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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프로복싱 플라이급 챔피언 역사

by Ajan Master_Choi 2005. 1. 6.

초창기 프로복싱의 전통적인 여덟체급 중 가장 가벼운 체급이었던 플라이급은 처음엔 체구가 작은 영국인들이 만들어 놓은 내셔널 타이틀에 지나지 않았지만, 1913년 들어 유럽 중심의 국제복싱기구인 IBU(국제복싱연맹)와 EBU(유럽복싱연맹)가 한계체중 50.800kg의 플라이급을 신설하면서 국제적으로 공인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영국의 <시드 스미스>와 프랑스의 외젠 크리퀴 간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20R판정승을 거둔 스미스를 양 기구의 초대챔피언으로 인정함으로써 이 체급의 첫 번째 세계챔피언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스미스를 지역챔피언으로 치부하며 세계챔피언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3년 뒤 챔피언인 지미 와일드가 자국의 도전자 영 줄루 키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비로소 이 체급의 초대챔피언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BBBofC(영국복싱관리위원회)가 인정한 영국 최초의 플라이급 챔피언으로 세차례 방어에 성공했던 스미스는 체력이 뛰어난 파이터로서 하드히터는 아니었지만 탁월한 풋워크로 빠른 몸놀림을 구사했다.
세계챔피언에 오를 때까지 78전을 싸워 68승 5무 5패를 기록할 만큼 당시로서는 승률이 높은 편이었지만 두달 뒤 열린 첫 방어전에서 동국의 <빌 라드버리>에게 11R TKO로 무너진 뒤부터 급격히 하락세를 탔다.

2대 챔피언인 라드버리 역시 경량급다운 스피드를 자랑하며 런던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는데 역시 첫 방어전에서 웨일스 출신의 <퍼시 존스>에게 일격을 당해 단명한 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25살의 젊은 나이로 프랑스에서 전사했다.
웨일스 출신으로는 첫 번째 세계챔피언이었던 존스는 당시 40승 2무의 무패 기록을 보유했던 저돌적인 복서로서 슬러거답게 KO율도 높은 편이었다.

크리퀴와 논타이틀전에서는 패했지만 타이틀을 걸고 싸운 첫 방어전에서는 20R 판정승을 거두고 설욕해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불어나는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체중초과로 타이틀을 날리는 바람에 이 체급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공석이 된 타이틀은 영국인 간에 결정전을 벌여 <탠시 리>가 지미 와일드에게 생애 첫 패배를 안기며 17R TKO승을 거두어 새 챔피언에 등극했다.
많은 사람들이 무적의 와일드가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와일드가 3주째 감기를 앓아 최악의 컨디션으로 링에 올랐기 때문에 터프한 리에게 호되게 얻어터질 수 밖에 없었다.

비교적 거친 복싱을 구사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리는 위력적인 좌우훅을 통해 곧잘 KO승을 이끌어 냈는데 동국의 복병 <조 시몬즈>에게 16R TKO로 무너져 역시 첫 방어의 벽을 넘지 못했다.
16살부터 링에 오른 시몬즈는 이미 전 챔피언을 셋이나 물리친 실력자로 귀여운 용모와 달리 경기운영은 매우 터프해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넉달 뒤 첫 방어전에서 그동안 이 체급 최강의 실력자로 군림하면서도 무관에 머물러 있었던 <지미 와일드>에게 12R TKO로 패했다.

웨일스출신으로 ‘마이티아톰’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와일드는 엄청난 파워 때문에 해머를 든 유령으로도 불렸는데 은퇴할 때까지 147번을 싸워 패한 것은 단 네차례에 불과하고, 경량급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100KO승의 기록을 남겼다.

두 번째 방어전에서 구적인 리와 재대결을 벌여 최상의 컨디션으로 흠씬 두들겨 11R TKO승으로 설욕했고, 네 번째 방어전에서는 미국에서 건너온 영 줄루 키드를 역시 11R TKO로 제압하면서 비로소 미국도 인정하는 진정한 세계챔피언으로 공인받았다.
이후 체급을 넘나들며 빅이벤트를 연출한 와일드는 나중에 밴텀급에서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조 린치를 꺽은 뒤 용감하게도 당시 세계 밴텀급챔피언이었던 피트 허먼과도 싸워 선전을 펼쳤으나 3차례 다운을 당한 끝에 17R에 레퍼리스톱으로 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차례의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며 여전히 플라이급에서는 최강으로 군림했던 와일드는 1923년 6월에 2만명이 넘는 대관중이 운집한 뉴욕야구장에서 모처럼 세계타이틀을 걸고 필리핀의 <판초 빌라>와 여섯 번째 방어전에 나섰다.
하지만 이미 서른이 넘은 와일드는 젊고 빠르고 강한 빌라에게 더 이상 마이티아톰으로서의 위용을 보여주지 못했고, 7R에서 수십발의 펀치를 허용한 채 KO당해 그의 오랜 링레코드에 마침표를 찍었다.

비교적 단신으로 체격도 작았지만 언제나 파이팅넘치는 터프니스와 괴력의 펀칭파워를 발휘해 이 체급에서는 위대한 챔피언의 반열에 올랐다.
1990년에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와일드의 9년 아성을 허물어뜨린 빌라는 자국인 필리핀은 물론 아시아 최초의 세계챔피언으로서 데뷔 4년차부터 본격적으로 미국 링에 등장해 1922년 9월 재기에 나선 전 세계 밴텀급챔피언 조니 버프를 11RKO로 누이고 아메리카챔피언에 등극하는 인상적인 실적을 올렸다.

155cm의 단신이지만 날카로운 공격력으로 정평이 나있던 빌라는 3명의 도전자를 깨끗이 처리하며 왕좌를 공고히 하는 듯 했지만 뜻밖에도 앓고 있던 이를 뽑은 뒤 독이 스며들어 1925년 7월 치궤양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프로복싱 역사상 현존하는 챔피언의 최초의 사망사건이었다.

빌라가 떠난 자리에는 1924년 파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미국의 <피델 라 바바>가 들어섰다.
미국 중심의 NBA 플라이급 초대챔피언 결정전에서 동국의 프랭키 제나로에게 판정승을 거두어 챔피언에 등극했지만 1927년 1월 영국의 엘키 클라크를 무자비하게 짓뭉개 다섯 번의 다운을 빼앗은 뒤 판정승을 거두고 나서야 비로소 유럽에서도 인정받는 세계챔피언으로 대우받았다.
스마트한 복싱스타일로 이 체급의 타이틀을 처음으로 미국으로 옮겨온 바바는 학업을 위해 곧바로 타이틀을 반납했고,
1년 뒤 밴텀급에 나타났다가 나중에 페더급으로 전향해 두 차례 세계도전에 나섰지만 모두 패해 큰 빛을 보지 못했다.

바바의 타이틀 반납 이후 이 체급은 복수의 챔피언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우선 <NBA>는 1927년 10월 미국의 <핑키 실버버그>를 새챔피언으로 인정했고, 당시 프로복싱계의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NYSAC>(뉴욕주운동위원회)도 두달 뒤 뉴스보이 브라운을 15R판정승으로 누른 미국의 <이지 슈워츠>를 초대챔피언으로 인정했다.

반타작 복서였던 <NBA>챔피언 실버버그는 결정전에서 동국의 루비 브래들리의 로우블로우 덕분에 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지만 40여일 뒤 논타이틀전으로 치러진 리매치에서 브래들리에게 10R판정으로 패하자 NBA로부터 타이틀을 박탈당해
매우 짧은 재임기간을 기록했다.
NBA는 새챔피언을 결정하기 위한 토너먼트전에서 프랭키 제나로를 누른 캐나다의 <앨버트 프렌치 벨란저>와 영국의 어니 자비스 간에 최종전을 치루게 해 12R판정승을 거둔 벨란저가 왕좌에 올랐다.
그러나 70여일 만에 다시 만난 <프랭키 제나로>와의 리매치에서 완패를 당해 군말없이 타이틀을 넘겼다.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뉴욕출신의 제나로는 155cm의 단신이었지만 이전의 투박하고 터프한 복싱스타일을 넘어 소프트한 기교파적 복싱을 선보이며 경량급에 새로운 복싱스타일을 제시했던 당대의 강자로서 아마추어 출신답게 기본기도 완벽했다.
전 챔피언인 빌라를 세 번이나 셧아웃시킨 바 있었지만 유독 세계타이틀과 인연이 없어 실력에 비해 늦게 꽃을 피웠다.
그러나 적지인 파리에서 벌인 네 번째 방어전에서 홈링의 <에밀 플라드너>에게 경기시작 47초만에 간장을 급습당해 1R KO패로 제동이 걸리는 불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즈음 IBU도 모처럼 유럽으로 타이틀을 되찾아 온 플라드너를 챔피언으로 인정해 플라드너는 졸지에 NBA타이틀 외에 IBU 타이틀까지 차지하는 경사를 맞았다.
신장에 비해 리치가 길어 스파이더로 불렸던 플라드너는 안정된 기량을 바탕으로 높은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벌어진 제나로와의 리매치에서 제나로가 5R에 플라드너의 로우블로우를 맞고 쓰러지자 3심 중 프랑스인이 플라드너의 채점승을 주장한 가운데 미국인과 스위스인이 제나로의 실격승을 선언해 버려 경기장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매니저는 물론 제나로도 폭행을 당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후 IBU는 제나로의 타이틀을 박탈하고 플라드너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지만 동국의 외젠 화트에게 18번이나 다운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15RTKO패를 당했고, 나중에 밴텀급 세계타이틀에 도전했다가 알 브라운에게 불과 1R만에 KO당해 더 이상 세계타이틀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한편, <NYSAC> 챔피언에 오른 슈워츠는 달리기 챔피언으로 불리울 정도로 히트앤런에 능했던 아웃복서로 제나로의 스파링파트너에 기용되면서 기량이 급성장해 많은 인기를 모았다.
첫 방어에 성공한 뒤 NBA와 NYSAC가 모두 인정하는 세계 밴텀급 챔피언결정전에 나섰다가 부시 그래햄에게 혼쭐이 났지만 이 체급에서는 전 챔피언인 벨란저를 포함해 모두 다섯명의 도전자를 물리쳤다.
그러나 데뷔 이래 반타작에 가까운 승률로 전망이 없었던 동국의 <윌리 라모트>에게 뜻밖에 15R판정으로 패해 타이틀을 넘겼는데 나중에 두 선수의 매니저가 동일인임이 밝혀져 NYSAC로부터 더 이상 챔피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영국을 중심으로 세계챔피언의 역사가 시작된 이 체급은 초창기에는 영국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지미 와일드 이후 미국에서도 성공리에 정착하면서 링지의 커버모델을 배출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973년초 베니세 보코솔의 반탐급 월장으로 왕좌통일전이 수포로 돌아간 가운데 다시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든 WBC와 WBA 모두 새로운 챔피언을 결정하기 위한 매치업에 나섰고, WBC는 톱랭커와 다름없는 전챔피언 <베툴리오 곤살레스>와 멕시코의 미구엘칸토 간의 결정전을 지시했습니다. 

양선수 모두 일정한 수준의 테크닉을 보유했기 때문에 예상대로 접전을 벌였으나 홈링의 잇점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던 곤살레스의 팔이 올라가며 2차왕조를 열게 되었습니다.

 

두 번의 방어전을 연속 KO승으로 장식하며 1차 왕조에 비해 한층 원숙한 기량을 뽐냈던 곤살레스는 일본으로 날아가 오구마쇼지를 맞이했는데 5개월전 갖은 논타이틀전에서 승리할 때보다 훨씬 더 잘 싸웠지만 2-1의 미묘한 15R 판정패를 당해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이 날 곤살레스는 판정결과가 발표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오구마의 트로피를 발로 걷어차는 난폭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왼손잡이 복서로서 변칙스타일의 복싱을 구사했던 오구마는 끈질긴 체력을 바탕으로 한 접근전에 능했는데 도둑질하다시피 빼앗은 챔피언벨트는 장차 이 체급의 지존으로 등극하게 되는 미구엘칸토의 탁월한 디펜스와 감각적인 컴비블로우에 농락당한 채 풀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링의 대학교수라 불리우며 소위 퍼펙트복싱을 완성시킨 칸토는 당대의 멕시칸 KO펀처와 달리 초등학교 수준의 펀치력을 갖고 있었지만 어느 각도에서나 정밀기계처럼 자신의 컴비블로우를 타격하면서 지킬때는 빠른 스텝과 유연하고 기민한 보디웍을 구사해 거의 상대의 펀치를 맞지 않았습니다.

제 아무리 강한 펀치를 갖고 있어도 칸토에게 걸리면 호박에 침주기에 불과했습니다.

 

솜방망이 같은 주먹 때문에 재임시절 강한 챔피언으로 불리지 못했고, 동향의 강렬한 하드펀처 구티 에스파다스의 출현으로 일반 대중에게 큰 인기를 모으지 못했지만 정확한 공수를 통해 언제나 시합의 주도권을 잃지 않는 능수능란함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싸우는 프로페셔널한 기질 때문에 전문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숙적인 전챔피언 곤살레스를 두차례나 무찔렀고, 끊임없이 도전해 온 일본의 자객을 5번이나 돌려 세우면서 당시로서는 이 체급 최다인 무려 14차방어의 대기록을 수립해 올타임 랭킹에서 언제나 거장다운 후한 대접을 받아 왔습니다. 

1970년대 후반 칸토의 안정된 왕좌 덕분에 여전히 혼전양상을 벗어나지 못했던 WBA타이틀과 달리 WBC타이틀은 상대적으로 높은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서른살을 넘기면서 체력적으로 부담을 갖게 된 칸토는 적지로 날아든 15차방어전에서 프로전적 11전만에 세계도전에 나선 신예 박찬희의 신들린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완패를 당해 야인으로 물러났습니다.

125승 2패의 눈부신 아마추어경력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테크니션이었던 박찬희는 비록 일발파워는 부족했지만 경량급다운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컴비블로우, 타고난 복싱 센스를 자랑했습니다.

