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성군이라 일컷는 세종이나 성웅 이순신도 역사적으로 흠결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 분을 인간을 넘어 선 신의 단계로 까지 가고 있는 거의 완전무결한 인간으로 추앙한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내가 조선 최악의 왕이라 칭했던 인조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좋은 왕으로서 모습도 있다.
단지 몇가지 나쁜 이미지때문에 전체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폭군 이미지였던 광해가 최근들어 좋은 이미지로 재조명되면서 인조는 더 최악의 나쁜 왕 나락으로 떨어 졌다.
이제 인조의 변명을 들어 보자!
솔직히 인조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해주고 싶지 않다.
그러나 역사 전문가들의 인조에 대한 세세한 글을 읽어 보고 내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인조와 서인정권에 대한 나의 증오심 근원은 안 해도 될 정묘, 병자호란을 불러 들여 수 십만 백성을 죽게하고 수 백만 백성들을 고통속에 빠지게 한데 기인한다.
하지만 역사 전문가들 중에는 이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보기도 한다.
인조반정이 없었고 광해가 계속 집권했더라도 병자호란은 피할 수 없었다는 시각이다.
또 인조가 뛰어난 왕은 아니었지만 요즘 광해가 재조명되고 상당히 미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인조가 더 나쁘게 평가되고 있을 뿐이지 나름 괜찮은 왕 이었다는 것이다.
실록에 나오는 인조는 하루종일 말 한마디 없을 정도로 조용한 왕이었다.
나름 신하들에게도 인정과 배려등을 베풀줄 알았다.
백성들 안타까운 일을 듣게 되면 눈물을 뿌리며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인조 초창기 겉으로 드러 난 인간성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역사 전문가가 인조에 관해 한 말이다.
"실제로 인조가 실책을 많이 한 것은 맞지만 이는 학계의 광해군 재평가와 이로 인한 미디어 미화로 인한 것이다. 광해군도 내치에서 옥사와 과도한 궁궐 재건등으로 너무나 큰 실책을 저질러 민심이 반쯤 이반한 원인을 스스로 자초한 면도 있다. 이에 비해 인조는 적어도 내치는 잘했고 다음 대에 효종이 안정적으로 집권하도록 만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조선 역사상 최악이라고 평가하기엔 다소 억울한 면도 있다."
인조는 선조 때 능양군으로 봉해졌다.
선조 때부터 인조 생가 집에 왕기가 있다는 설이 나돌았다.
이에 왕이 된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인조 일가를 경계했다.
당시는 인조보다 동생 능창군이 훨씬 똑똑하다는 소문이 났고 그에게 왕기가 있다는 여론이 돌았다.
그래서 광해와 대북정권은 인조 동생 능창군을 역모로 몰아 죽인다.
이후 인조 아버지 정원군도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조 생가는 헐려 경희궁이 지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인조가 살아 남은 것을 보면 당시 인조는 실록에 나온대로 조용한 성품에 성정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광해와 대북정권이 무시해도 될 만큼 왕 재목감이 못 되었고 존재감 또한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조용한 성품이 가슴에 칼을 품으면 더 무서운 것이다.
당시 능양군이었던 인조는 숙부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고 가슴 깊숙히 칼을 갈게 된다.
인조는 당시 비주류였던 서인 유생들과 함께 반정을 계획한다.
인조반정은 참 조잡하고 시원찮은 반정이었지만 더 어리숙하게 대처를 하는 광해와 대북정권 덕분에 반정은 성공한다.
결과적으로는 정원군 집에 왕기가 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인조는 가만히 있다가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중종과는 달리 본인이 직접 반정을 계획하고 참여했다.
인조는 반정에 성공해 왕위에 올랐으나 반정의 대의명분이나 정통성은 약했다.
인조는 반정 세력인 서인들에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중종반정때보다 인조반정 당시 인조가 직접 앞장 서는 등 반정에 참여한 측면이 훨씬 강한지라 중종에 비견하면 자기 목소리를 낼 수는 있었으나 태종이나 세조처럼 자기 세력을 완벽히 장악한 수준의 쿠데타는 아니었다.
인조이후 부터 조선사대부들 정신적 지주인 성리학은 더 교조화 되어 갔다.
사대주의와 숭명주의를 넘어서 명이 조선으로 넘어와 이어진다는 소중화주의 단계까지 간다.
조선사대부들은 명 황제만 진정한 황제로 모시면서 조선 왕은 조선 대표 사대부로 밖에 보지 않는다.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는 시대를 열어 가기 시작한다.
숙종, 영, 정조 시대를 제외하고 대부분 시기가 그랬다.
