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민간인 총살 명령
일제와 부왜축출, 계급타파, 토지 평등소유의 기치를 내걸고 독립운동을 벌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조선독립사 최고의 별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을 배출한 밀양의 민중은 유독 깨어서 반일 반독재 의지가 강했다.
그만큼 비극은 더 컸다.
한국전쟁 발발 한 달만에 이승만 명에 따라 수많은 밀양 사람들이 굴비처럼 엮여 트럭에 실려 죽음의 계곡에서 최후를 맞았다.
CIC(+헌병대)가 경찰들을 부려서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였다.
보도연맹원들은 밀양경찰서와 송지지서에 구금됐다가 일부는 7월31일, 그 나머지는 19일후 총살되었다.
구금 중 고문으로 죽은 시체들은 낙동강 물에 던져 고기밥을 만들었으니,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한 경우는 그나마 행운(?)이었다.
전문가들은 전국적으로 30만 보도연맹원들 중 20만이 이승만에 살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골로 간' 의열단장 김원봉의 4형제, 5사촌..
약산은 9남 2녀 중 장남이었고, 막내 여동생 김학봉과는 34살 차이가 났다.
동생들 김용봉, 봉기, 덕봉, 구봉 4명, 그리고 사촌 5명은 이승만에 의해 한국전쟁 발발 두달후 청도, 밀양군, 낙동강변, 미전고개에서 집단 학살되었다.
이때 약산의 부친은 연금당한 채 돌아가셨다.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은 밀양읍 나카노공장에 구금되었다가 어린 여학생이라는 이유로 천만다행으로 석방되었다.
세계 최고의 현상금 320억
일제는 독립운동가 김원봉에 천문학적인 액수인 현상금 100만원을 걸었다.
지금 시세로 따지면 320억!!
김원봉에 이어 김구의 현상금은 60만원이었다.
이 액수는 오사마 빈라덴에게 붙은 540억 원의 현상금이 있기 전까지는 세계 최고였다.
의열단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며 '조선의용대'라는 강력한 군사조직을 결성했다.
1941년 좌우 독립운동 진영 힘을 모으기 위해 임정에 합류하며,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되었다.
임정 군무부장으로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부왜강점기=동물의 왕국) 독립운동가의 삶
1946년, 조선공산당·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 등 서울의 공산주의(사회주의) 단체들이 합당해 남조선 노동당을 창당했다.
그런데 약산이 이끌던 민족혁명당은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약산은 자본주의니, 공산주의(사회주의)니 하는 이념보다는 민족과 동포의 삶을 밝게 하는 데 관심이 컸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 관련 혐의로 일제 형사 출신의 악질경찰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는 수치를 겪었다.
미군+부왜 빽을 배후로, 백의사, 김두한 등 정치깡패들은 백주대낮에 독립지사들을 죽여댔다.
여운형을 쏴 죽인 후 약산을 노리고 있었으니 약산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동물의 왕국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겠나?
-김두한 본인의 육성(옛 동아방송 <노변야화> 1969년 10월부터 56회분 녹취·정리)
"김원봉. 대한임시정부 군사부장 있잖아요. 김규식 탈퇴시켰더니 그 다음에 김원봉이 좌우 합작 대표로 나오잖아요. 처치하자 했죠. 30명이 총을 들고 문을 부수면서 들어갔죠. 여자하고 애들, 하녀들을 건너방에다가 이부자리를 뒤집어 씌우고서 소리 내면 죽는다고 하고 안방이랑 벽장까지 싹 다 뒤졌는데 없어요. 그래서 부인한테 이랬거든요. "만약에 좌우 합작에 김규식 박사 대신 들어가면 죽인다. 그거 하나만 일러라. 그리고 일체 좌익에 가담하면 죽인다. 경고한다." 그리고 나와버렸죠. 그리고 김원봉은 좌우 합작을 안 했죠. 그 후에 이북으로 넘어갔어요. 죽인다고 그러는 바람에 이북으로 들고 튀었죠. 죽인다는데 도리가 있나요?"
약산은 김구·김규식 선생의 제안으로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1948년 4월 19일)에 참가했다가 남으로 오지 않고 북에 남은 것으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1947년 경찰들이 들이닥쳐 고등학생이었던 약산의 여동생(김학봉)을 잡아가 종로경찰서에서 모진 심문을 받을 때부터 약산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후 7달을 동물의 왕국(남한)에 숨어 살다가 이듬해 초 월북한 것..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검열상에 올랐지만 1958년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되었다.
즉, 남과 북에서 공히 버림받았다.
빨갱이(?) 김봉철
김원봉의 동생 4명, 사촌 5명이 살해되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미군정포고령2호 위반으로 3천원 벌금형을 받을 정도로 민족지사였던 민족혁명당원이던 동생 김봉철은 다행히 살아남았다.