 

칸토와의 리매치에서 후반에 추격당해 15R무승부로 타이틀을 방어한 뒤 당대 최강의 KO펀처 구티 에스파다스를 전광석화같이 빠르고 정확한 연타공격으로 2R만에 요절내면서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 방어전에 나선 것이 화근이 되어 한물 간줄 알았던 노장 오구마 쇼지에게 뜻밖에 9R TKO패를 당해 6차방어전에서 낙마했습니다.

비록 14개월만에 왕좌에서 물러났지만 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멕시칸 투톱 칸토와 에스파다스를 먹어치운 업적만으로도 박찬희는 이 체급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 했습니다.

WBA는 당초 왕좌통일전으로 예정됐던 토너먼트상의 대진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넉달전 오바 마사오에게 당한 역전 KO패의 상흔에서 벗어난 차차이 치오노이가 스위스 출신의 유럽챔피언 프리츠 쉐르베를 4R종료TKO로 물리치고 동국의 선배 폰 킹피치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왕좌에 오르는 놀라운 업적을 세웁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가 없듯이 15년째 이 체급에서 싸워 온 치오노이에게도 감량고가 찾아왔습니다.

 

1차방어 상대였던 일본의 하나가타 쓰스무와의 재전을 앞두고 중량을 맞추지 못해 타이틀이 박탈된 가운데 하나가타에게 6R TKO로 무릎을 꿇으면서 화려한 링캐리어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무려 다섯 번째 도전에서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집념의 사나이 하나가타는 처음에는 장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한 레코드를 기록했으나 프로데뷔 6년만에 내셔널챔피언에 오른 뒤 WBC챔피언 에프렌 토레스와의 논타이틀전에서 승리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WBC챔피언에 등극한 오구마 쇼지에 이어 WBA마저 하나가타가 챔피언에 오르면서 드디어 일본도 양대기구를 석권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특색없이 접근전만 시도하는 하나가타의 단조로운 복싱스타일로는 소중한 타이틀을 오래 지킬수 없었습니다.

홈링에서 열린 첫 방어전에서 전WBC챔피언 에르비토 살라바리아와 나름대로 접전을 벌였으나 기량차이로 석패하고 말았습니다.

양대기구를 넘나들며 투타임 챔피언의 반열에 오른 살라바리아는 하나가타와의 재전에서 승리한 뒤 홈팬들앞에서 복수를 다짐했던 파나마의 젊은 도전자 알폰소 로페스에게 신구교대극의 희생양이 되며 최종회에 항복했습니다.

비교적 단신으로서 스피드는 물론 일발강타도 장전하고 있었던 로페스는 마치 싸움닭같이 끈질기고 거칠게 싸우는 인파이터의 전형이었습니다.

 

전WBC챔피언 오구마 쇼지를 가볍게 일축한 뒤 2차방어전에서 멕시코의 강타자 구티 에스파다스와 정면충돌했는데 초중반은 로페스가 날카로운 공격으로 에스파다스를 압도했지만 12R들어 에스파다스의 라이트펀치 단발에 안면을 내주며 첫 다운을 당하더니 도합 다섯차례나 다운을 빼앗기며 13R에 장렬히 산화했습니다.

 

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멕시코산 경량급 KO펀처 중 하나였던 에스파다스는 단신의 동안에 어울리지 않는 강펀치의 소유자로서 레프트훅에 이은 라이트어퍼는 가히 예술있었고, 어떤 상대에게도 이길 것만 같은 씩씩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안정된 왕좌를 유지했습니다.

막강한 파워를 과시하며 4차례의 방어전을 모두 호쾌한 KO로 쓸어담자 에스파다스에게 ‘작은거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고 이 체급의 세계랭커들에게 가히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심한 탓인지 교만함에 무게가 실리면서 5차방어전에서 맞이한 베테랑 베툴리오 곤살레스에게 허를 찔려 왕좌에서 전락했습니다.

타고난 인파이터로서의 천부적인 재질을 절반남짓 밖에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4년만에 WBC챔피언으로 돌아온 곤살레스는 칠레출신의 실력파 마틴 바르가스에 이어 숙적 오구마 쇼지를 KO로 잡아내고 강한 노장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파나마의 기교파 루이스 이바라의 히트앤 사이드 작전에 휘말려 세 번째 왕좌에서 내려왔지만 이후 두차례나 더 세계타이틀에 도전하는 집념을 보여 주었습니다.

칸토, 에스파다스와 더불어 1970년대 후반기를 장식한 이 체급의 트로이카로 불리울만 했습니다.

아마추어출신으로 전형적인 사우스포 아웃복서였던 이바라는 유연한 몸놀림과 빠른발을 이용한 컴비블로우가 일품이었고 때로는 스위치복싱까지 구사하는 까다로운 복서였습니다.

챔피언에 오른지 90일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당시 9연속KO승으로 주가를 높여가던 김태식을 상대했는데 1R 중반부터 도전자의 폭발적인 소나기펀치에 무치별적인 난타를 당해 불과 4분11초만에 180여발의 펀치세례를 받고 침몰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도 WBC챔피언 박찬희와 함께 이 체급의 양대기구를 모두 석권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경량급으로서 라이트급 이상의 파워가 실린 양훅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김태식의 미래는 인상적인 대관식 때문에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첫 방어전에서 상대의 머리에 받혀 턱뼈가 깨지는 불운을 겪은데 이어 제3국에서 열린 2차방어전에서 지명도전자인 남아프리카공화국출신의 톱콘텐더 피터 마테블라에게 비교적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15R판정패를 당해 단명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1970년대 중후반들어 화려한 기교를 갖춘 칸토의 연승행진과 하드펀처 에스파다스가 연출한 고감도 KO씬, 백연마같은 곤살레스의 늠름하고 거친 싸움이 경량급 특유의 보는 재미를 더하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이 체급은 중남미권과 동양권의 빼앗고 빼앗기는 치열한 타이틀 탈환전까지 전개해 더욱 더 복싱팬들의 구미를 당기게 했습니다.

에밀 플라드너와의 리매치에서 논란 끝에 5R 실격승을 거두고 <NBA>타이틀로 다시 세계정상에 오른 <프랑키 제나로>는
외젠 화트의 밴텀급 월장에 따라 <IBU>로부터도 챔피언으로 인정받았다.

플라드너에게 날벼락을 맞은 후로는 아웃복싱에 기반을 둔 복싱스타일로 심기일전해 구적인 앨버트 프렌치 벨란저 등 적지에서 3명의 도전자를 연달아 제압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 했다.
하지만 1930년 12월 26일 NYSAC에서 인정한 챔피언 미지트 월가스트와의 왕좌통일전에서 월가스트의 스피드를 잡지 못해 15R무승부를 기록한 뒤로 스페인의 빅토르 페란드에게도 간신히 15R 무승부로 타이틀을 방어하는 등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리다가 아홉 번째 방어전에서 튀니지 출신의 <빅토르 영 페레스>의 환상적인 라이트 한방으로 2R만에 실신해 타이틀을 내주었다.
세네갈의 영웅 배틀링 시키를 흠모했던 페레스는 일찍이 16살부터 링에 올라 프랑스 파리로 활동무대를 옮긴 후 힘을 받기 시작했다.

챔피언에 올라서도 알제리와 영국, 오스트리아 등지를 날아다니며 많은 승부를 펼쳤지만 1년 뒤 벌인 첫 방어전에서 영국의 <재키 브라운>에게 13R TKO로 무너져 의외로 단명했다.
유대계로서 은퇴후 나찌독일에 항거하다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끌려가 죽음의 행진속에 사망했다.

지미 와일드가 타이틀을 빼앗긴 이래 실로 9년만에 이 체급의 세계타이틀을 종주국 영국에 안겨준 브라운은 장신의 정력적인 인파이터로서 레프트의 활용이 뛰어나고 접근전에서 타격포인트를 잘잡아 비교적 KO율이 높았다.
프랑스의 강호 발란틴 앙즐만과 세차례의 걸친 난전속에 타이틀을 수성했으나 세 번째 대결에서는 논란이 많은 15R 무승부를 기록해 IBU로부터 타이틀을 몰수당했고, 5차방어전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베니 린치>에게 8번이나 캔버스 신세를 지며 2R TKO패를 당해 왕좌에서 물러났다.

역시 165cm의 장신인 린치는 자기 페이스를 확실히 지키며 파워부재를 테크닉으로 커버했던 노련한 챔피언으로서 라이트스트레이트가 위력적이었다.
자국에서는 지미 와일드에 버금가는 실력자로 평가받았다.
브라운의 타이틀을 몰수했던 <IBU>는 키드 데이비드를 5R TKO로 제압한 <발란틴 앙즐만>을 새챔피언으로 세웠지만 1차방어 후 타이틀전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더 이상 챔피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윌리 라모트의 타이틀을 박탈한 <NYSAC>는 쿠바의 블랙 빌을 15R판정으로 물리친 필라델피아 출신의 기교파 <미지트 월가스트>를 새챔피언으로 인정했다.
펀치력은 형편없었지만 놀라운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아웃복싱으로 승률이 높았다.

첫 방어전에서 상대한 라모트가 5R 종료후 심장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손쉽게 방어에 성공한 뒤 이 체급의 진정한 챔피언을 가리고자 제나로와 맞섰지만 끊임없이 파고드는 제나로를 특유의 스피드를 통해 적절히 제어하고 15R 무승부에 만족했다.
체중고를 겪어 루비 브래들리에게 고전 끝에 어렵게 타이틀 지킨 뒤 밴텀급과 페더급을 넘나들며 활약하다가 필리핀에서 날아온 <스몰 몬타나>에게 눈자위가 잘리며 10R판정패를 당해 타이틀을 상실했다.
프로데뷔 후 4년차부터 미국에 진출한 몬타나는 펀칭파워가 약하고 공격루트가 단순했지만 역시나 빠른 펀치로 유명세를 탔고 월가스트에게 도전하기전에 이미 한차례 승리를 거둔 바 있었다.

이즈음 왕좌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으면서 1937년 1월 19일 런던의 웸블리스타디움에서는 NBA챔피언 린치와 NYSAC챔피언 몬타나간에 왕좌통일전이 거행됐다.
챔피언 간의 대결답게 양선수는 치열한 경기를 펼쳤고 후반에 더 공격적이었던 린치가 근소한 차의 15R 판정승을 거두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세계챔피언으로서 발돋움했다.

때마침 1년뒤 IBU 또한 앙즐만의 타이틀을 불인정하는 바람에 피델 라 바바가 타이틀을 반납한 이래 무려 10년만에 이 체급의 단일챔피언이 탄생하게 되었다.
<NBA>와 <NYSAC>는 물론, <IBU>로부터도 챔피언으로 인정받은 <베니 린치>는 이후 4만여 관중이 운집한 고향 글래스고우에서 무패의 하드펀처 피터 케인을 맞아 이 체급 역대 최고의 경기 중 하나로 손꼽힐만한 명승부를 펼친 끝에 13R KO승을 거두고 타이틀 방어에 성공해 더욱 더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너무 젊은 나이에 찾아온 인기 때문인지 술을 가까이하게 되는 바람에 한계 체중을 맞추지 못해 우려를 자아냈다.

케인과의 리매치에서 체중고로 인하여 15R 무승부로 그친데 이어 통산 다섯 번째 방어전에서는 미국의 재키 주리치에게 12R TKO승을 거둔 뒤 한계체중 초과때문에 타이틀전이 취소되고 왕좌에서 마저 내려와야 했다.
이후 불과 25살의 한창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고, 알콜중독에 빠진 뒤 영양실조에 걸려 33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NYSAC타이틀이 소멸된 가운데 공석이 된 <NBA>타이틀은 1938년 9월 22일 <피터 케인>이 홈링인 리버풀에서 재키 주리치와 결정전을 벌여 파워에서 앞서며 다섯 번의 다운을 빼앗은 끝에 15R 판정승으로 챔피언에 올랐다.
그러나 16살에 프로에 뛰어든 케인 역시 20살이 되면서 체중조절에 한계를 드러내며 다음해 5월 밴텀급 월장을 선언했고, 그해 말 NBA는 케인의 타이틀을 박탈해버린 뒤 1941년 2월 21일 재키 주리치를 10R판정으로 누른 필리핀의 <리틀 다도>를 새 챔피언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IBU쪽에서는 계속해서 케인을 챔피언으로 인정했고 밴텀급을 오가며 활동했던 다도가 밴텀급에 정착하자 NBA도 <피터 케인>을 다시 챔피언으로 인정하는 혼란을 겪게 되었다.

케인은 챔피언에 오른지 5년만에 등을 떠밀리다시피 해서 나선 첫 방어전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재키 패터슨>에게 경기시작 60초만에 KO패를 당해 타이틀을 내주었다.
이후 원래 체급인 밴텀급으로 돌아가 활약했지만 다시는 세계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난세를 평정한 패터슨은 이 체급 최초의 사우스포 챔피언으로서 비교적 펀치력이 강했는데 레프트훅은 그의 필살기였다.
밴텀급을 넘나들며 승패를 나누어 가진 뒤 3년만에 첫 방어에 나서 백전노장 조 쿠란에 두차례 다운을 빼앗고 15R판정승으로 제압했지만 더 이상 플라이급 체중을 맞추기 어려웠고 이듬해 미국의 다도 마리노와의 2차방어전을 앞두고 감량에 실패해 경기를 거부한 결과, NBA로부터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후 IBU 타이틀도 소멸된 가운데 북아일랜드 출신의 <린티 모나한>이 패터슨 대신 다도 마리노와 결정전에서 싸워 예상을 깬 승리로 NBA 챔피언에 등극했다.

소년시절부터 링에 올라 장래를 촉망받았던 모나한은 군복무를 위해 잠시 복싱에서 멀어졌지만 복귀 후 패터슨이 챔피언으로서 벌인 논타이틀전에서 7RTKO승을 거둔데 이어 나중에 챔피언에 오르게 되는 테리 알렌을 1R에 보내버려 식지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챔피언에 오른 뒤 패터슨과 재차 맞붙어 또 다시 7RKO시켰고, 프랑스의 자랑 모리스 산데욘마저 제압해 강인함을 보여줬다.
그러나 알렌과의 3차방어전에서 컨디션 난조에 빠져 15R무승부를 기록했고, 몇 달후 기관지염이 악화돼 더 이상 링에 오르지 못한 채 은퇴를 선언했다.

