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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덕수궁 석어당

by Ajan Master_Choi 2008. 2. 21.

덕수궁의 첫 이름은 정릉(동) 행궁이었다.
뒤에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이 되었다.
정릉동 행군=> 경운궁=>덕수궁이 된 것이다.
파란만장의 역사가 내재해 있는 곳이다.

1592년 4월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일본군이 부산으로 쳐들어와 순식간에 한양을 덮치자 선조는 북으로 피난을 가야했다.
국토의 끝 의주에서도 불안하자 선조는 명나라로 가겠다고 했다.
국왕이 망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어이없는 투정에 다행히도 눈밝은 신하들이 있어서 명으로의 망명은 불발에 그쳤다.
국왕이 전쟁에서의 죽음이 두려워 사대하는 대국으로 망명을 하겠다는 발상은 이후 선조를 현군에서 암군으로 강등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국왕이 없는 나라의 백성은 누굴 의지하고 살아야 하나?

그러고보면 뒷날 병자호란때 항복을 하느니 장렬히 죽음으로 선비의 도를 지켜야한다는 김상헌을 위시한 척화파의 주장은 차라리 의롭기까지 해보인다.
물론 저들도 입으로만 결사항전이지 막상 항복을 하자 죽는이는 없었다.
말이 가지는 허상, 입으로만 성리학을 외치는 헛개비들을 보는 것같아 씁쓸하다.

다행이랄까?
중국 역사상 가장 무능하다고 평가되는 당시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조선에 파병을 허락한다.
이로인해 조일 전쟁은 기나긴 진흙밭에 들었다.
무려 7년이다.

명군의 참전으로 기세를 회복한 조명 연합군은 남진을 하고 선조는 그 뒤를 따라 한양으로 올수 있었다.
그때가 1593년이었다.
막상 한양에 도착하니 머무를 곳이 없었다.
임금이 한양을 버리자 성난 백성들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을 불태웠다.
나 살자고 백성을 버린 군주에 대한 응징이었다.

선조는 그나마 온전한 집을 물색해 들어가야 했다.
그게 지금의 덕수궁 터(당시는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집이었다.
월산대군은 성종 임금의 친형이다.
예종이 핏덩이를 두고 이른 나이에 죽자 궁궐밖에 있던 역시 요절한 세조의 장손 의경세자(추존왕 덕종)의 아들중에 임금의 자리가 가게 되었다.

순서대로라면 월산이 성종의 자리에 앉아야 했으나 당시의 권세가 한명회 신숙주 등이 두사람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와 짜고 한명회의 사위인 자을산 대군(성종)을 임금으로 앉혔던 것이다.
다행히 월산은 이 힘의 순리를 받아들여 음풍농월로 세상과 멀리해 무탈하게 여생을 보냈으나 길지는 못했다.
34살에 운명했으니...
성종도 단명.
37살에 운명했다.

세조에게 쫓겨난 단종의 저주였을까?
세조의 자손들은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
세조 자신도 근근히 50을 살았을 뿐이고 그의 장자 의경세자도 스물 초반,
예종도 스물 남짓,
월산과 성종도 사십을 넘기지 못했다.

그 월산의 집이 임진란 혼란의 와중에 일본군의 지휘소로 쓰여 성했던 것이다.
선조는 그 집에 들어 국정을 돌봤다.
조선의 처지만큼 궁색했다.
정식 궁궐이라 칭하기엔 궁색했는지 정릉 행궁 또는 정릉동 행궁이라 명명했다.

그렇게 행궁에서 폐허가 된 조선을 경영했고 전쟁이 끝나고 몇년 뒤 선조는 그 집에서 운명했다.
1608년의 일이다.
새로 들인 젊은 부인 김씨와 딸 정명공주,
꿈에 그리던 아들 영창대군을 남겨두고 끝끝내 전쟁전 자신이 머물던 창덕궁으론 가지 못했다.
객사라고 해야할까...

임진란이 선조의 운명을 바꿨다.
그뒤로 그는 어리석은 임금이란 뜻의 암군으로 분류된다.
현군과 암군은 시련이 왔을때 어떻게 대처하는가로 극명히 드러난다.

선조의 죽음으로 당시 20대의 왕비 김씨는 대왕대비가 된다.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린 이 여인은 훗날 비극의 대비인 인목대비가 된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인목대비와 힘겨루기에서 이긴 서자 광해군이 정릉동 행궁 즉조당에서 즉위한다.
그는 무너진 궁궐의 복원하는 사업, 영건 사업에 몰두해 무너진 국격을 살렸으나 먹고살기 힘든 민초들의 부역으로 원망을 받는다.

1611년.
임금은 창덕궁을 중건해 들어간다.
무려 19년만의 복귀였다.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정릉동 행궁은 경운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옮기면서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그대로 둔다.
이미 왕권을 두고 심각한 마찰이 있었다.

각설하고...

