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은 멕시코의 무더운 여름날씨에도 불구하고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오후 5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각 트로츠키는 책상 앞에 앉아 몇 가지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잭슨은 코트 주머니에서 얼음 깨는 조그만 도끼를 살그머니 꺼내서 뾰족한 도끼날로 트로츠키의 두개골을 세차게 내리쳤다.
트로츠키의 비명소리를 듣고 경호원이 달려들어와 그 암살자를 붙잡았는데 트로츠키가 "안돼.그 자를 죽여서는 안돼.살려서 입을 열게 만들어야 돼"하고 소리치지 않았다면 이들은 그 암살자를 그 자리에서 죽였을 것이다.
트로츠키는 병원으로 급송될 때까지도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동료 한 사람을 곁에 불러놓고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전한 말을 가까스로 구술했다."나는 정치적 암살자의 공격을 받고 죽을 직전에 있소.부디 내 친구들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고...계속 전진하시오"
이렇게 말하고 트로츠키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다음날 그는 숨을 거두었다.
멕시코시티로부터 수천 km 떨어진 곳에서는 세상에 조셉 스탈린(강철을 뜻하는 러시아어 stal에서 따온 이름)으로 알려진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쉬빌리가 트로츠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스탈린 휘하에 있는 비밀경찰의 사주를 받아 행동했을 것이 분명한 이 암살자는 트로츠키를 추종하면서 신임을 얻은 다음,그를 살해했던 것이다.
스탈린에겐 트로츠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치욕인 동시에 위협이었다.
그의 가장 무서운 경쟁자가 죽음으로써 이제는 러시아의 독재자이며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그의 권위에 도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레닌이 1924년에 사망하자,
그의 측근동료들이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크레믈린에 모였다.
1917년 혁명의 아버지이고,그 후 뒤따른 반란과 내전,기근 속에서 이들을 이끌었던 훌륭한 스승이며 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지도자였던 레닌이 마침내 숨을 거둔 것이다.
이제 레닌의 관 옆에서 마지막 경의를 표하고 아울러 필연적으로 뒤따를 권력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꿈꾸고 있는 인물들은 바로 소련 공산당의 통치기구인 정치국 위원들이었다.
그 자리에는 페트로그라드(현재의 생트 페테르부르크)당 제1서기인 그리고리 지노비에프,모스크바당 제1서기인 레프 카메네프,국가경제최고심의회 의장을 지낸 알렉세이 리코프,당 이론가이자 당기관지 편집책임자인 니콜라이 부하린,그리고 당 서기장인 조셉 스탈린이 있었다.
소련 지도자 중 오직 한 사람만이 그 자리에 없었다.
볼셰비키 혁명과 동시에 트로츠키는 레닌과 함께 러시아혁명의 영웅으로 추대되고, 트로츠키는 그 탁월한 능력과 윤리적인 가치,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자질로서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큰 장벽이 있었다.
그의 태생은 유태인이었다.
유태인이었던 트로츠키로서는 민족의 벽에서 자신이 레닌 이후 최고 대표를 맡을 수가 없었다.
레프 트로츠키는 의사의 장기휴양권고에 따라 흑해 연안의 휴양도시인 수쿠미로 향하고 있었다.
머리가 명석하고 오만한 트로츠키는 레닌의 볼세비키당에 뒤늦게 입당했지만 1917년 6월에 일단 볼세비키에 가담한 후에는 ,그는 레닌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기민한 두뇌는 공산봉기에 예리한 칼날을 주었다.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후,
트로츠키는 외무담당 인민위원(장관)으로 일하다가 다시 군사담당 인민위원이 되었다
그는 붉은 군대를 창설,反혁명적인 白군을 소탕하고 나아가 러시아내전 중에 영국,일본,프랑스,체코,미국을 포함한 외세의 군사적,경제적 개입을 격퇴시켰다.
레닌의 추종자들 중에서 이상에 불타는 러시아 젊은이들 사이에 혁명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독자적으로 수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은 트로츠키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에게는 따뜻한 인간미와 관용이 부족했다.
그는 자신의 명민함과 공산주의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을 과시하면서 자신보다 머리가 모자라고 헌신적인 노력이 부족한 동지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존경할 만한 인물은 레닌뿐이라고 생각했다.
레닌이 죽자 그의 당연한 후계자는 트로츠키였다.
