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체중 160파운드의 미들급은 현존하는 17체급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체급이다. 19세기 많은 헤비급 선수들의 최소 중량이 170파운드였다가 1920년대 175파운드로 설정됐던 점을 고려하면 이 체급은 당시 서양인들의 평균적인 체격을 반영해 미들급으로 호칭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라이트급이 생겨나면서 프로복싱은 헤비-미들-라이트로 이어지는 3단계의 단순하지만 합리적인 체급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글러브를 낀 미들급 첫 세계타이틀전은 1884년 7월 30일 뉴욕의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열린 <논파렐 잭 뎀프시>와 조지 풀제임스 간의 대결이었다.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의 초대 챔피언 뎀프시는 빠르고 정확한 앞손에 힘이 실린 라이트 펀치를 소유했는데 152파운드 정도의 체중에도 덩치 좋은 풀제임스와 22R의 사투를 벌인 끝에 KO로 눕히고 이 체급의 화려한 서막을 열였다.
5년간 3차례의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며 무패행진을 달리다가 조지 라블랑쉬에게 1889년 32RKO패를 당하고도 나중에 상대의 팔꿈치 가격이 확인돼 계속 왕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맹주였던 빌리 매카시를 꺽어 명실상부한 챔피언으로 인정받았지만 NSC가 출범했던 1891년 <봅 피치몬즈>에게 13RKO패로 타이틀을 상실한 뒤 32살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초창기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챔피언 피치몬즈는 18살 때 뉴질랜드에서 명장 젬 메이스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복싱에 입문했는데 덕분에 그의 레프트잽은 화살같은 속도와 기교를 갖추게 되었고 필살의 라이트펀치는 하룻밤에 4명을 때려 눕혔던 일화가 전해 내려올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또한,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었던 복부공격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맨주먹 싸움이 글러브 복싱으로 진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직후 허리가 길고 안짱다리에 너무 마르고 대머리까지 벗겨져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두 번의 방어전에도 불구하고 6년 넘게 정상을 지켜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체중을 뛰어넘는 타고난 파워에 기술적인 진보까지 더해진 그는 1897년 헤비급의 2대 세계챔피언 제임스 코베트의 명치를 찍어 헤비급 정상에 오르는 괴력을 발휘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후일 피치몬즈는 40살의 나이에 조지 가드너를 제물로 L.헤비급까지 정복해 사상 최초로 3체급을 제패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뛰어난 업적이나 실력에 비해 큰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초창기 프로복싱에 끼친 공로는 그 누구보다 컸던 명인이었다.
피치몬즈가 월장하게 되면서 1890년대 웰터급 세계챔피언으로 명성을 떨치던 미국의 <토미 라이언>은 잭 보너를 20R판정으로 누르고 2체급을 석권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이미 미들급 초대챔피언 뎀프시를 3R에 요절낼 만큼 치명적인 실력을 자랑했던 라이언은 이 체급에서 더욱 더 만개한 기량을 뽐냈다. 그는 당시의 여느 선수들과 달리 힘보다는 기술과 스피드로 스타일의 혁신을 주도했고 상・하체가 일치된 직선 타격을 극대화시켜 오늘날 스트레이트의 원조가 되었다.
이후 방어형 크라우칭을 기본으로 하는 그의 복싱은 수많은 복서들이 기술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실제로 스파링을 통해 1900년대 초반 헤비급 세계챔피언 제임스 제프리스 등 여러 선수들에게 전수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타이틀 방어전 대한 개념이 희박해 라이언의 공식적인 방어 기록은 세번에 불과했지만 논타이틀전을 통해 연승가도를 질주했고 1907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10년 가까이 챔피언으로 군림해 지금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한때 L.헤비급 월장을 고려했지만 더 이상 무리하지 않고 링을 내려와 체육관을 운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라이언의 후임에는 사나운 폴리시인의 피가 흐르던 <스탠리 케첼>이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차갑고 이지적인 외모와 달리 슬라브인의 기질을 타고난 케첼은 불굴의 투지와 저돌적인 인파이팅으로 대부분의 경기를 KO로 장식해 미시간의 암살자라는 무시무시한 링네임이 붙었다. 아직은 거칠고 투박했지만 앞선 챔피언들보다 진화된 공격 기술을 구사했는데 특히, 몸 전체를 날려서 던지는 파워풀한 펀치는 인간병기나 다름없어 짜릿한 전율을 선사했다.
이를 통해 당시 마라톤처럼 길게 느껴지던 복싱이 단 한방으로도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케첼의 챔피언 등극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웰터급 세계챔피언 마이크 트윈 설리반을 1RKO로 눕혔던 1908년 2월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후 설리반의 쌍둥이 잭에 이어 자신과 스타일이 비슷했던 라이벌 빌리 파프케까지 누르면서 비로소 진정한 챔피언으로서 천하를 호령했다. 그러나 4차방어전에서 재회한 <빌리 파프케>에게 뜻밖의 업셋을 허용하는 실수를 저질러 권토중래를 다짐해야만 했다.
독일 이민자 2세였던 파프케 역시 벼락같은 강펀치를 소유한 터프가이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투지만점의 인파이터였다. 하지만 설욕에 나선 <스탠리 케첼>의 피스톤 펀치에 광폭하고 잔인한 리벤지를 당해 겨우 80일만에 낙마했다. 왕좌에 복귀한 케첼은 L.헤비급 세계챔피언 출신의 잭 오브라이언을 3R만에 격침시킨데 이어 첫 방어전에서 숙적 파프케를 재차 완파하며 백인의 우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09년 백인들의 분노를 샀던 최초의 흑인 헤비급 세계챔피언 잭 존슨과의 흑백대결에 내몰리게 되었다. 당시 미국 사회는 흑인 차별과 멸시가 당연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백인이 존슨을 때려 눕혀주길 바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케첼은 백인 관중들을 의식해 레프트잽으로 시간을 보내던 존슨을 12R에 쓰러뜨려 잠시 환호성을 들었지만 곧바로 일어선 존슨에게 라이트어퍼컷을 맞고 앞니가 6개나 빠지는 처참한 몰골로 실신해 당랑거철의 무모한 도전이었음을 입증하고 말았다.
이듬해 존슨과의 리매치를 원했던 케첼은 어이없게도 친구 목장에서 훈련 도중 치정에 얽힌 총격으로 24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해 더 이상 링에 오를 수 없었다. 두차례 모두 재임기간이 길지는 않았으나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싸우는 거칠고 사나운 파이팅과 처절하기 짝이 없는 그의 경기스타일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케첼 사후 이 체급은 전임 파프케부터 조니 톰슨, 휴고 켈리 등으로 이어지며 리니얼 챔피언을 자임했으나 공식적인 챔피언 결정전이 없었기 때문 모두 공인받지 못했다. 결국, 1913년에 이르러 미국의 <프랭크 클라우스>가 유럽에서 처음 열린 미들급 타이틀전에서 파프케를 크게 압도하며 15R에 실격승을 거두고 새로운 챔피언으로 공인되었다. 단신의 클라우스는 상대의 안쪽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손이 많기로도 유명했지만 첫 도전자인 <조지 칩>을 과소평가한 탓에 6R 통렬한 라이트훅을 턱에 맞고 생애 첫 KO패의 굴욕을 맛보았다.
리투아니아계인 칩은 광산에서 일하며 단련된 강한 어깨 덕분에 해머같은 강펀치로 높은 KO율을 자랑했다. 두달 뒤 캐치웨이트 시합으로 조우한 클라우스를 또 다시 5RKO로 눕혀 챔피언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으나 19살의 독일계 신예 <알 맥코이>에게 경기 시작 115초만에 레프트어퍼컷을 맞고 가라앉아 6개월만에 무관이 되었다. 일약 신데렐라로 떠오른 맥코이는 이 체급에서 최연소이자 첫 번째 왼손잡이 세계챔피언이었다. 양손이 모두 강한 하드펀처였지만 무판정 시합이 많았던 탓에 생각보다 인기가 많지 않았고 3년반 만에 가진 첫 방어전에서 <마이크 오다우드>에게 턱까지 깨지는 수모를 겪으며 6RKO패를 당해 기대와 달리 일찍 저물었다.
비교적 공수 양면에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오다우드는 특이하게도 육군에 입대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유일한 세계챔피언으로 이름을 남겼다. 컴백 후 논타이틀전에서 맥코이를 재차 KO시켜 건재를 과시했으나 뉴욕 출신의 <조니 윌슨>에게 판정으로 패해 전임들과 마찬가지로 첫 방어전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사우스포임에도 비교적 하드펀처에 속했던 윌슨은 뉴욕의 갱단과 어울리며 몇몇 경기에서 승부 조작에 가담해 대중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1년 뒤 오다우드와의 재대결에서 승리해 케첼 이래 처음으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챔피언이 되었지만 <NYSAC>가 돌연, 1922년 필 크럭에게 압승을 거둔 <데이브 로젠버그>를 새로운 챔피언으로 옹립해 본의 아니게 반쪽짜리 챔피언으로 전락했다.
윌슨과 동향인 로젠버그는 아마추어 챔피언 출신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석달만에 전임 <마이크 오다우드>에게 8R 실격패로 물러났고 이듬해 오다우드가 은퇴하자 NYSAC는 슬그머니 윌슨을 챔피언으로 복위시켰다. 이같은 혼란속에서 1923년이 되서야 2차방어전을 맞이한 윌슨은 L.헤비급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던 강호 <해리 그렙>에게 대차의 판정으로 무릎을 꿇어 3년만에 왕좌에서 물러났다. 지금도 올타임 톱텐으로 손꼽히는 그렙은 터프하고 맹렬한 인파이터로서 ‘피츠버그의 풍차’라는 링네임처럼 경기내내 빠른 움직임과 함께 다양한 각도에서 쏟아내는 폭풍같은 펀치세례로 유명했다.
이미 L.헤비급에서 전현직 세계챔피언 잭 딜런과 배틀링 레빈스키 뿐만 아니라 무패의 최강 진 터니마저 제압해 무관의 제왕으로 불러도 좋을 만큼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70cm가 조금 넘는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강철같은 체력과 내구력을 바탕으로 상대의 안팎을 수시로 들락거리는 탁월한 푸트웍에 빠른 핸드스피드까지 겸비해 L.헤비급은 물론 헤비급에서도 통할 정도였지만 일발필도의 파워 부족은 중량급 파이터로서 약점이었다.
왕좌에 오른 그렙은 과거 서밍을 당한 탓에 오른쪽 눈이 거의 실명된 상태에서도 마치 물만난 고기처럼 방어전을 거듭했고 1925년 7월 2일 당대 최고의 빅매치였던 웰터급 세계챔피언 미키 워커와의 5차방어전에서는 엄청난 난투극(?)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머쥐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날 링사이드에서 관전한 유명한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그를 최강의 전사로 추켜세웠고 여러 작가들이 영감을 얻어 예술작품을 남겼을 정도로 위대한 챔피언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핸섬한 외모에 어울리는 여성편력으로 자주 가십거리에 등장하더니 이듬해 갖은 7차방어전에서 <타이거 플라워스>에게 판정 논란 속에 석패해 챔피언 벨트를 풀어 주었다. 6개월 후 플라워스와의 재전에서 또 다시 패배한 그렙은 자동차 사고로 인한 코수술을 받다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32살의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비록 챔피언에 재임했던 기간은 3년여에 불과했지만 재능이 풍부한 선수들이 우글거리던 당대에 헤비급까지 오르내리며 300전 가까이 싸운 그의 캐리어는 챔피언으로서의 기록을 뛰어넘는 굴지의 명장이었음을 증명하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아프리카계였던 플라워스는 헤비급 세계챔피언 존슨에 이어 두 번째 탄생한 흑인 세계챔피언이자 이 체급 최초였다. 아웃복싱에 가까운 스타일로 비교적 손을 많이 내는 편이었고 사우스포다운 날카로운 카운터 펀치는 물론 상대의 힘을 역으로 이용한 무서운 연타까지 장착했다. 여기에 약점인 유리턱을 감추기 위한 교묘한 회피능력이 몸에 배어 있어 시대를 앞서가는 출중한 디펜스를 자랑했다.
전 챔피언 그렙을 다시 한번 돌려세운 뒤 2차방어전에서 <미키 워커>의 집요한 공격에 예상밖의 판정으로 패하며 주위의 기대보다는 단명에 그쳐 아쉬움을 주었다. 이후 재기에 성공해 워커와의 리매치를 앞둔 플라워스도 눈주위의 흉터 제거 수술 도중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이해 미들급 세계챔피언들의 불행이 계속 이어졌다. 염원하던 2체급 석권을 달성한 워커는 강력한 좌우훅을 앞세워 더욱 더 왕성한 공격력을 발휘하며 두차례의 방어에 성공해 자신의 진가를 마음껏 펼쳐 보였다. 그리고 이즈음 불어나는 체중 때문에 고민이 커지자 L.헤비급으로 눈을 돌려 트리플 크라운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미 전 챔피언 마이크 맥티그를 상대로 한 시운전을 1RKO로 장식해 자신감이 충만했지만 토미 로프란과의 정식 타이틀전에서는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며 판정패를 당해 물거품이 되었다. 3차방어전에 성공한 뒤 1929년 이번에는 미들급 왕관까지 포기하고 내친김에 헤비급으로 월장했으나 그의 원대한 꿈은 전 챔피언 막스 슈멜링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고 L.헤비급 정상 재도전 역시 맥시 로젠브룸에게 가로 막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은퇴 후 화가로 변신해 뉴욕과 런던에 자신의 그림을 전시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프로복싱에 가장 먼저 탄생한 체급으로서 올해로 135년째를 맞이한 이 체급은 초창기부터 사상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 피치몬즈를 비롯해 라이언, 케첼, 그렙 같은 올타임급 슈퍼 파이터를 연이어 배출하면서 헤비급과 더불어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다만, 기이하게도 초대 챔피언 뎀프시를 필두로 여러 챔피언들이 각종 사고와 질병으로 일찍 삶을 마감해 한때 저주받은 체급으로 불리울 정도로 비명횡사가 줄을 이었다.
미키 워커의 타이틀 반납 이후 이 체급은 다시 한번 복수 챔피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먼저, 신설 기구인 <NBA>가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를 거쳐 1932년 최종전에서 오도네 피아자를 6RKO로 제압한 미국의 <윌리엄 고릴라 존스>를 챔피언으로 인정했다. 키에 비해 유난히 긴 팔을 갖고 있어 이름까지 고릴라로 개명한 존스는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레프트잽과 날카로운 컴비네이션으로 상대를 요리했고 140전을 넘게 싸우면서도 단 한차례의 다운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탁월한 맷집과 디펜스를 자랑했다.
그러나 첫 방어에 성공한 뒤 느닷없이 제3의 기구인 IBU 챔피언 결정전에 나섰다가 프랑스의 <마르셀 틸>에게 로우블로우로 11R 실격패를 당해 NBA 타이틀까지 날리며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5년 후 서른이 넘은 나이에 프레디 스틸을 상대로 타이틀 탈환에 나섰지만 이미 전성기를 지난 탓에 완패했고 은퇴 후에는 1920년대의 섹스심벌 메이 웨스트의 보디가드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프로 데뷔했던 대머리 챔피언 틸은 초기에는 승패를 반복하며 저니맨과 다름없었지만 경기 경험이 쌓이고 성인으로서 체력이 뒷받침되면서 양손에 파워까지 붙어 월드클래스로 도약할 수 있었다. 첫 방어 후 1년 넘게 방어전을 갖지 않아 NBA 타이틀을 박탈당했지만 당시 유럽 중심의 국제기구였던 IBU 챔피언으로서 9차례나 타이틀 방어에 성공해 자국은 물론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NYSAC>는 1933년 <벤 제비>를 새로운 챔피언으로 세웠는데 그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강타자 프랭크 바타글리아와 맞서 오른쪽 눈자위를 자르고 12R에 TKO승을 거두었다. 뉴욕 태생의 유대계로 부지런히 들락거리면서도 상대의 안쪽을 파고드는데 강점이 있었고 레프트훅을 앞세운 보디공격에도 매우 능한 편이었다. 하지만 첫 방어전부터 무승부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니 3차방어전에서 웰터급 세계챔피언 출신의 <루 브로일라드>의 강타 앞에 7R만에 무릎을 꿇고 내리막을 걸었다.
