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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by Ajan Master_Choi 2017. 9. 4.



철학자 칼 포퍼는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보지 않는 자는 바보요, 나이가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자는 더 바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포퍼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가 나중에 자유주의자로 전향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 얘기를 볼 때마다 (물론 그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스스로 ‘나는 결코 바보였던 적이 없어.’라고 거만하게 말하는 듯해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어쨌든 마르크스주의를 ‘닫힌 사회’의 전형이라 맹렬히 비판했던 포퍼조차도 마르크스주의에 젊은 열정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사실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 중 단 한순간도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된 적이 없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전 세계의 3분의 1에 가까운 이들이 거의 한 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다는 사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지금도 여전히 현실의 위기가 심각해질 때마다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마르크스의 이름이 끊임없이 다시 호출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마르크스주의를 단순히 철지난 사상으로 치부하고 무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공산주의 프로젝트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1917년 이후의 세계 전반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하거나 쓸 수 없”(19)는 것이다.
 
도대체 마르크스주의에 무엇이 있기에 그토록 젊은 열정들을 사로잡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개인적인 경험을 밝히자면, <공산주의당 선언>에 실려 있던 한 구절, 즉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라는 표현이 나를 끌어당겼다.

우리나라처럼 각 개인의 개성과 자유가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교육 체계에 몸서리쳤던 나에게, ‘가족을 위해, 학교를 위해, 국가를 위해’와 같은 말들이 끔찍하게 싫었던 나에게,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사회, 그리고 그것이 서로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은 마치 천국에 대한 묘사처럼 들렸던 것이다.
 
나는 무슨무슨 주의자가 되기에는 대단히 게으른 인간이기에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청할 깜냥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이상과 마주한 후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여러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저술들을 찾아 읽게 되었고, 그들이 설명하는 자본주의의 현실과 모순, 그리고 극복 방향에 대해 많은 부분 공감을 하였다.

물론 지금은 그들의 사상들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철저하게 무너져 내렸는지도 알고 있고, 현실의 조건에 비추어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는 나에게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점에서 <코뮤니스트>는 매우 반가운 책이다.

여기저기서 단편적으로 습득했던 공산주의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적 토대와 소련이라는 현실적 구현물, 이 두 중심을 양 극으로 하여 초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부터 최근의 사파티스타에 이르기까지, 시간적·지리적으로 넓게 퍼져있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적·현실적 자기장의 세밀한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특히 기원-실험-도약-확산-변형-종언으로 이어지는 각 부의 제목은 공산주의 역사의 흥망성쇠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시종일관 비판적인 자세로 공산주의의 역사를 검토한다.

물론 저자가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폐기해야할 철지난 사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기초에 대한 치밀한 검토를 수행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역사가로서 그 사상이 현실에 이루어 놓은 구현물들인 여러 현실적 공산주의 국가들의 모습을 차근차근 파헤침으로써, 어떻게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기획이 실패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가의 사멸’을 예측했다. 공산주의 역사는 그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국가 권력은 급속도로 강화되었다. 노동수용소는 확산되었다. 공산주의에 적대적인 개인과 집단을 억압하는 일은 현상 유지를 위해 계속 필요했다. 시민 사회는 분쇄되었다.”(23)
 
이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뼈아픈 지적이다.

물론 현대의 어떤 공산주의 옹호자들은 ‘역사상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실현한 국가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식으로 이러한 지적을 회피하기도 한다.

레닌이나 스탈린과 같은 독단적 인물의 문제로, 혹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파상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로 현실 사회주의가 보여준 전체주의적 모습을 애써 평가절하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유명한 한 논객의 말을 잠시 비틀어 인용하자면, 하나의 사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가 현실 속에서 만들어 놓은 사태이지 그 사상의 내심이 아니다.

하나의 사상이나 이념은 그 자체의 내적 정합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현실과의 적합성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한 사상을 현실적으로 구현해 보려는 다양한 시도가 대부분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간단히 무시하고 외면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의 역사적 실패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저자는 결론에서 한 가지 딜레마를 지적한다.


“공산주의 정부들은 레닌과 스탈린이 개발한 소련식 모델을 시행할수록 점점 강력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소련식 모델의 근본적인 특징들을 복제할 수 없었거나 복제하려 하지 않았던 국가들은 내부의 해체나 외부의 개입에 취약했다.”(741)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대부분의 국가들은 직면한 내적 외적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체제를 수립해야 했고, 이를 위해 전체주의적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은 더 큰 반발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강력한 체제를 위해 도입한 전체주의가 결국 체제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선택이 일종의 조급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는 조급증.

그러한 조급증이 다양한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로부터 귀를 막게 만들고, 현실적 문제들에 눈감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현실적 급박성을 볼모로 삼아 비판과 성찰의 여지를 무시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억압했던 태도가 전체주의 사회로 귀결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여 더 많은 비판과 토론, 더 많은 실험과 성찰, 결국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도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급증을 버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랬을 때 더 많은 의견들이 서로 조율을 이루면서 하나의 안정된 지향점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로. 나는 그 과정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했던 말도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성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止揚)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