그러나 레닌의 관 옆에 서 있는 애도객 중,
이 당연한 후계자가 최고권력을 승계해서는 안된다는 데 찬성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
권력에 정상에 있는 이들은 문상 중에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레닌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전보를 보냈다.
"모든 정치국원들은 귀하의 건강상태를 우려하여 귀하가 수쿠미로 그대로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음.
장례식은 1월 26일 토요일에 거행될 것임.
귀하는 그 시간에 맞추어 돌아올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됨"
그러나 스탈린도 알고 있던 바와 같이 레닌의 장례식은 27일에 거행될 예정이었다.
트로츠키가 참석하지 않는다면 당과 국가에 대한 그의 관심이 부족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었다.
정지국원들의 트로츠키에 대한 한결같은 증오심은 정치적인 요인과 개인적인 감정이 뒤섞인 것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소련은 과감한 궤도수정을 통해 부분적으로 자본주의방식을 허용함으로써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을 이룩했다.
정치국원들은 이상주의자인 트로츠키가 집권하면 즉각 농업의 집산화와 모든 산업의 국유화 조치를 취함으로써 피해가 엄청났던 내전종식 이후에 채택되었던 보다 온건한 경제정책을 철폐하여 새로운 혼란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들은 또 자신들에 대한 트로츠키의 경멸과 그의 무자비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자기네들의 지휘와 실권을 잃게 되지 않을까도 걱정했다.
따라서 이들은 트로츠키가 지지세력을 규합하기 전에 그의 권력을 박탈하는 데 힘을 모으기로 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반대자들이 알지 못했던 사실은 트로츠키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인물이 그들 사이에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혁명 엘리트들은 조용하고 근면하며 겉으로는 온건해 보이는 조셉 스탈린이라는 인물에게서 곧 그들을 꺾은 권력투쟁의 승리자,그들을 처형하는 독재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1905년과 1907년 사이에 세 차례 짧은 해외여행을 한 것 이외에는 줄곧 러시아제국 안에서 살아 왔다.
그는 1890년대 후반에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으나 ,마르크스의 난해한 이론이나 그의 저서에 밑바탕에 깔린 인도주의적인 충동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1879년 그루지야지방(러시아어로 그루지야로 발음되고 지금은 영어식 발음인 조지아로 표기합니다.와인의 품질이 무척 뛰어나다고 합니다)
고리마을에서 가난한 신기료장수와 세탁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앙심이 독실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그리스정교의 사제로 만들기로 작정하고,온갖 희생을 무릎쓰면서 간신히 그를 그루지야지방의 수도인 티플리스의 신학교에 보냈다.
스탈린은 신학교생활에 따르는 여러 가지 규제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동료학생들에게 혁명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인쇄물을 돌리다가 1899년 그 학교에서 퇴교당했다.
그 다음해 스탈린은 지하정치운동에 참여,
코카서스지방에서 다른 혁명가들과 함께 그 지역 산업도시들의 노동자 파업을 선동했다.
그는 1902년부터 1913년 사이에 일곱 차례나 체포,투옥되었으나 일곱번 모두 쉽게 탈출하여 그가 제정러시아의 비밀경찰조직인 '오크라나'의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1913년 스탈린은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1917년 석방될 때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같이 석방된 카메네프와 함께 페트로그라드로 가서 '프라우다'(진실이라는 뜻)지를 편집하였다.
10월혁명에서 스탈린이 한 역할은 레닌이나 트로츠키에 비해 비중이 훨씬 작은 것이었지만 혁명이 성공한 후 스탈린에게는 민족문제담당 인민위원(장관)자리가 주어졌다.
그는 러시아인 이외의 소수민족(자신의 고향인 그루지아인들을 포함한)들 사이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운동을 잔인하게 분쇄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이후 그는 학살자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그는 1922년 3월 공산당서기장에 임명되었는데 그보다 지식수준이 높은 동료들은 그 자리가 이름 그대로 서기 책임자에게나 알맞는 직위라고 조소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그 직무를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서기장이란 직위가 권력기반으로서는 그 어느 자리보다 잠재적인 가능성이 많음을 인식하고 야심있는 당료들을 각급당직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에 의해 기용된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우선 충성을 바쳤다.
레닌은 1922년 5월 첫 뇌출혈을 일으켰다.
그가 집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동안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스탈린으로 구성된 3두체제가 정부를 이끌어 나갔다.