1920년대말부터 NBA와 NYSAC의 대립속에 투크라운의 시대를 맞이했던 이 체급은 10여년 뒤 베니 린치에 의해 다시 일인지배체제를 맞이했지만 이후 영국에서만 타이틀이 회전하는데다가 제대로 방어전을 치루지 못하는 챔피언들이 이어지면서 복싱팬들의 관심에서 다소 멀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린티 모나한의 은퇴로 인한 후계는 그와 15R 무승부를 기록했던 영국의 <테리 알렌>이 1950년 4월 25일 프랑스의 오노레 프라테시를 15R 판정승으로 물리치고 차지했다.
프로복서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불과 8살때부터 아마추어복싱을 시작해 100전이 넘는 경기를 치룬 알렌은 10년 뒤 프로에 데뷔해 2차대전 중 해군으로 이집트에서 복무하면서도 경기를 이어갈 정도로 복싱에 대한 불타는 집념을 보였다.

하지만 넉달 뒤 적지에서 벌인 첫 방어전에서 미국의 <다도 마리노>에게 15R 판정패해 챔피언 재임기간은 그의 의지에 비해 무척 짧았다.

마리노는 하와이 호놀루루 출신의 필리핀계로서 모나한과 승패를 주고 받으며 알려지기 시작했고, 무모하게도 당시 세계 밴텀급 롱런챔피언으로 명성을 날리던 마누엘 오르티스의 아성에 도전했다가 대차의 15R 판정패를 당하기도 했다.
3년만의 플라이급 복귀전에서 세계타이틀을 거머쥔 마리노는 첫 방어전에서 다시한번 알렌을 가볍게 따돌렸지만 30대 중반을 넘긴 나이탓에 일본 도쿄에서 벌인 2차방어전에서는 7살 연하인 <시라이 요시오>의 철저한 히트 앤 사이드 작전에 말려 15R 판정패 했다.

일본인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시라이는 처음엔 전형적인 일본 특유의 어그레시브한 복싱스타일이었지만 당시 미국인으로서 일본복싱의 정신적 지주였던 앨빈 칸의 철저한 지도를 받으면서 기술적인 면이나 수비스타일에 커다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전임 챔피언이었던 마리노와 알렌 등을 연이어 물리치며 4차방어에 성공했는데 그 역시 서서히 나이에서 오는 체력적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원정길에서 간신히 10R 무승부를 기록했던 무패의 <파스쿠알 페레스>와 홈링에서 타이틀을 걸고 싸웠지만 15R판정패를 당하면서 왕좌에서 내려왔고, 리매치에서는 페레스에게 초반부터 일방적인 공세를 당한 채 5R만에 처참한 KO패를 당해 은퇴했다.
은퇴 후 사망하기 전인 2000년대 초반까지 경기해설자로 자주 모습을 보여 우리에게도 친숙한 편이다.
148cm의 단신인 페레스도 아르헨티나 최초의 세계챔피언으로서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바 있어 아마와 프로를 석권했고, 플라이급 올타임 랭킹에서 늘 다섯손가락 안에 이름을 올리는 최강의 파이터였다.

인파이팅에 관한 한 흠잡을데 없는 완벽한 파이터로서 작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거리를 좁힌 뒤 매서운 연타를 퍼붓는 인상적인 스타일이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방어에 나서 시라이를 때려 잡은 뒤 필리핀의 복병 레오 에스피노사에게 다소 고전했지만 이후 세차례는 모조리 KO승으로 방어에 성공해 이 체급에서 모처럼 강한 챔피언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하지만 7차방어 후 일본의 야오이타 사다오와 벌인 논타이틀전에서 예상외로 많은 펀치를 허용한 끝에 생애 첫 패배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불꽃같던 페레스의 파이팅은 전성기를 지나기 시작했고, 일본 원정에서 요네쿠라 겐지에게 15R 판정승을 거둔데 이어 타이틀을 걸고 싸운 야오이타와의 2차전에서는 한차례 다운을 빼앗기며 후반에 추격해 13R TKO승을 거두었다.

1950년대 후반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9차방어의 위업을 달성한 페레스는 1960년 4월 16일 또 다시 원정길에 나서 이번에는 태국의 신예 <폰 킹페치>를 상대했는데 혈전을 벌인 끝에 2-1의 15R 판정패를 당해 세계챔피언으로서의 생명을 다하고 말았다.
5개월 뒤 킹페치를 LA로 불러들여 타이틀 탈환에 나섰지만 25살의 킹페치를 감당하기에는 세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접전양상이었던 1차전과 달리 8R KO로 쉽게 무너졌다.

이 체급의 세계챔피언 역사에 길이 남을 명챔피언을 무너뜨린 킹페치 역시 태국 최초의 세계챔피언으로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는데 168cm의 장신으로 언제나 단정하게 빗고 나온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이었다.

초기에는 다소 투박하고 촌스러운 복싱스타일이었지만 세계챔피언에 오른 뒤 기술복싱에 눈을 뜨면서 샤프한 라이트스트레이트를 비롯한 한층 세련된 기량으로 페레스를 잡고 일본 원정길에 나서 세키 미쓰노리와 노구치 키오를 차례로 제압했지만 4차방어전에서 만난 <파이팅 하라다>의 계속된 압박과 화끈한 공격에는 11R만에 무릎을 꿇어 타이틀을 상실했다.

하라다는 끊임없는 러싱파이팅으로 언제나 당당한 모습이었지만 태국 원정으로 벌인 <폰 킹페치>와의 재대결에서 접전 끝에 근소한 차로 석패해 3개월만에 무관이 되었다.
킹페치와 승패를 주고받은 뒤 미련없이 플라이급을 버리고 월장한 밴텀급에서 빛을 발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투타임 챔피언에 오른 킹페치는 첫 방어전으로 또 다시 일본 원정길을 감행해 <에비하라 히로유키>와 맞섰는데 1R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에비하라의 훅을 정통으로 턱에 허용한 뒤 다시 일어나 복부에 강타를 맞고 127초만에 넉아웃돼 허무하게 타이틀을 날렸다.

이 기록은 당시 일본에서 열린 세계타이틀전 중에서 가장 빠른 KO였고, 이 체급의 세계타이틀전 사상 최단시간 KO였다.
에디 타운센트의 전문적인 지도를 받아 온 에비하라는 데뷔 초기에 파이팅 하라다에게만 패했을뿐 발군의 실력을 선보였던 사우스포로서 면도날같은 레프트 펀치에 강점이 있었다.
그러나 3개월 뒤 적지에서 벌인 리매치에서는 <폰 킹페치>에게 경험과 테크닉에서 격차를 보이며 타이틀을 되돌려 주었다.

이로써 킹페치는 후대의 차차이 치오노이, 베툴리오 곤살레스와 함께 이 체급에서 세 번째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하면서 1960년대 전반기를 뜨겁게 달구었지만 이탈리아까지 날아가 벌인 첫 방어전에서 단신인 <살바토레 부루니>의 빠르고 정확한 공격을 잡지 못하고 대차의 판정패를 당해 이번에도 단명했다.

오래간만에 이 체급에서 유럽 복싱의 명맥을 잇게 된 부루니는 아마추어시절부터 각광받던 테크니션으로서 교묘한 레프트훅과 라이트카운터가 주무기였다.
이즈음 NBA를 계승한 WBA와 그로부터 분리 독립한 WBC간에는 뿌리깊은 대립의 감정이 고조되면서 점차 각 체급에서 두 명의 세계챔피언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 체급도 예외는 아니었다.
먼저 WBA가 부루니에게 톱랭커인 올라시오 아카바요와 방어전을 갖을 것을 지시했고, 과거 아카바요와 세차례 싸워 1승2패로 열세를 경험한 부루니가 이를 거부하자 곧바로 타이틀 박탈을 선언해 버렸다.

그리고 WBC만이 인정한 가운데 부루니가 호주의 로키 가테라리와의 1차방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결국, 세계챔피언 분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세계대전 후 이 체급은 전세계적인 복싱붐을 타고 유럽이나 미국을 벗어나 체격적으로 적합한 남미와 동양출신 복서들이 득세하기 시작해 파스쿠알 페레스나 폰 킹페치같은 실력자를 배출했고, 특히 그 중에서도 일본은 이 체급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과시하며 적지 않은 세계챔피언을 쏟아내 플라이급의 복싱강국으로 분류되었다.

<WBC>로부터 계속해서 세계챔피언으로서 인정받은 살바토레 부루니는 2년전 홈링에서 한차례 승리한 바 있는 스코틀랜드출신의 <월터 맥고완>과 적지에서 맞섰으나 도전자 맥고완이 눈부상에도 불구하고 선전을 펼친 탓에 벨트를 풀어야만 했다.
1950년 8월 테리 알렌이 타이틀을 상실한 이래 16년만에 영국으로 타이틀을 되찾아 온 맥고완은 아마추어 국가대표출신으로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124전 중 단2패만을 기록할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올리며 한때 아마추어 플라이급 챔피언으로 인정받기도 했었다.
아마추어출신답게 화려한 풋웍을 바탕으로 매우 세련된 기량을 선보였지만 잦은 안면부상 때문에 적지에서 벌인 첫 방어전에서 태국의 <차차이 치오노이>의 날카로운 공격에 유혈이 낭자한 채 9R 닥터스톱에 의한 TKO패로 짧은 재임기간을 기록했다.

태국의 우상인 폰 킹피치의 뒤를 이은 치오노이는 자국의 여느 선수와 달리 무에타이 경험이 전무했지만 패배를 두려워 하지 않는 맹렬한 파이팅으로 무장된 전형적인 복서로서 한때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인연 때문에 유독 일본 선수와 많은 경기를 치렀다.
타고난 배짱과 적지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적극적인 경기운영, 그리고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탄력있는 라이트훅은 춤추는 다이나마이트라는 애칭에 손색이 없었다.

맥고완과의 방어전을 앞둔 챔피언 부루니를 제압하면서 급부상했고, 타이틀 방어전에서 맥고완과의 리매치를 포함해 3연속 KO승을 기록하며 기세를 올렸다.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요괴를 쫓기 위해 입산수도하며 승려행세를 하는 기행을 일삼아 소승으로 불리기도 했다.
5차 방어전에서 멕시코의 <에프렌 토레스>와 원정경기로 벌인 리매치에서 1차전과 달리 예상밖의 일방적인 공격을 당해 8R TKO패로 타이틀을 넘겼다.

과거 일본의 에비하라 히로유키의 벽에 막혀 번번히 세계도전의 문턱에서 기회를 날렸던 토레스는 집요한 공격수로서 일발필도의 강타를 갖춘 하드펀처였지만 아무래도 스피드가 좋은 상대에게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첫 방어전에서 하나가타 쓰스무를 쉽게 넘은 뒤 적지에서 벌인 <차차이 치오노이>와의 러버매치에서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대차의 15R 판정패를 당해 치오노이의 재임을 허락했다.


이로써 태국은 동시대의 WBA챔피언 베크레크 차트반차이와 함께 양대기구 타이틀을 독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임의 기쁨도 잠시여서 치오노이는 당시 동양챔피언으로서 상승세를 타고 있던 필리핀의 <에르비토 살라바리아>를 불러들인 첫 방어전에서 2R에 살라바리아의 정확한 스트레이트를 턱에 맞은 뒤 3번이나 캔버스를 구르며 2R TKO패를 당해 왕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아웃복싱에 기반을 둔 깨끗한 푸트웍과 충실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최강의 원투스트레이트가 장기였던 살라바리아는 챔피언에 오르기 전부터 무패의 WBA챔피언 베크레크 차트반차이에게 생애 첫 패배를 안겨줄만큼 실력파로 인정받았다.
1차 방어전에서 난적 하나가타 쓰스무를 제압한 뒤 베네수엘라로 원정길에 나서 베툴리오 곤살레스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한차례 다운을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15R 무승부로 타이틀을 방어하는 듯 했다.
그러나 경기후 판정결과에 불만을 품은 곤살레스측이 살라바리아가 경기도중 설탕물을 섭취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자 한달 뒤 WBC는 살라바리아의 타이틀을 박탈했고, 새로운 챔피언 결정전도 없이 <베툴리오 곤살레스>를 챔피언으로 인정하는 촌극을 벌였다.

곤살레스는 첫 세계챔피언의 등극과정과 달리 이후 수많은 명복서를 상대로 한 화려한 링캐리어를 통해 세 번씩이나 이 체급의 정상정복에 성공하며 자국의 국민적 영웅의 반열에 오를 만큼 위대한 챔피언으로 발전하게 된다.
초창기에는 카운터블로우 위주의 소극적 스타일로 박력이 떨어졌지만 나중에 투타임챔피언에 오르면서 물러설줄 모르는 늠름한 복싱스타일은 그의 전매특허가 되었고, 라이스트레이트의 파괴력은 이 체급에서 일류로 대접받았다.

1차 왕조 시기만해도 아직은 미완의 대기로서 불과 두 번째 방어전에서 당시 태국의 별로 칭송받던 <베니세 보코솔>에게 철저히 파괴당하며 적지에서 10R TKO패로 단명하고 말았다.

일본과 함께 이 체급의 강국으로 떠오른 태국이 배출한 네 번째 세계챔피언인 보코솔은 사우스포이면서도 플라이급치고는 KO율이 꽤 높았던 하드펀처인데다 단단한 체구에 완벽한 테크닉과 탁월한 무브먼트를 겸비해 롱런이 예상되었지만 첫 방어전에서 전임 챔피언 살라바리아에게 퍼펙트한 판정승을 거둔 뒤 체중조절에 어려움을 겪자 곧장 타이틀을 반납하고 밴텀급으로 월장해버려 아쉬움을 주었다.
더구나 당시 WBA와 WBC는 이 체급의 통합챔피언 선발을 위해 상호 챔피언쉽 규정을 통일하고 프리츠 쉐르베와 전챔피언 치오노이 간의 승자가 보코솔과 대전하는 토너먼트까지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쉬움이 더 컸다.

단일챔피언이었던 살바토레 부루니의 왕관을 빼앗아버린 <WBA>는 1966년 3월 1일 도쿄에서 톱랭커인 아르헨티나의 <올라시오 아카바요>와 다카야마 가쓰요시 간의 결정전에서 15R 판정승을 거둔 아카바요를 새 챔피언으로 인정했다.
단신의 사우스포로서 스위치복싱을 구사했던 아카바요는 뛰어난 무브먼트를 통해 상대에게 쉽게 타점을 허락치 않는 반면 자신의 공격력은 극대화하는 능력을 소유해 통산 83전을 싸워 패한 경기는 단 2차례에 불과할 정도로 견고한 실력을 갖추었다.

