이 광제와 막내 광찬은 요절했다.
후주 태조 곽위를 따라서 20세부터 전장을 누빈 조광윤은 곽위가 후한을 치고 후주를 세울 때 개국공신으로 군사령관이 되었다.
오대십국 중에서 가장 훌륭한 명군으로 칭송 받는 곽위의 아들 시영(세종) 시대에 금군사령관으로 남당, 후촉, 북한, 요 나라 등을 공격해 영토의 일부를 빼앗았다.
특히 남당의 생사여탈권 같은 소금의 산지를 차지한 것은 대단한 소득이었으나, 세종은 959년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병사하고 겨우 7살 공제(시종훈)가 즉위하자 요 나라와 연합한 북한이 침공해 왔다.
이를 막기 위해 조광윤이 나섰으나 어린 황제를 모시고 연합군과의 싸움에 불안한 군인들은 조광윤을 술에 만취시켜 강제로 옹립하는 ‘진교의 변’을 일으켰다.

제위찬탈을 미화시킨 것이라는 비판은, 전쟁터에 나간 군사령관이 술을 마셨고, 부하들이 황포를 미리 준비하여 입혔다는 점과 개봉으로 회군할 때, 금군 사령관 한통이 필사적으로 막다가 전사해서다.

▲ 술자리에서 병권을 회수한 '배주석병권'
수도에 돌아온 조광윤은 공제를 보호하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건국했고, 공제의 자손들은 남송 멸망 때까지 보호를 받았다.
공제가 16세에 죽자 황제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한 고조 유방처럼 토사구팽하지 않고, 먼저 개국 공신들을 불러서 "형제 같은 너희 덕에 황제에 오른 나는 편한 잠을 못 자고 있다.
너희들은 믿지만 너희 부하들의 부추김이 있다면 나 처럼 흔들릴 것이다.
권력보다는 마음 편하고 부유하게 살거라."라고 하여 다음 날 자진해서 모두 병권을 바치자 고향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배려했다.
후촉(934년~965년)은 사천성을 지배하며 풍부한 경제력으로 문화를 꽃 피웠다. 
맹지상이 죽자 3남 맹창(孟昶)이 제위를 이었다.
천연의 요새라서 외부의 공격이 걱정되지 않아서 군대를 내부의 감시로 돌려 권력을 강화했다.
▲ 부용화
농업, 양잠업을 계속 발전시키고, 문인을 장려했다.
수도 사천 성도 곳곳에 부용화 (芙蓉花)를 심어 부용성으로도 불렸다.
▲ 맹창은 황후 화예부인 서씨(은도)와 함께 꿈처럼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한편 송 태조 조광윤은 당 나라가 절도사에 의해 멸망했기에 가장 먼저 문치주의와 함께 절도사의 힘을 꺾는 일부터 했다.
네모난 얼굴에 큰 귀를 갖고 있어서 사람들이 방면대이(方面大耳)라고 불렀고 술을 좋아했다. 
어느 날 궁중에서 성대한 술잔치가 벌어졌는데, 거나하게 취한 조광윤이 동생 진왕(조광의)에게 술을 자꾸 권했다.
그러자 조광의는 태조가 총애하는 금성부인을 가리키며, 금성부인이 뜰 아래 핀 꽃을 꺾어오면 술을 마시겠다고 했다.
금성부인이 꽃을 꺾으러 뜰 아래로 가자 진왕은 급히 활로 금성부인을 쏘아 죽이고, 엎드려 ‘저를 즉시 처형해도 좋으니, 제발 과음하지 마십시오’라고 상소하니, 이후 일절 술을 마시지 않고 통일 전쟁에 나섰다.
963년 요지인 호북성 형남을 치고, 965년 후촉을 침공하자 맹창은 북한과 손 잡고 대항하다 패해 개봉으로 연행되어 진국공에 봉해 졌으나 그 해 죽고, 태조는 화예부인을 곧바로 후궁으로 들였다.
▲ 中, 국민배우 은도(인타오)가 열연했다.
조광윤의 모친 961년 두 태후가 죽었다.
송 나라는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후촉을 수탈하여 사천 지역 사람은 송 나라에 대해 강한 원한을 품게 되었고, 993년~995년에 대규모 ‘사천균산 반란’을 일으켰다.
970년 북부지역을 거의 통일하고, 971년 광동의 남한을, 975년 화남 최대 세력 남당을 멸망시켰다.
이제 북한과 오월만 남았다.
976년 11월 49세 때, 북벌을 계획하던 중 재위 17년 만에 태조가 갑자기 죽었다.
송사(宋史)에는 ‘그의 죽음은 불가사의 (不可思議)하다’고만 언급되었다.
두 태후가 조광윤으로부터 동생 광의에게 제위를 넘기겠다는 서약을 받아놓았음에도 정통성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고, 암살설로 발전했다.
형수인 효장황후 송씨 장례식은 황후의 예법에 따른 성대하고 엄숙하게 치러지지 않았다.
서산남로 절도사였던 차남 조덕방도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태종은 즉위 초 황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는 관료들을 해직하고 죽이지 않고 유배보낸 것은 ‘사대부와 간언을 하는 자는 처형하지 말라’는 태조의 유지였다.
태조 죽음과 관련하여 각기 다른 몇 가지의 암살설이 전해지고 있다.
태종이 즉위하고 5년이 지난 후에 발견된, 두 태후가 형에게 받아 금궤에 보관한 신조보기(臣趙普記) 라고 서명된 서약서 존재 자체를 몰랐거나 형의 변심이 염려되어 미리 쳤을 수도 있다.
그 중에서 화예부인 서씨가 복수를 위해서 형제가 싸우도록 했다는 것이 유력하다.
2대 태종 조광의는 978년 오월을, 979년 북한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완성했다. 
당 나라가 멸망 후 70년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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