그해 겨울,집무를 개시할 만큼 충분히 회복된 레닌은 3두체제가 정무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서기국의 잠재적인 영향력을 인식하였고, 스탈린에게 서기국을 이끌어갈 만한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1922년 12월,후에 레닌의 마지막 유언으로 알려진 한 문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스탈린동지는 당서기장이 된 후 자신의 수중에 엄청난 권력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에 상응하는 신중성으로 그 권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 미심쩍다"그 다음날 레닌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가한다
"스탈린은 너무 거칠다.나는 그 직위에서 스탈린을 밀어내고 참을성 있고 보다 충성스럽고 또 보다 예의바른 다른 사람을 임명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도록 동지들에게 제안한다"
레닌이 사망한 후 그의 유언은 카메네프,지노비에프 등에 의해 일부 내용이 삭제되었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이 트로츠키에 대한 권력투쟁에서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불참을 확인한 후,
레닌의 장례식에서 각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이 위대한 인물의 영전에 과장된 표현으로 충성을 다짐했는데 그 내용은 소련 신문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스탈린은 추도사에서 "레닌동지,우리는 전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을 강화,확대시키는데 신명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당신께 맹세합니다"하고 선언했다.
곧 뒤이어 스탈린과 그 협력자들은 당면과제,즉 트로츠키를 권력의 자리에서 고립시키는 일에 힘을 모았다.
레닌이 사망하기 전부터 이미 스탈린-카메네프-지노비에프 3두체제는 당과 국가에 대한 전반적인 지배권을 장악했다.
레닌의 마지막 유언내용이 1924년 5월에 개최된 13차 당대회에서 소문으로 퍼졌지만 3두체제는 정치국을 설득해서 중앙위원들 외의 사람들에게는 레닌의 유언을 비밀에 부치도록 조치했다.
중앙위원들에게 연설하는 자리에서 지노비에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레닌의 우려가 한 가지 점에서는 충분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음을 기꺼이 밝히고자 합니다.그것은 바로 우리 서기장에 관한 유언입니다.여러분들도 지켜보았듯이 수개월 동안 우리들은 훌륭하게 함께 일해 왔습니다.
따라서 내 자신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레닌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확인했으리라 믿습니다"
트로츠키는 2류지도자들로 이루어진 3두체제가 맡은 업무에서 오는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곧 제풀에 무너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레닌의 유언을 공개하지 않은 데 대해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스탈린,카메네프,지노비에프는 힘을 합쳐 트로츠키를 비판하는 선전공세에 나섰다.
이들은 트로츠키의 反레닌주의의 증거로서 혁명 전에 레닌의 볼세비키당 강령에 반대했던 그의 성명내용을 공개했다.
또한 급속하게 경제발전을 추진해야 한다는 그의 계획을 경제파탄을 초래할 '좌익 모험주의'로 규정지었다.
1925년 1월,트로츠키는 군사담당 인민위원(장관)자리에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트로츠키가 정치적으로 고립되자 스탈린은 자신의 협력자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일에 나섰다.
10월 혁명 이래 레닌의 계획의 성패는 궁극적으로 전세계적인 혁명에 좌우된다는 것이 공산주의이론의 핵심이었는데
그 이유는 세계적인 혁명을 성취해야만 소련이 서방세계의 선진경제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세계의 공산당을 대동단결시키고 해외에서 혁명을 고취시키기 위한 제3인터내셔널,즉 코민테른이라 불리는 기구가 1919년에 창설되었다.
이같은 세계혁명의 가장 열렬한 신봉자가 트로츠키와 카메네프,그리고 코민테른의 책임자인 지노비에프였다.
그러나 1차대전 이후 애태게 고대하던 반란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거나 또는 독일,헝가리,중국에서처럼 완전히 분쇄되었다.
스탈린은 1925년 세계혁명의 꿈을 포기하고 대신 '1국 사회주의'노선을 제창해서 지노비에프를 크게 놀라게 했다.
스탈린의 계산은 적중했다.
