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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임진왜란

by Ajan Master_Choi 2022. 3. 15.
임진왜란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순신 장군은 외계인이거나 타임머신 타고 미래에서 조선 시대로 온, 인간의 한계를 넘은 神界 바로 밑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은 이순신 장군에서 시작해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면서 끝나 전쟁입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과 자료는 아산 현충사, 용산 전쟁기념박물관, 통영 충열사, 진주성 박물관 등에 많이 있지만
직접 이순신 장군이 기적의 승리를 거둔 명량 해전의 격전지를 찾아서 떠난 여행을 떠났습니다.

윤두수, 김응남, 원균 등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고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해군참모총장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에서 파직당하고 고문도 당하고 옥살이를 합니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대부분의 배를 침몰시키고 섬으로 도망가 자기 혼자의 목숨을 연명합니다.
조선은 제해권을 잃고 일본은 드디어 당시 인구가 가장 많고 곡창지대인 호남 지역으로 진출합니다.

이치, 웅치 전투에서의 패배와 이순신의 한산도 방어선 때문에 더이상 서해 바다로 진출하지 못했던 일본은
이제 마음 놓고 남해 서해로 진출하여 한강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한양을 정복할 준비를 합니다.
이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로 복권하지만
수백척의 배는 원균이 바다로 침몰시켰고 남은 배는 불과 13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군사를 모집하려 각 도시를 방문하자 5리까지 마중나온 관리와 백성들은 울음바다로 장군을 맞이하고 많은 청년들이 자원 입대합니다.

선조는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도원수 권율에 합세해서 육지에서 싸울 것을 권유하지만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제가 살아 있는 한 적은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며 응전의 의지를 보입니다.

일본 수군은 몇 안 남은 조선 수군을 박살내고 남원성 전투에서 승리한 육군과 함께 수륙 양전으로 한양으로 진격할 예정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물살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빠른 명량해협을 진을 치고 있으며 적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일본 수군은 압도적인 배 숫자로 비록 이순신이지만 조선 수군을 마무리 시키겠다고 일대 전격적으로 밀어붙입니다.
이 울돌목(바닷물이 우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물의 길목)이라고 부르는
명량해협은 밀물때 빠른 조류로 유명한 곳입니다.
밀려오는 일본 수군의 숫자가 기가 질립니다.
밀려오는 일본 수군과 이순신 장군은 혼자 맞장을 붙습니다.
토요토미가 특별히 이순신 장군의 목을 베어 오라는 특명을 받은 해적 출신의 구르지마는
가면과 가발을 쓰고 개폼을 잡고 오지만
도리어 백병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목이 베이고 ---영화는 그렇게 나오지만 죽어 물에 빠진 구르지마를 항왜자인 오타니가 알아보고 이순신 장군에게 말하자 장군이 건져내서 그의 목을 베어 높이 걸자 사기를 잃은 왜군은 퇴각하고 그 와중에 급 물살에 서로 부딪혀 많은 배가 깨지고 전투는 그걸로 끝이 납니다.
왜함 31척을 격침시키고 나머지의 반은 반파시키고 4,000여 명을 수장시킨 대승리의 전투로 세계 10대 해전사에서도 한산도 대첩과 명량 대첩은 두 개나 기록되어 있답니다.
살라미스 해전,
레판토 해전,
칼레해전,
트라팔가르 해전,
쓰시마 해전,
미드웨이 해전과 함께 말입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명량해전 이틀 후에 전쟁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철수 명령을 받은 일본 수군을 노량에서 다시 무찌르다가 이순신 장군은 서거하고 이로써 임진왜란은 끝납니다.
울돌목 주위는 명량해전 승리 기념관이 있어서 둘러봤습니다.
천자총통에 점화하고 있는 숙련된 수군입니다.
물살이 센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이 조무라기 일본의 세키부네를 무찌르고 있는 트릭아트입니다.
거북선의 내부 모형을 전시했습니다.
거북선을 처음 만들도록 한 것은 대마도 정벌을 지시한 태종 이방원이었으며,
그때의 모습과는 좀 다르지만 이순신 장군의 부하인 나대용 장군이 만들어서 임진왜란 때 맹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조총을 튕겨내기 위해 위 뚜껑 갑판은 얇은 금속막으로 덮었으며(철갑선이라고 하기에는 무리죠),
앞 뒤 옆에는 소나무 15cm 두께로 만들어서 5cm 나무만 뚫는 조총의 탄환이 뚫지 못했답니다.