첫 방어전에서는 당초의 결정전 상대였던 전챔피언 에비하라 히로유키에게 압승을 거두었지만 두 번째 방어전에서는 나중에 WBC챔피언에 올랐던 에프렌 토레스에게 다운을 당한 끝에 어렵게 승리했고, 논타이틀전에서 일본의 다나베 기요시에게 생애 첫 KO패를 당한 데 이어 에비하라와의 재대결에서도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해 3차방어 후 스스로 은퇴를 선언했다.
좀 더 일찍 세계챔피언에 올랐다면 동국의 선배인 파스쿠알 페레스에 필적할만한 업적을 세울 수도 있었는데 너무 늦게 왕좌에 오른 것이 불운이었다.

공석이 된 왕좌는 절치부심끝에 재기에 성공한 <에비하라 히로유키>가 브라질의 복병 호세 세르비뉴를 대차의 15R 판정승으로 물리치고 6년만에 세계챔피언에 복귀하는 저력을 보였다.
그러나 첫 방어전부터 컨디션 난조를 보여 필리핀의 <베르나베 빌라캄포>가 휘두른 양훅에 시달리며 심판전원일치의 15R 판정패를 당해 두 번째 왕좌도 단명으로 끝났다.

빌라캄포는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양훅 만큼은 위력적이어서 늘 상대에게 위협적이었다.
첫 방어전은 한번 상대한 적이 있는 무패의 <베크레크 차트반차이>와 적지에서 맞섰는데 선전의 보람도 없이 홈타운디시젼에 울어야 했다.
장신으로서 터프하면서도 발이 빨랐던 차트반차이는 지독한 파워부재를 아웃복싱으로 극복한 케이스였는데 1차방어전을 앞두고 벌인 논타이틀전에서 동양챔피언 에르비토 살라바리아에게 일격을 당하더니 일본의 복병 <오바 마사오>에게 완벽히 제압당한 채 13R KO패를 당해 타이틀을 잃었다.

챔피언벨트를 지닌 채 교통사고로 링을 떠나 영원한 챔피언으로 불리운 오바는 167cm의 장신이었기 때문에 언뜻 보면 야위워 보일 정도로 늘씬한 신체조건을 가졌는데 밑바닥부터 올라온 만큼 기본기 또한 충실했다.
첫 방어전에서 지명도전자 베툴리오 곤살레스에게 신승했고, 과거 자신에게 패배를 안겼던 하나가타 쓰스무에게 설욕하며 3차방어에 성공해 순조로운 방어행진을 기록했다.

마지막 레코드가 된 5차방어전에서 이미 WBC에서 두 번이나 왕좌에 올랐던 강적 차차이 치오노이를 맞아 1R부터 다운을 허용하며 오른쪽발목에 부상까지 입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지만 불굴의 투혼과 일본인 특유의 근성을 발휘하며 러싱파이팅을 펼친 끝에 12R들어 극적인 역전 KO승을 이끌어내는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3주 뒤 드라이브가 취미였던 오바는 자신의 애마였던 시보레 콜벳과 함께 도쿄근처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24살에 불과했다.

1960년대 후반기부터 1970년대 전반기를 넘어오면서 이 체급은 일본, 태국, 필리핀으로 대표되는 동양복싱과 남미복싱의 각축장으로 완연히 변모했고, 이와같은 현상은 나중에 동양복싱의 맹주로 등장한 우리나라까지 가세하면서 사실상 198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1973년초 베니세 보코솔의 반탐급 월장으로 왕좌통일전이 수포로 돌아간 가운데 다시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든 WBC와 WBA 모두 새로운 챔피언을 결정하기 위한 매치업에 나섰고, <WBC>는 톱랭커와 다름없는 전챔피언 <베툴리오 곤살레스>와 멕시코의 미구엘 칸토 간의 결정전을 지시했다.
양선수 모두 일정한 수준의 테크닉을 보유했기 때문에 예상대로 접전을 벌였으나 홈링의 잇점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던 곤살레스의 팔이 올라가며 2차왕조를 열게 되었다.

두 번의 방어전을 연속 KO승으로 장식하며 1차 왕조에 비해 한층 원숙한 기량을 뽐냈던 곤살레스는 일본으로 날아가 <오구마 쇼지>를 맞이했는데 5개월전 갖은 논타이틀전에서 승리할 때보다 훨씬 더 잘 싸웠지만 2-1의 미묘한 15R판정패를 당해 통곡하고 말았다.
이 날 곤살레스는 판정결과가 발표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오구마의 트로피를 발로 걷어차는 난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왼손잡이복서로서 변칙스타일의 복싱을 구사했던 오구마는 끈질긴 체력을 바탕으로 한 접근전에 능했는데 도둑질하다시피 빼앗은 챔피언벨트는 장차 이 체급의 지존으로 등극하게 되는 <미구엘 칸토>의 탁월한 디펜스와 감각적인 컴비블로우에 농락당한 채 풀어줄 수 밖에 없었다.

링의 대학교수라 불리우며 소위 퍼펙트복싱을 완성시킨 칸토는 당대의 멕시칸 KO펀처와 달리 초딩 수준의 펀치력을 갖고 있었지만 어느 각도에서나 정밀기계처럼 자신의 컴비블로우를 타격하면서 지킬때는 빠른 스텝과 유연하고 기민한 보디웍을 구사해 거의 상대의 펀치를 맞지 않았다.
제 아무리 강한 펀치를 갖고 있어도 칸토에게 걸리면 호박에 침주기에 불과했다.

솜방망이 같은 주먹 때문에 재임시절 강한 챔피언으로 불리지 못했고, 동향의 강렬한 하드펀처 구티 에스파다스의 출현으로 일반 대중에게 큰 인기를 모으지 못했지만 정확한 공수를 통해 언제나 시합의 주도권을 잃지 않는 능수능란함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싸우는 프로페셔널한 기질때문에 전문가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숙적인 전챔피언 곤살레스를 두차례나 무찔렀고, 끊임없이 도전해 온 일본의 자객을 5번이나 돌려 세우면서 당시로서는 이 체급 최다인 무려 14차방어의 대기록을 수립해 올타임 랭킹에서 언제나 거장다운 후한 대접을 받아 왔다.

1970년대 후반 칸토의 안정된 왕좌 덕분에 여전히 혼전양상을 벗어나지 못했던 WBA타이틀과 달리 WBC타이틀은 상대적으로 높은 권위를 인정받았다.
서른살을 넘기면서 체력적으로 부담을 갖게 된 칸토는 적지로 날아든 15차방어전에서 프로전적 11전만에 세계도전에 나선 신예 <박찬희>의 신들린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완패를 당해 야인으로 물러났다.
125승 2패의 눈부신 아마추어 경력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테크니션이었던 박찬희는 비록 일발파워는 부족했지만 경량급다운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컴비블로우, 타고난 복싱 센스를 자랑했다.

칸토와의 리매치에서 후반에 추격당해 15R 무승부로 타이틀을 방어한 뒤 당대 최강의 KO펀처 구티 에스파다스를 전광석화 같이 빠르고 정확한 연타공격으로 2R만에 요절내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너무 자주 방어전에 나선 것이 화근이 되어 한물간줄 알았던 노장 오구마 쇼지에게 뜻밖에 9R TKO패를 당해 6차방어전에서 낙마했다.
비록 14개월만에 왕좌에서 물러났지만 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멕시칸 투톱 칸토와 에스파다스를 먹어치운 업적만으로도 박찬희는 이 체급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 했다.

<WBA>는 당초 왕좌통일전으로 예정됐던 토너먼트상의 대진을 그대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넉달전 오바 마사오에게 당한 역전 KO패의 상흔에서 벗어난 <차차이 치오노이>가 스위스 출신의 유럽챔피언 프리츠 쉐르베를 4R 종료 TKO로 물리치고 동국의 선배 폰 킹피치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왕좌에 오르는 놀라운 업적을 세운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앞에 장사가 없듯이 15년째 이 체급에서 싸워 온 치오노이에게도 감량고가 찾아왔다.
1차 방어 상대였던 일본의 <하나가타 쓰스무>와의 재전을 앞두고 중량을 맞추지 못해 타이틀이 박탈된 가운데 하나가타에게 6R TKO로 무릎을 꿇으면서 화려한 링캐리어에 종지부를 찍었다.
무려 다섯 번째 도전에서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집념의 사나이 하나가타는 처음에는 장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한 레코드를 기록했으나 프로데뷔 6년만에 내셔널챔피언에 오른 뒤 WBC챔피언 에프렌 토레스와의 논타이틀전에서 승리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WBC챔피언에 등극한 오구마 쇼지에 이어 WBA마저 하나가타가 챔피언에 오르면서 드디어 일본도 양대기구를 석권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별다른 특색없이 접근전만 시도하는 하나가타의 단조로운 복싱스타일로는 소중한 타이틀을 오래 지킬수 없었다.
홈링에서 열린 첫 방어전에서 전WBC챔피언 <에르비토 살라바리아>와 나름대로 접전을 벌였으나 기량차이로 석패하고 말았다.
양대기구를 넘나들며 투타임챔피언의 반열에 오른 살라바리아는 하나가타와의 재전에서 승리한 뒤 홈팬들앞에서 복수를 다짐했던 파나마의 젊은 도전자 <알폰소 로페스>에게 신구교대극의 희생양이 되며 최종회에 항복했다.

비교적 단신으로서 스피드는 물론 일발강타도 장전하고 있었던 로페스는 마치 싸움닭같이 끈질기고 거칠게 싸우는 인파이터의 전형이었다.
전WBC챔피언 오구마 쇼지를 가볍게 일축한 뒤 2차 방어전에서 멕시코의 강타자 <구티 에스파다스>와 정면충돌했는데 초중반은 로페스가 날카로운 공격으로 에스파다스를 압도했지만 12R들어 에스파다스의 라이트펀치 단발에 안면을 내주며 첫 다운을 당하더니 도합 다섯차례나 다운을 빼앗기며 13R에 장렬히 산화했다.

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멕시코산 경량급 KO펀처 중 하나였던 에스파다스는 단신의 동안에 어울리지 않는 강펀치의 소유자로서 레프트훅에 이은 라이트어퍼는 가히 예술이었고, 어떤 상대에게도 이길 것만 같은 씩씩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안정된 왕좌를 유지했다.
막강한 파워를 과시하며 4차례의 방어전을 모두 호쾌한 KO로 쓸어담자 에스파다스에게 ‘작은거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고 이 체급의 세계랭커들에게 가히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만심한 탓인지 교만함에 무게가 실리면서 5차방어전에서 맞이한 베테랑 <베툴리오 곤살레스>에게 허를 찔려 왕좌에서 전락했다.
타고난 인파이터로서의 천부적인 재질을 절반남짓 밖에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4년만에 WBC챔피언으로 돌아온 곤살레스는 칠레출신의 실력파 마틴 바르가스에 이어 숙적 오구마 쇼지를 KO로 잡아내 고 강한 노장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파나마의 기교파 <루이스 이바라>의 히트앤사이드 작전에 휘말려 세 번째 왕좌에서 내려왔지만 이후 두차례나 더 세계타이틀에 도전하는 집념을 보여 주었다.
칸토, 에스파다스와 더불어 1970년대 후반기를 장식한 이 체급의 트로이카로 불리울만 했다.

아마추어 출신으로 전형적인 사우스포 아웃복서였던 이바라는 유연한 몸놀림과 빠른발을 이용한 컴비블로우가 일품이었고 때로는 스위치복싱까지 구사하는 까다로운 복서였다.
챔피언에 오른지 90일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당시 9연속 KO승으로 주가를 높여가던 <김태식>을 상대했는데 1R 중반부터 도전자의 폭발적인 소나기펀치에 무치별적인 난타를 당해 불과 4분11초만에 180여발의 펀치세례를 받고 침몰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도 WBC챔피언 박찬희와 함께 이 체급의 양대기구를 모두 석권하는 영예를 안았다.

경량급으로서 라이트급 이상의 파워가 실린 양훅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김태식의 미래는 인상적인 대관식 때문에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첫 방어전에서 상대의 머리에 받혀 턱뼈가 깨지는 불운을 겪은데 이어 제3국에서 열린 2차방어전에서 지명도전자인 남아프리카공화국출신의 톱콘텐더 <피터 마테블라>에게 비교적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15R판정패를 당해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1970년대 중후반들어 화려한 기교를 갖춘 칸토의 연승행진과 하드펀처 에스파다스가 연출한 고감도 KO씬, 백전연마같은 곤살레스의 늠름하고 거친 싸움이 경량급 특유의 보는 재미를 더하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이 체급은 중남미권과 동양권의 빼앗고 빼앗기는 치열한 타이틀 탈환전까지 전개해 더욱 더 복싱팬들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주지하다시피 영국에서 플라이급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약 40여년간은 영국을 중심으로 왕좌쟁탈전이 벌어졌지만 1960년대 중반 WBA와 WBC가 분열한 뒤 1970년대를 거치면서 중남미권과 동양권은 절대적인 불가침의 영역을 구축하면서 양 진영간에 물고 물리는 싸움을 전개해 왔다.
특히, 1980년대를 맞이하면서 이 체급은 양대 기구 모두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하는 혼란의 소용돌이속에 빠져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면 챔피언이 바뀌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한 양상으로 치달었다.

1980년 5월 서른살이 넘은 말년에 전임 박찬희의 컨디션 난조 덕분에 챔피언벨트를 거머줘 미국 링지로부터 그해 최고의 컴백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WBC>챔피언 <오구마 쇼지>는 과거 베툴리오 곤살레스에게 그랬듯이 박찬희와의 연이은 리매치도 홈링에서 심판과 결탁해 더러운 판정으로 승리를 도둑질해가며 방어횟수를 늘려갔다.