그가 새로이 내건 슬로건은 정치국내의 보수적인 인물들,특히 노동조합 책임자인 톰스키,당이론가인 부하린,그리고 인민대표회의 의장인 리코프에게 호감을 샀다.스탈린의 새로운 노선은 또한 러시아가 외부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전세계의 횃불 구실을 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음을 암시함으로써 러시아인들의 민족주의 감정에도 부합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그러한 고립주의 노선에 맹렬하게 반대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1925년말에는 스탈린,리코프,부하린,톰스키로 구성된 통치체제에 대항할 능력이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에게 기만당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이들은 트로츠키와 제휴하고,기회있을 때마다 지도부를 공격하면서 주도권를 됯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스탈린과 그의 새 협력자들은 신속한 조치로 반대파를 제거했다.
3명의 반대파 지도자들은 1927년 당에서 축출되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니프는
그 후 과오를 회개하고 일시적으로 당에 복귀했으나 트로츠키는 1929년 1월 망명길에 올랐다.
트로츠키를 국외로 몰아내고 다른 반대파 지도자들을 협박으로 침묵시킨 스탈린은 이제 마음놓고 리코프,부하린,톰스키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트로츠키의 공업화 및 농업집산화 계획을 오랫동안 조소해 왔던 스탈린이 1928년에는 그 노선을 자신의 경제개발계획으로 채택했다.
정치국회의에서 리코프,부하린,톰스키는 소비재 생산을 희생하고 또 농업의 집산화계획은 농민반란과 기근을 유발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그 노선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들 또한 표결에서 스탈린 지지파에 패배한 후,직위를 박탈당하고 정치적 황무지로 추방되었다.
이제 스탈린의 권위에 도전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당을 완전히 장악한 스탈린은 압제의 손길을 1억 6천만의 러시아 인민들에게 뻗치기 시작했다.
그는 1928년 1차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도시와 농촌을 망라한 모든 사기업의 국유화를 통해 러시아를 공업강국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비교적 부유했던 수백만의 자작농들,
특히 쿨라크(일꾼을 따로 고용할 만큼 토지가 많은 부농)들은 농토와 농기구,가축을 거대한 집단농장에 내놓는 데 맹렬하게 반대했다.
이러한 반대를 분쇄하기로 결심한 스탈린은 노동자들과 군인들을 농촌으로 파견하여 농민들의 식량을 압수하도록 명령했다.
농민들은 이에 맞서 농작물을 불태우거나 가축들을 잡아먹음으로써 러시아 가축 총 수의 절반 이상이 도축되었다.
스탈린은 잔인한 보복을 서슴지 않았다
저항하는 모든 농민들을 쿨라크로 낙인찍어 1929년부터 1934년 사이에 약 500만 명을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추방했다.
(500만이라는 숫자는 최소한으로 어림잡은 수치이다.
기아나 질병,과로로 죽거나 또는 비밀경찰에 의해 처형당한 수백만 명은 넣지 않았다)
스탈린은 대규모적이고 급속한 공업화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강력한 자신의 테러조직들이 자행할 수 있는 온갖 잔악행위를 총동원했다.
러시아 전역에서 油井을 파고 광물과 임산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방대한 계획들이 추진되었다.
1931년에는 단체교섭이 금지되었고 그 이후부터 노동자들은 완전히 국가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계획적인 결근은 혹독한 처벌을 받았고 모든 노동자들은 정부의 사전승인을 받지 않고는 일자리를 옮길 수 없었다.
1934년이 되자 산업조직의 위계화 현상이 나타나 일부 노동자는 동료들보다 훨씬 많은 급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공업과 농업 생산량을 증대시키겠다는 당초의 목표를 성취시켰다.
1차 5개년계획의 성공은 그 이후에 거듭된 5개년계획들의 기초가 되었다.
스탈린은 수백만의 인명희생과 모든 인민-대부분 자기 농토의 집산화에 반대하는 농민-의 이동배치라는 희생을 딛고 그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1935년까지 소련의 공업 및 농업 생산량은 경이적인 증가를 나타냈다.
전세계의 눈에 소련은 하루 아침에 저개발국가에서 강력한 공업국가로 변모한 것같이 보였다.
소련 공산당은 끊임없는 선전활동을 통해 스탈린을 '오늘의 레닌',
구세주,천재,살아있는 聖者로 부각시켰다.
그에게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체포되어 강제노동수용소로 추방되었다.
1930년 중반쯤에는 스탈린은 제정러시아의 압제가 무색할 정도의 압정을 펴고 있었다.
스탈린은 1934년 레닌그라드 공산당 제1서기이자 자신의 가까운 협력자였던 세르게이 리코프를 암살하면서 대숙청을 실시한다.