떼죽음 이후 살아남은 김원봉 친척은 모두 어렵게 살았다.
그래도 김봉철이 한국전쟁 직후 사업을 해서 다른 가족들을 도왔다.
제2공화국 때 도의원도 지냈다.
4.19로 '미군+부왜' 꼬붕 이씨가 쫓겨나자 보도연맹에 대한 진상조사가 국회 차원에서 시작되고 유족들이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김봉철은 형제들이 몰살당한 계곡을 포함한 밀양과 청도 학살지에서 513구의 시신을 수습해 유족 200명, 읍민 500여 명과 함께 합동위령제를 거행했다.
피학살자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경남유족회 간부를 맡고 사회봉사를 이어간 것은 쿠데타범 다카키가 보기엔 범죄였다.
다카키 쿠데타 이틀 후 밀양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연행되고 '혁명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10년으로 감형, 1965년 석방)
형제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인간의 기본행위조차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약산의 가족을 챙기던 봉철이 빨갱이로 잡혀 들어가고 나서는 모두 숨어 살다시피 했다.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생전에 형들의 명예회복을 보지 못하고, 쿠데타 이후 겪은 자신의 고초에 대해 국가의 사과도 받지 못한 채 1986년 사망했다.
2010년 재심 무죄 및 손배소 승소했다.
재판 과정에서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던 외삼촌의 혁명재판소 기록을 발견했는데 당시 국가재건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다카키 마사오가 직접 서명 날인했음이 확인됐다.
명예회복이 되었다고 해서 6.25 때 죽은 형들이 살아 올 수는 없다.
또 남과 북에서 버림받고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한 김원봉의 역사적 복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막내 여동생 김학봉
"김한근이 어디 있어?"
"몰라요."
"집안 샅샅이 뒤져!"
밀양경찰서 사찰과 형사들은 이 잡듯이 집안을 뒤졌다.
옷장과 다락을 살펴본 형사는 쇠꼬챙이로 천장을 쑤셔보고, 헛간에 쌓인 거름을 쇠스랑으로 쑤셨다.
변소(화장실) 발 디딤대를 걷어낸 후 똥바가지로 휘휘 저었다.
그렇게 해도 김한근이 없자 경찰들은 김한근의 형 김영근(가명)을 연행해 갔다.
사실 김한근은 집에 있었다.
그는 거름덩이에 숨어 있다가 경찰이 쑤신 쇠스랑에 머리가 찍혔다.
그때 비명을 질렀다면 영락없이 저승사자에게 끌려갈 상황이라 꾹 참았던 것이다.
6.25 후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시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낙동강으로 가던 중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게 두 번이었는데, 집 헛간의 거름덩이에 숨어 있다가 쇠스랑에 찔리면서도 살아난 것이다.
동생 대신 경찰에 연행된 김영근은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가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같은 시각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인 경남여고 2학년 김학봉은 밀양읍 나카노공장에 구금되어 있었다가 어린 여학생이라는 이유로 천만다행으로 석방되었다.
저승 문턱에서 멈춰선 것.
그리고 염라대왕한테 세 번이나 갔다 온 김한근과 결혼했다.
약산 가족을 부양하던 김봉철이 쿠데타범 다카키에 의해 투옥되자 김학봉 부부의 삶도 파탄이 났다.
김태영(당시 7세)을 포함한 세 아들은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김태영은 6년을 그곳에서 지내며 사실상 노예의 삶을 연명했다.
LA에서 터를 잡고 경영학 박사학위까지 따고 오랫동안 여성의류사업을 한 김태영은 2000년부터 약산장학회를 설립해 운영하며 미국과 국내를 오가고 있다.
봉철의 모친 김학봉은 2001년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한 적이 있고, 2005년에는 국가보훈처에 서훈 신청을 했었다.
모두 좌절됐다.
오라비 약산의 묘소는 애국열사릉에 없고, 다른 곳에 잘 모셔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
일제강점기 동포를 일제의 총알받이로, 성노예로 만든 부왜세력은 아직까지 건재하다.
부왜세력을 비호하며 독재의 칼날을 휘둘렀던 이승만과 그 후계세력은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있는 반면, 일제에 항거해 누구보다 처절하게 싸웠던 약산은 잊혔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굴레는 김태영을 평생 옥죄었다.
사촌형제 한 명은 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최종 불합격되었다.
김태영이 김원봉 이야기하는 것이 마냥 기쁨이 될 날은 언제일까.
고문하다 사람이 죽으면 낙동강 고기밥으로 던졌다의열단장 김원봉의 4형제와 막내 여동생 김학봉의 이야기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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