그러나 4차방어전에서 맞이한 톱랭커 <안토니오 아벨라>의 중량감 넘치는 펀치에 휘청거리다 7R에 장렬한 타격전 끝에 큰대자로 뻗어 밑천을 털리고 말았다. 동국의 선배 에스파다스의 타력에는 못미치지만 위협적인 중장거리포를 장착한 아벨라는 주무기인 라이트어퍼는 물론 장신을 이용한 라이트스트레이트와 레프트훅도 일품이어서 자국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첫 방어전에서 펀치력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전WBA챔피언 김태식을 적지에서 2R만에 간단히 요리해 동양권에 강인한 인상을 심어주었지만 2차방어전에서는 콜롬비아에서 날아온 자객 <프루덴시오 카르도나>을 맞아 경기시작 2분30여초만에 기습적인 좌우연타를 허용한 뒤 레프트훅을 턱에 맞고 충격적인 장면의 KO패를 당해 예상보다 일찍 사라졌다.

아벨라만큼이나 장신이었던 카르도나는 동생 리카르도와 형제챔피언으로서 스피드는 떨어졌지만 경량급 치곤 제법 펀치력도 있고 감각적인 좌우컴비블로우에 능해서 인파이팅을 선호했는데 뛰어난 반사신경까지 갖추고 있어 상대의 공격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넉달 뒤 첫 방어전을 위해 다시 적지로 날아가 멕시코의 노장 <프레디 카스티요>를 상대했으나 노련한 카스티요의 끈질기고 집요한 접근전에 피투성이가 된 채 헛스윙만 남발하며 타이틀을 넘겼다. WBC L.플라이급 타이틀에 이어 2체급 제패에 성공한 카스티요는 과거에 비해 한층 공격적인 스타일로 변모했는데 당시 상승세를 타고 있던 지명도전자 <엘레온시오 메르세데스>의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아웃복싱을 따라 잡지 못해 4년전과 마찬가지로 석달천하에 그쳤다.

도미니카의 아마추어 국가대표출신으로 그 실력을 높게 평가받아 멕시코의 실력자 쿠요 에르난데스에게 스카웃되었지만 프로 초기에는 적지에서 접전이 많아 패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전WBA챔피언 구티 에스파다스를 KO시킨 뒤 톱콘텐더 후안 디아스마저 꺽고 타이틀도전권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했다.

메르세데스는 공수전환이 빠르고 카운터펀치가 정교한 기교파였지만 넉달 뒤 유리턱으로 소문난 <찰리 마그리>의 정확한 연타공격을 피하지 못해 왼쪽눈자위가 찟기며 과다출혈해 아쉽게도 7R에 레퍼리스톱패를 당했다. 이 체급의 종주국 출신으로서 오래간만에 웸블리구장에서 대관식을 갖은 마그리 역시 아마추어출신으로 영리한 경기운영능력과 파워를 갖춘 공격적인 복싱스타일로 한때 세계챔피언 0순위로 거론될 만큼 유망주로 손꼽혔다.

그러나 세계도전을 앞두고 갖은 전초전마다 시답지 않은 상대 후안 디아스나 호세 토레스에게 KO패를 당해 유리턱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세계정상으로부터 멀어져 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국복싱계에서는 16년만에 타이틀을 찾아 온 마그리가 군웅할거시대에 접어든 이 체급의 판도를 평정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만만히 보고 불러들인 필리핀의 <프랭크 세데뇨>에게 초반부터 공격일변도의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더니 허술한 가드사이를 뚫고 날아든 세데뇨의 날카로운 원투스트레이트에 속절없이 무너지며 세차례나 링바닥을 굴러다니다 6R에서 소나기펀치를 맞고 KO패했다.

일정한 수준의 기량을 바탕으로 사우스포 특유의 받아치기에 능했던 세데뇨는 언제 어디서나 전혀 주눅듦이 없이 노련하고 냉정한 경기운영으로 정평이 나 있었고 일발강타까지 보유하고 있어 복병중의 복병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빈틈은 있는 법이어서 일본 원정경기에서 맞이한 <고바야시 고지>에게 2R시작하자마자 엉성해 보이는 레프트훅을 턱에 맞고 중심을 잃더니 이내 회복하지 못한 채 세 번 다운된 후 TKO패를 당해 역시 첫 방어의 관문을 넘지 못했다.

170cm가 넘는 장신인 고바야시 역시 사우스포로서 정면대결보다는 아웃복싱을 선호하면서도 미사일같은 고공 스트레이트를 장착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감량의 여지가 없는 큰 키 때문에 언제나 중량고에 시달려야 했다.

이 와중에 첫 방어전부터 부담스런 상대였던 톱콘텐더 멕시코의 <가브리엘 베르날>을 맞았는데 2R들어 가공할만한 위력의 좌우훅을 안면에 허용해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앞으로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 기가막힌 타이밍의 라이트훅을 턱에 맞고 그야말로 떡실신(?)하고 말았다.

단신의 사우스포 베르날은 작지만 다부진 체격에 위력적인 좌우훅을 가진 하드펀처로서 동국의 선배 에스파다스와 흡사했지만 정직하고 단조로운 공수패턴 때문에 밸런스가 좋은 발빠른 주자에게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아벨라 이래 처음으로 첫 방어전에 성공한 챔피언이었지만 역시나 적지에서 스피드와 테크닉을 겸비한 태국판 작은 알리 <소트 치탈라다>의 뒤만 쫓아 다니다 근소한 차이로 타이틀을 넘겼다. 한때 철옹성을 구축했던 미구엘 칸토 덕분에 권위를 인정받았던 WBC타이틀은 그의 몰락과 함께 방랑을 시작해 동양에서 머무는 듯 하더니 중남미를 거쳐 잠시 유럽으로 갔다가 동양으로 돌아와 중남미를 다녀온 뒤 다시 동양으로 돌아다니며 발길 닿는대로 굴러 다녔다.

전임 챔피언 김태식으로부터 석연치 않은 승리를 거두고 <WBA>챔피언에 오른 <피터 마테블라>는 스피드가 좋은 전형적인 아웃복서로서 별다른 특징은 없었지만 인종차별이 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복서 특유의 오기와 근성을 갖추고 있었다.

석달 뒤 안전한 상대로 생각하고 불러들인 아르헨티나의 소형탱크 <산토스 라시아르>에게 초반부터 오른쪽 눈꺼풀이 잘린 뒤 두차례 다운을 당하고 7RTKO로 패퇴했다.

라시아르는 155cm정도의 단신이지만 상체근육이 유난히 발달된 전형적인 아르헨티나산 강타자로서 짧은 리치에 비해 레프트잽을 잘 치고 블로킹이나 헤드슬립같은 수비동작이 작아 순간적으로 상대를 파고들어 날리는 펀치의 적중도가 매우 높았다. 스텝을 거의 밟지 않을 정도로 스피드가 떨어지나 왕성한 체력과 투지로 몰아붙여 상대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버리는 스타일이다.

첫 방어전에서 전챔피언 <루이스 이바라>를 맞아 신장과 리치가 우세하고 발이 빠른 상대의 철저한 히트앤클린치 작전에 말려 손한번 써보지 못한 채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절치부심하여 왕좌에 복귀한 이바라는 김태식에게 당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철저한 디펜스를 통해 맞지 않는 복싱을 추구했지만 적지에서 만난 멕시코의 신예 <후안 에레라>의 집중적인 보디공격에 가드가 내려온 사이 안면을 사로잡히며 열세를 면치못하다가 11R에 강력한 레프트훅을 턱에 맞고 또 다시 1차방어전에서 무너졌다.

에레라의 챔피언 등극에 따라 WBC챔피언 아벨라와 함께 양대기구를 석권한 멕시코는 1970년대 중반 칸토와 에스파다스 이래 다시 한번 플라이급 타이틀을 독점하며 이 체급의 강국으로 우뚝 섰다. 멕시코의 수많은 명복서를 배출한 유카탄반도 출신의 에레라는 타고난 강타자는 아니었지만 레프트훅이 강하고, 보디공격에 일가견이 있으며, 찬스시 연타능력이 탁월해 KO승이 많았다.

첫 방어전에서 허세를 부리며 관록을 앞세운 쓰리타임챔피언 베툴리오 곤살레스를 피범벅으로 만들어 돌려보내는 수훈을 세워 롱런이 예상됐지만 전챔피언 <산토스 라시아르>의 인-아웃작전에 주도권을 내준 채 13R에서 오른쪽 어깨를 다치는 바람에 라시아르의 폭발적인 좌우연타속에 TKO패했다.

이처럼 WBA쪽도 WBC와 마찬가지로 잦은 왕자교대극을 연출해 한동안 이 체급의 타이틀은 평가절하될 수 밖에 없었는데 재임에 성공한 라시아르의 등장으로 WBA타이틀이 먼저 안정기에 접어 들었다.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발전한 폭발적인 좌우연타를 바탕으로 상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던 라시아르는 적지의 기대주들을 모조리 KO로 쓰러뜨려 세계 미들급 챔피언 카를로스 몬손 이후 자국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동시에 모처럼 이 체급에서 강력한 챔피언이 탄생했음을 전세계에 알렸다.

세계챔피언을 지냈던 에레라와 카르도나, 사파타까지 차례로 집어삼킨 뒤 안트앙 몽테르와의 9차방어전을 끝으로 타이틀을 반납하고 한체급 위의 슈퍼플라이급으로 월장했다. 혼란한 시기에 등장한 롱런챔피언으로서 진정한 프로페셔널 파이터의 진면목을 과시해 선배 파스쿠알 페레스와 함께 아직도 이 체급의 올타임랭킹에서 상위클래스로 평가받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군웅할거의 수많은 세계챔피언을 양산하며 혼전상태로 치달았던 이 체급은 IBF와 WBO까지 등장해 세계챔피언 러시에 가세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먼저, 1983년 12월 <IBF>를 통해 우리나라의 <권순천>이 수준미달의 레네 부사용을 5R에 굴복시켜 세계챔피언 대열에 합류했다.
불과 두달전에 WBA Jr.밴텀급 타이틀에 도전해 실패했던 권순천은 왼손잡이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거칠고 과격한 인파이터로서 변칙적인 플레이에 능했고 시한폭탄같은 한방은 상대를 공포에 몰아 넣을만큼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경기의 기복이 심해 잘할 때와 못할 때가 극명하게 엇갈리기도 했다.
3류를 상대로 한 방어행진 도중에 매니저의 농간으로 가짜도전자와 싸우는 정신적인 충격을 경험한 뒤부터 급격한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동국의 <정종관>에게 번번히 약점을 드러내면서 두 번이나 무승부로 연명한 끝에 7차방어전이 된 3차전에서 초반부터 눈자위가 크게 찟어져 4RTKO패했다.
전형적인 잡초 정종관의 초창기는 그야말로 시계제로의 절망적 상태였지만 톱클래스와 겨루면서 눈을 뜬 러싱파이팅에 오기와 뚝심을 더해 전 WBC챔피언 엘레온시오 메르세데스를 KO시켜 이변을 일으키더니 급기야 권순천과의 도합 34R에 걸친 혈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첫 방어전에서 동국의 <정비원>을 상대로 팽팽한 접전 속에 근소한 차이로 석패해 어렵게 오른 정상에서 4개월만에 내려섰다.

펀치력은 없었지만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부지런한 공격력과 날카로운 컴비블로우가 인상적인 정비원은 L.플라이급에서 유명우와 헤르만 토레스에게 한계를 드러내자 플라이급으로 월장해 기회를 잡은 케이스로 3개월만에 갖은 첫 방어전에서 동국의 <신희섭>에게 전라운드를 압도당하며 15RTKO패를 당해 존재감이 약했다.
비교적 큰 키의 사우스포였던 신희섭은 다양하고 정밀한 펀치를 구사하는 테크니션으로서 원투스트레이트가 일품이고 접근전에서 훅은 물론 어퍼컷도 잘 때려 일찌감치 유망주로 분류됐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3년전 WBA챔피언 산토스 라시아르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뒤부터 한층 더 세련된 테크닉과 최고의 컴비블로우를 자랑하며 물오른 실력을 과시해 9연속KO승을 기록할 정도로 무풍지대를 달렸다.
하지만 2차방어전에서 맞이한 전IBF Jr.플라이급 챔피언 <도디 페날로사>의 지능적인 압박복싱에 예상밖의 모습으로 난타당해 5R만에 무릎을 꿇었다.
뛰어난 실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적때문에 저평가될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챔피언이었다.

초대부터 4대까지 우리나라에서만 맴돌아 인터내셔널이라는 말이 무색했던 IBF벨트를 필리핀으로 가져간 페날로사는
플라이급 월장 이후 일라리오 사파타가 갖고 있던 WBA 타이틀 도전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코리안 킬러로서 건재를 과시하고 있었는데 홈링에서 벌인 첫 방어전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우리나라의 <최창호>에게 예상밖의 11R 역전KO패를 당해 일찍 낙마했다.

국내에서조차 무모한 싸움으로 내다 볼 정도로 희망이 없었지만 후반에 독기를 발휘해 최고의 이변을 일으킨 최창호는 파괴력이 강한 양훅을 앞세워 투지만점의 공격적인 파이팅을 펼치는 인파이터로서 허술한 커버링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첫 방어전에서 지명도전자 필리핀의 <롤란도 보홀>에게 IBF의 비호아래 텃세판정으로 희생돼 아쉬움을 주었다.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IBF탈퇴 움직임이 있었던 시기로 IBF의 아시아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필리핀과 태국은 그만큼 후한 대접을 받았다.

페날로사가 빼앗긴 타이틀을 억지로 되찾아 온 보홀은 접근전을 선호하는 인파이터였지만 볼품없는 펀치력에다 뻣뻣하기까지 한 움직임 때문에 대성할 수가 없었다.
적지에서 벌인 2차방어전에서 영국의 검은독수리 <듀크 맥켄지>에게 시종일관 열세를 면치 못하다가 11R에서 강렬한 라이트스트레이트를 턱에 맞고 꿈길을 헤매였다.
아마추어 국가대표로 활약하다가 거물인 미키 더프에게 스카웃된 맥켄지는 170cm의 장신으로 흑인복서 특유의 유연성과 고감도의 펀치력으로 일찍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동국의 선배 찰리 마그리를 은퇴시키고 유럽챔피언에 오른 뒤 오랫동안 WBC 톱랭커로서 왕좌를 노렸으나 챔피언 소트 치탈라다의 부상으로 캔슬되자 갑자기 IBF로 선회했다.