그의 잠재적 경쟁자가 될만한 인물들은 모두 공산주의체제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혐의로 공개재판에 회부된 후 모두 처형시켰다.
소련 사회의 구석구석이 모두 숙청대상이었다.
1937년.군부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5월 31일에 시작된 군부숙청은 그 해가 저물기도 전에 대부분의 소련군사회의 회원과 3만 명의 장교들이 체포되어 이들 중 상당수가 처형됐다.
군의 능력있는 간부급 장교들이 이 당시 대부분 숙청되어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련은 유능한 장교의 부족으로 초전에 무척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1939년쯤에는 숙청도 마무리가 되어서 스탈린은 그 누구도 도전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권좌에 군림하게 되었고 이러한 절대권력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14년간 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 트로츠키는 1940년 8월20일 멕시코시티에서 암살당한다.
1937년에서 1938년에 걸친 피의 대숙청을 지휘한 사람은 니콜라이 예조프로 후일 그의 이름을 따서 당시의 대숙청을 예조프시치나로 부른다
예조프는 제정러시아에서 1875년에 태어났다.
니콜라이 예조프는 본명이 아니고 고리키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이름이다
1차대전에 참전했으나 전투를 하기에 지나친 왜소한 체격때문에(151cm,스탈린은 163cm) 후방에서 지원업무나 담당했다
1917년 5월 쯤에 그는 처음으로 볼셰비키 당에 합류했다.
10월 혁명에서 일개 당원 외에 별다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던 그는 1919년에는 붉은 군대의 일원으로서 赤白내전에서 싸웠다.
1921년부터 예조프는 정치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초기에 지역 관리 위원회 일원들의 비서 역할을 맡던 예조프는 대숙청과 같은 일을 총괄할 학살자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의 동료들에 따르면 그는 "활기차고 친절하며, 거의 항상 웃고 있는 자그마한 사람"이었다.
또한 어느 볼셰비키 관료의 글에 따르면 예조프는 항상 열정적으로 일했고 업무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굳이 단점을 찾으라면, 한번 시작한 일에 너무 몰두하는 나머지 그만둘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 글의 끝 부분은 이렇게 써져 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예조프는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항상 일손이 부족했던 볼셰비키에서는 그처럼 열정적으로 일하는 인재가 꼭 필요했고, 그는 1927년에는 소득 분배 위원회의 실질적인 총수로, 1929년에는 농업 정치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30년 쯤에 스탈린은 이 '부지런한 난쟁이'에게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1934년, 곳곳에서 놀라운 업무력과 열정을 보여준 예조프는 결국 소련의 중앙 위원회의 일원으로서 선출된다.
그는 그곳에서도 특유의 쾌활함과 열정, 그리고 웃는 얼굴로 소련의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다질 수 있었다.
물론 부하린 등 일부 고위 관료들은 예조프를 극도로 싫어했다.
실제로 그의 긍정적인 측면 이면에는 여러가지 병적인 증세가 있었다.
일단 그는 키만큼이나 건강이 안 좋았고, 수시로 병에 걸리고는 했다.
이 때문에 중앙 위원회에서는 거의 정기적으로 예조프를 휴양지로 보내야만 했다.
예조프가 중앙 위원회의 일원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앙 위원회장이었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 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스탈린은 예조프에게 키로프의 뒤를 잇게 하고, 1936년에는 그를 NKVD의 수장으로 임명하며 '키로프 사건'을 수사하게 했다.
'수사'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조금이라도 의심가는 자가 있다면 트로츠키 파로 몰아서 제거하는 숙청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맡을 사람으로는 누구보다도 스탈린을 믿고 있음과 동시에 일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놀라운 업무력을 지닌 예조프가 적격이었다.
예조프는 처음 몇 달 동안은 자신이 하는 일을 끔찍히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열정을 보였다.
덕분에 그는 정신적으로 피폐해 졌고, 피로로 인해 병에 걸리는 일이 더욱 잦아졌을 뿐 아니라 이따금씩은 우울증세를 보이며 알코올 중독자 마냥 술을 퍼 마시기도 했다.
스탈린은 예조프가 자기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수시로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위로해 주어야 했다.
이 대숙청 작업이 시작된지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예조프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에 충실해 졌다.