인목대비의 아들,
선조의 정통성을 물려받은 아들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가고 그곳에서 죽는다.
인목의 아버지 김제남은 칠서의 난에 연루되어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경운궁은 서궁으로 격하되고 그곳에 유폐된 인목대비는 외부와의 소통이 끊긴다.
이미 대비에서 후궁으로 강등되고 소위 폐모살제가 된것이다.
어미는 후궁이 되고 영창대군은 죽인것이다.

광란의 시대, 조선의 권력은 마찰이 있으면 죽거나 유배가 당연했다.
서궁에서 울분의 나날을 보내는 인목대비는 울분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그게 오늘날 궁중문학이 된 계축일기이다.
이를 통해 그녀의 억울함과 당시의 정치사를 엿볼수 있다
무시받은 세월이 무려 십여년...

서궁 사방에서 똥내가 진동하고 썪은 내가 코를 뭉그러뜨렸다고 한다.
살아도 사는게 아닌 삶.
어미와 시집못간 딸(정명공주)은 그렇게 인고의 날들을 보내야 했다.
새로운 세상은 올 것인가...
암담했을 것이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날이 왔다.

1623년 3월.
한 떼의 군사들이 경운궁의 문을 열라 외친 것이다.
인목대비는 마침내 저 미친 임금(광해군)이 자신의 시집 못간 늙은(당시 공주는 21세로 노처녀중 노처녀였다) 공주를 잡으러 온 줄 알았다.
결사적으로 궁의 문을 열지 않자 이제 막 창덕궁을 접수하고 반란에 성공한 능양군(후일 인조)은 직접 경운궁을 찾아와 할머니인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설명하고 그녀에게서 옥새를 받고 왕위를 인정 받는다.
그 즉시 인목대비가 머물던 석어당 옆, 
광해군이 즉위핫 즉조당에서 왕에 오른다.
훗날 죽어 인조대왕이 된다.

자, 이제 복수의 일이 남았다.

그녀는 인조에게 광해군 부자의 머리를 가져오라 한다.
살점을 씹어 한을 풀겠다고 한다.
그러나 새 임금은 왕가의 도리는 그게 안된다며 인목을 달랜다.

경운궁에 몸이 묶여 잡혀온 광해군.
그때가 때마침 음 3월이었으니 이 석어당에 살구꽃이 피었을 것이다.

저 살구나무가 그때도 그 자리에 있었을까?

궁궐의 나무는 뜬금없이 심지는 않을 터.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시인묵객이 수시로 찾아들어 음풍농월로 한세상 살았을 월산대군이 집안에 봄을 맞이하는 매화를 심었을 것이며 술을 부르는 행화, 즉 살구를 어찌 심지 않았으랴.

살구꽃 찬란하게 핀 석어당 아래 온 몸이 묶여 꿇어앉은 폐주 광해군.
인목의 살기와 그와 반대로 봄바람에 하염없이 날리는 꽃잎을 보면서 광해군은 권력의 부질없음을 헤아렸을까?
그랬을거 같다.
왜냐하면 그는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강화도를 시작으로 태안 제주로 이배를 다니면서 무려 18년을 더 살았다.
권력의 부질없음을 통달한 이의 내려놓음 이 없으면 설명이 불가한 일이다.

반면 권력욕을 내려놓지 못한, 폐세자가 된 그의 아들은 강화에서 도망치다 잡혀 죽었고 며느리와 부인도 스스로 목숨을 내려놓았다.
다만 그는 홀로 갖은 수모를 견뎌내며 제주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장수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
죽어 생모의 묘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에 묻혔다.
경운궁은 오랜 세월이 흘러 조선의 운명이 다할 무렵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도망치듯 들어오면서 다시 세인의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는 이내 물러나야 했다
순종이 즉위하고 아버지의 장수를 빌며 덕수궁이라 명명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한다.

덕수궁이 되었어도 석어당은 여전히 남아있어 역사속 그날을 상기시킨다.

지금의 현판은 후일 영조 임금이 쓴 글씨.
옛석昔 임금어御, 이때 옛 임금은 선조를....

각설하고...

단청없는 백골 2층.
한옥 석어당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살구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칙칙하기만 하던 석어당 건물이 화려해 보인다.
저 꽃잎아래 무릎 꿇었을 사내와 그 사내를 내치고 권력을 되찮은 여인이나 이젠 석인, 즉 옛사람이 되었다.

권력도 재력도 화무십일홍?
지고나면 추억만 남는다.
있을때 선정을 베풀고 있을때 남을 위해 쓰고 피었을 때 때맞춰 보는 일.
그게 지나간 세월이 보여주는 교훈 아닐까?

4년만에 찾은 석어당 늙은 살구나무 꽃을 보며 상념에 젖는다.

일장춘몽이다.
그래 세상사 지나고 보면 봄날의 꿈같이 아련하고 아득한 일일진저.
그럼에도 부지런히 계절을 즐기고~ 

우리 무에타이도 즐기자 ~

 

즐겨야만 이런 부질없는 상념이라도 할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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