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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섬에 있는 서점

by Ajan Master_Choi 2021. 12. 22.

나는 늘 장편소설을 좋아했다.
사랑은 장편소설이고 인생은 대하소설이라 생각했는데....
인생이 단편집이라고 말하는 책을 만났다.

우리는 딱 장편소설은 아니야.
그가 찾고 있는 비유에 거의 다가간 것 같다.
우리는 딱 단편소설은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의 인생이 그 말과 가장 가까운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단편집이야.
(p301)

이 책은 각 챕터 앞에 서점 주인인 주인공이 추천하는 단편소설이 하나씩 소개되어 있다.
소개되는 작가는 좀 들어본 듯 하지만(로알드 달, 마크 트웨인, J.D. 샐린저, 에드가 앨런 포, 레이먼드 카버 등) 작품은 한 개도 모르겠다.
미국의 문학과 문화를 안다면 아마도 훨씬 더 잘 이해될 책이리라.

다 읽고 나서 곰곰 생각하니 인생은 대하소설이라기 보다 단편집인게 더 좋을 것 같다.
장편소설은 대부분 캐릭터가 잘 변하지 않는다.
인물보다 사건과 이벤트가 주인공일 때가 많다.
전쟁, 가난, 이별, 사고, 죽음, 질병, 재회, 증오, 배신 등등등.
사건 사고가 주인공을 잠식하고 점령한다.
물론 그 과정 중에 주인공의 캐릭터가 긍정적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너무 변하면 오히려 개연성이 떨어진다 느낄 때도 많다. 이러니 소설가도 참 죽을 맛일게다. ㅎ

심지어 장편 소설은 인간의 나약함과 운명에의 굴복과 인생에 대한 체념을 미학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쓰여지는 글인가 싶을 때도 있다.

인생이 단편을 모은 단편집이라면 그 인생을 사는 주인공은 부담이 훨씬 덜 할 것 같다.
각각의 스토리마다 최선을 다하고 산뜻하게 그 사건을 떠나면 된다.
그리고 새 마음과 새 각오로 또 새로운 사건에 임하면 된다.
각 단편마다 주인공이 달라지고 장면도 바뀐다.
내가 꼭 줄기차게 주인공이어야 하는 부담도 없다.
과거가 현재를 무겁게 짓누르고 미래를 향해 등떠밀려 나가는 인과의 고리가 어느 정도 느슨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기회가 훨씬 더 많다고 느껴지지 않을까?

이 책의 이야기를 단편집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아내의 죽음', '도둑 맞은 책', '업둥이', '재혼', '딸의 재능', '발병', '서점 주인의 죽음' 정도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한편으로 인생이 일단락 되고 그럴 때마다 주인공의 인생은 새로이 열린다.

생각해 보면 안 그런 인생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늘 인생의 길목길목에서 한 챕터를 마무리하고 또 한번 성장하며 새로운 스토리를 시작하곤 한다.
질질 늘어지는 장편소설보다 인생이 단편집이라 생각했을 때 더 많은 희망과 가능성과 기대가 우리 앞에 놓여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단편집처럼 내 인생의 한 편을 쿨하게 마무리하고 나는 또 새로운 주인공으로서 새로운 한 편을 시작하면 좋겠다.

우리는 우리가 수집하고, 습득하고, 읽은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여기 있는 한, 그저 사랑이야.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진정 계속 살아남는 거라고 생각해.
(P304)

사실 이 책은 일에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던 시기를 보내고 머리를 식힐 가벼운 책이 필요해 골라 들었었다.
그러나 스토리에 또 미혼모와 업둥이 얘기가 나와서 나는 잊고자 했던 우리나라 무연고 아이들의 현실과 보육원에 관련된 정책, 보육원의 기능 전환, 지지부진한 가정 위탁 발굴 사업, 입양 문화와 절차 등등 잊고 싶었던 현실에 또다시 발목을 잡혔다.
도망갈 수가 없네.. 된장~ㅠ

입양은 입양된 아이 뿐만 아니라 입양한 부모의 삶도 바꿀 수 있다는 걸 이 책은 보여준다.
양육이란 20년의 세월이 걸리는 장편소설 거리지만, 입양이 무거운 대하소설로만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가벼운 단편소설처럼 받아들여지면 좋겠다는 꿈을 꿔본다.
삶을 너무 무겁게만 대하는 태도는 세상을 달라지게 하는데 걸림돌이 될 지도 모른다.

마야, 장편소설도 분명 그 나름대로 매력적이지만, 산문 세계에서 가장 우아한 창조물은 단연 단편이지.
단편을 마스터하면 세상을 마스터하는 거야.
(p297)

내가 그동안 단편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읽고 나서 바로 휘발되어 버리는 그 가벼움에 있었다.
그러나 지난 해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단편집의 매력을 알았다.
하나하나의 단편이 모여 한 줄기 주제로 잘만 흐른다면 각각의 단편이 더 빛을 발할 수도 있고, 쉬이 휘발되지 않고 오래 남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단편의 가치를 몰랐던 이유는 좋은 <단편집>을 읽어보지 못해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