사우스포의 강타자로 완벽히 변신한 브로일라드는 틸의 타이틀을 박탈한 <NBA>로부터도 뒤늦게 챔피언의 지위를 인정받아 명실상부한 2관왕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사실상 세계 공인의 챔피언 결정전을 겸한 첫 방어전에서 <빈스 던디>에게 패배하며 80일만에 무관이 되어 그 의미가 반감되고 말았다.
웰터급 세계챔피언을 지냈던 조 던디의 동생인 빈스는 이미 7개월 전 제비에게 도전해 식은땀을 흘리게 했던 장본인으로서 파워 부족에도 불구하고 빠른 발놀림과 피스톤같은 원투 펀치로 기대를 모았다. 두차례의 방어전을 깔끔한 승리로 장식한 뒤 논타이틀전에서 연패에 빠지더니 <테디 야로츠>의 레프트잽과 교묘한 클린치에 시달리며 졸전 속에 타이틀을 넘겨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역시 솜방망이같은 주먹을 소유한 야로츠는 강력한(?) 디펜스와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이기는 복싱에 능해 챔피언에 오를 당시 80전 중 패배는 고작 두 번에 불과했다. 하지만 같은 폴리시인 <에디 베이브 리스코>와 타이틀을 걸고 복수에 나섰다가 무릎 부상 속에 두차례의 다운을 내주며 판정으로 패해 한계를 맞이했다. 아마추어에서 오래 활약했던 리스코는 프로 전향 후 신통치 않은 성적으로 장래가 불투명했으나 힘을 주체로 한 공수가 먹히면서 상승세를 탔고 유독 야로츠한테 뛰어난 상대성을 발휘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한동안 임팩트가 떨어지는 고만고만한 선수들이 왕좌를 이어간 탓에 존재감이 약했던 이 체급은 1936년 타코마의 자객 <프레디 스틸>의 등장으로 다시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2차방어에 나선 리스코를 누르고 대관한 스틸은 조각같은 외모와 달리 소위 닥공(?) 스타일로 인기가 높았는데 강력한 파워에 엄청난 체력까지 소유한 전형적인 싸움꾼이었다. 레프트잽에 이은 강력한 라이트스트레이트가 장기였고 안면과 보디를 오르내리는 각도 큰 좌우훅 역시 화력이 대단했다.
왕좌에 오른 스틸은 전 챔피언인 존스와 리스코에게 완승을 거둔 데 이어 3연속 KO 방어를 기록하며 불과 1년 6개월만에 5차방어에 성공하는 놀라운 하이 페이스로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러나 논타이틀전에서 프레드 아포스톨리에게 뜻밖의 리벤지를 당하더니 NYSAC로부터 타이틀까지 박탈당한 채 <알 호스탁>의 강펀치에 1R에만 4차례 캔버스를 굴러다니며 충격적인 KO패를 당해 롱런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은퇴 후에는 준수한 용모 덕분에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 활동했다.
이변의 주인공이 된 <NBA> 챔피언 호스탁은 체코계로서 사나운 슬라브인이라고 불리울 만큼 거칠고 맹렬한 하드펀처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넉달 뒤 나선 첫 방어전에서 초반에 양주먹 모두 부상을 당한 탓에 라이벌 <솔리 크리거>에게 힘한번 못써보고 타이틀을 내주는 실수를 범했다. 본래 수비형 복서였던 크리거는 왼쪽팔꿈치에 부상을 당하면서 인파이터로 전향해 뒤늦게 빛을 본 케이스였는데 7개월만에 <알 호스탁>에게 타이틀을 돌려줘 그 영광이 오래가지 못했다.
스탠리 케첼 이래 처음으로 미들급 타이틀을 탈환하는데 성공한 호스탁은 에리히 실리그를 1RKO로 꺽고 부활하는 듯 했지만 이번에는 <토니 제일>에게 가로막히며 13RTKO로 물러나 2차방어에 실패했다. 한편, <NYSAC>쪽은 스틸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겼던 <프레드 아포스톨리>가 1938년 NBA 웰터급 챔피언 출신의 영 코베트 3세를 누르고 새챔피언에 올랐다. 골든글러브 우승 후 프로에 뛰어든 아포스톨리는 탄탄한 기본기와 안정된 공수를 바탕으로 챔피언 클래스의 선수들을 연파해 세계챔피언 후보 영순위로 손꼽혔는데 이미 1년 전 IBU 챔피언 틸의 얼굴을 피로 물들이며 은퇴로 내몰기도 했다. 그러나 왕좌에 오르자 호시탐탐 L.헤비급을 넘보다가 후일 챔피언에 오르는 빌리 콘에게 연패를 당한 데 이어 필리핀의 <세페리노 가르시아>에게 7RKO로 침몰해 이 체급의 타이틀마저 상실하며 슬럼프에 빠졌다.
모처럼 미국세를 벗어나 아시아 복서 최초로 미들급 정상을 차지한 가르시아는 당대 최고의 하드히터로서 후일 키드 가빌란에 의해 대중화된 볼로 펀치를 처음 사용했고 노련한 수비와 맷집은 물론 150전에 가까운 캐리어로 만년에 오른 왕좌임에도 쉽게 넘볼수 없는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조국에서 처음 열린 세계타이틀전에서 글렌 리를 가볍게 일축한데 이어 전대미문의 4체급 석권을 노리던 헨리 암스트롱의 도전을 무승부로 세이브하는 자랑스러운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방심한 탓이었는지 3차방어전에서 미국의 <켄 오버린>에게 예상외로 고전하며 타이틀을 넘겼다. 파워부족을 빠르고 영리한 경기운영으로 커버했던 오버린은 강호 스티브 벨로이스의 두차례 도전을 논란 속에 막아낸 뒤 <빌리 슈스>와는 잘 싸우고도 억울한 판정패를 당하는 아이러니를 겪었다. 아마추어 시절 슬러거로 소문났던 슈스는 오른손 부상 때문에 사실상 원핸드 파이터로 뛰었던 이색적인 선수였는데 이듬해 돌연 해군에 입대하면서 왕좌는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1940년 <NBA> 챔피언에 등극한 제일은 폴란드계의 쾌활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상대와 조건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그야말로 투사 중의 투사였다. 강력한 좌우훅을 앞세워 전라운드를 치고 들어가는 저돌적이고 용맹스러운 파이팅때문에 강철의 사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는데 실제로 제철소 소년공 출신이기도 했다. 데뷔 초만해도 그는 돈벌이를 위해 너무 자주 링에 오른데다가 부실한 디펜스에 노가드의 위험천만한 모습까지 드러내며 KO승 아니면 판정패를 반복해 도무지 일류선수로 성장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공동매니저 샘 피앤과 아트 윈치를 만나면서 경기운영능력은 물론 막강한 파워에 날카로운 보디샷까지 겸비한 강타자로 다듬어졌고 전처럼 막무가내로 경기에 나서는 일도 없어졌다. 세 번째 왕좌 복귀를 꿈꾸던 호스탁을 2R에서 무려 8차례나 쓰러뜨리며 산산조각 내버린 뒤 3차방어전에서 무관의 제왕이라던 기교파 조지 에이브람스까지 잡아내면서 <NYSAC> 타이틀까지 손에 넣어 진정한 미들급 세계 최강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절정의 시기에 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제일 역시 군입대를 피할 수 없었고 무려 4년이 지나서야 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시상황을 고려해 여전히 세계타이틀을 보유했던 제일은 거의 5년만에 나선 네 번째 방어전에서 9살 연하의 <록키 그라지아노>와 다운을 주고받는 치열한 난투극을 펼친 끝에 6RKO승을 거두고 건재를 과시했지만 10개월 뒤 리매치에서는 반대로 6R에 역전을 허용하며 레퍼리스톱이 걸려 무관으로 전락했다. 두 번에 걸친 이들의 전투는 마치 부모를 죽인 철천지 원수가 만난 것처럼 무자비한 난타전을 전개해 링지로부터 1946년과 1947년 연이어 올해의 경기에 선정될 정도로 복싱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였다.
명배우 폴 뉴먼의 출세작인 ‘상처뿐인 영광’의 실제 모델이었던 그라지아노는 교도소를 밥먹듯이 드나들던 길거리 파이터 출신으로 작은 키에 훈련도 소홀했지만 거칠고 빠른 컴비네이션과 파괴력 높은 주먹을 앞세워 금방 강타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왕좌에 오르기 전부터 뇌물공여 시비때문에 NYSAC는 물론 NBA에서도 출전정지 처분을 받는 등 링안팎에서 트러블을 겪으면서 절치부심 복수를 다짐하고 나온 <토니 제일>의 강타 앞에 3R만에 실신해 양강의 처절했던 3연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재임에 성공한 제일은 강렬했던 그라지아노와의 3연전으로 인해 여전히 철옹성과도 같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석달 뒤 가진 첫 방어전에서 당시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온 프랑스의 <마르셀 세르당>에게 11R만에 좌초해 그대로 링을 떠났다. 이 경기를 포함해 3년 연속 최고의 경기에 주인공이 되었던 제일은 KO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파이터였고 방어횟수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7년 넘게 미들급 천하를 호령하며 1940년대를 가장 뜨겁게 달군 사나이로 이름을 날려 올타임급 레전드로 평가받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알제리 태생의 세르당은 얼굴을 가슴에 바짝 붙인 상태에서 날리는 롱레인지의 양훅이 위력적이었고 상대의 몸싸움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터프하면서도 손이 많았던 인파이터의 전형이었다.
110전을 싸우는 동안 두 번의 실격패 외에는 저본일이 없을 정도로 무적을 자랑했지만 웰터급에서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자 미들급으로 월장해 서른이 넘은 나이에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러나 9개월만에 나선 첫 방어전에서 터프가이 <제이크 라모타>의 맹렬한 드라이브에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을 당하며 10R만에 기권해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다. 비록 재임기간은 짧았지만 세르당이 대서양을 건너 금의환향했을 때는 프랑스 국민들이 개선장군인 드골이 돌아왔을 때보다 더 열광적이었고 왕좌에 오르기 전부터 샹송 가수 에디뜨 삐아프와 염문을 뿌리며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재기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던 세르당은 4개월 후 라모타와의 리매치를 위해 미국행에 올랐다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운명을 달리해 미들급의 저주를 떠올리게 했다.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영화 ‘레이징 불’의 주인공이었던 라모타는 그라지아노와 마찬가지로 뉴욕의 뒷골목 건달 출신이었다. 엉성한 수비에 펀치력도 부족했으나 브롱크스의 황소답게 엄청난 스태미나와 무쇠턱을 자랑하며 지칠줄 모르는 러싱 파이팅을 펼쳐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웰터급 시절 무패의 슈거 레이 로빈슨에게 생애 첫 패배를 안겨준데 이어 전 챔피언 프리지 지빅을 비롯한 톱클래스의 선수들을 잇달아 잡아내 빅네임 킬러로도 유명했다.
첫 방어전을 가볍게 넘어선 뒤 2차방어전에서 롤랑 도뚜일을 맞아 15R에서 대역전극을 연출한 덕분에 1950년 링지로부터 올해의 경기에 선정되며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영원한 숙적 <슈거 레이 로빈슨>의 소나기 펀치에 13RTKO로 침몰해 로빈슨의 미들급 시대를 알리는데 제물이 되었다. 링을 떠난 라모타는 TV와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는 한편 암흑가의 마피아와도 손을 잡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노년에는 알콜중독에 빠지기도 했지만 95세의 천수를 누렸다.
1930년대 세계타이틀이 둘로 쪼개진 뒤로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한 이 체급은 스틸의 등장으로 마침표를 찍으며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또 다시 양분된 천하를 제일이 통일하면서 다시 한번 팬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여기에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컴백한 제일과 그라지아노 간의 역대급 트릴로지는 갖가지 화제와 함께 난타전의 진수를 보여주며 많은 대중들에게 프로복싱의 참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인간적인 면모와 삶의 미학이 깃들어 있는 몇몇 챔피언들의 인생스토리는 영화로까지 재연되며 우리에게 크나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1951년 마침내 미들급 정상을 정복하고 2체급을 석권한 <슈거 레이 로빈슨>은 이미 웰터급 시절부터 전 체급을 뛰어넘어 세계 최강의 챔피언으로 명성이 높았다. 현대 복싱의 기술적 진보를 가져온 완벽하고 아름답기조차했던 복싱 실력 뿐만 아니라 링 밖에서도 스마트한 외모와 남다른 언변, 고급스러운 라이프 스타일로 대중들에게 어필해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특히, 수많은 명사와 스타들과도 교류하며 엔터테이너적인 기질까지 드러내 당대에 뉴욕 사교계를 주도하는 셀럽(?)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왕좌에 오른 로빈슨은 플라밍고 핑크 캐딜락과 호화스러운 13명의 수행단을 대동하고 유럽 투어를 다니며 논타이틀전을 통해 세계적인 인기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으로 날아간 마지막 경기에서 동급 유럽챔피언 <랜디 터핀>을 지나치게 깔본 나머지 충격적인 판정패로 5개월만에 무관이 되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복싱 역사상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이변을 연출한 터핀은 봅 피치몬즈 이래 55년만에 미들급 타이틀을 가져온 덕분에 졸지에 스타로 떠오르며 종전 후 삶에 지친 영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다. 낮은 가드가 눈에 거슬리기는 했어도 아마추어 경험이 풍부해 반사신경이 좋았고 지칠줄 모르는 체력을 앞세워 끊임없이 상대의 안쪽을 노리는 인파이팅을 구사했다.
타이틀을 상실한 <슈거 레이 로빈슨>은 옵션을 행사해 두달만에 터핀을 6만의 관중이 운집한 뉴욕의 폴로그라운드로 불러들여 재기에 나섰다. 기술적으로 한수 위였던 로빈슨은 신중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터핀을 서서히 조여 나갔고 10R 통렬한 라이트스트레이트로 가라앉힌 뒤 폭풍같은 연타로 두들기며 레퍼리 스톱을 끌어내 자존심을 회복했다. 한달 간격으로 칼 보보 올슨과 전 챔피언 록키 그라지아노를 연파하며 2차방어에 성공하자 L.헤비급 세계챔피언 조이 맥심에게 눈길을 돌렸다.
1952년 6월 25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들의 경기는 공중파가 아닌 유료방송으로 중계할 만큼 당시 최고의 빅매치였는데 빠르고 현란한 아웃복싱을 구사한 로빈슨이 맥심을 시종일관 압도했으나 섭씨 40도의 무더위에 지친 나머지 13R 종료 후 스스로 경기를 포기해 유일한 KO패의 오점을 남겼다. 거의 손에 넣었던 트리플 크라운을 놓친 로빈슨은 그해 연말 갑자기 은퇴를 선언하고 그동안 동경했던 쇼 비즈니스계로 뛰어들어 가수 겸 탭댄서로 활동해 아쉬움을 주었다. 하지만 최고가 사라지기를 결코 원치 않았던 복싱팬들은 언젠가 로빈슨이 링으로 돌아올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공석이 된 왕좌에는 하와이안 펀치로 불리던 <칼 보보 올슨>이 1953년 전 챔피언 터핀에게 두차례의 다운을 빼앗으며 판정승을 거두고 올랐는데 링지는 4강전을 통해 당당히 로빈슨의 후계자가 된 올슨에게 연간 최우수 복서의 영예를 수여해 기대감을 높였다. 스웨덴 태생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당시 하와이에서 근무한 탓에 유년시절을 호눌룰루에서 보냈던 올슨은 16살 때부터 프로무대에 올랐다.
