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경의 옥사는 1676년(숙종 2)에 승려 처경이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사칭하다가 탄로나 처형된 사건입니다.
처경은 평해군의 향리 손도의 아들로 용모가 매우 수려했습니다.
그의 스승은 지응입니다.
처경은 1671년(현종 12) 무렵부터 신승으로 자처하면서 경기도 지방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는 옥으로 만든 작은 부처상을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하면서 생불로 불렸으며, 궁중 나인들 중에도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1674년 그가 죽산의 봉송암에 있을 때 이곳을 자주 내왕하던 경성 사대부 집안의 종인 여거사 묘향으로 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즉, 소현세자의 유복자가 강에 투신하였다는 설과 살아 있다는 설이 있는데,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에 처경은 왜릉화지에 언문으로 ‘소현의 유복자’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소현의 비인 강빈의 필적으로 속여 허적에게 보였다가 거짓임이 탄로 났습니다.
그 결과 숙종은 2품 이상과 삼사의 관원을 빈청에 불러들여 그 처리방도를 논의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대신의 요청으로 시임ㆍ원임의 6경ㆍ삼사가 모두 모여 훈련도감에서 국문한 뒤 묘향과 함께 처형되었고, 이와 관련된 자는 모두 귀양에 처해졌습니다.
다음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찬술한 조선시대의 사서『연려실기술』에 있는 내용입니다.
“병진년 11월에 중 처경이 영의정에게 와서 스스로 소현세자의 유복자라고 말하니, 임금이 시임대신, 원임대신, 이품 이상은 실직, 군직, 삼사 관원을 막론하고 모두 빈청에서 회의할 것을 명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처경의 허위간교한 죄상은 지금 벌써 탄로되었으니, 다시 같이 모여서 조사할 일이 없으니 신 등이 금부 당상 및 양사 장관과 같이 평상시 국문하는 예에 따라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처경의 결안의 대략에,
“나이는 25세인데 아버지는 손도이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청사이며, 사승은 지응입니다. 그는 걸승으로서 떠돌아다니다가 갑인년에 죽산 봉송암에 있을 때에 묘향이 자주 왕래하였는데, 소현의 유복자라는 말을 들었고, 경산에 온 뒤로부터 이 말로써 나인들과 편지 내왕이 있었습니다. 전에 공초 중에, ‘묘향의 수양’이라 한 일도 속인 것이며, 왜릉화지에 쓴 글의 사연도 그의 손으로 위조한 것입니다. 그는 손도의 아들로서 거짓으로 소현의 유복자라 하여 인심을 의혹시키고자 한 죄가 지금 벌써 모두 탄로되었습니다. ……”
하였다.
당고개에서 사형을 집행하였다.
금부에서, 죄인 한천경 처경의 주인은 춘천으로, 김명은 충주로, 박인의 두 사람은 처경이 일찍이 데리고 다니던 자다.
숙신은 이천로, 애숙 두 사람은 복창군의 궁인으로서 처경과 자주 왕래한 자는 태안으로 각각 도삼년정배를 하였는데, 임금이 숙신은 삼수로, 애숙은 정의로 무기한 정배하기를 명하였다.
상인 정윤주와 정연주 두 사람은 정지호의 손자로 처경과 절친하게 왕래한 자 등은 처경의 요망한 말을 듣고도 관에 고발하지 않은 죄로 곤장 1백과 도삼년에 속금을 바치게 하였다.
중국의 경우 ( 진승의 난)
진승과 오광은 거사를 시작하기 전에 점치는 사람에게 일의 성패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물어보았는데, 점쟁이는
"성공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지만, 성패는 귀신에게 물어보라."
라고 답하였다.
이에 진승은
"이건 귀신의 위신을 빌려 사람들을 복종시키라는 뜻이다."
라고 해석하여 흰 비단에 붉은 글씨로 '진승왕'이라고 쓰고는 물고기를 잡아 그 배속에 넣어 두었다가 사람을 보내 사오게 하여 삶아먹도록 시켰다.
수졸들은 물고기 배속에서 '진승왕'이라고 쓴 백서를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여기에 더해, 밤에는 몰래 오광을 시켜 수졸들이 숙영하고 있는 부근의 황폐한 사당에 가서 한밤중에 장작불을 피워 놓고 여우 목소리를 흉내내어 외치도록 했다.
대초홍, 진승왕
"진승이 왕이 되어, 초나라는 크게 일어날 것이다."
중국 진나라 말기인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이 일으킨 농민 반란으로 군웅의 할거를 이끌어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이었던 진나라의 멸망을 가져왔다.
비록 진승의 세력 자체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진나라 군대에게 진압당했으나, 그 여파는 실로 어마어마하여 결국 거대한 진 제국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되었다.
반란은 결국 실패했지만 통일왕조가 무너지고 난세로 들어가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후한 말의 황건적의 난이나 원나라 말의 홍건적의 난, 신라 말의 원종·애노의 난과도 성격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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