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가을이 무르익은 어느 날 밤이었다.
소지왕은 잠을 뒤척이고 있었다.
얼마 전, 민심을 살피고자 날이군(捺已郡, 영주)에 행차 갔을 때 만난 벽화 때문이었다.
날이군의 세력가인 파로는 소지왕이 경주에서 오지인 날이군까지 온 것을 알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힌 자신의 딸 벽화를 수레에 태운 후 색깔 있는 명주로 덮어서 소지왕에게 바쳤다.
왕은 음식을 보낸 것으로 생각하고 열어보았는데 어린 소녀였으므로 이상하게 생각해 받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벽화는 소지왕의 뇌리에서 맴돌며 떠날 줄 몰랐다.
소지왕은 왕궁으로 돌아온 후에도 벽화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려 매일 밤을 뒤척여야 했다.
벽화에 대한 그리움을 가누지 못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릴 지경에 이른 왕은 급기야 중대한 결정을 했다.
"비밀리에 아무도 모르게 벽화를 만나고 오자."
왕은 수행관리 몇 사람만을 데리고 일반 백성으로 위장해 날이군에 갔다.
파로는 왕을 맞이해 자신의 딸 벽화로 하여금 수청을 들게 했다.
소지왕은 그 후로도 두세 차례 몰래 벽화를 만나기 위해 날이군을 다녀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왕은 여느 때처럼 벽화를 보고자 날이군에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여정이 너무 길어 고타군(古陀郡, 안동)을 지날 즈음 해가 지고 말았다.
왕 일행은 어느 할머니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은 문득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이에 할머니에게 물었다.
"요즈음 나라 사람들은 왕을 어떤 임금으로 생각하는가?"
할머니가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은 왕을 성인으로 여기지만 저는 그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듣자 하니 왕이 날이의 여자에 반해 관계를 맺으러 백성의 옷차림을 한 채 온다 합니다. 무릇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붙잡히는 법입니다. 지금 왕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구인들 성인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소지왕은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할머니의 솔직한 말에 왕으로서 자신의 행실이 한없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러나 벽화에 대한 그리움까지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이에 소지왕은 벽화를 경주 왕궁의 별실로 데려왔다.
이젠 매일 밤 벽화와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지왕과 벽화 사이에는 어느덧 아들 하나가 생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둘 사이의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소지왕이 그해 겨울 11월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돌아온 사랑 소지왕이 왕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내세우지 않고 한 여인을 사모하는 마음은 지극히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소지왕과 벽화의 사랑은 해피엔딩에서 갑자기 반전되어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어렵게 아들까지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지왕이 갑자기 죽고 만 것이다.
그의 아들과 벽화의 행방은 전해지지도 않는다.
소지왕의 보호 없는 이들 모자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지 않았을까?
소지왕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울 뿐만 아니라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마치 반대세력에 제거된 후 진실이은폐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소지왕이 죽은 후 왕위 계승 서열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방계 지증(500~514)에게 왕위가 넘어간 사실은 이러한 심증이 막연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더 이상 소지왕과 벽화의 사랑을 단순히 두 사람만의 슬픈 '러브스토리'로 넘겨버릴 수는 없다.
그 속에 숨어 있는 신라 왕실 내의 권력다툼과 당시 신라를 둘러싼 고구려·백제와의 국제관계를 추적해보도록 하자.
어떤 이는 소지왕이 벽화와 사랑에 빠진 나머지 정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식으로 소지왕의 죽음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고타군 할머니의 충고를 감안하더라도 소지왕이 임금으로서 정사를 소홀히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실제 소지왕은 즉위 후 적어도 재위 22년(500), 벽화를 만나기 이전까지 흠잡을 데 없는 정치를 해왔다.
소지왕이 재위했던 5세기 말은 바야흐로 '격변의 시기' 였다.
대내적으로 소지왕의 할아버지였던 눌지왕(417~458)이 석씨세력을 물리친 후 다지기 시작한 김씨 왕실의 세습을 이어가야 했고, 대외적으로는 정복군주 장수왕(413~491)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침입을 막아야 했다.
소지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의 집중공격을 받았던 까닭은 변화된 대고구려관계에서 초래된 것인데, 그 연원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400년 고구려는 왜의 침입을 받은 신라가 지원병을 요청해오자 5만의 군사를 파견해 구원해주었고, 그 후 수십 년간 신라를 보살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눌지왕은 자신들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배신해버렸다.
눌지왕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고구려 군사의 도움으로 정적 실성왕(402~417)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언제까지 고구려의 꼭두각시 노릇만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눌지왕은 재위 9년(425) 박제상을 보내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동생 복호를 귀환시켰고, 17년(433)에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을 통해 백제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등 신라 내의 고구려세력을 배제시키려고 노력했다.