외모와 달리 링위에서는 힘과 체력을 앞세운 과격한 복싱을 구사했고 슬로우 스타터로서 비교적 견실한 공수를 뽐냈다. 첫 방어전부터 웰터급에 이어 2관왕을 노리는 강호 키드 가빌란의 도전을 물리치며 순조로운 방어 행진 속에 싸우는 챔피언으로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3차방어에 성공한 올슨은 1955년 세계 L.헤비급 챔피언 아치 무어에게 도전해 3RKO로 침몰하더니 외도를 마치고 링으로 돌아온 <슈거 레이 로빈슨>에게 2R도 버티지 못한 채 타이틀을 돌려줘 호랑이없는 굴에 토끼왕에 불과했음을 입증했다.
로빈슨의 왕좌 복귀는 3년의 공백을 뚫고 이루어 낸 업적인데다가 미들급 역사상 세 번째 챔피언 등극은 처음이기 때문에 더욱 더 가치가 있었다. 여전히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컴비네이션으로 올슨을 다시 한번 거꾸러뜨렸지만 2차방어전에서 <진 풀머>의 거센 추격을 당하며 챔피언벨트를 풀어 복싱 천재에게도 조금씩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뛰어난 힘과 체력을 자랑했던 풀머는 강력한 좌우훅을 앞세운 저돌적인 인파이팅이 트레이트 마크였고 특유의 크로스 암 가드는 철벽수비를 이루는데 일조했다. 넉달 뒤 <슈거 레이 로빈슨>의 전광석화같은 레프트훅을 맞고 5RKO로 추락해 그저 운좋은 사나이에 불과한 줄 알았으나 후일 화려한 제2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가장 완벽한 KO펀치 중 하나로 회자되는 명장면을 연출하며 4번째 왕좌에 오른 로빈슨은 이 당시 사실상 정점을 찍은 상태로 이미 나이도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매번 과거와 똑같을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웰터급 세계타이틀을 반납하고 올라온 난적 <카멘 바실리오>의 거친 공세에 시달리며 판정으로 물러나 이번에도 1차방어의 벽(?)을 넘지 못했다. 2관왕에 오른 바실리오는 불굴의 근성과 투지의 아이콘으로 정평이 난 사나이였지만 6개월만에 재회한 <슈거 레이 로빈슨>의 면도날같은 컴비네이션에 왼쪽 눈이 거의 감긴 채로 판정패를 당해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이들이 벌인 두차례의 대결은 1957년과 1958년 모두 링지가 선정한 올해의 경기에 선정될 만큼 밀도높은 명승부였다.
빼앗기면 반드시 다시 빼앗아 오는 로빈슨의 저력과 집념은 분명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언제나 복싱팬들에게 짜릿한 감동과 환희를 선사해 주었다. 그러나 지칠대로 지친 로빈슨이 한동안 링에서 멀어져 있던 사이 NBA는 그의 타이틀을 박탈해 반쪽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느새 38살의 노웅이 된 그는 거의 2년만에 나선 <폴 펜더>와의 첫 방어전에서 치열한 접전 속에 타이틀을 내주었고 이번에는 5개월 뒤 갖은 재전에서도 패배해 황혼기에 접어들었음을 시인했다.
그 후로도 로빈슨은 또 다시 대관을 노리며 두차례 정상 도전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고 44살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간 끝에 1965년 글러브를 벽에 걸었다. 은퇴 후 파산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TV와 스크린을 통해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냈으며 말년에는 당뇨병과 알츠하이머로 투병하다가 1989년 사망했다.
불사조같은 생명력을 발휘하며 헤비급의 조 루이스가 사라진 1950년대 군계일학의 대활약을 펼쳤던 로빈슨은 주지하다시피 프로복싱의 흐름을 바꾼 혁신적인 스타일로 근대와 현대의 복싱을 구분짓는 역사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롱런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웰터급을 포함해 당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식스타임 챔피언으로 군림했고 통산 200전을 싸운 놀라운 전투력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대기록이었다.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항상 프로복싱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레전드 중의 레전드로 팬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인물이다.
로빈슨의 6번째 미들급 왕좌 복귀를 가로막은 펜더는 잦은 손부상때문에 경쾌한 푸트웍을 바탕으로 한 아웃복서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적절한 클린치와 함께 찬스가 나면 집중타로 상대를 쓰러뜨릴 줄 아는 영리함도 갖추고 있었다. 전 챔피언 로빈슨에 이어 바실리오까지 연파하며 3차방어에 성공해 주가를 높인 뒤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영국 원정에서 2차방어전 상대였던 <테리 다운스>에게 9RTKO로 무릎을 꿇어 타이틀을 상실했다.
터핀에 이어 10년만에 다시 영국으로 챔피언 벨트를 가져온 다운스는 정확한 원투스트레이트와 매서운 양훅을 소유한 강타자였으나 몸놀림이나 테크닉 자체는 대단치 않아서 곧바로 <폴 펜더>의 기교에 리벤지를 당하고 금새 잊혀졌다. 9개월만에 왕좌에 복귀한 펜더는 이듬해 돈을 벌만큼 벌었다며 은퇴를 선언했는데 NYSAC는 한발 앞서 지명방어전을 이행하지 않은 그의 타이틀을 박탈했고 더 이상 챔피언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소멸되고 말았다.
한편, 로빈슨의 타이틀을 박탈한 <NBA>는 1959년 챔피언 결정전을 지시해 <진 풀머>가 바실리오를 혈투 끝에 14RTKO로 누르고 2년만에 왕좌에 복귀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더 왕성한 전투력을 발휘한 풀머는 별명인 싸이클론답게 무서운 터프니스와 야수같은 공격본능으로 거침없는 방어행진을 펼쳐 나갔다. 2차방어전에서 아찔한 무승부를 경험했지만 바실리오를 재차 격침시킨데 이어 전성기를 지나긴 했지만 두 번에 걸친 로빈슨의 도전을 정면 돌파해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2관왕을 넘보던 베니 파레트를 곤죽으로 만들고 당시로서는 이 체급 최다인 7차방어에 성공하며 장기집권 채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페더급 세계챔피언을 지냈던 호건 키드 배시와 함께 나이지리아의 별로 떠오른 <딕 타이거>에게 예상 밖으로 덜미가 잡히면서 3년만에 권좌에서 내려섰다. 맹렬한 파이팅에 테크닉까지 물이 올랐던 풀머는 2차 집권기에 자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지만 워낙 강렬했던 로빈슨의 빛에 가려 저평가된 챔피언 중 하나였다.
그해 링지로부터 최고의 파이터로 선정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타이거의 원래 이름은 리차드 이헤투였는데 청년시절 호랑이를 때려잡은 뒤부터 타이거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찌감치 영국으로 스카웃되어 영연방 챔피언을 지냈고 미국까지 진출해 월드랭커들을 속속 잡아내며 연승가도를 달렸다. 일발필도의 파워는 부족한 편이었으나 아프리카 출신답게 호전적 기질이 강한 용맹스러운 전사였다. 크라우칭한 상체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주포인 레프트훅을 앞세워 마치 후진기어가 고장난 열차처럼 철저한 인파이팅으로 상대를 부수었다.
얼마 후 헤비급 정상에 오르는 조 프레이저가 연상되는 스타일로 오죽하면 왕좌에 복귀한 펜더가 그의 도전이 두려운 나머지 링을 떠났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넉달만에 재회한 풀머와의 리매치는 핏빛으로 물들며 승부를 가리지 못했지만 신설 기구인 WBC 타이틀까지 걸고 조국에서 격돌한 3차전에서는 7R 종료 후 기권을 받아내 우위를 입증했다. 이후 3차방어전에서 지명도전자였던 <조이 지아델로>의 빠른 발과 노련한 공수에 헛스윙을 남발하는 졸전을 벌여 잠시 타이틀을 내주었다.
33살의 나이에 세계 정상의 염원을 이룬 지아델로는 연륜만큼이나 내공도 깊어 이미 첫 세계도전에서 풀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보기보다 정력적인 챔피언으로 공수 전환이 빠르고 타점높은 원투스트레이트에 위력적인 라이트어퍼컷을 장착한데다가 디펜스나 내구력 면에서도 크게 뒤질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만년에 오른 왕좌를 오래 지킬수는 없어서 2차벙어전에서 <딕 타이거>에게 타이틀을 돌려주고 은퇴 수순에 접어들었다. 2년만에 복위한 타이거는 웰터급에서 올라온 <에밀 그리피스>를 첫 도전자로 맞이해 비교적 선전을 펼쳤으나 생애 첫 다운을 내준 것이 짐이 되어 편파적인 판정에 고개를 떨구었다.
곧바로 한체급 위로 월장해 37살의 나이에 호세 토레스를 꺽고 봅 피치몬즈 이래 66년만에 처음으로 L.헤비급을 정복한 미들급 챔피언이 되었다. 두 체급을 석권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그리피스는 여전히 뉴욕의 스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미들급으로 올라오면서 과거와 다르게 타격전보다는 노련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빈곳을 찌르는 경험에 의존한 경기를 펼쳤다. 자신과 싸우는 타이거에게 조소를 보냈던 조이 아처의 도전을 연거푸 막아낸 뒤 이탈리아의 숙적 <니노 벤베누티>와 3차방어전에 나서 초반부터 다운을 주고받는 불꽃튀는 난타전 끝에 벨트를 풀었다. MSG 전성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 경기는 1967년 링지에서 올해의 경기로 선정할 만큼 대단한 승부였는데 치열했던 이들의 3연전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Jr.미들급에 이어 역시 2관왕에 오른 벤베누티는 대서양만 건너가면 힘을 쓰지 못하는 유럽인들의 자존심을 고취시켰고 어딘가 모르게 배타적이었던 본고장 복싱팬들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 모았다. 5개월 뒤 <에밀 그리피스>를 다시 만난 벤베누티는 밀고 당기는 실랑이 끝에 14R 라이트훅을 허용해 다운을 내주며 판정패로 물러나 이들의 러버매치는 필연적이었다. 서로 한차례의 워밍업을 마친 양자는 3차전에서도 초박빙의 접전을 펼쳤는데 이번에는 9R에서 다운을 빼앗은 <니노 벤베누티>가 근소한 차로 승리를 거머쥐고 설욕에 성공했다.
이후 벤베누티는 외형상 4차방어에 성공하며 순항하는 듯 했지만 논타이틀전마다 한물간 타이거는 물론 톰 베세어같은 얼치기에게도 패배해 카리스마 부족을 드러내며 우려를 자아냈다. 결국 이와같은 난조는 새로운 슈퍼스타의 탄생으로 이어져 1970년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몬손>이 기가막힌 타이밍의 라이트스트레이트로 벤베누티를 침몰시키고 멋지게 정상에 올랐다.
1950년대 불멸의 파이터 로빈슨을 탄생시킨 이 체급은 그와 타이틀을 주고 받은 라이벌들을 양산하며 프로복싱의 조류를 바꿀 수 있는 명승부를 잇달아 연출해 전세계 복싱팬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고 미들급 뿐만 아니라 프로복싱전체에 기여한 공로 또한 적지 않았다. 이후에도 풀머와 타이거같은 걸출한 챔피언들을 배출하며 포스트 로빈슨 시대를 이어갔고 캐시어스 클레이의 출현밖에 특별한 이슈가 없었던 1960년대 중반 그리피스와 벤베누티가 벌인 숨막히는 3연전 역시 현대복싱의 흐름을 이끌어 간 역대급 트릴로지 중 하나로 기록될만 했다.
1970년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충격적인 12RTKO로 실신시키고 미들급 천하를 제패한 <카를로스 몬손>은 전대의 슈거 레이 로빈슨, 후대의 마빈 해글러와 함께 역대 미들급 최강의 챔피언으로 손꼽히는 전설적인 명장이었다.
초기에는 미완이었던 탓에 허점을 드러내며 3번의 패배를 당했지만 20전째 마지막을 경험하고 이후로는 99전으로 은퇴할 때까지 패배를 모르는 전사로 거듭났다.
힘과 체력을 앞세운 정력적인 파이팅으로 아르헨티나 출신답게 수많은 경기 속에 살아남은 뒤 베테랑 호르헤 페르난데스를 제물로 자국과 남미 타이틀을 차례로 따내며 세계 정상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180cm가 넘는 타고난 강골에 영화배우 뺨치는 얼굴을 지닌데다가 청량감마저 안겨주는 시원한 복싱을 구사해 복싱팬들뿐만 아니라 뭇여성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며 당대 최고의 쾌남아로 인기를 끌었다.
업라이트형의 정통파 복서로 레프트잽으로 거리를 두고 라이트스트레이트를 폭발시킨 뒤 잇달아 레프트훅을 실어 나르면 그것으로 경기는 끝이었다.
발이 빠르다거나 펀치스피드가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장신에서 터져나오는 라이트스트레이트 일발은 라이플로 불리울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고 링 위에서는 언제나 냉혹하고 무자비한 승부사였다.
포커페이스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직선 공격을 펼치다가 찬스가 생기면 여지없이 타점높은 장타를 뿜어내며 대부분의 경기를 넉넉한 차이로 마무리해 챔피언이 되고나서도 고전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6개월 후 권토중래를 꿈꾸던 벤베누티를 3R만에 요절낸 후 역시 전 챔피언 에밀 그리피스를 홈링로 불러들여 비참한 최후를 안겨주며 더 이상 남미의 촌놈이 아닌 팜파스 초원의 영웅으로 발돋움했다.
1972년 유럽으로 건너간 몬손은 Jr.미들급 초대챔피언을 지냈던 백전노장의 기교파 데니 모이어를 비롯한 세명의 도전자를 모조리 KO로 때려 눕혀 거칠 것 없는 무풍지대를 달렸다.
더욱이 6차방어전에서는 뛰어난 펀치력으로 한때 무관의 제왕으로 대접받았던 지명도전자 베니 브리스코마저 대차의 판정으로 돌려 세워 더 이상 도전자를 찾기가 힘든 지경이 되었다.
3년동안 8차방어를 이룩한 몬손은 1974년 웰터급 역대 챔피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호 호세 나폴레스를 파리에서 맞이해 팽팽한 승부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6R만에 항복을 받아내며 더욱 더 강력한 철옹성을 구축했다.
프랑스의 명배우 알랭 들롱이 주선한데다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전료까지 보장돼 화제를 불러모은 이 경기는 중량급 스타워즈의 서막을 알린 신호탄이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복싱에 왜 체급 구분이 필요한지를 잘 설명해 주었다.
한편, 각 체급에서 WBA와 갈등을 빚었던 후발주자 <WBC>는 몬손이 나폴레스와 싸우면서 톱랭커 <로드리고 발데스>와의 지명방어전을 차일피일 미루자 곧바로 타이틀을 박탈하는 강수를 두었다.
10년만에 반쪽이 된 타이틀은 곧바로 발데스의 품에 안겼는데 챔피언 결정전에서 9개월 전 판정승에 그쳤던 강호 브리스코를 이번에는 7R에 턱을 부수고 KO시켜 확실한 우위를 입증했다.
콜롬비아 태생의 발데스는 그리피스를 키워낸 매니저 길 클랜시의 눈에 들면서 힘과 기교를 겸비한 강타자로 만개했다.
중남미 특유의 유연한 상체와 긴 리치를 활용해 빈틈을 파고드는 원투스트레이트가 위력적이었고 한번 걸려들면 살아남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연타를 자랑했다.
특히, 빠르게 휘어치는 듯한 라이트훅은 폭발적인 화력을 지니고 있어 섣불리 대들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었다.
왕좌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발데스는 홈링과 프랑스를 오가며 4차례의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고 나서야 비로소 몬손과 진정한 제왕의 자리를 놓고 대결할 수 있었다.
한편, WBA 챔피언으로서 여전히 이 체급의 절대군주로 통했던 몬손 역시 나폴레스 전을 포함해 4연속 KO승으로 12차방어에 성공하며 강력한 카리스마에 세월이 가져다 준 위엄까지 더해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냈다.
1976년 지중해의 모나코에서 마주한 양강의 대결은 앞서가던 몬손이 발데스의 후반 추격에 애를 먹었지만 14R 전광석화같은 라이트스트레이트로 다운을 빼앗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WBA>와 <WBC>로 양분되었던 미들급 왕좌를 2년만에 재통일한 <카를로스 몬손>은 링 밖에서도 이미 영화배우로 활약하며 파파라치들의 표적이 될만큼 숱한 스캔들을 뿌려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누렸다.