숙종, 영, 정조 시대에도 중국 황제들 처럼 절대적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런면에서 인조시대 잘못된 모든 일을 인조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조정신료들 책임이 더 클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인조가 가장 욕을 많이 먹고 비난 받는 일 중 하나가 친자식인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며느리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친손자 둘 도 죽여버린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일은 신하들 몫이 아니라 인조 개인적인 책임이다.
물론 인조가 공식적으로 역모로 몰아 죽인 강빈 말고는 소현세자나 그의 아들의 죽음은 지금까지 의문사로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정황으로 봐서는 직, 간접적으로 인조에 의한 죽음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처럼 받아 들여 지고 있다.
당시 대부분 조선 내 여론은 소현세자 친청 행위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한일합방 이후 친일매국노 행위와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어쩔 수 없는 당시 시대상황 이었다.
그런 시대 상황으로만 보면 인조 극악한 패륜 행위도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다.
청나라가 명을 완전히 접수한 뒤인 1645년, 청 황제는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고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귀국했다.
인조는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에게 어떠한 위로 말도, 귀국 축하 연회도, 치하도 하지 않았다.
소현세자가 죽기 전 3달 동안 실록에 나오는 소현세자에 대한 기록이라곤 당대 대 문장가 이식이 세자 귀환을 축하하는 교서를 발표했다는 것뿐이다.
이처럼 인조의 소현세자에 대한 노골적인 박대 분위기 속에서 소현세자는 결국 귀국한 지 3달도 못 버티고 그 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소현세자 죽음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소현세자가 독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는 정사인 <인조실록> 23년 6월27일자에도 나온다.
소현세자의 졸곡제 기사 중 세자의 시신 상태를 설명해 놓은 부분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 나오므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독살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소현세자 죽음에는 인조가 직접 개입했단 말도 있고 그냥 방조만 했다는 설도 있다.
또 한 편에서는 소현세자에게 침을 잘 못 놓아 죽은 의문사라는 설도 있다.
세자의 이런 갑작스럽고 허무한 죽음은 당연히 수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풍토가 다른 이역에서도 9년여를 견뎌 낸 세자가 조선으로 귀국하자 마자 학질 따위에 쓰러질 리는 없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 생각이었다.
더구나 학질에 침을 맞다 죽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은 이형익이 문제였다.
이형익은 지방을 떠돌던 의원이었다.
소현세자와 왕위 경쟁관계에 있던 소용 조씨가 추천하여 불과 3개월 전에 어의가 된 사람이다.
여기서 소용 조씨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 전문가들에게 조선시대 궁중에서 최고 악녀를 뽑아라고 한다면 소용 조씨를 1위 자리에서 빼 놓지 않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폐비윤씨, 장녹수, 김개시, 장희빈보다 더 한 수 위로 본다.
소용 조씨는 인조 후궁이다.
2013년 JTBC에서 사극드라마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에서 배우 김현주씨가 소용 조씨 역활을 실감나게 했다.
일단 소용 조씨는 인조의 후궁으로 들어가서 아들 2명의 딸 하나를 낳았다 .
이 아들 중 숭선군 이징이 문제였다.
소용조씨는 숭선군을 세자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현세자와 강빈까지도 제거해야 했다.
인조가 자기를 가장 많이 총애하고 애정이 많은 것을 이용해 소용 조씨는 소현세자와 강빈을 모함해서 죽음으로 몰고 간다.
결국 소현세자가 죽었다.
강빈도 역모로 몰아 죽인다.
소현세자 두 아들도 유배를 보내 죽이는 것 까지 성공했다.
이 모든 것이 인조가 한 일이 아니라 소용조씨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소용 조씨 아들이 아닌 인조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왕세자가 되고 만다.
봉림대군 이호는 조선 17대 왕 효종이 된다 .
효종 즉위 후에 김자점 난이 터지고 소용조씨 딸 효명옹주를 김자점 집안에 시집 보낸 소용 조씨에도 불똥이 떨어 졌다.
김자점 난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소용조씨가 소현세자 부부를 모함하고 죽음까지 몰고간 장본인이라는 것으로 몰아 간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효종이 자기 아버지 인조가 친아들 소현세자와 강빈 그리고 손주들까지 죽였다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용 조씨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김자점이다.
사실 소용 조씨는 김자점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김자점은 조선시대 3대 간신에 빠지지 않는다.
김자점 난 이후 소용조씨는 사약을 마시고 죽고 그녀 아들 숭선군 , 낙선군 , 딸 효명옹주는 효종이 그래도 이복동생들이라고 죽이지 않고 유배 보낸걸로 끝냈다 .
