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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장어집 이야기

by Ajan Master_Choi 2010. 3. 19.

남루한 차림의 대여섯살쯤 되는 녀석이 풍천가에 쪼그리고 앉아 선운사에서 떠내려오는 단풍잎을 하나씩 고사리손으로 건져 올려 양지바른 바위에 착착 붙였다.

그때 개울가 모래 둔덕을 넘어온 열두서너살 먹은 소년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소맷자락 속에서 무엇인가 꺼내 단풍잎을 줍는 아이에게 주자 한점을 입에 쏙 넣었다.

"형아도 먹어라.”

바로 그 순간, 두눈을 부릅뜬 영감님이 둔덕 위로 불쑥 솟아나

 

“야, 이놈!”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선 더 어린 아이의 손바닥을 발로 차자 몇점 음식이 노을진 하늘로 치솟더니 풍천 물살 위로 떨어졌다.

“나으리, 그건 손님들이 먹다 남기고 간 겁니다요.”

형제는 부둥켜안고 울고, 나으리는 뒷짐을 진 채 씩씩거리며 둔덕을 넘어갔다.

늦가을 짧은 해가 떨어지고 서산은 단풍잎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한 무리의 보부상들이 풍천장어집에 들어서자 돈통을 차고 앉았던 주인 영감이 눈웃음을 치며 목을 길게 빼 인사했다.

동시에 화덕에 숯불을 붙이는 아이들, 장어를 접시에 담는 아녀자들, 상차림을 하는 사람들로 들썩거렸다.

“바쁜데 만득이 놈은 어디 갔어?”

주인 영감의 고함에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그 시각, 조실부모한 어린 형제 만득이·천득이가 살던 움막이 불길에 휩싸여 풍천도 붉게 춤을 췄다.
그날 이후로 풍천장어집에서 일하던 열두살 만득이와 그의 코흘리개 동생 여섯살 천득이는 풍천에서 사라졌다.

풍천장어집은 여전히 문전성시다.
고창은 전주 필방을 진 보부상들이 무안·목포로 가는 길목이요, 곰소에서 광주·순천으로 가는 새우젓 길목이요, 담양 죽세공품이 뱃길로 가는 길목이라 보부상들이 항상 들끓었다.

그들의 재산은 두말할 것도 없이 튼튼한 다리.
다른 생선에서 찾을 수 없는 단단한 육질의 장어가 그들의 다리에 힘을 넣는다고 믿었다.
게다가 보부상들은 주머니가 넉넉해 장어값에 연연하지 않았다.

팽영감의 풍천장어집은 독점이다.
풍천가에 다른 장어집이 들어서면 수하의 왈패들을 시켜 갖은 방법으로 장사를 훼방 놓았다.
장어잡이 어부 역시 그 집에 장어를 팔았다가는 왈패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풍천장어집과는 거래가 끊겼다.

장어잡이 어부들에게 값을 후려쳐 싸게 사서 보부상들 에게 비싸게 파니 팽영감은 천석꾼 부자가 되었다.

5년이 지난 어느 날, 보부상들이 풍천장어집에 몰려왔는데 그 속에 만득이와 천득이가 끼어 있는 것이다.

열일곱 만득이는 어깨가 떡 벌어진 청년이 되었고, 열한살 천득이는 조그만 봇짐을 지고 왔다.
나이 지긋한 보부상 단장은 만득이·천득이를 무척 귀여워했다.

이튿날 보부상 무리가 떠나갔지만 만득이와 천득이는 따라가지 않았다.
그들은 고창에 머물며 한갓진 곳에 커다란 집을 샀으며, 그 집에 딸린 논을 인부 여럿을 동원해 큼지막한
연못으로 팠다.
얼마 뒤 그 큰 기와집에 ‘선운장어’ 간판이 섰다.

팽영감이 고창 왈패를 모았다.
왈패 다섯명에게 술과 함께 장어를 구워 먹이고 돈 열냥씩을 찔러준 후 선운장어집에 가서 깽판을 치라고 일렀다.
하지만 모두 받은 돈을 마루에 던져놓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쳐 도망갔다.

선운장어집에 손님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보부상뿐 아니라 고창, 곰소, 격포에서도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장어잡이 어부들도 좋은 값을 쳐주는 만득이네 선운장어집으로 몰려왔다.
그곳에선 잡아온 장어를 바로 구워내지 않고 논을 파낸 연못에 일단 넣어 기르다가 그걸 잡아서 구워냈다.

 

“선운장어집 장어 육질이 훨씬 단단하다”

 

는 입소문이 물결처럼 퍼졌다.
팽영감이 사람을 시켜 선운장어집에서 장어를 사와 먹어봤다.

정말 육질이 단단했고 제집 장어는 고등어살처럼 힘이 없었다.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오직 만득이와 천득이 형제뿐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가물치 다섯마리를 연못에 풀어 장어들이 가물치에게 잡아 먹힐까봐 바닥뻘로 들어가 도망치느라 육질이 단단해진 것이다.

만득이네는 손님이 들끓고, 팽영감네는 문지방에 거미줄을 쳤다.

천득이 가슴 속엔 아직도 팽영감에 대한 원한이 부글부글 끓었다.
만득이가 조용히 타일렀다.

“우리에게 팽영감은 가물치야. 팽영감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도 움막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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