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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조선시대 내시

by Ajan Master_Choi 2022. 3. 10.

보통 사람들이 내시라고 하면 왕이 들어오기 전에

"주우상저어언하아 납씨이오오",

"즈언하~ 수라를 들이겠사옵니다."

라고 소리지르는 늙은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고려시대에는 명문가 출신으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문관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즉, 현대인들이 "내시=환관"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고려시대의 내시는 환관이 아니다.

 

고려의 내시는 여러 관청기관을 원래 소속으로 하고 국왕에 의해 선발되어 내시원에 근무했다.

내시원 근무 신하는 본래 관직명 앞에 내시를 붙였다.

고려 내시들은 왕의 행차에 동행하는가 하면,

왕명의 초안 작성,

유교 경전의 강의,

왕실재정 관리 전반을 담당했으며,

때로는 국왕을 대신하여 궐 밖의 민정을 살피기도 했다.

현대로 보면 청와대의 행정관에 대응된다.

내시는 권설직이며 특별 봉급으로 별사미를 받았다.

때문에 고려 내시 관료는 선망 대상이었으며, 내시 출신 중 재상에 오른 자가 무려 22명이었다.

과거 합격자가 아니더라도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내시가 되기도 하고, 의술, 점술, 잡기 등으로 내시에 발탁되기도 했으며, 무신정권 시대에는 무신이 내시가 되기도 했다.

왕을 보좌하는 직업이기에 무술시험도 봤다.

이후 공민왕 대에 내시부가 만들어진 후에는 관료들이 담당하던 내시원은 군 복무 대신으로 하는 궁궐 숙위 성중관으로 역할이 위축되었으며, 조선 초 세조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궁궐 숙위의 기능만을 담당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환관이 곧 내시부를 담당했던 조선시대의 영향 때문에 환관과 내시를 너무 쉽게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고려시대의 내시직은 엄연히 당대의 고위가문 자제들만이나 들어갈 수 있는 엘리트직인데도, 이를 환관으로 착각하곤 한다.

예컨데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내시 한뢰가 정중부에게

"개도 안 물어갈 환관 놈"

라고 욕을 먹는 이상한 장면이 나오고,

오히려 진짜 환관이었던 왕광취는 멀쩡히 수염 달린 관료로 묘사되어 고증오류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를 신경쓰려다가 진짜 환관이었던 최만생 조차 수염을 기른 관료로 묘사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환관들이 내시부를 맡게 되면서 내시가 곧 환관이라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환관들은 고자였기 때문에 내시라는 말에 고자라는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태조 시대에 당시 세자 의안대군의 세자빈 유씨가 내시(고려시대의 개념으로 거세하지 않았다) 이만과 간통한 사건으로 인해 이만은 처형되고 세자빈은 폐출된 것에서 시작되어, 이후부터는 거세한 사람들만 내시가 되게 함으로서 내시와 환관의 차이가 없어졌다.

흔히 내시는 죽을 때까지 궁 안에서 사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어느 쪽이든 고령이 되면 진상품 관리 등의 파견명목으로 궁 밖에 나가 말년을 보냈다. 

 

경상북도 청도군 임당리에 있는 7동짜리 한옥이 그중 하나로 내시들의 양로원 같은 역할을 하던 장소다.

집안이 부유하거나 돌봐줄 수 있는 가족이 있으면 귀가해서 살 수도 있었다.

이는 궁녀도 마찬가지다.

이는 왕과 왕족만이 궁궐 안에서 죽을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시들은 환관이 되기 위해 잘라낸 자신의 고환을 잘 말린 후 '양물단지'에 보관했다.

죽은 후 고환을 다시 몸에 접합시켜 관에 넣어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시들은 자신의 고환이 담긴 양물단지를 보물처럼 아꼈다.

월계동의 초안산에 분묘군이 있는데, 여기 묻힌 사람들의 상당수가 내시다.

일부 사극에서 묘사되는 조선시대 내시들은 뿔이 없는 사모를 쓰고 흉배가 없는 녹색 단령을 입는 것으로 나오는데, 고증 오류이다.

조선시대 때 그려진 내시들의 초상화를 보면 일반 관료들처럼 뿔이 있는 사모를 쓰고 품계에 따른 흉배가 달린 관복을 입었다.

초안산으로 들어서기 전,

오늘의 주인공 내시들의 삶에 대해 살펴보자.

 

왕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거세된 왕의 남자.

조선의 궁에는 왕을 중심으로 왕의 여자 내명부와 왕의 남자 내시부가 존재했다.

왕의 후궁들과 궁녀가 속한 내명부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소개된 적이 제법 많다.

그에 비해 내시부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내시부, 사전을 찾아보면 조선시대 궁중 안의 식사 감독, 왕명의 전달 등을 맡은 관청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실무 담당자는 모두 환관이 임명됐으며

내시부의 으뜸 벼슬은 왕의 식사와 수행비서 역할을 하는 종2품 상선이었다.

 

종2품은 조선시대 제4위 품계로 그동안 내시하면 떠올리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권력을 보여준다.

물론 정1품(빈)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왕의 여자들에 비하면 조금 떨어지기도 있지만

왕의 최측근으로 머물던 왕의 남자들도 만만치 않은 권세를 누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시부의 정원은 140명.

그들은 궁의 음식과 청소 등 궁중 살림살이를 담당하며 왕과 왕비 등 왕족을 모신 유일한 남자 궁인이었다.

이들은 거세당해 남성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왕의 남자로 권세를 지니게 된 이들은 혼인을 하고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내시들의 혼인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이어졌지만

왕실의 비호 덕분에 내시들도 혼인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좋았던 시절도 잠깐.

내시들이 잠들어 있는 분묘군은 처참하다.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건만 언젠가 왕의 옆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흉측하다.

진짜 핏줄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돌봐줄 후손 없이 잠든 내시 분묘군은 전혀 관리되지 않은 모습이다.

버려진 무덤 곁으로 부러진 비석과 망주석,

목이 잘린 동자석과 문인석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킨다.

조선시대 내시와 궁녀, 그리고 사대부들의 무덤 1000여 기가 모여있는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사적440호)을 가기 위해서는 노원구 월계동의 월계고등학교를 시작점으로 삼으면 좋다.

 

주소는 서울시 노원구 월계동 산8-3번지.

월계고등학교 운동장에 자리한 비석골 근린공원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시대 묘지석물을 살펴보면 더 내실있는 초안산 역사여행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