인조가 소현세자 죽음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실록등 공식 기록으로 나와 있다.
소현세자 독살설은 당시 정황과 추측일 뿐이다.
최근에는 의학적 근거를 통해 소현세자가 독살 당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도 강하게 대두 되고 있다.
인조가 괜히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병사이든, 독살이든 침을 맞고 살해 되었든 정사 실록을 비롯 당시 기록된 모든 주변 상황은 인조에게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조에 의한 소현세자 죽음이 사실일지라도 인조는 할 말이 많다.
대명 사대주의자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병자호란에서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청나라와 외교는 오랑캐에 대한 굴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1645년 2월 9일에 귀국한 소현세자를 인조는 친청매국노 귀국으로 바라봤다.
지금 시각으로 봐서 소현세자가 조선을 개혁 할 수 있었던 대단한 인물로 보이지만 당시 인조와 조정 신하들 입장으로서는 자기나라를 침략한 놈들에게 빌 붙어 아부나 하며 살았던 덜 떨어진 놈으로 보였을 뿐이다.
문제는 인조와 대부분 대명사대주의자인 조정신하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반 백성들도 소현세자에 대한 그런 시각이 강했다는 것이다.
병자호란이 있은 지 십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라 인조와 조정신하들은 오랑캐 여진족(만주족,청나라)에게 당한 수모와 치욕의 삼전도 굴욕은 그들 가슴 속에 큰 응어리가 되어 씻을 수 없는 한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반 백성들도 청에 당한 엄청난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시기였으니 어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 시각으로 보면 소현세자가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소현세자 판단이 올바르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인조와 조정신하 그리고 일반 백성들까지도 시대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그들에게는 소현세자가 불구대천 원수 청나라에 동조하는 매국노 배신자로 밖에 안 보였다는 것이 소현세자 불행이고 조선 불행이자 우리 민족 불행 이었다.
당시 시대 여론을 역행하면서 시대 선구자가 되어 그 시대를 이끌고 또 성공하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소현세자 예 에서 볼 수 있다.
소현세자도 이런 역사 진행 현실을 조금이라도 알았어야 했다.
자신 개혁 발톱은 마음 속 깊숙히 감춰 뒀다가 왕이 되고 나서 서서히 실권을 잡고 여론을 바꿔 가면서 진행 했어야 했다.
그러나 순진한 소현세자는 그러하지 못했다.
인조와 조선사대부들이 보기엔 소현세자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강빈에게 있었다.
강빈은 청에 있을 때 부터 세자빈이 절대해서는 안될 일을 해서 인조와 조정 신하들 조소와 비난을 받았고 분노를 샀다.
지금 우리 시각으로 보면 강빈의 진취적 생각과 강인한 행동, 뛰어난 현실적 경제적 감각들이 크게 박수를 받을 일이다.
그러나 당시는 성리학이 교조화 되어 가고 있었다.
고리타분한 남성 우월주의 시대였다.
그 시대 상황 옳고 그름을 떠나 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청에 찰짝 달라 붙어서 청 선진문물을 받아 들이자고 했다.
소현세자 부인 강빈은 한술 더 떠서 청나라 오랑캐 땅에서 손수 농사를 짓고 무역을 해서 돈을 많이 모았다.
고리타분한 인조와 조선사대부들 눈에는 그런 그 둘이 친청매국노로 보였다.
또한 강빈은 일반 백성들이나 하는 일을 몸소하는 얼빠진 여자로 보았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변한 것도 강빈이 세자빈 체면을 잃고 한 행위로 돈을 많이 벌고, 그러한 돈을 소현세자에게 밀어 주어 소현세자가 그 돈을 바탕으로 청 관료들과 많이 사귀면서 부터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인조는 세자빈 강빈에 대해 감정이 극도로 안 좋았다.
이런 인조와 강빈의 악화 된 감정 상태에서 소현세자가 귀국한지 3개월만에 의문사하자 강빈 정신 상태는 어떠했겠는가?
지금 생각해도 성격 강한 강빈의 처절함과 복수심이 눈에 훤하게 보이는 것 같다.
이런 강빈이 소현세자 독살 의심을 받고있는 인조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인조는 자신에게 증오를 품고 억척스럽고 강인한 그녀를 보며 강빈을 대비로 만들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뒤 종법대로라면 소현세자 장손 열두살 석철을 세손으로 정해야 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 동생 봉림대군을 세자로 정한다.
그리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증오와 복수심에 가득 차있는 강빈을 자기를 독살하려 음식에 독을 탔다는 역모 누명을 씌워 사사한다.
두 친손자들도 제주도에 유배를 보낸다.
그리고 그 둘은 의문사 당한다.