영화 명량 마지막에 나오는 거북선은 허구입니다.
칠천량 전투에서 원균이 모두 파괴하거나 수장시키거나, 뺐겨서 한 대도 안 남고 명량해전을 치렀으니까요.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입니다.
좀 느리지만 포를 쏘기에 좋고 충돌시에도 유리합니다.
일본의 세키부네는 해적선답게 방향 전환과 속도가 빠르지만 포를 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근접전으로 올라타서 백병전을 치르는게 일본 수군의 전술입니다.

당시 일본군은 백년 이상 전국시대 전투를 치뤘던 사무라이들이 많아서
백병전에서는 농민군 출신들로 이루어진 조선군은 상대도 안되었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멀리서 포를 쏘고 가까이서는 부딪치는 전술을 사용했답니다.

물론 우리 장수들은 무관 과거 시험이 3년마다 열려서
거의 무에타이 선수급에 펜싱과 양궁 메달리스트 수준이지만 숫자가 적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32세에나 재수해서 무과에 합격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를 쓰는 모습입니다.
맨처음 부임한 함경도 어느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패배했다고 모함을 받아
기록으로 자세하게 남겨놔야 겠다해서 일일이 모든 것을 기록했답니다.
 
와키자카는 용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패배해서
어느 무인도에서 10일을 미역만 먹고 연명하다가 배의 잔해로 뗏목을 만들어 탈출했답니다.
 
이 해적 출신의 왜장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처럼 전사를 모두 기록했고 한산도 대첩일에는 모든 후손들이 미역만 먹는 집안의 풍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답니다.
제일 큰 포가 천자총통,
다음이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순서입니다.
ㅡ하늘천 따지 가물현 누르황~~
명량해전 때 진도의 부녀자들이 강강술래를 하면서 혼란 스럽게 하고 숫자가 많아보이도록 했답니다. (과연?)
울돌목에 쇠사슬을 연결해서 썰물 때 돌려 도망가는 왜선을 걸리게 해서 침몰시켰다는 쇠사슬 감개입니다.
이건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휘하에서 눈치만 보고 전투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김억추의 후손들이 나중에 왜곡해서 남긴 기록들을 보완하기 위해 가짜 유물입니다.
 
쇠사슬 몇만근을 혼자서 지고 만들었다고 하고 칼 한번 휘두르면 왜군 수백명 목이 잘렸다는 기록으로 보면 난중일기만큼 신빙성있는 기록도 많지 않습니다.
진도 대교를 배경으로 케이블카가 지나고 석양이 지는 울돌목 해변입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휘하 군사를 모아놓고 한 유명한 어록입니다.
 
필생즉사
'필히 살고자 하면 죽고, 필히 죽고자 하면 산다'.
명량대첩탑입니다.
여름이 되면 물이 나와 울돌목의 물세기를 체험할 수 있는 시설같은데 지금은 작동을 안 합니다.
영화 장면을 잡은 이 포스터는 위 명량의 고뇌하는 이순신상을 보고 만들었겠죠.
스카이 워크 바로 밑의 물살은 너무 세서 쉭~쉭 우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울돌목이죠.
진도 쪽 기슭에도 울돌목을 내려보고 지휘하는 듯한 이순신 장군상이 있습니다.
울돌목 진도쪽에 있는 진도 타워에 올랐습니다.

판옥선 형태를 패러디한 커다란 설치 예술직품 같습니다.
올라가는 길 옆 벽에 그려진 명량해전 그림입니다.
물살이 엄청난 울돌목의 물살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공격하라"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중과부적의 이순신 장군이 질거 같다고 생각한 나머지 12척은 물살이 바뀐 정오쯤 되어 슬슬 움직이며 도와주기 시작합니다.

결국 승리한 이순신 장군은 곧 노량에서 귀국하는 일본 수군을 끝까지 추격해서 섬멸하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합니다.

이겨도 괴팍한 선조에게 다시 트집잡혀 압송될 것을 예상한 이순신 장군은
일부러 갑옷을 입지 않고 총탄을 일부러 맞은 것이라는 자살설,
잘 아는 남해안 어느 섬에 숨어서 살았다는 은둔설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진도 타워에서 내려다본 울돌목입니다.
가슴 뭉클한 이순신 장군의 처절한 전투 현상을 떠 올리는 울돌목 탐방 여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