고구려로서는 백제를 제압하는 데 주력해야 했던 시기에 속국이나 다름없었던 신라의 이탈과 백제와의 세력 연맹은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법하다.
이에 고구려는 449년 중원(충주)에서 양국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는 의식을 치르고 비문 (중원고구려비)을 세워 신라를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불과 얼마 후 경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사 100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454년부터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양국은 돌이킬 수 없는 대립관계로 들어섰다.
고구려 장수왕으로서는 배은망덕한 신라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신라에 앞서 백제의 정벌이 더 중요한 과제였다.
이에 장수왕은 475년 백제 한성을 총공격해 개로왕을 처단함으로써 이른바 '백제 한성시대'를 종식시키기에 이른다.
신라가 구원병을 파견했지만 한 발 늦었다.
백제 문주왕은 급히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
백제를 제압한 고구려는 본격적인 신라 정벌을 계획했다.
소지왕이 즉위한 479년은 대고구려관계에 있어 신라가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때였던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고구려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장수왕이 신라를 집중 공략한다면, 아무리 백제와 손잡고 있다 하더라도 신라는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소지왕에게 믿는 구석은 있었다.
아버지 자비왕(458~479)이 고구려가 백제와의 전쟁에 주력하는 틈을 이용해 대고구려 군사요충지에 튼튼한 성을 쌓아두었기 때문이다.
자비왕은 소백산맥을 천연 방어망으로 삼아, 그중 대고구려 교통로였던 추풍령·계립령·죽령·동해안 일대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아두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파상적인 공격은 신라의 목을 점점 죄어왔다.
특히 소지왕 3년(481) 고구려·말갈 연합군은 호명성 등 7성을 빼앗고 미질부(흥해)까지 진격해왔다.
수도 경주를 빼앗길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백제와 가야의 구원병이 급히 출동해, 방어한 후 물러가는 고구려군을 니하(강릉)까지 쫓아가 격퇴했다.
고구려는 이후에도 신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그러나 소지왕의 적절한 전술 운용과 나제동맹군의 활약에 번번히 패하고 말았다.
곧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은 신라 소지왕으로 인해 좌절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소지왕은 대외적 위기상황 속에서 대내적인 체제정비와 왕권강화의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재위 9년(487) 봄 2월에는 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을(奈乙)에 신궁을 설치했고, 3월에는 사방에 우편역을 설치하는가 하면, 담당 관청에 명해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했다.
또한 재위 12년(490)에는 경주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재화가 원활히 유통되도록 했다.
소지왕은 신궁 설치를 통해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김씨족을 중심으로 하되, 동시에 박씨족을 회유·포섭하고자 했다.
대고구려 긴장관계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에 정치세력 간의 갈등을 조장하기보다는 통합과 안정을 추구한 것이다.
동시에 우편역 설치와 관도를 수리함으로써 대고구려 전쟁과 국내 정치를 뒷받침할 경제적 성장을 도모했다.
요컨대 소지왕 시대 신라사회의 최고 이슈는 '대고구려 전투의 승리'였다.
『삼국사기』의 소지왕대 대부분이 고구려 관련 기록으로 채워져 있음은 이를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대고구려 전투의 승패 여부는 곧 신라의 존망과 직결될 수 있었다.
따라서 소지왕대 정치운영의 키워드는 '고구려'였고, 그 시대의 여러 사건들 역시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지왕이 날이군에 간 까닭 이제 소지왕과 벽화의 사랑이야기를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해보면 어떨까?
먼저 소지왕이 벽화를 만나러 간 곳인 날이군(영주)에 주목하고자 한다.
엄밀히 말하면 소지왕은 날이군에 갔기 때문에 벽화를 만난 것이지, 애초부터 벽화를 만나기 위해 날이군에 간 것은 아니었다.
소지왕이 날이군에 순수(巡狩)를 간 것은 나름대로의 정치적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벽화와의 사랑이야기에 가려져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소지왕은 이미 재위 5년(483)과 10년(488), 일선군(선산)에 행차해 수해를 당한 백성들을 위로하며 곡식을 나누어주고, 죄수를 사면해준 적이 있었다.
소지왕이 전례 없이 두 차례나 일선군에 순수를 간 것은 이곳이 대고구려 관계에 있어 군사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날이군 역시 죽령로의 길목에 위치하는 군사요충지였다.
죽령로는 오늘날의 경주-영천-의성-안동-영주(순흥)-죽령-단양-제천-원주-춘천에 해당하는데, 험하지만 신라와 고구려 간 최단 교통로로서 양국이 우호관계였을 때 자주 이용되었다.
여기서 현재의 영주는 고구려가 신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에 고구려군을 주둔시켰던 곳이다.