두 번째 방어전에서 체중조절에 실패해 최악의 컨디션에서 만난 북아일랜드 출신의 <데이브 맥콜리>에게 타이틀을 잃었는데 나중에 선수층이 얇은 WBO에서 밴텀급과 Jr.페더급 정상을 잇달아 정복해 프로데뷔때 약속했던 3관왕을 이루어 내기도 했다.
장신의 호전적 인파이터인 맥콜리는 모스크바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자 프로에 뛰어들어 국내레벨을 상대로 착실히 힘을 기른 뒤 WBA챔피언 피델 바사에게 두번 도전해 다운을 주고받는 인상적인 선전을 펼친 바 있었다.
업라이트스타일의 좌우훅은 충분한 위력을 갖고 있었지만 허술한 수비와 캐리어 부족이 마음에 걸렸다.

첫 방어전에서 강호 도디 페날로사에게 여유있게 승리한 뒤 B급 도전자를 상대로 다운을 주고받는 불안함속에서도 5차방어에 성공하며 이리저리 굴러다닌 IBF벨트의 고단함을 덜어주었는데 재차 도전한 콜롬비아의 <로돌포 블랑코>에게 석패해 3년만에 벨트를 풀었다.

한편, 중남미를 중심으로 한 제4의 기구 <WBO>도 1989년 3월에 세계챔피언을 배출하며 혼란을 가중시켰는데 초대챔피언에는 미구엘 메르세데스를 셧아웃시킨 콜롬비아의 <엘비스 알바레스>가 등극했다.
사우스포로서 아웃복싱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승부욕이 강해 타격전을 마다하지 않았던 알바레스는 스트레이트를 주무기로 한 무시못할 공격력까지 겸비해 유망주로 이미 분류됐었다.
팬들의 관심도 적고 무엇보다 도전자를 구하지 못하게 되자 명색이 세계타이틀임에도 불구하고 WBO타이틀을 내팽개친 채 WBA지역타이틀로 갈아타는 웃지못할 해프닝을 벌였다.
이에 따라 멕시코의 <이시드로 페레스>가 급조된 결정전 상대 앙헬 로사리오에게 혼쭐이 난 뒤 최종회에 간신히 역전KO승을 거두고 두 번째 챔피언에 올랐다.

L.플라이급 시절에는 WBC챔피언 장정구를 다운시킬만큼 강력한 펀치력과 준수한 테크닉을 선보였지만 플라이급으로 올라오면서 파괴력이나 움직임 모두 예전보다 떨어진 느낌을 주었다.
3차방어전에서 홈어드밴티지를 안고 싸운 스코틀랜드의 뉴페이스 <패트 클린톤>에게 벨트를 풀었다.

<WBC>의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된 왕자를 자임했던 <소트 치탈라다>는 불과 5전째 WBC L.플라이급 챔피언 장정구에게 도전했다가 분루를 삼켰지만 중량조절의 부담이 없는 플라이급으로 월장하자 물만난 고기처럼 최고의 실력을 발휘했다.

무에타이 출신이면서도 힘에 의존하는 태국의 전형적인 복싱스타일과는 달리 정교한 리드잽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빠른 발과 유연한 허리놀림을 섞은 교묘한 아웃복싱을 펼쳐 태국판 알리로 통했고, 허를 찌르는 오른손 스트레이트과 어퍼컷은 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첫 방어전은 용감하게도 적지로 뛰어들어 전챔피언 찰리 마그리를 5R만에 요절냈고, 가브리엘 베르날과의 리매치에서는 홈텃세로 승리를 챙겨 머쓱했지만 러버매치에서는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대차의 12R판정승을 거두고 롱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자신감이 붙을수록 교만함과 나태함이 비례해 여가수와의 염문설에 휩싸이더니 연습을 게을리하고 체력관리에도 실패하면서 자멸의 길로 접어들었다.
7차방어전에서 우리나라의 신예 <김용강>의 푸트웍을 따라 잡지 못한 채 휘청거리다 헛스윙만 남발하면서 타이틀을 헌납했다.

아마추어출신이지만 국내타이틀와 동양타이틀을 차례대로 거머쥐며 단계를 밟아 성장한 김용강은 치타라는 별명에 걸맞은 빠른 스피드와 다양한 기교를 지닌 깨끗한 아웃복서타입으로 접근전을 좋아하지 않아 강인해 보이진 않았으나 레프트잽으로 거리를 두고 날리는 원투트스트레이트와 어퍼가 강하고 예리했다.
원래 L.플라이급에서 뛰다가 동국의 롱런챔피언 장정구와 유명우를 피해 플라이급으로 월장하면서 더 나은 실력을 발휘했다.
두 번째 방어전에서 까다로운 상대였던 일본의 레오파드 다마쿠마를 적지에서 가볍게 일축해 장래를 촉망받았지만 적지에서 <소트 치탈라다>와 벌인 리매치에서 선전에도 불구하고 부상때문에 아쉽게 타이틀을 돌려 주었다.

재집권에 성공하며 2차왕조를 열어 젖힌 치탈라다는 방어횟수가 거듭되면서 연륜이 묻어날 정도로 완성된 복싱을 보여 주었는데 카를로스 살라자르나 리차드 클라크같은 당대의 신진들을 현저한 실력차로 따돌렸고 구원의 숙적 장정구와 6년만에 또 다시 적지에서 만났지만 접전속에서도 한층 여유있는 경기를 펼치며 복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5차방어전에서 만난 동문의 후배 <무앙차이 키티카셈>의 힘찬 대쉬에 초반부터 밀리기 시작하더니 무차별 난타를 허용하며 6RTKO패를 당해 무기력하게 타이틀을 날렸다.

당시 일각으로부터 동문 간의 조작극을 의심받을 정도로 이 날의 치탈라다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탈라다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A급 프로페셔널 챔피언으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복싱감각은 물론 빠른 스피드와 변칙적인 테크닉을 발휘해 당시 끝없이 이어진 왕좌쟁탈전을 종식하고 두차례에 걸쳐 통산 10차방어를 달성한 기록은 1980년대를 마감하는 이 체급의 마지막 위업으로 평가할 만하다.

7개월전 IBF Jr.플라이급 챔피언으로서 미국발 슈퍼스타 마이클 카바할의 제물이 되었던 키티카셈은 찬스가 나면 어김없이 폭발하는 매서운 연타로 유명했지만 과거에 비해 서두르지 않는 침착성을 발휘했다.
첫 방어전에서 재도전에 나선 베테랑 장정구에게 공수전환이 늦어 세 번이나 다운을 내주었지만 최종회에 역전KO승을 거두며 장정구를 은퇴로 내몰았고, 3차방어전에서는 한물간 치탈라다의 얼굴을 핏빛으로 물들게 해 태국복싱의 내일로 떠올랐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물결속에 프로복싱무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소련산 일본수입복서 <유리 아르바차코프>의 차가운 카운터펀치에 세차례나 캔버스를 구르며 사그라졌다.

산토스 라시아르의 월장으로 비어 있던 <WBA>왕좌는 그의 벽을 넘지 못했던 노장 <일라리오 사파타>가 한번 상대해 이긴적 있는 미국의 알론조 곤잘레스를 홈링에서 가볍게 따돌리며 2관왕을 차지했다.
여전히 빠르고 유연한 몸놀림과 견고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이기는 복싱에 도가 튼 사파타는 도디 페날로사나 알베르토 카스트로같은 만만치 않은 도전자를 상대로 1986년 한해동안 다섯번이나 방어전을 치러낼 정도로 과거와 다름없는 엄청난 정력을 과시했다.

이듬해 적지에서 치룬 6차방어전에서 콜롬비아의 영악한 강타자 <피델 바사>에게 덜미를 잡혀 무관이 되었다.
당시 WBC밴텀급 챔피언 미구엘 로라와 함께 콜롬비아의 쌍두마차였던 바사는 뛰어난 체력을 바탕으로 한 인파이터로서 오른손 훅의 타력이 높았지만 높은 KO율을 지닌 무패의 전적과 달리 약한 맷집과 들쑥날쑥한 경기력으로 항상 외줄타기하듯 불안한 구석이 많았다.

첫 방어전부터 데이브 맥콜리에게 두 번이나 다운을 당한 뒤 때리다 지친 상대를 종반에 몰아붙여 간신히 13R에 역전TKO승을 거두었고, 사파타와의 재전에서도 어렵사리 무승부를 기록해 외양에 비해 허약한 챔피언으로 평가됐다.
비교적 약체를 상대해 방어횟수를 6까지 늘려 나간 뒤 7차방어전에서 회장국의 보이지 않는 지원을 받은 베네수엘라의 <헤수스 로하스>에게 바톤을 넘겨 실적에 비해 존재감은 희미했다.

로하스는 허리놀림이 좋은 변칙복서로 백스텝과 동시에 터져나오는 라이트스트레이트가 위력적이고, 접근전때 쇼트블로우도 잘 쳤지만 발이 빠르지 못한 것은 단점이었다.
첫 방어전에서 우리나라의 <이열우>와 엉키고 설키는 지리멸렬한 경기를 펼쳐 2관왕을 허용했다.
WBC 챔피언에서 물러난 동국의 김용강을 제치고 잡은 기회를 잘 살린 이열우는 갑자기 1차방어전 상대가 바뀌면서 컨디션 난조에 빠져 지명도전자 <레오파드 다마쿠마>에게 중반 이후 무수한 공격을 받고 10R TKO로 주저 앉았다.
L.플라이급에서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1차방어의 벽을 넘지 못하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키가 크고 눈이 좋은 다마쿠마는 일발파워보다는 스트레이트를 주무기로하는 기교파로서 체질적으로 터프니스가 부족해 안전한 복싱을 선호했다.

첫 방어전에서 전챔피언 로하스에게 힘겨운 무승부로 고비를 넘기는 듯 했으나 WBO 초대챔피언의 명함을 가진 <엘비스 알바레스>의 힘에서 압도당하며 쉽게 타이틀을 내줬다.
염원하던 메이저챔피언에 오르며 승승장구가 예상됐던 알바레스는 불과 첫 방어전에서 전WBC챔피언 <김용강>에게 다운을 주고 받으며 선전했지만 상대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해 단명하고 말았다.
2년만에 양대기구 타이틀을 석권하며 복귀한 김용강은 첫 방어전에서 레오 가메스에게 화려한 아웃복싱을 펼쳐 완승을 거두었고, 지명도전자 조나단 페날로사에게는 6R KO승을 거두면서 옛 컨디션을 완전히 찾은 듯 했지만 대수롭지 않았던 베네수엘라의 <아퀼레스 구스만>을 맞아 체중조절에 실패하면서 예상밖의 졸전을 벌여 또 다시 3차방어의 벽을 넘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기에 WBC는 소트 치탈라다를 중심으로 안정감을 찾아갔지만 WBA는 일라리오 사파타와 피델 바사 이후 1990년대 접어들면서 또 다시 혼전상태를 맞이해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했고, IBF도 초대챔피언 권순천 이후 제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정처없이 떠돌다 2류에게 정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리 아르바차코프 Vs. 무앙차이 키티카셈

아마추어 복싱강국인 소련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으로 기록된 <WBC>챔피언 <유리 아르바차코프>는 아마추어 시절 180전이 넘는 풍부한 캐리어를 쌓으며 올림픽을 제외한 유럽선수권, 세계선수권 등을 모두 석권해 명실공히 최강으로 군림했었다.

그리고 후일 WBA 라이트급 챔피언에 오르게 되는 오르주벡 나자로프와 함께 일본의 가네히라 마사키에게 수입돼 충실한 기본기를 앞세워 10연속KO승을 질주하며 일찍부터 이 체급의 세계무대를 평정할 후보로 예견되었다.
슬러거는 아니었지만 타이밍 좋은 컴비블로우의 적중도가 높았고 상체의 움직임이 좋아 상대에게 타점을 허용하는 일이 적었다.

첫 방어전에서 무패의 도전자 진윤언을 제압한 뒤 전임 무앙차이 키티카셈을 적지에서 재차 꺼꾸러 뜨린데 이어 지명도전자 이사이아스 사무디오마저 물리치면서 롱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위험한 도전자들을 차례대로 돌려 세우며 철벽아성을 구축한 아르바차코프는 도구치 다카오와 벌인 9차방어전에서 손부상을 입어 긴 공백기를 갖게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망막에 이상이 생겨 선수생활마저 위협받는 불운을 맞았다.
이 때문에 은퇴를 고려했지만 가네히라의 강권으로 무려 15개월만에 억지로 링에 올라 7차방어전 상대였던 태국의 <차차이 사사쿨>에게 오랜 공백기와 눈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완패함으로써 5년만에 왕좌에서 물러났다.

차차이 사사쿨 Vs. 매니 파퀴아오

아르바차코프의 공백이 길어지면서 6개월전에 이미 잠정챔피언에 올라 있었던 사사쿨은 초등학교때부터 무에타이에 몸을 담기 시작했고, 아마추어 국가대표로 서울올림픽에 출전해 8강에 진출하며 두각을 나타냈었다.
스텝의 활용은 거의 없지만 왕성한 전투력을 앞세워 상대를 압박하는 능력이 탁월했고 캐리어가 쌓이면서 경기운영능력까지 겸비해 톱클래스로 성장했다.
우리나라의 김영진과 장영순을 상대로 두 번의 방어전에 성공한 뒤 3차방어전에서 오늘날 프로복싱 최고의 슈퍼스타로 발돋움한 필리핀의 <매니 파퀴아오>를 상대로 선전했으나 8R에 파퀴아오의 강력한 레프트훅이 턱에 꽂혀 실신했다.

이 체급에서는 장신이었던 파퀴아오는 아직 미완의 대기로서 공수 모두 안정적이지 못했지만 라이트잽의 활용이 돋보였고 원투스트레이트에 이은 기습적인 좌우훅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첫 방어전에서 톱랭커 가브리엘 미라를 곤죽으로 만들었지만 태국 원정길에 나선 2차방어전에서 체중조절에 실패해 컨디션 부조속에 또 하나의 숨은병기 <메드고엔 싱수라트>의 끈질긴 대쉬를 피하지 못한 채 3R에서 복부에 치명타를 맞아 단명했다.