1년만에 재회한 발데스에게 2R 생애 첫 다운을 경험했지만 침착한 경기운영을 통해 또 다시 판정승으로 건재를 과시하며 당시 이 체급 최다인 14차방어의 금자탑을 쌓았으며 이 때가 그의 나이 복서로서는 환갑이나 다름없는 서른 다섯살이었다.
장장 7년 가까이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몬손은 자연사없이는 몰락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상대로 기자회견을 통해 모든 타이틀을 반납하고 명예로운 은퇴를 선택했다.
그가 링을 떠난 이유는 심신이 지친 탓도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복싱에 흥미를 갖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몬손은 상대가 없을 정도로 강했고 유난히 미국이 득세했던 이 체급에서 아르헨티나의 영웅으로서 프로복싱의 황금기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으나 화려했던 복싱인생과 달리 링을 떠난 뒤 이혼과 결혼을 반복하며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삶을 살더니 결국 1988년 아내를 살해한 죄로 영어의 몸이 되었고 1995년 특별감호 휴가 도중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어 복싱팬들과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절대군주가 사라지자 이 체급은 난기류에 휩싸이며 급격히 혼란에 빠졌다.
먼저 <로드리고 발데스>가 3년만에 재격돌한 브리스코를 다시 한번 판정으로 꺽고 마침내 1인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동안 몬손의 빛에 가려 전성기를 다 보낸 탓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아르헨티나의 <우고 코로>에게 체력적인 한계를 드러내며 만장일치로 패배해 그 영광이 6개월을 가지 못했다.
동시대의 몬손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업적이었지만 발데스의 복싱실력 만큼은 동국의 롱런챔피언 안토니오 세르반테스와 미구엘 로라에 버금가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용히 때를 기다린 끝에 왕좌에 오른 코로는 발을 많이 쓰는 아웃복서에 가까웠는데 선수비 후역습의 지루한 경기 스타일로 인해 자랑스러운 선배 몬손의 후계자를 자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첫 방어전부터 홈링에서 무패의 로니 해리스에게 고전하더니 발데스를 재차 물리친 뒤 이탈리아의 터프가이 <비토 안투오페르모>의 뒷심에 밀려 3차방어에 실패했다.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 골든 글러브 우승 직후 프로에 뛰어든 안투오페르모는 살아온 이력이나 복싱스타일 면에서 1940년대말 토니 제일과의 3연전으로 유명했던 록키 그라지아노와 여러모로 닮아 있었다.
하드펀처도 아니고 테크니션과도 거리가 멀었지만 오로지 길거리 싸움으로 다져진 격렬한 터프니스와 끈질긴 투쟁본능으로 정상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거친 압박을 전개해 상대의 안쪽을 파고드는데 능했고 어떠한 상대와 붙어도 당당하게 치고 나갔으며 집요한 승부욕으로 종종 불리하던 경기를 뒤집어 더욱 더 인기가 많았다.
이와같은 그의 장점은 머지 않아 정상에 오르게 되는 강호 해글러와의 1차방어전을 무승부로 세이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숙적 <알란 민터>에게 아쉬운 판정패로 타이틀을 내줘 단명하고 말았다.
은퇴 후에는 우수에 찬 외모 덕분에 연기자의 길을 걸으며 ‘대부 3’ 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영국의 4번째 미들급 챔피언인 민터는 뮌헨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아마추어에서 300전이 넘는 전적을 보유해 당연히 기본기가 충실했다.
고전적인 업라이트형의 사우스포로서 비교적 큰 키에 라이트잽과 스트레이트가 좋았고 무엇보다 뛰어난 정신력을 자랑했다.
반면, 눈자위가 쉽게 커트되는 약점을 안고 있어 늘 부상으로 인한 패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왕좌 복귀를 노리는 안투오페르모를 8RTKO로 누르고 가뿐하게 첫 관문을 넘어섰지만 단단히 벼르고 나온 <마빈 해글러>의 무자비한 폭력에 앞에 역시나 피투성이가 된 채 3R만에 레퍼리 스톱이 걸렸다.
소위 링의 미치광이로 불리며 1980년대를 철권 통치했던 해글러는 일발필도의 하드펀처는 아니었지만 공격적인 성향이 매우 강해 사우스포의 통념을 깨뜨린 무적의 챔피언이었다.
헤비급 세계챔피언을 지냈던 플로이드 패터슨을 동경해 링에 오르기 시작했고 아마추어 전미 선수권에서 우승한 뒤 프로에 뛰어들어 무패를 질주하다가 4년차에 접어들면서 순식간에 2패를 당해 주춤했지만 그 뒤로는 전승가도를 달리며 브리스코까지 제압하고 1978년 정상의 문턱에 도달했으나 너무 강한 나머지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안투오페르모에게 도전해 무승부로 분루를 삼킨 뒤 민터를 제물로 염원하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검은 피부에 철갑을 두른 듯한 근육질의 몸매와 험악한 인상의 빡빡 깍은 대머리 자체가 싸우기 전부터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특유의 안정된 밸런스와 활화산같은 체력을 앞세워 시종일관 활발한 움직임으로 인-아웃을 오가며 마음껏 공략하다가 마무리에 들어가는 그의 경기스타일은 도무지 빈틈을 찾을 수 없을만큼 완벽에 가까웠다.
라이트잽으로부터 시작되는 공격루트는 스트레이트와 양훅의 컴비네이션으로 이어졌으며 동시에 능숙한 어퍼컷이 안면과 보디를 오르내렸다.
원래 오른손잡이였던만큼 순간적인 스위치에도 능했고 사우스포의 스탠스에서 오른발의 탄력을 이용해 휘어치는 라이트펀치는 해글러만의 독특한 필살기였다.
또한, 유연한 상체를 이용한 헤드슬립과 보디웍으로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탄탄한 디펜스와 사실상 평생 한번도 다운이 없었던 역대 최강의 맷집에 이르면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여기에 어린 시절 뉴욕의 할렘가에서 키워온 냉정한 승부 근성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없이 자신이 마음먹은대로 경기를 이끌어 가는데 원천이 되었다.
화려한 언변이나 쇼맨십과는 거리가 멀어 대중적인 인기는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수도승처럼 묵묵히 운동에만 전념하는 그의 모습은 진지하다 못해 경건한 느낌마저 주었다.
초특급 슈퍼스타 슈거 레이 레너드의 등장으로 전세계 복싱팬들의 이목이 웰터급으로 쏠린 가운데 첫 방어전부터 지명도전자였던 베네수엘라의 자객 풀헨시오 오벨메히아스를 처단한데 이어 전챔피언 안투오페르모를 철저하게 응징하며 서서히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섰다.
이후 매경기마다 압도적인 실력차를 과시하며 정력적으로 방어행진을 펼친 해글러는 1983년 유럽을 평정한 영국의 토니 십슨을 6R만에 격추시키고 6차방어에 성공하면서 경이로운(Marvelous) 사나이로 추앙받기 시작했고 이 경기의 해설자로 나섰던 레너드 역시 자신이 은퇴한 당위성을 설명하며 해글러의 기량과 파워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 윌포드 사이피언을 상대로 신설기구 <IBF> 타이틀까지 거머쥐고 3대기구 통합챔피언에 오르자 레너드가 링을 떠난 뒤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세계프로복싱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미들급의 절대강자로 우뚝 선 해글러 쪽으로 이동했다.
바야흐르 ‘패뷸러스 포’(Fabulous Four)로 일컬어지는 전설의 4인방 간에 본격적인 각축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 중 해글러의 첫 번째 상대는 1983년 사상 최초의 4관왕을 노리고 도전한 로베르토 두란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전성기를 지난 두란의 철저한 수비와 클린치에 막혀 근소한 차의 판정승에 만족해야만 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채 두자릿수 방어 기록에 도달한 해글러는 두란을 초토화시키고 도전장을 던진 토머스 헌스를 상대로 드디어 1985년 당대 최고의 슈퍼매치에 나서게 된다.
역시나 세기의 대결로 일컬어진 이들의 대결은 경기 전부터 범상치 않은 설전과 매스컴의 호들갑(?)으로 전세계 복싱팬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 모았다.
공이 울리자 예상과 달리 거칠게 압박에 나선 해글러에게 헌스는 초장부터 전면전을 개시하며 2R 송곳같은 라이트스트레이트로 왼쪽눈가를 커트시켜 먼저 기세를 올렸으나 해글러는 피를 본 야수처럼 이리저리 날뛰며 맹렬한 반격을 펼쳤고 3R 역시나 오른손 휘어치기로 밸런스를 무너뜨린 뒤 안면에 필살의 라이트훅을 먹여 헌스를 가라앉혔다.
7분 52초의 짧은 러닝타임이었지만 묵직하고 강렬했던 한편의 드라마였고 링지를 비롯한 모든 매체들은 이 경기를 최고로 선정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더욱이 PPV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폐쇄회로 TV중계에 200만명이 몰려들어 무하마드 알리 Vs 조 프레이저 전의 160만명을 넘어서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고 순이익 역시 1982년 래리 홈스 Vs 게리 쿠니 전의 2,200만불보다 300만불이 웃돌아 경기내용은 물론 흥행면에서도 대단한 성공작이 되었다.
이에 따라 해글러는 대전료와 흥행수입을 합산해 1,000만불 이상을 벌어들였고 헌스 역시 800만불 이상을 챙겼다.
1960년대에는 로빈슨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왕좌교대극이 잦았지만 1970년대 들어 프로복싱의 주역으로 종횡무진 활약한 몬손이 1인 독주체제를 구축하며 태평성대(?)를 구가해 복싱팬들의 뇌리에 미들급은 곧 몬손임을 각인시켰다.
그 뒤 군웅할거 시대를 종식시킨 해글러의 등장과 함께 또 다시 절대권력의 시대를 맞이한 이 체급은 전설의 4인방이 각축전을 벌이는 전쟁터로 변모해 1980년대 수많은 이슈를 토해내며 가장 인기있는 골든웨이트로 자리잡게 되었다.
1985년 히트맨 토머스 헌스와의 하드 보일드한 스릴러를 통해 세계프로복싱의 흥행을 이끌어 갈 새로운 영웅으로 클로즈-업(close-up)된 <마빈 해글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문가들로부터 직전의 카를로스 몬손은 물론 슈거 레이 로빈슨과도 동급으로 평가받기 시작했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5년 넘게 극강의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어느덧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들어선 해글러에게는 더 이상 마땅한 적수가 없었고 이로인해 공백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이런 와중에 Jr.미들급에서 아프리카의 야수로 불리운 25연속 KO승의 강타자 존 무가비가 도전장을 던지면서 또 한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거의 1년여만에 링에 오른 해글러는 무가비의 파워에 초반 예상과 달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6R 폭풍같은 좌우연타로 그로기에 내몬 뒤 서서히 압박해 11R 강력한 원투스트레이트를 박아 넣어 경기를 마무리했다.
경기를 앞두고 미스매치라는 말도 많았지만 위력적인 파워와 녹록치 않은 내구력을 보여준 무가비의 선전 덕분에 이 경기는 지금까지도 숨은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무가비 전 이후 체력과 기량 저하를 느끼고 은퇴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해글러는 자신을 겨냥해 3년만에 조건부 컴백을 선언한 <슈거 레이 레너드>와 꿈의 대결을 위해 잠시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았지만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승인한 <WBC>와 달리 WBA는 톱콘텐더 해롤 그래햄과의 지명방어전 미이행을 이유로 해글러의 타이틀을 박탈했고 IBF 역시 노랭커와의 타이틀전을 인정할 수 없다며 레너드가 승리할 경우 왕좌를 공석으로 두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1987년 4월 6일 이른바 슈퍼 파이트로 명명된 이들의 대결을 앞두고 양측은 수개월 전부터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며 역시나 전세계 복싱팬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대전료로 해글러 1,200만불, 레너드 1,100만불이 확정된 가운데 레너드가 경기수익과 중계권료를 대폭 양보해 해글러에게 총 2,000만불을 안겨준 대신 링면적 22피트, 10온스 글러브, 12라운드제 요구를 모두 받아내는 치밀한 전략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박사들의 예상은 체급과 전력 차이 외에도 레너드의 공백이 너무 길어 단연코 해글러의 우세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초반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푸트웍으로 기선을 잡은 레너드가 중반 이후 해글러의 거센 압박을 현란한 스웨이와 클린치로 차단한 뒤 매라운드 종반 스무발 이상의 융단폭격을 감행해 2-1의 판정으로 승리하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전세계 75개국으로 생중계된 이들의 경기는 내용상 워낙 접전이었기 때문에 판정결과에 대한 논란 속에도 레너드의 승리를 인정한 전문가와 미디어가 상대적으로 많았고 링지에서도 1987년 최고의 경기와 최고의 이변으로 선정하는데 이견이 없었다.
판정에 불쾌감을 드러낸 해글러는 몇차례 재대결을 요구했지만 레너드가 은퇴를 발표하자 쇼비지니스의 저열한 상술과 흥행업자들의 비겁한 정치적 술책을 비난하며 이듬해 33살의 나이에 미련없이 링을 떠나는 거장다운 결단을 내렸다.
무려 11년동안 무패를 자랑하며 비정한 링의 무법자로 활약했던 해글러는 통산 13차방어에 실패하며 7년넘게 군림해온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도무지 단점을 찾기 어려운 그의 복싱은 사실상 올타임 미들급 넘버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경이로웠다.
사우스포이면서도 정교한 테크닉과 부드럽고 견고한 밸런스는 물론 강력한 파괴력마저 겸비한 인파이터로서 뛰어난 멘탈과 체력까지 갖추었던 그는 역대 가장 완성도 높은 챔피언 중 한명이었다.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강인함에 링밖의 성실한 생활과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아름다운 뒷모습이 더욱 더 위대한 복서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은퇴 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영화배우로 변신해 인디오 시리즈 등 여러 액션물에 출연했고 영국에서 복싱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얼굴을 비추었을 뿐 청춘을 불살랐던 사각의 링과는 직접적인 거리를 멀리했다.
첩보전을 방불케하는 기가막힌 작전과 상대에 대한 철저한 분석으로 해글러도 질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레너드는 사상 10번째 트리플 크라운의 주인공으로서 ‘과연 레너드’라는 찬사와 함께 화려한 부활을 예고했다.
특히, 전성기 못지 않은 경쾌한 발놀림과 노련한 페인팅, 편대폭격같은 연타능력에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노가드까지 선보여 다시는 못볼줄 알았던 복싱천재에 대한 팬들의 기대감은 한껏 높아질 수 밖에 없었으나 아쉬울 것이 없었던 그는 해글러의 리매치 요구를 일축하고 한달 반만에 은퇴를 선언하며 또 다시 돌아올 듯한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 채 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레너드의 은퇴로 공석이 된 <WBC> 왕좌는 후안 도밍고 롤단을 격투 끝에 4RTKO로 포획한 <토머스 헌스>가 차지했는데 이미 미들급을 우회하여 WBC L.헤비급을 정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 최초로 4체급 석권의 고지를 밟은 인물이 되었다.
롤단 전에서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어도 여전히 막강한 화력과 드라마틱한 경기력을 자랑했던 헌스는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미들급의 주역으로서 아직도 흥행의 중심에 서있기에 충분했으나 7년만에 설욕을 노리던 레너드와의 빅매치가 지지부진하자 첫 방어전을 겸해 한수 아래의 <이란 바클리>를 상대로 워밍업에 나섰다가 부실한 안면 커버링의 약점을 드러내며 참담한 3RKO패를 당해 팬들을 실망시켰다.
1988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대반란을 일으키며 프로복싱의 묘미(?)를 일깨워준 바클리는 데뷔초 승패를 반복하며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월드랭커들을 잇달아 잡아내 1년 전 WBA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뛰어난 정신력과 투지가 최대의 강점이었고 주무기인 레프트훅은 물론 라이트펀치의 위력도 대단했지만 수비가 신통치 않았고 경기운영도 순진했던 탓에 이듬해 베테랑 <로베르토 두란>에게 추격을 허용하며 첫 방어에 실패했다.