그 기간은 대체로 광개토왕이 신라를 구원해주었던 400년에서 눌지왕이 고구려세력을 물리친 5세기 중엽전후로 생각된다.
소지왕이 순수를 간 시점인 500년에 날이군은 분명 신라 영토였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군사가 주둔했던 곳이었다.
비록 고구려 군사가 물러갔을지라도 그 영향력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5~6세기의 불상과 무덤에 고구려적 요소가 강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임이 이미 밝혀졌다.
순흥 읍내리 고분 이 고분의 채색벽화는 현재까지 남한에서 발견된 삼국시대의 고분 벽화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되며, 고구려풍을 띠고 있다.
결국 소지왕이 영주에 순수를 간 까닭은 얼마 전까지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날이군의 백성들을 위무함으로써 그들이 신라의 통치범위 내에 있음을 확인시켜주고자 함이었다.
날이군의 토착세력이었던 파로에게 소지왕의 순수는 '뜻밖에 굴러들어온 기회'였다.
파로는 왕에게 딸을 바쳐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신라 중앙정부의 비호하에 지역 내에서 통치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당시 신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한 채 각 지역의 토착지배세력을 이용한 간접 지방통치를 하고 있었다.
파로는 특히 소지왕의 약점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당시 신라 왕위는 큰아들이 물려받았는데, 소지왕에게는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집안의 대를 잇는 존재로서 아들의 가치가 유효한데, 하물며 왕위를 이어야 하는 절박한 입장이었던
소지왕으로서 파로의 제안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딸이 미모까지 뛰어나다니 그 누가 마다하겠는가?
소지왕이 경주에서 영주를 '불원천리(不遠千里)'하며 드나들다가 급기야 벽화를 왕궁 별실에까지 데리고 온 데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고타군의 할머니는 왜 소지왕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이 노파가 소지왕이 여자에 빠져 정사를 살피지 않은 데 대한 직언을 한 것 정도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기록에 접근한 결과이다.
고타군 할머니가 문제 삼은 것은 소지왕이 날이군의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노파는 "무릇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잡히는 법이다"라고 했다.
이 말의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날이군(영주)과 고타군(안동)의 지리적 환경을 생각해봄으로써 풀 수 있는 문제다.
날이군은 대고구려 군사요충지로서 신라 왕실의 주목을 받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고구려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던 곳으로 신라에서는 가장 변방에 속했다.
이는 날이군이 신라의 영토에 속하면서도 통치의 범위에서 가장 멀리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지역에는 친고구려세력이 잔존해 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소지왕이 날이군을 순수한 까닭도 역설적으로 이 지역이 가장 '친고구려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친신라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라고 보여진다.
이에 반해 고타군은 날이군에서 그리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신라에 귀속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왕 5년(84)에 고타군주가 청색의 소를 바쳤고, 조분왕 13년(242)에는 고타군에 풍년이 들어 알이 굵은 벼를 신라 중앙정부에 바쳤다고 한다.
고대에 신성한 동물과 벼 등의 헌납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항복하거나 복속되어 있을 때 일종의 징표 같은 역할을 했다. 사로국에서 출발한 신라는 경상도 일대에 산재한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면서 발전했다.
고타군에 있었던 소국의 존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위의 기록은 고타군이 일찍부터 신라의 통치 범위에 속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렇게 보면 고타군의 할머니는 평범한 할머니 같아 보이지 않는다.
왕이 아무 집에나 묵었을 리 만무하며, 왕을 향해 거리낌 없이 직언을 하는 모습도 예사롭지가 않다.
신라 중앙왕실에 협조하는 '친신라토착세력'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왕에게 충고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지위를 가진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소지왕의 죽음이 고타군 할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라는 사실은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요컨대 친신라세력가로서 고타군 할머니는 소지왕이 날이군의 친고구려세력에 포섭되는 데에 불만을 제기했던 것이다. "무릇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잡히는 법이다"에서 '용'이 소지왕을, '물고기의 옷을 입는 것'은 '친고구려세력'과의 제휴행위를, '어부'가 '고구려세력'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면 지나친 추측일까?
소지왕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고타군 할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였더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지왕은 벽화와의 사랑과 아들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구려의 파상공격에 맞섰던 영웅 군주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이것이 소지왕과 정치적 성격을 달리하던 세력에게는 소지왕을 폐위시킬 결정적 명분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지증이 방계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 같은 소지왕의 대고구려 전술 운용의 실책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개인으로서 소지왕의 사랑은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그러나 신라왕으로서 소지왕의 사랑은 시대가 요구하는 군주상에 미치지 못하는 '죄'가 되고 말았다.
영주 무섬마을 초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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