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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조선시대 기생 김향화

by Ajan Master_Choi 2010. 3. 17.

화성행궁 봉수당은 전통의 묵살을 명목으로 자혜의원을 세우고 기생들의 위생 검사를 시행하고 있었다.

1919년 3월29일 창기 취급하던 일제의 치욕스러운 위생 검사에 부당함과 불쾌함을 느낀 수원 지역의 기생들은 일제히 자혜의원 앞으로 모였고 일본 경찰과 수비대가 총칼을 겨누는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결국 김향화는 만세 운동을 벌인 주동자로 체포돼 2개월간 고문을 받았고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으로 넘겨져 공판에 회부된 뒤 그해 5월27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세평 남짓의 작은 옥사 안에서 일제에 당당히 맞선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라는 뜨거운 이야기 1920년 3월 1일에 만세운동 1주년을 기념하며 ‘여옥사 8호실’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 역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이다.
당시 8호실 감옥에는 유관순 이외에도 수원에서 30여 명의 기생을 데리고 시위를 주도했던 기생 김향화, 다방 직원이었던 이옥이, 유관순의 이화학당 선배 권애라,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다 아들을 잃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만석모, 아이를 가진 수감인으로 갖은 고생 속에서도 아이를 키워낸 임명애 등 우리가 반드시 함께 기억해야 할 다양한 인물들이 존재했다.

일설에 따르면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과 같이 수감됐다고 전해졌으며

10월27일 가출옥돼 수원으로 돌아온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수원시는 이동근 학예사가 연구한 수원 기생의 만세운동 자료를 바탕으로

2008년 국가보훈처에서 김향화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했고 정부는 2009년 김향화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조선시대 기생에 수는 대략 3만 명에 달했는데 이들 중 김향화는 노래와 가곡뿐 아니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에 능했고 검무와 승무, 궁중무용, 서양악기였던 양금까지 다루면서 수원 지역의 으뜸가는 기생으로 기록돼 있다.

김향화의 본명은 김순이로 1897년 한성부(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 나이에 결혼 후 어떠한 이유였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혼을 하게 됐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기생이돼 수원 기생조합에 들어갔다고 한다.

22세가 되던 해 김향화는 수원 지역에서 제일 가는 예기로 성장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돌아가시면서 나라를 잃었다는 슬픔에 수원예기조합 기생 33명은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고 망곡제(望哭祭)를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조선에는 라디오도 보급이 잘 안되 있었으며 일본 왕이 항복한다는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8월 15일 당시에는 거리가 조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나운서들이 지속적인 해설 방송을 통해 계속해서 조국의 해방 사실을 알렸고 그 다음날인 8월 16일 부터 사람들은 거리에 나와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많은 분들이 광복절 이후 일본군은 모두 한국 땅에서 쫒겨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일정기간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상태로 조선을 장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조선 총독부는 48년까지 건군준비위원회 치안권 등의 다양한 협의를 진행하고 이간질 하면서 조선인들을 위협했다.
하지만 맥아더가 미국 군대 외에는 누구도 권한을 이양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9월 9일부터 일본군 무장해제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해방했지만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태극기 게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에서 설명한 것 처럼 미군이 개입하기 전까지 일본군과 조선총독부는 치안권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산에 태극기를 다는 것으로 만족해야만했다.

1945년 우리의 주권을 찾았지만 9월 9일까지는 총독부 건물에 일장기가 게양되 있었으며 그 이후 1948년까지는 성조기가 걸려있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상공인을 천대해 상공업 발전이 없는 가난한 나라였다.

구한말 왕까지 나서 매관매직할 정도로 부패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국력의 뒷받침 없는 작은 군대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었다.

2009년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 부속건물인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서울 진관사 태극기'는 1919년 3.1 만세운동 시기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극기 자체도 불에 타 손상되고 구멍이 난 흔적이 있어 만세운동 당시 현장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학계가 이 태극기를 숨긴 것으로 추정하는 인물은 진관사 승려였던 백초월이다.

백초월은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만주지역 독립군 부대를 돕는 등 불교계 독립운동을 총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진관사 태극기와 백초월의 행적을 미루어 볼 때, 불교 사찰이 독립운동 배후 거점지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태극기 자체로도 의미가 크다.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려 항일운동 상징성이 큰 데다, 태극과 4괘를 우주 만물의 기본 요소를 의미하는 기존 견해와 달리 '자유와 평등'의 근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했기 때문이다.

 

"매우사 신부에게 부탁하오. 당신은 우리의 광복 운동을 성심으로 돕는 터이니 이번 행차의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 이 의구(義句·올바른 글)의 말을 전하여 주시오. 지국(止國·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인력.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말세(强弩末勢·힘을 가진 세상의 나쁜 무리)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1941년 3월 16일 충칭에서 김구 드림"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1941년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를 적어 벨기에 출신 매우사(본명 샤를 메우스) 신부에게 준 것이다.
김구는 선교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려던 매우사 신부에게 태극기를 건네며 미국에서 우리 동포를 만나면 자신이 쓴 글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198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해당 태극기는 제작시기와 전래 경위가 정확한 데다, 1942년 임시정부가 태극기 제작규정을 통일하기 직전에 만들어져 태극기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김구 선생의 친필 143자가 쓰여있어 역사적 가치도 크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립 운동가의 음식:
안중근 선생의 꿔바로우. 
꿔바로우는 요즘 중식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음식이다.

흔히 먹는 탕수육과 달리, 꿔바로우는 돼지고기에 입히는 튀김옷을 전분 대신 찹쌀가루를 써 ‘찹쌀탕수육’이라고 불린다.
두 번 튀겨 바삭바삭한 식감을 살린 뒤 새콤달콤함 소스에 부어 먹으면 꿔바로우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꿔바로우는 안중근 선생이 의거를 계획하며 먹은 요리로 최근에 다시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건해 선생의 납작 두부볶음:
당시 중국어를 하지 못한 오건해 선생은 재료를 사러 나가는 게 눈에 띄고 쉽지 않아 직접 콩을 재배했다고 한다.

두부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채소로 요리한 게 바로 납작 두부 볶음면인데, 엷게 썰어 건조시킨 두부를 야채와 함께 볶으면 완성된다.

쫄깃한 식감에 고소한 향으로, 당시 사진을 보면 꽃빵도 곁들여져 있다.

이 밖에도 오건해 선생은 홍샤오로우도 즐겨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간장으로 조린 돼지고기 요리다.

지복영 선생의 총유병:
여성 동포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강조한 지복영 선생은 평소 중국식 파전병 총유병을 즐겨 드셨다고 한다.
대만 길거리 음식으로 알려진 파전병은 밀가루 반죽 안에 참기름과 쪽파 등을 넣고 구운 음식이다.
지복영 선생이 만든 총유병은 움파를 넣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움파에는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면역력을 높여주고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등의 효능이 있다.

이 밖에도 김용환 선생이 의용대를 대접할 때 내놨다는 양미리 더덕 고추장구이, 그리고 서영해 선생의 해산물 스튜와 밀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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