매니 파퀴아오 Vs. 메드고엔 싱수라트

함량미달의 <WBA>챔피언 <아퀼레스 구스만>은 부지런하고 꾸준한 스타일이지만 중남미 특유의 유연성과 디펜스 외에 뚜렷하게 내세울만한 컬러가 없어 예상대로 동국의 지명도전자 <데이비드 그리만>에게 일찌감치 타이틀을 넘겼다.
그리만 역시 풍부한 아마추어경력의 소유자로서 안정된 스탠스에 면도날같은 레프트잽을 자랑했는데 어퍼컷의 파괴력이 일품이어서 KO율도 높은 편이었다.
원래 Jr.밴텀급에서 뛰었으나 난공불락의 WBA챔피언 카오사이 갤럭시에게 패퇴한 뒤 플라이급으로 내려와 기어코 정상을 밟았다.

첫 방어전에서 3관왕을 노리던 이오카 히로키를 가볍게 제압했지만 불안한 마음으로 나선 태국 원정길에서 소트 치탈라다의 재래라 불리운 <사엔 소 플로엔치트>의 까다로운 아웃복싱에 휘말려 3차방어전에서 타이틀을 상실했다.
1990년대 초반 또 다시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한 WBA타이틀을 평정해 외형상 군계일학같은 존재감을 과시했던 플로엔치트는 전형적인 아웃복서로 치탈라다에 비해 전체적인 면에서 한수아래였지만 섬세하고 빠른 템포의 스피드 복싱은 플로엔치트만의 독특한 맛이 있었다.

긴 리치에서 뻗어나오는 시원한 스트레이트와 장신답지 않은 정교한 쇼트블로우로 전임 챔피언들의 거센 도전을 일축하면서 어느덧 노련미까지 더해져 파죽지세의 방어행진을 벌였지만 지나치게 안정적인 경기운영과 소극적인 공격패턴 때문에 새가슴이라는 비아냥마저 감수해야 할 만큼 전 시대의 선배 챔피언들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었다.

10차방어전에서 베네수엘라의 <호세 보니야>에게 힘에서 밀리면서 근소한 차의 12R판정패를 당해 타이틀을 내주었다.

탄력있는 몸놀림에 각도 좋은 좌우펀치를 장착한 보니야는 슬러거를 지향했지만 펀치의 궤적이 크고 안면 수비가 허술해 로센도 알바레스같은 일류에게는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타이틀 방어전에서 한물간 이오카 히로키나 야마구치 게이지를 상대로 파워를 과시했으나 모처럼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한 4차방어전에서 아르헨티나의 복병 <우고 라파엘 소토>를 만나 접전끝에 타이틀을 상실했다.
4년전 WBC챔피언 아르바차코프에게 톱콘덴더 자격으로 도전했다가 8RKO패로 물러났던 소토는 경기경험이 많은 만큼 노련한 경기운영능력을 갖췄으나 평범한 공수라인으로는 이 체급을 오래 지배할 수 없었다.
9개월만에 나선 첫 방어전에서 WBA 회장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레오 가메스>의 어줍쟎은 펀치에 3R만에 희생돼 트리플크라운을 헌납했다.

당시 유행처럼 불어닥친 다체급 석권 기록에 재미들린 가메스는 두달 뒤 WBA 슈퍼플라이급 잠정타이틀까지 거머쥐고 노골적으로 4관왕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으나 정작 이 체급의 타이틀은 태국의 왼손잡이 강타자인 <손피차이 피사누라찬>의 한방에 8RKO로 쓰러져 단 한차례도 방어하지 못한 채 쫓겨났다.

프란시스코 테헤도 Vs. 대니 로메로

WBA Jr.플라이급 챔피언 유명우에게 패퇴한 뒤 플라이급에서 톱콘덴더로서 기회를 엿보다 <IBF>챔피언에 오른 <로돌포 블랑코>는 과거에 비해 더욱 유연해진 허리놀림과 정확도 높은 좌우컴비블로우를 앞세워 대기만성의 날카로운 파괴력을 과시하며 승승장구했으나 태국의 강타자 <피치트 시트방프라찬>이 날린 초강력 라이트훅에 3R만에 무릎을 꿇어 불과 다섯달만에 무관으로 전락했다.
나중에 WBA Jr.플라이급 챔피언에 오르게 되는 피치트 초 시리와트의 형이기도 시트방프라찬은 무에타이출신으로서 늦게 프로복싱에 뛰어들었지만 데뷔초부터 연속KO승으로 이목을 끌었다.
레프트잽에 이은 원투스트레이트로 기선을 잡은 뒤 폭발적인 연타로 끝장을 보는 화끈한 복싱을 구사했고, 근육질임에도 불구하고 상체의 움직임이 기민해 수비능력도 탁월했다.

2년간 홈링에서 다섯차례의 방어에 성공했는데 마지막이 된 5차방어전에서 멕시코의 노장 호세 루이스 세페다에게 어렵게 승리를 거둔 뒤 느닷없이 타이틀을 반납하고 무패챔피언으로 은퇴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세페다를 물리치고 시트방프라찬의 뒤를 이은 콜롬비아의 <프란시스코 테헤도>는 아마추어 국가대표 출신으로 장신에서 내리꽂는 파괴력 높은 스트레이트를 가졌지만 매에 약한 것이 흠이었다.
WBC L.플라이급 챔피언 움베르토 곤살레스에게 초장에 박살난 뒤 플라이급으로 월장해 세계챔피언의 꿈을 이뤘지만 두달만에 잠재력이 풍부한 미국의 젊은 강펀처 <대니 로메로>의 거친 대쉬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프랭키 제나로 이래 무려 64년만에 이 체급의 타이틀을 미국으로 찾아온 로메로는 홍안의 미소년같은 외모를 지녔지만 펀치스피드가 뛰어나고 오른주먹의 파워가 수준급인데다가 찬스시 터져나오는 폭발적인 좌우컴비블로우가 매우 위력적이었기 때문에 당대의 최강 유리 아르바차코프를 위협할만한 엘리트 챌린저로서 많은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첫 방어에 성공한 뒤 논타이틀전에서 노장 윌리 살라자르의 펀치에 왼쪽안구가 파열되는 큰 부상으로 7RTKO패를 당해 링지로부터 1995년 최고의 이변에 선정되는 데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타이틀을 반납한 뒤 월장해 IBF Jr.밴텀급 챔피언으로 복귀했다.
로메로가 반납한 챔피언 벨트는 이미 잠정챔피언에 올라 있던 영국의 <로비 리건>의 몫이었다.

웨일스 출신인 리건은 초창기에는 별볼일 없었지만 유럽챔피언에 오른 뒤부터 부쩍 스퍼트를 냈다.
수비에 치중하는 아웃복서로서 상체의 놀림이 좋고 반사신경이 뛰어났지만 박력이 없는 공격스타일 때문에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넉달 뒤 소리 소문없이 두체급 위의 WBO 밴텀급 챔피언으로 나타나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또 다시 정처없이 떠돌던 IBF 타이틀은 미국의 <마크 존슨>을 새챔피언으로 옹립하면서 모처럼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다.

전미 아마추어 L.플라이급 챔피언 출신인 존슨은 사우스포로서 긴리치에서 나오는 날카롭고 스피디한 펀치를 바탕으로 화려한 테크닉을 구사했는데 낮은 가드와 발을 잘 쓰지 않는 것은 단점이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전챔피언 테헤도를 1RKO로 보내 버린 후 라울 슈아레스나 알레한드로 몬티엘, 아더 존슨같은 만만치 않은 도전자를 격침시키며 2년동안 7번의 방어전을 소화했는데 실력이나 업적보다 과대평가되었다.
타이틀 반납 후 조니 타피아의 월장으로 비어 있던 IBF Jr.밴텀급 챔피언에 올라 역시 2관왕이 되었다.
존슨의 집권으로 한층 격상된 IBF 타이틀은 보잘 것 없는 루이스 코로나도를 유린한 장신의 사우스포 강타자 <이레네 파체코>의 손아귀에 들어 갔다.

콜롬비아 출신으로 긴리치와 현란한 발재간에 번개같은 원투스트레이트를 장착한 파체코는 능수능란한 페이스 조절을 통해 상대를 자유자재로 다뤘는데 체중고로 인해 자주 방어전에 나서지 못한 탓에 기복이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체코의 복싱센스나 스킬은 존슨의 뒤를 이을 만한 정상급 챔피언으로 손색이 없었다.

한편, 여전히 팬들의 관심밖에 놓여 있었던 <WBO>타이틀은 아마추어시절 LA올림픽에도 출전하는 등 재능을 보였던 영국의 신예 <패트 클린톤>이 쥐고 있었다.
라이트잽에 이은 레프트스트레이트가 주무기였으나 밸런스가 불안정하고 스태미너도 부족해 위태로운 왕좌를 이어갔다.
두 번째 방어전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베테랑 <제이콥 마틀라라>의 노회하고 집요한 접근전을 견디지 못하고 8R에서 두손을 들었다.
두 번째 정상도전에서 WBO를 통해 세계챔피언에 오른 마틀라라는 두 명의 유러피언을 KO시키며 유럽스타일에 강한 면모를 보였으나 4차방어전에서 만난 멕시코의 하드히터 <알베르토 히메네스>에게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우월한 신체조건과 강력한 펀치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끊임없이 압박하는 스타일인 히메네스는 데뷔초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며 연속KO가도를 달렸는데 첫 세계도전에서는 WBC 챔피언 무앙차이 키티카셈의 터프니스에 밀려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3연속 KO방어 행진속에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지만 5차방어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던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살라자르>와 다시 만나 후반에 힘이 실린 카운터블로우를 정통으로 얻어 맞고 레퍼스 스톱 당해 그것으로 끝이었다.
IBF Jr.밴텀급에 이어 2관왕이 된 살라자르는 일찍부터 세계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는데 세 번의 메이저타이틀 도전은 모두 실패해 역부족을 드러냈지만 아마추어출신답게 발놀림이 좋고 순간적인 스피드를 동반한 스트레이트가 위협적이며 변칙플레이에도 능했다.

5번의 방어전은 대부분 자국에서 박빙의 승부를 펼쳐 홈타운디시젼을 강하게 풍겼고, 나이에 따른 한계로 인해 별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멕시코의 <루벤 산체스 레온>에게 맥없이 타이틀을 넘겨 주며 은퇴했다.
메히카리의 로컬복서 출신인 레온은 공격형으로서 발이 느리고 스윙도 커 자연히 수비도 허술한 편이나 캐리어가 쌓이면서 파워가 붙어 말년의 호세 데 헤수스를 KO로 잡아내기도 했다.
스페인 원정에 나선 2차방어전에서 내셔널챔피언에 불과한 <호세 로페스 부에노>에게 초반부터 수비에 허점을 보이며 3R만에 패퇴했다.
스페인출신으로는 이 체급의 첫 세계챔피언이었던 부에노는 레프트잽의 활용이 좋고 라이트스트레이트가 위력적이었으나 공격패턴이 단조롭고 스텝이 거의 없어 발빠른 아웃복서에게 약점을 갖고 있었다.

첫 방어에 성공한 뒤 타이틀을 내버린 채 유럽타이틀에 도전했다가 연이어 패전을 기록해 당시 WBO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줬다.
1990년대 들어 소트 치탈라다의 2차왕조를 필두로 유난히 많은 챔피언을 배출해 이 체급의 중심으로 떠올랐던 태국은 세기말 또 다시 손피차이 피사누라찬과 메드고엔 싱수라트가 WBA와 WBC 양대 메이저기구를 모두 장악하면서 대물의 등장을 예고했고, WBA회장국의 잇점을 살린 베네수엘라도 한몫 단단히 챙기며 신흥강국으로 부상했다.

반면, 이 체급의 전통적 강호 중 하나였던 우리나라와 일본은 프로복싱이 침체에 빠진 탓에 명함을 내밀지 못했고 유망주가 중량급으로 몰린 멕시코 역시 챔피언의 이름을 찾기 어려웠다.
또한, 후발주자인 IBF가 마크 존슨과 이레네 파체코를 앞세워 어느덧 메이저급으로 도약을 이룬데 비해 WBO는 여전히 월드클래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초년병 시절의 매니 파퀴아오를 KO시키고 <WBC>타이틀을 획득해 파퀴아오의 패배를 언급할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메드고엔 싱수라트>는 6살때부터 복싱을 시작했지만 축구선수와 탁구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운동에는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다.
접근전을 선호하는 인파이터로서 순발력이 좋고 공수전환이 빠르며, 끊임없는 대쉬로 상대를 괴롭혔는데 보다 다양한 공격루트가 필요했다.


첫 방어전은 가볍게 넘어섰지만 2차방어전에서 필리핀의 차세대 에이스 <말콤 투나카오>의 스피드를 따라 잡지 못한 채
7R에 불의의 일격을 당해 단명하고 말았다.
아마추어 국가대표 출신인 장신의 투나카오는 11전만에 세계정상에 오를 만큼 탄탄한 기본기와 스피드외에 펀치력까지 겸비했었는데 일본의 셀레스 고바야시에게 악전고투하여 12R무승부로 간신히 타이틀을 지켜낸 뒤 감량의 후유증 속에 태국의 자랑 <퐁삭렉 원종캄>이 휘두른 양훅을 맞고 불과 70초만에 드러눕기 시작하더니 1R에 쓰리녹다운을 당해 힘한번 써보지 못한 채 타이틀을 잃었다.