오직 노장다운 뚝심 하나로 38살의 나이에 사상 3번째로 4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두란은 전보다 파워도 줄고 체력적인 부담도 컸지만 살아있는 신화로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열달 후 슈퍼미들급 WBC 챔피언으로 돌아온 레너드와의 3번째 대결에서 완패한 뒤 부상이 겹치면서 타이틀을 포기했고 1년반 만에 컴백한 이래 무려 50살까지 링에 오르는 괴력을 발휘했다.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복싱을 위해 태어난 사나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두란은 육감적인 움직임과 후퇴를 모르는 전투적인 복싱으로 1970년대 라이트급을 철권 통치했고 1980년 복싱천재 레너드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일전은 전 세계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그 뒤에도 전설의 4인방 중 한명으로 끝없는 활약을 펼치며 싸움의 본질에 가장 충실했던 명품 중의 명품으로 언제나 올타임 랭킹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만큼 위대한 챔피언으로 남았다.
은퇴 후 방탕한 생활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음악활동을 즐기며 새로운 인생을 살았고 2016년 그의 일대기가 ‘Hands Of Stone’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출시돼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기도 했다.
한편, <IBF>에는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미국의 <프랭크 테이트>가 링위의 마이클 잭슨으로 명성을 날리던 마이클 올라지데에게 완승을 거두고 새로운 후계자로 이름을 올렸다.
비교적 장신으로 아마추어에서 다져진 완벽한 기본기와 다양한 기교를 겸비해 발을 쓰는 아웃복싱에 일가견을 보였다.
첫 방어전부터 흔쾌히 영국으로 날아가 노장 토니 쉽슨을 눕히고 차세대 주역 중 한명으로 떠올랐지만 동국의 <마이클 넌>에게 무릎을 꿇어 단명에 그쳤다.
아마추어 시절 버질 힐에게 LA올림픽 출전권을 날치기 당했던 넌은 185cm의 훤칠한 키에 미끈한 몸매의 소유자로서 프로에서 왕성한 전투력을 과시하며 초고속 성장세를 나타냈다.
당시 왼손잡이 레너드라고 불리울만큼 경쾌한 푸트웍에 뛰어난 핸드스피드와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였는데 워낙 좋은 눈을 가져 웬만해서는 공격을 허용하는 일이 없었고 기가막힌 타이밍의 카운터 펀처였지만 적극적인 압박을 통해 기회를 포착하면 강력한 인파이팅으로 상대를 두들겼다.
이 때문에 1988년 링지를 비롯한 각종 매체로부터 무하마드 알리 이래 최고의 아웃복서로 평가받으며 해글러의 뒤를 잇는 미들급의 대권주자로 급부상했다.
늙은 들소 롤단을 때려 잡은 뒤 WBA 챔피언 칼람베이와 격돌해 환상적인 레프트훅으로 88초만에 KO승을 거두고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어 바클리를 비롯한 챔피언 클래스의 도전자들을 잇달아 격침시키며 순조로운 방어행진 속에 WBC 챔피언 두란과의 대전설이 오가기도 했으나 6차방어전에서 당시 무명이나 다름없던 <제임스 토니>에게 11R 강력한 레프트훅을 얻어맞고 뼈아픈 역전패를 당해 모든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우려됐던 자만심과 함께 체력이 부족하고 턱이 약한 결점을 고스란히 노출시킨 넌은 슈퍼미들급으로 올라가 2체급을 석권하며 부활을 꿈꾸었지만 더 이상 과거의 화려한 복싱을 보여주지 못한 채 평범한 복서로 전락해갔다.
시쳇말로 럭키펀치 한방으로 이변을 연출하며 1991년 링지로부터 최고의 파이터에 선정된 토니는 비교적 빠른 스피드의 대담한 공격과 파괴력 높은 주먹이 인상적이었던 반면, 아직은 수비가 불안하고 경기의 기복이 심한 것이 흠이었다.
후일 WBA 챔피언에 오르는 레지 존슨을 돌려 세운 뒤 당대 최강으로 군림했던 마이클 맥컬럼의 도전을 두차례나 막아내며 6차방어에 성공해 일천한 역사를 지닌 IBF의 보물이 되었다.
이후 타이틀을 반납하고 상위체급으로 진군해 슈퍼미들급에 이어 크루저급까지 3체급을 석권하며 명복서의 반열에 올랐다.
<WBA>는 자이르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데뷔한 <숨부 칼람베이>를 새로운 챔피언으로 결정했다.
바클리를 누르고 왕좌에 오른 칼람베이는 첫 방어전부터 아랫 체급에서 맹위를 떨치던 마이클 맥컬럼의 도전을 물리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 빠른 발과 스웨이가 발군이어서 이탈리안 익스프레스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더블, 트리플 잽이 날카롭고 상대의 주먹을 피해 날리는 카운터펀치 역시 일품이었으나 3차방어에 성공한 뒤 IBF 챔피언 마이클 넌과 통합타이틀전을 모의하다가 WBA의 불허속에 경기도 지고 타이틀마저 놓쳐 스스로 명을 재촉하고 말았다.
후임에는 절치부심 재기에 성공한 자메이카의 <마이클 맥컬럼>이 컨디션 난조 속에 해롤 그래햄에게 신승을 거두고 2관왕을 달성했다.
고급스러운 테크닉에 뛰어난 반사신경과 함께 강한 내구력을 자랑했던 맥컬럼은 노련미까지 더해져 두차례의 방어전을 압승으로 이끌었고 3년만에 재회한 칼람베이에게는 여전히 상대성이 좋지 못해 고전했다.
그 뒤 IBF 쪽에 눈을 돌렸다가 타이틀을 박탈당했으나 2년반만에 WBC L.헤비급 챔피언으로 복귀해 3체급 석권을 이루었다.
1년넘게 방치된 채 주인을 찾지 못하던 벨트는 미국의 <레지 존슨>이 스티브 콜린스를 누르고 허리에 감았다.
전미 챔피언시절부터 각광받는 유망주였던 존슨은 감각적인 디펜스가 돋보이는 왼손잡이로 스피드를 동반한 레프트훅은 걸리기만 하면 헤어나지 못할 만큼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3번의 방어전을 가쁜히 넘어서며 상승세를 탔지만 한수 아래로 여겼던 <존 데이비드 잭슨>에게 의외로 고전하며 근소한 차의 판정으로 고배를 마셨다.
그 뒤 미들급 왕좌 복귀에 연거푸 실패하자 챔피언 벨트가 흔해진 덕분에 두체급을 뛰어 넘어 IBF L.헤비급 타이틀을 거머쥐는 호사를 누렸다.
신설기구 WBO에서 Jr.미들급 초대챔피언을 지냈던 잭슨은 명장 엠마누엘 스튜워드의 손을 거치면서 과거와 달리 점차 공수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매니저와의 갈등으로 방어전을 미룬 채 WBA의 허락없이 논타이틀전에 나서는 바람에 어이없게도 장외에서 타이틀을 잃고 말았다.
이후 두차례나 왕좌 복귀를 노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은퇴 후에는 트레이너로 변신해 최근까지 세르게이 코발레프의 미트를 받아주기도 했다.
1989년 제4의 기구로 돛을 올린 <WBO>는 해글러의 이복 동생 로비 심스를 판정으로 따돌린 <더그 데위트>를 초대챔피언으로 세웠다.
헌스를 상대로 최종회까지 버텨낸 터프니스에도 불구하고 무딘 푸트웍과 뻣뻣한 상체 때문에 이미 한계를 드러냈던 데위트는 매튜 힐튼의 2체급 석권을 저지하는 수훈을 세웠지만 역시나 2차방어전에서 영국의 강타자 <나이젤 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타이틀을 넘겼다.
'다크 디스트로이어'(Dark Destroyer)라는 닉네임을 가진 벤은 파괴본능을 자극하는 철저한 어택의 인파이터로 생김새나 스타일에서 야성미가 물씬 풍겼다.
다만, 반칙도 마다하지 않는 그의 단순하고 저돌적인 복싱은 후일 크나큰 비극을 낳는 빌미를 제공했다.
첫 방어전부터 왕좌 복귀를 노리던 전 WBC 챔피언 바클리를 맞아 난장에 가까운 주먹다짐으로 1RKO승을 거두고 본고장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나 동국의 라이벌 <크리스 유뱅크>에게 공수의 불균형과 부실한 내구력을 드러내며 9R만에 스톱이 걸려 7개월만에 무관으로 전락했다.
미국에서 데뷔한 유뱅크는 빠른 발을 소유한 기교파로 상대에 따라서는 난타전에도 능할만큼 건실한 공수를 보여줬다.
초기에 안면 내구력의 불안감을 노출시켰지만 한번 잡은 찬스는 절대 놓치지 않는 집요함으로 약점을 커버했다.
두차례의 방어에 성공한 뒤 동국의 마이클 와트슨을 치열한 접전 끝에 누르고 3개월 후 비어있던 슈퍼미들급 타이틀을 놓고 다시 재회하는 보기드문 장면을 연출했다.
유뱅크가 떠난 자리에는 헌스를 배출한 크롱크짐의 뉴히어로 <제랄드 맥클레란>이 썩어도 준치였던 무가비를 거침없는 공격으로 1R만에 요리하고 정상을 차지했다.
라이벌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패해 서울올림픽 출전이 좌절되자 프로에 데뷔한 맥클레란은 비교적 장신에 빠른 스피드와 유연한 밸런스를 소유한 하드펀처로 원라운드 보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유독 초반 승부를 선호했다.
상대를 가두는 압박과 폭풍같은 연타능력이 탁월했고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특이한 궤적의 라이트훅은 전율과 공포의 필살기였다.
당시 마이너기구에 불과했던 WBO 벨트를 내팽개친 맥클레란은 타이틀 방어는 안중에도 없이 메이저 타이틀을 정조준하며 본격적인 세몰이에 나섰다.
1970~80년대 몬손과 해글러의 장기집권 덕분에 다른 체급에 비해 희소가치가 높았던 전통의 미들급 챔피언 벨트는 1980년대 후반 IBF에 이어 WBO까지 등장하면서 많은 챔피언들의 허리를 장식하며 흔해 빠진 물건이 되었다.
더욱이 L.헤비급 사이에 슈퍼미들급까지 생겨나 다체급 석권이 유행처럼 번지자 1990년대 초반 이 체급은 챔피언들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잠시 거쳐가는 정거장 신세로 전락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해글러-레너드-헌스-두란이 차례로 거쳐간 <WBC> 타이틀은 <줄리안 잭슨>이 1990년말 해롤 그래햄을 환상적인 라이트훅 원펀치로 실신시키고 차지해 2체급을 석권했다.
여전히 공수가 뚜렷한 단조롭고 경직된 복싱에 머물러 있었지만 해머같은 펀치력 만큼은 부실한 체력과 맷집을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3차례 연속 초반 KO승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잭슨은 야심차게 준비한 IBF 챔피언 제임스 토니와의 한판승부가 무산되자 타이틀 방어에 전념했으나 쉬어가는 방어전으로 생각했던 5차방어전에서 전 WBO 챔피언 <제랄드 맥클레란>의 강타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며 5R만에 무릎을 꿇어 KO왕은 KO로 진다는 복싱계의 속설을 재확인시켰다.
맥클레란이 하드펀처 존 무가비에 이어 잭슨까지 격침시키자 많은 전문가들은 당분간 미들급이 그의 천하가 될 것으로 보았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맥클레란은 잭슨을 포함한 3명의 도전자를 단 한번의 공소리에 모조리 해치워 원라운드 보이다운 괴력을 뽐내며 많은 팬들의 관심을 모았지만 아마추어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던 로이 존스 주니어가 IBF 미들급에 이어 슈퍼미들급 챔피언에 오르자 조급한 마음에 타이틀을 반납하고 월장했다가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맥클레란이 자리를 비우자 <줄리안 잭슨>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유럽챔피언 아고스티노 카르모다네를 요절내고 냉큼 자리를 다시 꿰챴으나 이미 30대 중반을 넘어선 잭슨도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는 없어서 5개월 후 <퀸시 테일러>에게 바톤을 넘겨주고 서서히 퇴장을 준비했다.
까다로운 스타일의 왼손잡이였던 테일러는 안정된 밸런스에 제법 파워도 붙어 있었는데 불행히도 상대성이 좋지 못한 장신의 <키스 홈즈>에게 9RTKO로 타이틀을 잃어 단명에 그쳤다.
190cm에 육박하는 큰 키에 긴 리치를 소유한 홈즈는 기동력을 살린 사우스포로 상대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한 뒤 빠르고 정확한 롱펀치로 경기를 풀어 나갔다.
다소 수수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스타일이나 한번 불이 붙으며 인화성 강한 원투스트레이트가 승부를 가르기도 했다.
두 번의 방어전을 후반 KO승으로 장식한 후 프랑스 원정길에 나섰다가 발을 헛디뎌 <하시네 세리피>에게 잠시 벨트를 맡겨 두었다.
대머리가 눈에 띄었던 세리피는 거친 완력으로 18년만에 WBC 타이틀을 유럽으로 가져오는데 성공했지만 뻣뻣한 상체로는 더 이상 미래가 없었다.
1년여만에 세리피를 설욕하고 왕좌에 복귀한 <키스 홈즈>는 2차방어에 성공한 뒤 매치메이킹을 놓고 돈 킹과 법정투쟁을 벌이면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바람에 타이틀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렸다.
<WBA>쪽은 1994년 <호르헤 카스트로>가 전 챔피언 레지 존슨을 판정으로 꺽고 새로운 챔피언으로 이름을 올렸다.
아르헨티나 출신답게 정확히 100번째 시합에서 정상을 차지한 카스트로는 산적두목을 연상케하는 외모에 놀라운 체력을 지닌 터프가이로 지칠줄 모르는 공격으로 한몫했지만 움직임 자체가 느리고 테크닉 또한 보잘 것이 없었다.
2차방어전에서 왕좌 복귀에 나선 존 데이비드 잭슨에게 만신창이로 얻어터지다 9R 럭키펀치 한방으로 드라마틱한 역전극을 일궈내 잠시 주목을 받았으나 존슨의 재도전을 가까스로 물리친 뒤 <다케하라 신지>의 두뇌복싱에 다운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며 5차방어에 실패해 과분한 자리에서 내려왔다.
일본 최초로 미들급을 정복한 다케하라는 필리핀의 세페리노 가르시아 이래 무려 56년만에 이 체급의 타이틀을 동양으로 가져왔다.
185cm가 넘는 큰 키에 완급조절이 탁월한 공수와 깔끔한 컴비블로우를 통해 자국과 동양챔피언을 거치며 엘리트 복서로 성장해왔다.
특히, 칼날같은 스트레이트와 상대의 보디를 겨냥한 레프트훅이 수준급이어서 당시 동양권에서는 적수가 없었으나 다케하라 역시 6개월 후 미국의 <윌리엄 조피>에게 9R만에 철저히 부서지며 동양인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 망막 부상으로 젊은 나이에 은퇴를 강요당했다.
<윌리엄 조피 Vs. 로베르토 두란>
아마추어를 거쳐 주로 3류들을 상대로 전적을 키워온 조피는 아기자기한 기교에 날쌘돌이처럼 빠르고 탄력있는 복싱을 구사했다. 무엇보다 순발력 넘치는 받아치기가 장기였지만 스피드에 비해 펀치력이 부족했고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은 애초부터 미들급 선수로 어울리지 않았다.
두 번의 관문을 넘어선 뒤 도미니카 출신의 <훌리오 세자르 그린>과 다운을 주고받는 접전 끝에 석패했다.
조피와 마찬가지로 단신의 그린은 예리한 각도의 컴비블로우가 눈에 띄였지만 챔피언으로서는 함량 미달이어서 5개월만에 <윌리엄 조피>에게 벨트를 돌려 주었다.
재임에 성공한 조피는 47살의 나이에도 비대해진 몸집으로 링을 배회하던 로베르토 두란을 3R만에 스톱시킨 데 이어 재도전에 나선 그린의 눈자위를 잘라내고 안정감을 되찾았다.