그의 일에 대한 지나친 열정은 결국 '사람을 죽이는 일'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는 점차 상대를 조사하여 트집을 잡은 후, 사형을 선고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고, 이 때 부터 예조프에게는
"피의 난쟁이"라는 경멸적인 호칭이 붙기 시작했다.
새디스트 적인 기질이 생긴 예조프는 필요 이상으로 처형 작업에 몰두했다.
스탈린, 몰로토프, 보로실로프, 부됸니 등, 이른바 '스탈린 내각'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부하들 조차 난쟁이 도살자의 손길에서 안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아직 예조프를 진정 시킬 수도 없었고, 진정 시킬 생각조차 없었다.
예조프의 학살 열정은 사그러들기는 커녕 점점 활기를 띄었다.
부하린은 편지에서 "난 이렇게 역겨운 인간을 본적이 없다.
그는 마치 꼬리에 불이 붙어서 비명을 지르는 고양이를 보며 즐거워 하는 인간과 다를 것이 없다"며 예조프를 격렬하게 비판했지만, 이 편지를 쓴 지 2년 만인 1938년에 예조프의 제물로 승천한다.
비록 권력 싸움에서는 졌지만 여전히 상당한 인기를 누리던 부하린의 죽음은 스탈린을 제외한 상류층 관료들에게도 충격이었다.
심지어 부하린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한 스탈린 내각의 사람들도 "설마 진짜 죽일줄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예조프는 숙청을 진행시키면서 스탈린 다음가는 권력을 잡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상류층 관료들은 자신들도 '부하린 처럼' 처형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과, 예조프가 너무 멋대로 행동한다는 불쾌감을 느끼며 그에 대한 적대감을 이따금씩 드러냈고, 불안감을 느낀 예조프는 숙청 작업을 더욱 가속화 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결국 이 대숙청은 스탈린이 보기에도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진행되었다.
처형의 손길은 이제 평민들에게 까지 뻗어 나갔고, 예조프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각 지역마다 "최소 몇 명 이상의 반역자를 잡아낼 것"을 명령하기까지 했다.
이 말도 안되는 명령으로 인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사람들이 몇 만명 씩 잡혀 들어왔고, 예조프는 자랑스럽게 "아직 NKVD의 반역자 색출 작업은 활기를 띄고 있습니다"라고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이 광란의 숙청작업 기간동안 최소한 170만 명이 구속되었고 약 144만 명이 형을 선고받고 이 중에서 72만 명은 처형당했다.
이들의 죄목은 대부분 반체제,폭동,간첩,방해공작,사보타지 등이었다.
이 당시의 숙청작업으로 소련의 유능한 군인들도 대규모로 숙청당했고 결과적으로 소련의 전투력이 급감하게 된다.
2차대전 중에 벌어진 핀란드와 소련사이의 겨울전쟁( 1939년 11월 30일부터 1940년 3월 13일까지 핀란드와 소련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소련군대는 상대도 안될 것 같던 핀랜드軍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이 결과 소련은 강대국들에게 만만해 보이는 상대가 돼버렸다.
스탈린이 보기에 더이상 학살을 진행시켰다가는 소련이 그동안 만든 모든 것이 무너질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잔인하고 평판이 좋지 않지만, 동시에 영리하고 조심스러운 라브렌티 베리야를 갑작스럽게 NKVD의 수장으로 임명했고, 동시에 예조프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했다.
눈치가 빨랐던 베리야는 이미 스탈린이 숙청 작업에 진저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고, 예조프를 반역자로 몰아갈 만한 자료들을 이미 다 모아둔 상태였다.
스탈린이 공개적으로 예조프를 공격하자, 베리야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자료들을 공개하며 예조프를 "일본과 독일의 첩자"로 규명했다.
이 중 일부 자료들은 허위였지만, 이미 정치국 사람 모두를 적으로 돌린 예조프를 변호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베리야는 또한 예조프에게 직접 찾아가서는 "스탈린 암살 계획을 세웠다"고 진술 할 것을 강요했지만, 예조프는 "이왕 죽을 것이라면 명예롭게 죽겠다"며 거절했다(흐루시초프의 말에 의하면 스탈린은 "그에게 명예라는 것이 남아 있던가?"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예조프는 1940년 2월 4일, 총살형에 처해졌고, 그에게 충성하던 NKVD 내각의 처형이 이어졌다.
예조프와 그 측근들의 죽음으로 피로 얼룩졌던 대숙청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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