벼락같은 대관식을 치루며 뉴밀레니엄을 이끌어 갈 세계챔피언으로 등극한 퐁삭렉은 어느새 아시아의 맹주로 부상한
태국의 초특급 스타로서 유년시절부터 무에타이를 하다가 불과 16살에 프로복싱에 데뷔해 혈기왕성하고 강렬한 복싱을 구사했다.
왼손잡이복서지만 강한 펀치력을 바탕으로 한 저돌적인 파이팅은 그의 전매특허로서 주무기인 레프트훅과 라이트어퍼컷이 위력적이었다.
견고한 가드에 위빙과 더킹능력이 수준급이고 한번 불이 붙으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특히, 경기시작 34초만에 마무리한 나이토 다이스케와의 4차방어전은 에밀 플라드너가 기록한 이 체급의 최단시간 KO타임을 무려 73년만에 경신한 것이었다.
성급할 정도로 공격적인 만큼 수비에 허점도 있었고 링밖에서는 자유분방함을 꿈꾸며 절제하지 못해 저울대와 씨름하는 나태한 모습을 노출시키기도 했지만 2005년을 기점으로 파워를 앞세운 과거의 모습과 달리 노련미와 수를 꿰뚫는 지능적인 복싱으로 방어횟수를 늘려 갈 정도로 여유를 가졌다.
홈텃세가 심한 일본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후세인같은 1급 도전자도 여유있게 따돌렸지만 재임기간 중 잠정챔피언이었던 멕시코의 강타자 호르헤 아르세와의 대결을 기피해 옥에 티를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구엘 칸토가 갖고 있었던 이 체급의 최다방어를 기록을 훌쩍 넘어 18차 방어의 대기록을 수립함으로써 플라이급의 역사를 다시 쓴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19차 방어전에서 세번째 도전해 온 집념의 사나이 일본의 <나이토 다이스케>에게 초반부터 눈부상을 입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상대의 공격을 잇달아 허용해 재위 6년4개월만에 결국 왕좌에서 내려 왔다.

나이토의 타이틀 획득으로 일본은 WBA챔피언 사카다 다케후미와 함께 1975년 이래 32년만에 WBA와 WBC 양대기구를 독식하면서 이 체급에서 완벽하게 부활했다.
롱런챔피언 퐁삭렉을 상대로 감격적인 대관식을 갖은 나이토는 학창시절의 이지메를 극복한 노력과 근성의 파이터로
자세는 엉성해 보이지만 스피드와 펀치력을 겸비했고 허술한 수비를 특유의 변칙적인 공격스타일로 커버했다.
첫 방어전에서 가메다가의 둘째 다이키와 레슬링을 방불케하는 어처구니없는 졸전을 거쳐 퐁삭렉과의 리매치를 12R무승부로 선방한 뒤 5차방어에 성공했다.
가문의 설욕을 위해 나선 <가메다 고키>의 빠르고 정확한 타격과 견고한 수비에 막혀 타이틀을 넘겼다. 
2체급을 석권하며 자국내 인기복서로 자리잡은 고키는 캐리어가 쌓이면서 과거에 비해 안정적이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잠정챔피언에 올라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던 <퐁삭렉 원종캄>의 관록을 뛰어 넘지 못해 첫 방어전에서 낙마했다.


타이틀을 탈환한 퐁삭렉은 예전의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80전이 넘는 캐리어만큼이나 노련미가 붙을대로 붙어
여전히 경량급의 제왕다운 카리스마를 풍겼다.
재집권 후 4차례의 방어를 더해 통산 22차방어의 위대한 성상을 쌓아 올렸다.
5차방어전에서 감량고로 인해 평소보다 몸이 무거워진 탓에 한두수 아래인 필리핀의 <소니 보이 자로>에게 네차례나 다운을 빼앗긴 끝에 충격적인 KO패를 당해 퐁삭렉왕조의 종지부를 찍었다.
뜻밖에 대어를 낚으며 횡재한 자로는 양훅을 앞세운 공격형 파이터로서 10여년간 미니멈급부터 슈퍼플라이급까지 넘나들었으나 세계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넉달 뒤 지명도전자인 일본의 사우스포 아웃복서 <이가라시 도시유키>와 적지에서 열전을 펼친 끝에 아쉬운 12R판정패를 당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WBA>챔피언 <손피차이 피사누라찬> 역시 태국의 무에타이 출신으로 발이 느린 왼손잡이지만 파괴력 높은 강타를 소유했다.
7전만에 마이너기구 타이틀을 접수했고, 한 체급을 올려 PABA챔피언에 오른 뒤 더욱 더 빛을 발했다.
적지에서 발이 빠른 무패의 강타자 <에릭 모렐>을 쫓아 다니다 포인트에서 뒤져 2차방어에 실패했다.
장신의 푸에르토리코산으로 초기에는 강철주먹으로 불릴만큼 하드펀처였으나 점차 절묘한 아웃복싱으로 성가를 높여 가기 시작했다.


경쾌한 스텝으로 상대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고 자신의 거리에서 마음껏 펀치를 날리는 테크니션으로 레프트잽의 활용이 좋고 접근시 예리한 각도의 좌우훅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비록 시합 간격이 길었어도 톱랭커였던 호세 데 로페스와 덴카오산 카오비치트를 연달아 물리치며 태평성대를 누릴 것처럼 보였지만 6차방어전에서 지명도전자 <로렌소 파라>를 맞아 초반부터 밀려 다운을 허용하더니 거듭 실점을 당해 홈링에서 추락했다. 
워낙 안정된 실력을 자랑했지만 프로모터의 잦은 대전 연기로 심신이 지친 상황에서 컨디션이 매우 좋지 못했다.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300전에 가까운 아마추어 전적을 보유하고 있는 파라는 긴 리치와 빠른 발을 이용하는 아웃복싱의 전형으로 순간적으로 올려치는 라이트어퍼컷과 교묘한 타이밍에 날아드는 레프트잽이 위력적이고 자신이 설정한 틀안에서 경기를 마무리하는 강점이 있었다.
하지만 저질 체력과 변덕스런 페이스, 특히 체중조절의 어려움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첫 방어전부터 사카다 다케후미를 상대로 가까스로 타이틀을 지켰고, 3차방어전에서도 트래쉬 나카누마의 후반 추격에 12R 종료공과 동시에 다운을 당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무릎수술을 받느라 15개월만에 나선 6차방어전에서 중량을 맞추지 못해 타이틀을 박탈당한 뒤 세 번째 도전한 일본의 <사카다 다케후미>의 집요한 복부공격에 3R만에 두손을 들었다.

18살에 프로에 데뷔한 사카다는 4R보이부터 단계를 밟아 성장한 만큼 기본기가 충실하고 원투스트레이트와 좌우훅을 잘 쳤지만 파워가 부족한데다 내구력이 취약해 방어전때마다 다운을 허용하며 악전고투했다.
5차방어전에서 재도전한 <덴카오산 카오비치트>의 큰 스윙에 1R부터 비틀거리다 2R말미에 라이트훅을 관자놀이에 맞고
그대로 누웠다.
스승인 카오사이 갤럭시를 빼다 박은 둔탁하고 박력있는 스타일을 가졌지만 다른 것은 스승의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했다.


무에타이 경력을 인정받아 데뷔전부터 PABA 타이틀에 도전해 챔피언에 올랐고 21전만에 모렐에게 도전했다가 세계정상의 높은 벽을 실감하기도 했다.
3차방어전에서 재도전한 <가메다 다이키>와 지저분한 난타전을 벌인 끝에 상대적으로 펀치의 정확도가 떨어져 적지에서 벨트를 풀었다.
이로써 WBC챔피언 고키와 함께 가메다형제도 헤비급의 클리츠코형제처럼 양대기구를 석권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비교적 장신으로 아마추어에서 닦은 기본기에 일발강타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뛰어 넘는 성급함과 무례함때문에
링안팎에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최연소 세계챔피언을 노리고 동국의 WBC챔피언 나이토에게 도전했다가 엽기적인 반칙플레이를 범해 벌금은 물론 출전정지 등의 징계를 받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소극적인 범전으로 일관한 두 번의 방어전을 마친 뒤 조급증을 참지 못하고 2체급 석권을 위해 타이틀을 반납했다.
공석이 된 왕좌는 1년 반동안 잠정챔피언으로 있었던 파나마의 <루이스 콘셉시온>이 승계받았는데 단신의 강타자였던 그는 전임 카오비치트를 1R에 괴멸시킬 정도로 무서운 강타를 휘둘렀지만 작은 타이슨으로 소문난 멕시코의 <에르난 마르케스>에게는 11R TKO로 무너져 불과 석달만에 무관이 되고 말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IBF>쪽은 정상급 챔피언인 <이레네 파체코>가 매년 한번씩만 방어전에 나서며 굳건하게 왕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즈음 무서운 기세로 치솟고 있었던 지명도전자 <빅 다치니안>을 상대로 15개월만에 7차방어전에 나섰다가 상대의 카운터블로우를 맞고 그로기에 빠진 뒤 11R TKO패를 당해 5년8개월만에 권좌에서 물러났다.

 

중앙아시아의 소국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아마추어시절부터 70%가 넘는 KO율을 기록하며 돌주먹을 과시했던 다치니안은
풍부한 아마추어 캐리어를 가진 선수답게 엄청난 파워와 기교를 동시에 겸비하고 있었으며 레프트의 파괴력은 이 체급 최고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드니올림픽에서 탈락한 직후 호주에 수입돼 제프 페네크의 지도를 받으며 파죽지세의 연승가도를 달렸다.
여섯차례의 방어전 중 다섯 번을 KO로 쓸어담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펀치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희생자 명단에는 루이스 말도나도같은 실력파도 있었다.


하지만 필리핀의 복병 <노니토 도나이레>의 레프트카운터에 충격적인 5R 실신KO패를 당해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 날의 경기는 미국의 링지로부터 2007년 최고의 넉아웃과 최고의 이변으로 선정될 만큼 복싱팬들을 놀라게 했던 경기였다.
L.플라이급 세계랭커였던 글렌 도나이레와 형제복서로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도나이레는 아마추어시절 미국 주니어대표로 뛰었을 정도로 조숙한 천재로서의 편린을 내보였다.
프로데뷔 2전째 패배를 경험한 뒤 탄탄한 기본기와 동물적 복싱감각을 자랑하며 연승가도를 달렸고 힘이 실린 스피디한 펀치와 스위치히팅이 가능한 세련된 무브먼트를 통해 날이 갈수록 강타자의 면모를 과시했다.


레프트펀치의 위력은 파괴적이며 섬광같은 카운터블로우는 전율적이기까지 하다.
세 명의 도전자를 모두 KO로 제압하면서 톱랭크사의 봅 애럼에게 스카웃된 후 ‘넥스트 파퀴아오’를 기치로 타이틀 반납하고 한체급 위의 슈퍼플라이급으로 향했다.
도나이레의 벽에 가로막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모루티 음탈란>이 훌리오 세자르 미란다를 물리치고 새챔피언에 올라 지금까지 4연속KO방어를 기록하며 녹록치 않은 실력을 과시하고 있다.

세기말 호세 로페스 부에노가 내버린 <WBO> 타이틀은 챔피언결정전을 불과 몇시간 앞두고 알레한드로 몬티엘의 대타로 전격 기용된 멕시코의 <이시드로 가르시아>가 푸에르토리코의 강타자인 호세 로페스에게 예상밖의 선전을 펼친 끝에 차지했다.
WBO북미챔피언 출신인 가르시아는 파워는 떨어지나 끊임없이 상대를 쫓는 스타일로 접근전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편이었다.


2차방어전에서 한 주먹하는 몬티엘가의 막내 <페르난도 몬티엘>과 정면대결을 펼쳤으나 7R TKO패해 행운이 오래가지 못했다.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멕시칸 특유의 롱펀치에 파워가 실려있고, 컴비블로우 연타능력이 탁월했던 몬티엘은 스피드는 물론, 테크닉도 안정적이어서 롱런을 기대할만 했는데 만만치 않은 세 명의 도전자를 깨끗이 정리한 뒤 슈퍼플라이급으로 월장해 이 체급에서의 재임기간은 짧았다.


잠정챔피언으로 있다가 몬티엘의 뒤를 잇게된 <아도니스 리바스>는 니카라과 아마추어 국가대표출신으로 프로전향 4년만에 하드펀처인 디에고 모랄레스를 꺽고 슈퍼플라이급에서 WBO챔피언에 등극할만큼 자질을 갖춘 교타자였지만 아르헨티나의 영웅 <오마르 나르바에스>에게 희생양이 되며 첫 방어에 실패했다.

역시 국가대표 출신으로 아마추어경력이 길었던 나르바에스는 왼손잡이답지 않게 공격적이고 파워도 있었지만 확실한 컬러가 다소 부족해 챔피언 초기에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자국의 선배 카를로스 몬손의 14차방어기록을 넘어서는 장기집권에 성공하면서 관록이 붙어 WBO의 경량급 얼굴마담으로 언제 어디서나 안정된 경기운영능력을 펼쳐 보였다.


8년간 모두 16차례의 방어에 성공한 뒤 타이틀을 반납하고 슈퍼플라이급으로 월장해 37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역챔피언으로 뛰고 있을 만큼 괴력의 소유자다.
나르바에스의 후임에는 IBF 챔피언결정전에서 탈락했던 멕시코의 <훌리오 세자르 미란다>가 필리핀의 신예 리치 메프라넘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고 챔피언에 올랐다. 
힘이 좋고 터프하며 펀치력도 있어 화끈한 승부를 즐겨하나 오픈블로우가 많고 수비에 허점도 많았다.
세차례 방어에 성공하며 순항하는 듯 했지만 하와이언 펀처 <브라이언 빌로리아>와 체력전 끝에 타이틀을 넘겼다.


2관왕이 된 빌로리아는 과거보다 터프하고 강인한 모습으로 돌아와 첫 방어전에서 L.플라이급 현역 최강으로 손꼽혔던 지오바니 세구라의 도전을 완파한데 이어 구원의 숙적 오마르 니노 로메로마저 KO로 잡아내 목하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2000년대 이 체급의 MVP를 선정한다면 두말할 나위없이 WBC챔피언 퐁삭렉 원종캄과 WBO챔피언 오마르 나르바에스를 손꼽을 수 있겠지만 마크 존슨 - 이레네 파체코 - 빅 다치니안 - 노니토 도나이레로 이어진 IBF 챔피언리스트는 동 시대 최강의 전력이었고 적어도 이 체급에서 만큼은 IBF챔피언이 메이저기구 챔피언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이렇게 해서 어느덧 100년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 플라이급은 글자 그대로 전세계의 작은 사나이들이 자신을 불살랐던 각축장으로서 경량급 특유의 보는 재미를 더하면서 한때 많은 인기를 모았지만 최근들어 전통적인 양대 메이저기구 챔피언들의 질적 하락이 두드러지고 상위체급 진출의 징검다리 역할에 머무르면서 팬들의 구미를 당기지 못해 점차 비인기체급으로 전락해 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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