인조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참으로 냉혹한 일이었지만 자신 사후 왕위 쟁탈 전으로 혼란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자부 했다.
인조는 강빈 사사를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연산 예를 들기도 했다.
인조에 대한 변명을 하는 일부 역사 전문가들은 강빈 비극의 원인을 세손이 어리고 이런 상황에서 세손이 왕위에 올랐다면 실권자가 되었을 다혈질인 강씨 성품을 인조가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지명하면서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세손들은 안 된다 "라는 논지로 말한다
인조는 자신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예상한 것으로 보이며 (4년 뒤 실제로 사망한다) 당시 고작 열한살에 불과한 장손 이석철이 왕위에 오르면 성격 강한 강빈에게 휘둘리지 않을까 경계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강빈은 사약을 마시며 후궁 소용조씨와 봉림대군에 대한 극단의 저주가 담긴 유언을 남긴다.
이에 인조는 "죽어 마땅한 년이었다"고 말하고 손자들까지 유배를 보내 의문사 시킨다.
여기서 강빈이 자기 아들들을 생각해서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했음 어떻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강빈의 처지를 생각하면 너무 호사스런 생각일 수도 있지만 아이들을 살려 후일을 도모했어야 했다.
인조는 실제 조선 왕조에 인수대비, 폐비윤씨(사후 연산군에 의해), 문정왕후들에 의해 국정이 농단 당한 쟁쟁한 사례들 그 점을 걱정했을 수 있다.
당시 인조에겐 새 중전 장렬왕후가 있었으나 장렬왕후가 소현세자 부인 강빈보다 열세살이 어려 후에 대비로 승격할 가능성이 높은 강빈이 인수대비나 문정왕후처럼 강경하게 나설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한 것이다.
게다가 인조가 보낸 사약을 먹고 극단적인 저주 유언을 들은 이상 인조에게는 연산군 전철을 밟을 손자들도 살려둘 이유가 별로 없었다.
인조의 강빈에 대한 사사는 강빈에 대한 개인적 감정도 크게 작용했다.
인조가 강빈 사사를 명하자 이때 신하들이 당태종 일을 들고 동정론을 펴자 인조가 '당태종은 성인이 아니고 강씨는 내 자식이 아니다' 라고 비답하였다.
다시금 신하들이 '강빈이 비록 전하 자식은 아니지만 빈으로 있을 때는 소현 배필이었으니, 전하 자식이 아닙니까'라 하며 선처를 바라자 인조가 '개새끼같은 것을 임금 자식이라 하다니, 나를 모욕하느냐?'라는 말을 한 것이 조선왕조 실록에 실려있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ㅡ 《인조실록》 24년 2월 9일[32].
이만큼 인조는 강빈에게 뒤틀려 있었다.
이러한 일은 누구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해야 할까?
며느리 뛰어난 경제 감각을 못 받아 주는 찌질한 인조!
조금 찌질할지라도 세 아들을 위해서라도 시아버지 심사를 잘 헤아리고 모시어 훗 날을 기약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성격이 너무나 강했던 강빈!
물론 인조가 훨씬 잘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큰 며느리마저 비정하게 죽였던 인조 권력도 오래 가지 못했다.
소현세자가 죽은 4년 뒤, 인조는 날씨가 한창 더워진 인조 26년 1649년 6월 어느 날,
전염병이 돌던 시기에 학질 증세로 사망한다.
55세까지 살았던 인조가 조선시대 왕 중에서 단명했다 말하긴 힘들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인조 시대부터 성리학이 급격하게 교조화되고 여성 지위도 더 내려 갔다.
인조와 서인정권은 병자호란으로 기존에 세웠던 집권 명분이 약해지고 삼전도 굴욕으로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 지자 내부부터 정권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이에 기존에 상당히 느슨하게 적용되던 성리학적 종법 질서를 급격하게 강화해 내부 불온한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덕분에 수많은 여성들이 열녀라는 이름아래 목숨을 잃거나 평생을 외롭게 수절해야 했다.
환향녀를 비롯한 환속 문제는 인조도 딱하게 여겼는지 환속금액 상한 제한과 이혼 금지로 막으려고 하긴 했으나 단지 시늉만 냈고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지키려 하지 않았다.
사실 인조가 불탄 한양과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눈물을 흘렀다는 기록이 실록에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인조가 겉으로만 그랬을 뿐이다.
인조는 이런 문제를 본질적으로 인식하고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인조는 여러모로 무책임한 왕이었고 조선 최악의 왕이었던 것 같다.
여전하 나에게는 인조반정이 조선 최악의 쿠데타였고 인조가 조선 최악의 왕이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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