이후 만만한 상대를 골라 유유자적하며 3년을 보내는 사이 역설적으로 WBA 타이틀의 권위는 추락해갔다.
결국, 2001년 미들급 통합시리즈에 끌려나가 당대의 웰터급 최강 <펠릭스 트리니다드>에게 무참한 패배를 당하며 6차방어에 실패했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3관왕을 달성한 트리니다드는 잇달아 체급을 올리면서도 가파른 상승세의 자신감과 변함없이 전투적인 강력한 인파이팅으로 푸에르토리코의 영웅에서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미들급에서 마이클 넌과 제임스 토니같은 좋은 인재를 배출했던 <IBF>는 1993년 또 다시 걸출한 인물을 정상에 올려 놓았다. 서울올림픽에서 홈텃세로 은메달에 그친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가 동국의 강호 버나드 홉킨스를 어렵지 않게 따돌리고 드디어 세계챔피언이 된 것이다.
올림픽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이 프로 전향 이래 파죽지세의 KO가도를 질주한 존스는 초인적인 반사신경을 소유한 무버스타일로 아웃복싱과 인파이팅을 넘나드는 감각적인 복싱으로 링을 지배했다.
경쾌한 스텝과 유연한 상체로 빈틈을 만들어 꽂아 넣는 파워펀치가 위력적이었고 놀라운 핸드스피드를 자랑하는 컴비블로우와 예측불허의 빠른 공수전환은 상대의 거리싸움이 무색할만큼 화려했다.
여기에 양팔을 내린 채 모든 펀치를 피해내는 뛰어난 동체시력과 엄청난 순발력, 전라운드를 풀로 뛸 수 있는 무한체력까지 겸비해 차라리 신계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세차례의 논타이틀전을 거쳐 지명도전자 토머스 테이트를 레프트훅 일발로 초살시킨 뒤 당시 중량급 최강으로 군림하던 제임스 토니를 겨냥해 슈퍼미들급으로 떠나버려 이 체급에서의 재임기간은 1년 남짓에 불과했다.
존스의 월장 덕분에 <버나드 홉킨스>는 세군도 메르카도와 두 번의 싸움을 벌인 끝에 정상에 올라 기사회생했다.
청소년 시절 강도죄로 복역 후 출소해 24살의 늦은 나이에 프로에 데뷔한 홉킨스는 초기에 라이트스트레이트가 위력적인 속전속결의 강타자로 이름을 알렸다.
미들급으로서 이상적인 신체조건을 지녔고 언제나 검은 망토를 둘러쓴 채 음산한 표정으로 링에 나타나 일찍부터 사형집행인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발을 쓰기보다는 군더더기없는 상체의 움직임으로 거칠게 압박한 뒤 맹렬한 연타공격을 퍼부었고 클린치 상태에서 날려대는 펀치도 많았지만 상대의 가드를 뚫어내고 꽂히는 라이트펀치는 파괴력의 크기를 떠나 상당히 날카로웠다.
다소 더티한 이미지를 풍기기는 해도 손이 많고 근접전에 강한데다가 다채로운 컴비블로우와 예리한 보디공격은 맷집 좋은 도전자들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비교적 견고한 수비능력과 웬만한 펀치를 맞고도 끄덕없는 내구력은 장기집권의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첫 도전자 스티브 프랭크를 24초만에 실신시킨 뒤 여세를 몰아 존 데이비드 잭슨과 글렌 존슨같은 실력파들까지 차례로 KO로 잡아내며 5연속 KO방어를 달려 성가를 높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KO를 노리기 보다는 치밀하게 계산된 복싱으로 지루한 경기를 거듭하며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해 두자릿수 방어기록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카를로스 몬손이나 마빈 해글러에 비해 존재감이 부족했다.
한동안 정처없이 방황하던 <WBO> 타이틀은 설립 초기 유달리 관계가 돈독했던 영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크리스 파이엇>이 챔피언 결정전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전 WBA 챔피언 숨부 칼람베이를 꺽고 은퇴로 내몰았다.
다소 연약해 보이는 타입으로 3년전 존 데이비드 잭슨에 고배를 들었지만 영리하면서도 투지 넘치는 파이팅이 인상적이었고 펀치력도 제법 쓸만했다.
두 명의 도전자를 모두 KO로 쓰러뜨린 뒤 지나친 자신감이 독이 되어 <스티브 콜린스>의 라이트카운터펀치를 맞고 5R만에 무릎을 꿇어 잊혀졌다.
세 번째 도전만에 정상에 오른 콜린스는 셀틱의 전사라는 닉네임답게 매우 저돌적이고 터프한 공격력을 자랑했지만 체중고 때문에 단 한차례의 방어전도 없이 타이틀을 반납하고 슈퍼미들급으로 월장하더니 뒤늦게 전성기를 맞이했다.
후임에는 전미 골든글러브 챔피언 출신의 <로니 브래들리>가 수준 이하의 데이비드 멘데스를 최종회 KO시키고 정상에 올랐다.
미끈한 몸매를 소유한 브래들리는 탄탄한 기본기에 흑인 특유의 유연한 몸놀림과 리드미컬한 공수가 강점이었다.
자로 잰듯한 원투스트레이트와 날카로운 좌우훅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파워가 숨어 있었고 스웨이도 능해 상대의 펀치를 허용하는 일이 드물었다.
두명의 자객을 잇달아 초반에 실신시켜 주목을 받은 뒤 사이먼 브라운의 3관왕을 저지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나갔으나 6차방어에 성공하고나서 갑자기 망막 이상으로 타이틀을 포기하는 불운을 겪어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했다.
9개월 전 브래들리와 무승부를 기록했던 <오티스 그랜트>는 영국 원정에서 라이언 로즈를 누르고 새로운 챔피언이 되었다.
자메이카 태생의 사우스포로 일찍부터 월드랭커를 상대하며 경험을 쌓았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침착하고 내실있는 경기운영이 돋보였지만 한차례 방어에 성공한 뒤 L.헤비급에서 빅매치가 성사되자 미련없이 타이틀을 내던지고 월장했다.
챔피언들의 타이틀 반납이 속출하면서 이번에는 국제적으로 무명이나 다름없던 독일의 <버트 쉥크>가 프리먼 바를 4RTKO로 꺽고 왕좌에 올랐다.
사우스포치고는 힘이 좋고 꽤나 공격적이었던 쉥크는 어렵게 첫 방어에 성공한 뒤 부상으로 링에서 멀어지면서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영국의 <제이슨 매튜스>는 잠정챔피언에서 곧바로 정규챔피언으로 승격했는데 매서운 주먹과 달리 내구력에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내며 스웨덴의 <알만 크라인츠>에게 8RKO로 무너져 실제 재임기간은 한달도 못되었다.
뉴밀레니엄 들어서도 여전히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던 이 체급은 2001년 돈 킹이 기획한 3대 메이저 기구 통합시리즈가 발표되면서 복싱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모았다.
먼저, 6년 가까이 <IBF>를 통치하고 있던 <버나드 홉킨스>는 1년여의 공백을 극복하지 못한 <WBC>챔피언 홈즈에게 시종일관 사나운 공세를 펼쳐 압승을 거두고 양대기구 타이틀을 하나로 묶어냈다.
이어 트리니다드 역시 투타임 챔피언 조피를 누르고 <WBA> 챔피언에 올라 양자는 5개월 뒤 결승에서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경기 전 2-1로 트리니다드의 우세가 점쳐진 가운데 뉴욕에서 발생한 9.11 테러의 여파로 시합은 2주 연기되었고 홉킨스가 푸에르토리코 국기를 내팽개치는 소동을 벌여 트리니다드를 자극하기도 했다.
9월 29일 뉴욕 MSG에서 열린 경기는 신체조건의 우위를 살린 홉킨스가 반칙도 마다하지 않는 터프한 공세로 시종일관 압도한 끝에 최종회 라이트훅으로 트리니다드를 KO시켜 해글러 이래 15년만에 3대기구 타이틀을 통합하는 기염을 토했다.
내추럴 웰터급인 트리니다드에게는 불과 1년만에 슈퍼웰터급과 미들급을 석권한 과도한 성공이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이후 트리니다드는 재기를 모색했지만 생애 첫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29살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고 후일 컴백해 로날드 라이트와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잇달아 패배하면서 완전히 링을 떠났다.
트리니다드 전을 통해 명실상부한 미들급 최강으로 군림하게 된 홉킨스는 이듬해 지명도전자 칼 다니엘스를 완파하고 15차방어에 성공하며 몬손의 최다방어 기록까지 갈아치워 인색하기만 했던 전문가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게 했다.
한편, 2000년 슈퍼챔피언 제도를 도입한 <WBA>는 왕좌에서 물러난지 6개월 밖에 안된 <윌리엄 조피>에게 하워드 이스트맨을 제물로 또 다시 대관식을 치르게 하는 호사를 안겨줘 물의(?)를 빚었다.
워낙 그릇이 작은 탓에 좀처럼 링에 오르지 못하다가 제2의 다케하라를 꿈꾸던 호즈미 나오다카를 제거한 뒤 챔피언 단일화에 나섰지만 더욱 노련해진 홉킨스의 벽을 넘을 수는 없어서 호빵이 된 얼굴로 2년만에 야인으로 전락했다.
조피가 한번도 아니고 세번이나 챔피언을 지낸것만 봐도 1990년대 당시 미들급의 질적 하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슬로베니아 이민자의 후손이었던 <WBO>챔피언 크라인츠는 당시 스웨덴이 프로복싱을 금지했기 때문에 독일에서 데뷔했는데 동구권 특유의 업라이트 스타일로 공수의 균형이 잘 잡혀 있었고 가라테 출신답게 타격에 일가견을 보였다.
만만치 않은 상대였던 무패의 전챔피언 쉥크를 6R만에 무너뜨린 후 2001년 우니베어줌 프로모션과의 분쟁으로 타이틀을 포기하고도 WBO의 강권에 벨트를 유지했다.
이후 1년만에 나선 3차방어전에서 동국의 파올로 로베르토를 꺽고 활기를 되찾았지만 잠정챔피언 <해리 사이먼>의 집요한 공격에 밀려 타이틀을 상실했다.
2체급을 석권하며 보폭을 넓혀가던 사이먼은 왕좌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아 자동차 과속으로 사망사고를 내며 자신도 큰 부상을 입어 타이틀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5년 뒤 고향에서 재기하며 몇차례 경기에 나섰지만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고 무패로 링을 떠난 몇 안되는 챔피언으로 남았다.
잠정챔피언에서 정규챔피언으로 승격한 아르헨티나의 <엑토르 벨라스코>는 비교적 좋은 신체조건을 소유했으나 우직한 전진스텝만으로는 정상을 지킬 수 없어서 석달 후 쉥크의 대타로 나선 독일의 <펠릭스 스텀>에게 벨트를 넘겼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출신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스텀은 풍부한 아마추어 전적으로 기본기를 다진 기대주였는데 유러피언치고 리드 잽이 좋고 발도 잘 쓰는 편이었다.
펀치력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섬세하고 교묘한 연타는 상대를 교란시키기에 충분했고 180cm가 넘는 장신에서 터지는 라이트스트레이트와 레프트훅은 무시못할 화력을 뿜어냈다.
여기에 건실한 디펜스와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경기운영능력까지 갖춰 독일복싱의 미래를 이끌어 갈 재목으로 평가받았다.
첫 방어전을 가볍게 넘어선 뒤 홉킨스의 목을 노리고 올라온 <오스카 델 라 호야>의 재기전 상대로 지목되어 잘싸우고도 네임밸류에서 밀려 타이틀을 내주었다.
사상 최초로 6체급 석권의 대기록을 작성한 호야는 홉킨스의 눈앞에서 부진한 경기를 펼쳐 스스로 실망할 수 밖에 없었고 트레이드 마크인 스피디한 공격력도 이제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감마저 증폭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틀 뒤 홉킨스와의 역사적인 4대기구 통합타이틀전이 발표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1990년대 초반 포스트 해글러를 자임한 챔피언들마저 하나, 둘씩 사라진 뒤 존스의 등장으로 잠시 기대를 모았지만 그에게도 이 체급은 정거장에 불과해서 과거의 명성에 턱없이 부족한 챔피언들이 양산되었다.
그나마 세기말 IBF의 홉킨스가 몬손과 해글러에 이어 오랫동안 미들급 챔피언으로 군림하면서 타이틀 지켜낸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39살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정력적인 파이팅으로 10년 가까이 정상을 지켜온 <WBA> <WBC> <IBF> 통합챔피언 <버나드 홉킨스>는 오래전부터 갈망해 온 상대인 <WBO> 챔피언 <오스카 델 라 호야>와의 한판승부에 나섰다. 양자 모두 그동안의 경력이나 나이를 감안할 때 누군가 한사람은 크게 후회할 수 밖에 없는 최후의 결전이었다. 더욱이 당시로서는 사상 첫 4대기구 통합타이틀전이었던 만큼 경기 슬로건처럼 또 하나의 역사가 될 것으로 기대됐다.
이 경기는 호야측 요구로 158파운드의 계약체중으로 성사되었고 대전료면에서도 호야가 홉킨스에 비해 3배 많은 3천만달러를 보장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전의 펠릭스 스텀 전을 통해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호야는 프로데뷔 이래 처음으로 언더독을 피할 수 없었다. 2004년 9월 18일 전세계 복싱팬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양강의 충돌은 초반 호야가 근소하게 리드를 잡는 듯 했으나 4R를 기점으로 홉킨스가 활발한 선제공격을 펼치며 승리의 물꼬를 틀더니 9R 레프트보디샷 한방으로 호야의 간장을 급습해 그대로 침몰시켰다.
이들의 대결은 당시 헤비급을 제외하고 5년 전 트리니다드 Vs. 호야 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100만 건의 PPV를 팔아치우는 높은 수익을 올려 당시 프로복싱의 인기하락 속에서도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사상 최초의 6체급 석권으로 대변되는 1990년대의 아이콘으로 프로복싱 흥행에 크게 기여했던 호야는 홉킨스의 높은 벽을 실감한 채 은퇴의 위기에 내몰렸다.
하지만 20개월 뒤 리카르도 마요르가를 눕히고 WBC 슈퍼웰터급 챔피언으로 화려하게 복귀하더니 당대 최강으로 군림하던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매니 파퀴아오와 글러브를 섞으며 골든보이다운 피날레를 장식했다. 반면, 슈퍼스타 호야에게 생애 첫 KO패의 아픔을 안겨준 홉킨스는 마침내 <WBA> <WBC> <IBF> <WBO> 미들급 타이틀을 싹쓸이하며 사형집행인으로서의 면모를 만방에 과시했고 L.헤비급의 로이 존스 주니어마저 무너진 그 해 파운드 포 파운드 넘버원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더욱이 5개월 뒤에는 하워드 이스트맨을 제물로 래리 홈스가 보유했던 통산 20차방어와 동률을 이루어 실력을 떠나서 기록적으로는 전대의 카를로스 몬손이나 마빈 해글러를 뛰어넘는 역대급 업적을 이루며 위대한 챔피언의 반열에 올라섰다.
미들급 천하통일에 이어 20차방어의 대업까지 달성하며 1인 독주체제를 구축한 홉킨스는 한해 전 컴백한 펠릭스 트리니다드와의 리매치에 잔뜩 눈독을 들였지만 트리니다드가 로날드 라이트와의 도전자 결정전에서 완패하면서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그러나 더 이상 적수가 없을 것 같았던 홉킨스도 2005년 7월 젊은 도전자 <저메인 테일러>를 상대로 별다른 스파크 없이 지루한 범전에 그치며 석연치 않은 2-1의 판정으로 패해 사실상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경기 후 많은 매체들이 홉킨스의 우세를 지지했지만 프로복싱계는 이미 마흔에 접어들어 흥행을 기대하기 어려운 홉킨스보다 새로운 스타의 출현을 고대했던 것으로 읽혀졌다. 장기집권을 끝낸 홉킨스는 주위의 예상과 달리 글러브를 벗지 않고 엄격한 자기관리를 통해 L.헤비급에서 2차례나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괴력을 발휘하며 외계인을 자처하는 새로운 닉네임과 함께 52살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거함 홉킨스를 누르고 단숨에 4대기구 챔피언벨트를 모두 손에 넣은 테일러는 시드니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출전해 L.미들급에서 동메달을 따낼 만큼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루 디벨라에게 스카웃되어 프로에 데뷔하더니 월드랭커 출신의 실력파들을 상대하며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공수가 아주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핸드스피드가 빠르고 파이팅이 좋은데다가 찬스 시 터지는 폭죽같은 연타와 위력적인 라이트펀치는 제법 많은 KO승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챔피언이 돼서는 어정쩡한 아웃파이팅(?) 스타일로 단 한차례도 시원한 승리를 보여주지 못해 톱클래스와는 거리가 있음을 자인했다. 지명방어전을 요구하는 IBF 타이틀을 던져버린 테일러는 홉킨스와 재차 격돌해 역시나 답답한 흐름 속에서도 3-0의 판정승을 거두고 우위를 입증했으나 로날드 라이트와의 2차방어전은 아슬아슬한 무승부로 세이브해 골든웨이트의 통합챔피언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 말에는 그동안 승인료 문제로 갈등을 빚어온 WBA에게도 버림받으며 슈퍼챔피언 지위를 박탈당해 홉킨스로부터 빼앗은 4개의 벨트 중 <WBC>와 <WBO> 벨트만 유지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지리멸렬한 방어전으로 미들급의 인기 하락을 가속화시킨 테일러는 이듬해 욱일승천의 기세로 치고 올라오던 백인 KO 아티스트 <켈리 파블릭>에게 영화 속 한 장면같은 역전 KO패를 당하며 5차방어에 실패해 그저 홉킨스의 천하를 끝낸 사나이로 만족해야만 했다.
2004년 홉킨스를 소위 슈퍼챔피언으로 승격시킨 <WBA>는 정규챔피언 결정전을 지시해 무명의 <마셀리노 마소에>가 케냐의 유망주 에반스 아시라를 2R만에 잠재우고 사모아 태생으로는 처음으로 정상 고지를 밟았다. 올림픽에 3차례나 참가했을 만큼 오랜 아마추어 생활로 서른이 넘은 나이에 프로무대를 밟은 마소에는 펀치력 하나만큼은 발군인 단신의 강타자로 유독 초반승부를 선호했지만 손목 부상과 함께 프로모터와의 불화가 이어지면서 링에서 멀어졌다.
결국, 2년여 만에 나선 첫 방어전에서 호야 전을 통해 주가를 올린 <펠릭스 스텀>의 노련한 아웃복싱에 말려들어 허공만 가르다 타이틀을 날렸다. 예상대로 왕좌 복귀에 성공한 스텀은 큰 활약이 기대되었지만 불과 첫 방어전에서 스페인의 <하비에르 카스티예호>의 카운터 펀치에 비틀거리더니 10R 레프트 보디샷에 저격당해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2관왕의 카스티예호는 38살의 나이에도 체력을 앞세운 변함없는 파이팅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었는데 첫 방어전에서 지명도전자 마리아노 카레라에게 11RTKO패를 당하고도 나중에 카레라가 도핑테스트에서 클렌부테롤이 검출되는 바람에 기사회생했다.
그러나 2차방어전에서 재회한 <펠릭스 스텀>에게 이번에는 만장일치의 판정패를 당해 아홉달만에 벨트를 돌려 주었다. 이 체급에서 세 번째 정상에 오른 스텀은 테일러의 타이틀 박탈로 WBA의 유일한 챔피언으로 군림했지만 2차방어전에서 무명의 랜디 그리핀과 무승부를 기록해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이어갔다.
그러나 홈링에서 만만한 도전자들을 상대로 노련한 디펜스와 함께 특유의 아웃복싱과 카운터 전법으로 꾸역꾸역 방어전을 거듭하면서 점차 안정감을 되찾았고 어느덧 7차방어에 성공해 WBA로부터 슈퍼챔피언이라는 과분한 칭호까지 받았다. 그 뒤 계약을 연장하려는 우니베어줌과의 소송에서 이겨 자유의 몸이 되면서 예전의 화려한 테크닉을 재현하며 두자릿수 방어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11차방어전에서 만난 영국의 터프가이 마틴 머레이에게 혼쭐이 나며 또 다시 부끄러운 무승부로 연명해 팬들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한편, 테일러의 타이틀 반납으로 공석이 된 <IBF>에는 아르메니아 태생의 <아더 아브라함>이 킹슬레이 이케케를 5RKO로 물리치고 대관식을 가졌다. 독일에서 아마추어를 거쳐 프로에 데뷔한 아브라함은 근육질의 다부진 체격을 소유한 하드펀처로 독일전차같은 뛰어난 전투력을 과시했다. 주포인 레프트훅은 일발필도의 무서운 파괴력을 과시했고 다양한 공격루트로 안면과 보디를 오르내리는 컴비블로우는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며 상대를 무너뜨렸다.
디펜스가 좋다고 할 수는 없으나 강인한 체력과 터프니스는 이를 커버하고도 남았고 아마추어와 프로를 통틀어 단 한차례도 캔버스 신세를 진 적이 없을 만큼 놀라운 내구력을 자랑했다. 특히, 3차방어전에서는 에디슨 미란다에게 초반 턱이 부서지는 악조건에서도 풀라운드를 견뎌내는 초인적인 맷집을 발휘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이후 화끈한 시합 운영으로 5연속 KO방어 행진 속에 독일 팬들의 폭발적 인기를 얻었고 첫 미국 원정에서 미란다를 무참한 KO로 꺽어 본고장에도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라이벌이었던 동시대의 WBA 챔피언 펠릭스 스텀과의 통합타이틀전이 끝내 불발된데다가 챌린저 리스트의 네임밸류마저 높지 않았던 탓에 통산 10차방어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는 안방장군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해야만 했다. 결국, 2009년 쇼타임이 주관한 슈퍼미들급 슈퍼식스 월드복싱 클래식 참전을 위해 타이틀을 반납하고 월장했다.
아브라함의 후임으로 새 챔피언에 오른 <세바스티안 실베스터>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지오바니 로렌소를 판정으로 이겼다. 아브라함이나 슈텀과 달리 순수 독일 혈통으로 100전 가까운 풍부한 아마추어 전적으로 기본기를 다졌고 한때 독일 미들급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공격형 파이터임에도 정직한 공수와 파워 부족은 단점이었고 맷집도 허약한 편이어서 롱런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2관왕을 노리던 로만 카르마진의 도전을 간신히 무승부로 막아낸 뒤 4차방어전에서 호주의 복병 <다니엘 길>의 감각적인 공수에 무릎을 꿇었다.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으로 빠른 스피드와 정교한 테크닉을 갖춘 길은 예리한 스트레이트와 카운터펀치를 장착한 아웃복서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난타전도 마다하지 않는 적극성을 겸비한 테크니션이었다. 두차레의 방어에 성공한 후 통산 13차방어에 나선 스텀과의 통합타이틀전을 적지에서 승리로 이끌어 <WBA> 타이틀을 흡수했다.
아마추어시절 테일러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며 미국인들이 염원하던 미들급 화이트 호프로 떠오른 <WBC> <WBO> 통합챔피언 파블릭은 프로 데뷔 후 거의 무명에 가까웠지만 북미챔피언에 오르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스킨헤드가 어울리는 저돌적인 공격력과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화끈한 스타일로 팬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긴팔을 이용한 원투스트레이트는 상대의 머리가 뒤로 젖혀질 정도로 상당한 파워를 장착하고 있었고 훅과 어퍼컷을 활용한 보디공격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공격 일변도의 스타일 상 밸런스나 디펜스가 부실해 자주 다운을 허용했고 리드펀치가 제구실을 못해 움직임이 좋은 상대에게는 역시나 약점을 드러냈다. 2차방어에 성공한 뒤 돌연 L.헤비급으로 월장한 홉킨스와의 일전에 나서 17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노장의 뚝심과 근성 앞에 단조로운 공수를 드러낸 채 완패해 이유없는 싸움에 나선 것을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알콜에 의존하면서도 자신의 체급으로 돌아와 두차례의 방어전을 KO승으로 장식하며 불안감을 씻어냈지만 5차방어전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고 있던 WBC 슈퍼웰터급 챔피언 <세르히오 마르티네스>의 빠르고 정확한 공격에 참패해 벨트를 풀었다.
100만불이라는 거액(?)을 손에 넣으며 미들급의 새로운 지존으로 떠오른 마르티네스는 글자 그대로 대기만성의 전형과도 인물이었다.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능력있는 프로모터를 만나지 못해 조국인 아르헨티나와 스페인, 영국 등을 전전하다가 30대 중반이 돼서야 꽃을 피운 것이다. 그런데 WBO는 두체급을 동시 석권한 마르티네스에게 체급 선택을 강요하더니 한달만에 타이틀을 박탈하는 어처구니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슈퍼웰터급 타이틀을 반납하고 미들급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은 마르티네스는 첫 방어전에서 폴 윌리엄스를 보란 듯이 2R 레프트카운터펀치로 실신시키는 잔인한 복수극을 연출해 링지를 비롯한 모든 매체로부터 당대의 메이웨더와 파퀴아오를 제치고 2010년 최고의 복서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두달 뒤 <WBC>도 마르티네스가 소속 방송사인 HBO의 반대로 지명방어전을 머뭇거리자 다이아몬드챔피언으로 밀어내고 잠정챔피언으로 있던 독일의 <세바스티안 즈빅>을 정규챔피언으로 승격시켰다.
메이저 기구들의 이와같은 행태는 당시 미들급에 중남미와 유럽 등으로부터 좋은 자원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면서 속된 말로 회전율을 높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로 인해 미들급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사분오열 양상을 나타내며 또 다시 함량 미달의 챔피언들을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마르티네스의 타이틀을 일찌감치 박탈한 <WBO>쪽은 러시아의 <드미트리 피로그>가 미국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히던 다니엘 제이콥스를 5R만에 침몰시키고 새 챔피언에 올랐다. 200전이 넘는 풍부한 아마추어 경력을 소유한 피로그는 여느 동구권 복서들과 달리 강력한 펀치력을 앞세운 아메리칸 스타일(?)의 호쾌한 파이팅을 보여주었다.
스피드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허리를 이용한 상체의 무빙이 좋아 회피능력이 탁월했고 공격 시 스트레이트, 훅, 어퍼컷의 3박자가 척척 들어 맞았다. 두차례의 방어에 성공하며 미들급의 새로운 주역으로 조명받았으나 불행하게도 허리 부상으로 타이틀을 내려 놓아야 했다.
후임에는 카메룬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잠정챔피언 <하산 은담 은지캄>이 정규챔피언으로 승격했다. 비교적 큰 키와 긴 리치를 소유해 아웃복싱에 능숙했으나 두달 뒤 내구력에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내며 <피터 퀼린>의 매서운 펀치에 6번이나 다운을 내주고 박살이 나버려 애초부터 깜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WBC> 챔피언 즈빅은 단순히 기량만 놓고보면 상당히 후한 점수를 받을만 했으나 중량급 치고는 너무나 솜주먹인 것이 문제였다. 5개월 후 멕시코의 레전드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의 아들인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 주니어>를 상대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후반에 추격을 허용하며 아쉽게 첫 방어에 실패했다. 멕시코 최초의 미들급 챔피언으로 이름을 올린 차베스는 슈퍼스타였던 아버지의 후광 덕분에 데뷔 초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파죽지세의 연승가도를 달렸다.
엄청난 체력에 펀치력이 좋고 승부욕도 강해 저돌적인 인파이팅을 구사했지만 몸놀림이나 스텝이 부족하고 디펜스 또한 부실한 편이어서 맷집으로 커버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잊을만하면 약물논란이 제기됐고 2차방어전을 앞두고는 음주운전으로 구속되는 사고까지 쳐 아버지의 명성에 누를 끼치기도 했다. 3차방어에 성공한 뒤 젊은 패기를 앞세워 무관의 제왕 <세르히오 마르티네스>와 진검승부에 나섰으나 현저한 실력차를 드러낸 채 최종회 역전 KO승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낙마했다. 이후 체중고로 L.헤비급까지 오르내리면서 자기관리에 실패해 생각보다 일찍 한계를 맞이했다.
사상 첫 4대기구 통합챔피언에 오르며 장기집권하던 홉킨스가 강제 퇴위당한 이 체급은 2000년대 중반 난세를 맞이한 가운데 파블릭과 마르티네스 정도가 리니얼 챔피언으로서 주목을 받았을 뿐 더 이상 이렇다할 챔피언을 내세우지 못했다. 더욱이 럭키가이 테일러의 등장에 이어 스텀이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팬들의 관심은 차갑게 식어만 갔다. 다만, 전통적으로 미국이 강세를 보였던 미들급에 유럽과 중・남미는 물론 오세아니아에서 잇달아 챔피언을 배출한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었다.
2010년 <WBA> 챔피언 펠릭스 스텀이 슈퍼챔피언으로 추대되면서 카자흐스탄 출신의 잠정챔피언 <게나디 골로프킨>이 정규챔피언 자리에 조용히 무혈입성했다.
고려인 어머니를 둔 하프코리언으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골로프킨은 자신의 이름을 딴 닉네임 ‘트리플 G’로 불리우며 당시 침체일로를 걷고 있던 이 체급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왔다.
300전이 넘는 커리어를 쌓으며 아마추어 무대를 평정한 뒤 아테네올림픽 은메달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니베어줌을 통해 독일에서 프로 데뷔했다.
신체조건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상대를 가두는 철저한 압박은 기본이고 쇠뭉치같은 펀치력과 정교한 타이밍의 공격력을 겸비해 한번 걸려들면 누구도 살아남기 어려운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리드펀치의 활용이 빼어나고 상대의 빈틈을 정확히 요격하는 필살의 보디블로우와 레프트잽을 가장한 빠른 스트레이트는 동구권 출신의 하드펀처에게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 높은 세기였다.
여기에 탄탄한 하체의 체중 이동과 전완근을 이용한 좌우훅과 어퍼컷은 엄청난 파괴력을 뿜어냈다.
수비적인 측면에서도 안정된 스탠스에 공수전환이 빠른데다가 움직임 자체가 간결해 회피능력 또한 나쁘지 않았고 가끔 상대의 펀치를 맞더라도 턱이 들리지 않는 강철같은 내구력까지 갖춰 상대를 역관광(?)시키는 카운터펀치에도 능했다.
화려한 스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다고 발이 느린 것은 아니어서 골로프킨의 사자몰이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초기 연전연승에도 불구하고 스텀의 인기에 치여 조무래기들만 상대하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챔피언에 오른 뒤에도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하며 이리저리 떠돌았으나 클리츠코 형제가 운영하는 K2 프로모션으로 이적한 후 새로운 스타가 필요했던 HBO의 지원 아래 미국시장에 진출하면서 본격적인 세몰이에 나섰다.
명장 아벨 산체스와 콤비를 이룬 골로프킨은 맷집 좋기로 유명했던 그레체고르츠 프로크사와 가브리엘 로사도를 연달아 KO시켜 단번에 메인이벤터로 자리 잡았다.
이어 만만치 않은 상대 매튜 매클린은 물론, L.헤비급을 오르내리던 커티스 스티븐슨마저 무시무시한 해머링으로 요절내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2013년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골로프킨은 링매거진 팬투표 결과, 당대의 슈퍼스타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를 제치고 최고의 복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2년 적지에서 스텀을 누르고 <WBA> <IBF> 통합챔피언에 오른 <다니엘 길>은 정규챔피언 골로프킨과의 단일화 지시를 거부한 채 <IBF> 타이틀 홀더에 만족했다.
이후 발빠른 아웃복싱으로 동국의 앤서니 문딘을 설욕하더니 첫 미국 진출 시합에서 영국의 <다렌 바커>에게 한차례 다운을 빼앗고도 근소한 차이로 타이틀을 상실해 5차방어에 실패했다.
두 번째 도전에서 정상을 차지한 집념의 복서 바커는 풍부한 아마추어 경험을 통한 안정된 기량으로 홈팬들의 큰 기대를 받았으나 첫 방어전에서 솜주먹인 <펠릭스 스텀>의 맹렬한 연타 앞에 2RTKO로 무너지더니 교통사고 후유증 탓에 고질적인 엉덩이 부상을 극복하지 못해 링을났다.
이 체급에서 무려 4차례나 왕좌에 오르며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간 스텀은 첫 방어전에서 호주의 <샘 솔리만>에게 판정패를 당하고도 경기 후 솔리만이 도핑 테스트에 걸리는 바람에 구차하게 왕위를 이어갔으나 석달 후 재격돌한 솔리만의 치고 빠지는 아웃복싱에 또 다시 농락당해 아예 슈퍼미들급으로 쫓겨났다.
스텀의 천적임을 입증하며 40살의 나이에 정상에 오른 솔리만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인터내셔널 파이터로서 까다로운 변칙스타일로 한몫했으나 <저메인 테일러>와의 첫 방어전에서 초반 다리부상을 당해 4차례의 다운을 내주는 안타까운 모습으로 만년에 오른 왕좌에서 물러났다.
슈퍼미들급 슈퍼식스 시리즈에서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가 7년만에 왕좌에 복귀한 테일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총기위협과 마약소지 등 중범죄로 기소되어 장외에서 타이틀을 날렸다.
후임에는 슈텀의 대타로 출전한 캐나다의 골든보이 <데이비드 르뮤>가 전 WBO 챔피언 하산 은담 은지캄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대관의 영광을 안았다.
프랑스계로 핸섬한 마스크에 양훅과 스트레이트를 앞세운 화끈한 시합으로 프로데뷔 이래 20연속 KO승을 질주하며 일찌감치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초반 승부를 선호해 한때 제랄드 맥클레란의 재림으로 평가받기도 했으나 발을 쓰지 않는 단조로운 공수와 후반 체력 저하까지 드러내며 이미 두차례 패배를 경험한터라 롱런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WBC>의 리니얼 챔피언에 복귀한 <세르히오 마르티네스>는 그동안 다이아몬드 챔피언으로 물러나 있으면서도 톱클래스를 상대로 날카로운 카운터펀치에 빠른 발을 이용한 변칙적인 경기운영까지 더하며 3연속 KO승으로 펄펄 날아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강해지는 느낌을 주었으나 누구에게나 황혼은 찾아오는 법이어서 첫 방어전부터 마틴 머레이의 강공에 시달리며 졸전을 벌이더니 1년여의 긴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4년 돌아온 강타자 <미구엘 코토>에게 초토화되어 복싱인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푸에르토리코 태생으로는 처음 4체급을 석권한 코토는 이전보다 안정감있는 공수로 길을 가볍게 KO로 제압하고 <사울 알바레스>와의 뜨거운 한판 승부를 예고했으나 WBC와 승인료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더니 경기 직전 타이틀을 박탈당한 채 155파운드의 계약체중에도 불구하고 힘이 좋은 알바레스에게 완패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었다.
2체급 석권에 성공한 알바레스는 웰터급에서 올라온 아미르 칸을 살인적인 라이트훅으로 실신시켜 첫 방어에 성공한 후 잠정챔피언 골로프킨과의 대결을 앞두고 돌연 타이틀을 내놓았다.
나이가 많은 골로프킨을 상대하는데 좀 더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얄팍한 심산이었다.
큰 키에 긴 리치를 소유한 <WBO>챔피언 <피터 퀼린>은 강력한 파워와 수준급의 기량을 소유한데다가 폭발적인 연타능력까지 겸비해 키드 초콜레이트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다.
뛰어난 동체시력과 순발력으로 공수전환이 빠르고 타점높은 스트레이트를 자랑했지만 공격 시 밸런스가 흔들리는 것은 단점이었다.
3차례의 방어전을 무난하게 치러내며 요주의 인물로 떠올랐으나 강호 매트 코로보프와의 지명방어전을 앞두고 갑자기 타이틀을 반납해 일부러 피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수군거림을 들어야 했다.
이후 두차례 정상 도전에 나섰으나 모두 실패해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신세를 망치는 우를 범한 꼴이 되었다.
퀼린의 후임에는 아일랜드의 <앤디 리>가 예상을 깨고 강호 코로보프를 6RTKO로 물리치고 왕좌에 올랐다.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으로 만년의 엠마누엘 스튜워드에게 스카웃되어 미국에서 프로데뷔했다.
185cm의 장신의 사우스포로 불안한 가드가 흠이었지만 하얀 헌스로 불리울 만큼 타점높은 스트레이트와 매끄러운 컴비블로우를 자랑했다. 전임 퀼린의 재기를 가로막는 수훈을 세운 뒤 2차방어전에서 영국의 <빌리 조 사운더스>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해 타이틀을 내주었다.
두자릿수 방어에 성공하며 WBA로부터 슈퍼챔피언 칭호를 얻게 된 골로프킨은 빅매치에 목말라 있었지만 너무나 강한 나머지 누구도 그와 싸우려들지 않았다.
아쉬운대로 무관으로 전락한 길을 상대해 특유의 되받아치기로 KO시킨 뒤 WBC 잠정챔피언 마르토 안토니오 루비오를 공포의 핵꿀밤(?)으로 가라앉혀 전 세계 복싱팬들을 경악케 했다.
이후로도 골로프킨의 KO퍼레이드는 거침이 없어서 터프가이 머레이와 발빠른 주자 윌리 먼로 주니어를 제물삼아 무풍지대를 달리며 14연속 KO방어에 성공했으나 지나치게 겸손한 태도와 밋밋한 멘트로 인해 메이웨더를 비롯한 빅네임들의 의도적 폄훼와 본고장 흥행업자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좀처럼 큰 시합을 잡지 못하던 골로프킨은 때마침 IBF 챔피언에 오른 르뮤를 상대로 2015년 10월 통합타이틀전에 나서며 생애 첫 PPV 경기에 도전했다.
경기는 예상대로 골로프킨이 르뮤를 여유있게 압도하며 8R만에 레퍼리 스톱을 끌어냈고 티켓 파워나 PPV 판매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양대기구를 석권한 골로프킨은 2016년 WBC 잠정챔피언 자격으로 정규챔피언 알바레스와의 한판 승부가 기대되었으나 타이틀을 반납하고 달아난 알바레스 덕분에 땀한방울 흘리지 않고 WBC타이틀도 흡수했다.
한편, 골로프킨의 슈퍼챔피언 승격에 따라 <WBA>는 정규챔피언 결정전을 지시해 <다니엘 제이콥스>가 재로드 플레처를 5RTKO로 물리치고 왕좌에 올랐다.
4년 전 드미트리 피로그와 격돌해 충격적인 넉아웃을 경험했던 제이콥스는 골육종을 극복하고 인간승리를 이루어 낸 기적의 사나이였다.
뉴욕 태생으로 아마추어 시절 웰터급과 미들급에서 골든글러브를 석권할 만큼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어 일찌감치 오스카 델 라 호야에게 스카웃되었다.
비교적 큰 키에 리드펀치가 예리하고 탄력있는 무빙을 이용한 원투컴비네이션는 마치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매서웠다. 여기에 상대의 빈틈을 골라치는 정교함과 속사포같은 연타능력은 톱클래스로 손색이 없었다.
안정된 스탠스와 유연한 허리를 통한 좌우 스위치와 감각적인 슬리핑이 인상적이었고 클린치웍에도 능했지만 생각보다 내구력은 부족한 편이어서 가끔 캔버스 신세를 지기도 했다.
두차례의 방어전을 KO승으로 장식한데 이어 3차방어전에서 강호 피터 퀼린을 85초만에 초살시켜 골로프킨의 대항마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WBC 슈퍼웰터급 챔피언 서지오 모라와의 리매치에서도 압승을 거두며 예열을 마쳤다.
<WBA> <WBC> <IBF> 통합챔피언에 등극한 골로프킨은 무패의 IBF 웰터급 챔피언 켈 브룩의 용감한 도전을 5R만에 일축하며 500만 달러가 넘는 대전료를 챙겼으나 두 체급 아래 선수와의 일전으로 오히려 팬들의 원성을 들어야 했고 WBA로부터는 방어전으로 인정도 받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윌프레도 고메스의 17연속 KO방어와 타이기록을 세운 골로프킨은 1980년대 마빈 해글러 못지 않은 무적함대로서의 명성을 쌓아 나갔지만 초인적인 파워를 자랑한 골로프킨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제이콥스와의 18차방어전을 판정승으로 마무리해 그도 사람이었음을 실감케 했다.
두달 뒤 <WBA>는 적지에서 무라다 료타에게 신승을 거둔 잠정챔피언 <하산 은담 은지캄>을 정규챔피언으로 세웠다. 5년만에 왕좌에 복귀한 은담은 미들급 챔피언으로서는 여전히 함량 미달이어서 5개월만에 다시 만난 <무라다 료타>의 맹공에 무릎을 꿇었다.
일본복서로는 다케하라 신지에 이어 22년만에 두 번째로 미들급 정상에 오른 무라다는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답게 기본기가 충실하고 파워넘치는 원투스트레이트와 좌우훅을 장착했으나 비교적 발이 무디고 스피드 역시 떨어지는 편이어서 미국 원정에서 대수롭지 않았던 <롭 브랜트>에게 낙마하고 말았다.
한편, 더 이상 상대가 없었던 골로프킨은 2017년 9월 마침내 벼르고 별러온 알바레스와 미들급 패권을 놓고 빅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초반 아웃복싱 스타일의 카운터펀치에 고전하면서도 펀치스탯에서 앞서며 우세한 경기를 이끌었지만 비즈니스 차원(?)에서 무승부로 마무리되어 재대결이 불가피해졌다.
복싱의 메카 라스베이거스에 처음 진출한 골로프킨은 비공식이기는 하나 알바레스와 함께 1천만 달러가 넘는 대전료를 보장받아 비로소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듬해 5월 양자 간의 리매치가 확정된 가운데 알바레스의 금지약물 양성반응으로 무산되면서 골로프킨은 급조된 도전자 바네스 마티로시안을 2R만에 요절내고 버나드 홉킨스에 이어 통산 20차방어의 금자탑을 쌓았으나 IBF는 노랭커였던 마티로시안 전을 불인정한 가운데 지명방어전을 이행하지 않은 골로프킨의 타이틀을 박탈해 버렸다.
이어 1년만에 재회한 <사울 알바레스>와 시종일관 치열한 격투 속에 박빙의 승부를 펼친 끝에 미묘한 판정으로 고배를 들어 8년만에 무관으로 떨어졌다.
대체로 1차전은 골로프킨의 승리, 2차전은 무승부로 보는 견해가 많았지만 골로프킨의 노쇠화에 대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고 확실히 과거에 비해 순발력이나 공수 모두 무뎌진 모습을 드러낸 것이 사실이었다.
올림픽 출전 경험을 갖고 있는 <WBO> 챔피언 사운더스는 사우스포의 테크니션으로 손이 많고 스피드가 빠르며 풋워크이 좋아 아웃복싱에 능했고 상대에 따라서는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구사하기도 했다.
당초 WBO로부터 코로보프와의 챔피언 결정전을 지시받았으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회피해 좋지 못한 인상을 주었다.
골로프킨의 그늘에 가려진 채 두 번의 방어전은 모두 범전에 그쳤으나 캐나다로 날아가 지명도전자 르뮤를 현란한 아웃복싱으로 농락하며 존재감을 과시했으나 4차방어전을 앞두고 금지약물 양성반응을 나타내 타이틀을 반납하고 때마침 비어있던 슈퍼미들급 정상을 겨냥해 월장했다.
후임에는 사운더스와의 대결이 무산된 <드미트리우스 안드라데>가 나미비아 출신의 월터 카우톤도크와를 두차례 쓰러뜨리며 대차의 판정승을 거두고 2체급을 석권했다.
슈퍼웰터급 시절보다 과감한 공격으로 팬들에게 어필한 안드라데는 사운더스를 괴롭힌 아카포프를 최종회 스톱시킨데 이어 3차방어전도 KO로 장식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빅매치를 고대하고 있다.
골로프킨을 쫓아낸 <IBF>쪽에는 <다니엘 제이콥스>가 세르기 데레비안첸코를 유연한 공수를 앞세워 무난하게 따돌리고 삼분된 미들급의 한축을 차지했다.
<WBA> <WBC> 통합챔피언에 등극한 알바레스는 금지약물 소동에 이어 개운치 않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보다 빠르고 영악하면서도 밸런스가 잘 잡힌 완성도 높은 복서로 진화했는데 뛰어난 디펜스 스킬을 발휘해 소위 슥빡(?)이라고 불리우는 카운터펀치를 주무기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WBA 슈퍼미들급 정규챔피언 록키 필딩을 제물로 3관왕 대열에 합류한 뒤 제이콥스를 카운터 위주의 아웃복싱으로 가볍게 일축하고 <IBF>타이틀까지 흡수해 1년만에 3대기구 타이틀을 재통합했다.
이어 쓰리타임 WBO L.헤비급 챔피언 세르게이 코발레프를 11R에 침몰시키며 그동안의 논란을 잠재우고 4체급 석권의 기염을 토해 2019년 링매거진을 포함한 모든 매체로부터 최고의 복서에 선정되었다.
알바레스의 3체급 동시 석권은 단일챔피언 시대와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1938년 헨리 암스트롱 이래 무려 81년만의 일이었다.
그 사이 IBF는 알바레스 측이 지명방어전 협상에 실패하자 타이틀을 박탈했고 WBC는 WBA의 슈퍼 챔피언 제도와 유사한 프랜차이즈 챔피언 제도를 신설해 알바레스를 승격시켰다.
톱클래스 챔피언들의 각축전 속에 레귤러 라인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지 오래여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먼저 <WBA> 챔피언 브랜트는 아마추어 골든 글러브 챔피언 출신답게 기동력이 좋은 화려한 연타를 자랑했으나 2차방어전에서 부실한 내구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전임 <무라타 료타>에게 2RKO로 무너져 단명에 그쳤다.
재임에 성공한 무라다는 지난해 스티븐 버틀러를 KO시키고 첫 방어에 성공하며 빅매치를 소원하고 있지만 강력한 파워에도 불구하고 단조로운 공수와 적지 않은 나이가 걸림돌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알바레스의 승격에 따라 <WBC>는 2018년부터 잠정챔피언으로 있던 <저말 찰로>를 별도의 챔피언 결정전없이 정규챔피언으로 인정했다.
동생 저멜과 형제 챔피언으로도 유명한 찰로는 2차례의 방어에 성공하고 있으나 슈퍼웰터급 시절보다 임팩트가 떨어지고 기복이 심한 모습을 드러내 분발이 촉구되는 실정이다.
알바레스가 박탈당한 <IBF>타이틀은 전임 <게나디 골로프킨>이 세르기 데레비안첸코에게 천신만고 끝에 신승을 거두고 차지해 1년여만에 왕좌 복귀에 성공했다.
최근 카밀 세레메타와의 첫 방어전에서 특유의 리드펀치가 살아나면서 활발한 움직임과 함께 디펜스 측면에서도 안정감을 보여줘 불혹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알바레스와의 3차전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2010년대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던 WBA 챔피언 골로프킨의 독주와 함께 WBC는 마르티네스-코토-알바레스로 이어지며 주류를 자처했지만 결국 골로프킨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고 이렇다할 물건을 내놓지 못한 IBF와 WBO는 팬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갔다.
시간의 풍화 속에 골로프킨을 꺽고 알바레스가 최후의 승자가 된 가운데 슈퍼미들급과 L.헤비급을 정복한 그의 관심은 미들급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어 앞으로 새판짜기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 체급은 1940년대부터 거의 10년 주기로 절대적인 지배자들이 군림하며 상대적으로 다른 체급에 비해 난공불락의 이미지가 강했고 그만큼 복싱팬들의 뇌리에 오래남을만한 명승부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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