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최남단 도시 하산과 북한 두만강역을 이어주는 두만강 철교(일명 조-러 친선교)를 하산 쪽에서 바라본 모습. 철교 교각을 연결하는 트러스의 경우 러시아 쪽 3개는 높고 북한 쪽 5개는 낮아 양쪽이 쉽게 구분된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남쪽의 항구 슬라비얀카에서 하산으로 가는 120km 구간은 집도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 무인지경이었다. 고려인 통역은 좌우에 펼쳐진 너른 땅을 가리키면서 “옛날에 한인(韓人)들이 개간한 농경지였다”고 설명하지만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도중에 군사도시 크라스키노 인근에 있는 추카노보에 들렀다.
19세기 말만 해도 2000명 가까운 한인이 거주한 연추(延秋) 마을이 있던 곳.
그러나 러시아인 주민들의 도움으로 도랑 가에 버려진 연자맷돌을 발견한 것이 유일한 수확이었다.
옛 소련의 기록 등에 따르면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조치로 없어진 연해주의 한인 마을은 600곳이 넘고 쫓겨난 한인은 18만 명에 이른다.
● 지난주에 세워진 한인 이주 기념비
연해주고려인협회의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위원회는 12일 추카노보에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비노그라드노예 마을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이곳은 지신허…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정착한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한국의 학자들은 기념비에 명기된 한인들의 연해주이주 시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청(淸)과 조선의 봉금정책이 사실상 19세기 초에 해제됨에 따라 1863년보다 훨씬 전에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인들의 최초 이주 시기를 둘러싼 논란은 1860년 청-러간 베이징(北京)조약의 영향이 크다.
러시아가 이 조약으로 간도의 일부였던 연해주를 차지한 뒤 연해주와 관련된 모든 기록은 러시아 영토라는 꼬리표가 붙어 정리됐기 때문이다.
●베이징조약 1년 뒤에 땅을 친 조선
아이훈조약 흑룡강
14세기부터 개시된 러시아의 동방진출은 1858년 청과 아이훈(愛琿)조약을 체결하고 헤이룽(黑龍)강 북쪽과 우수리(烏蘇里)강 서쪽을 삼키면서 본격화된다.
러시아의 야심은 ‘동쪽을 장악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 항 개설로 이어진다.
마침내 러시아는 노쇠한 청을 압박해 베이징조약을 맺고 공동관리지역이던 우수리강 동쪽마저 손에 넣는다.
그 이듬해인 1861년 함경북도 경흥군 봉수대의 조선 병사들은 두만강 어귀에 비석을 세우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필담을 통해 청과 러시아인들이 국경비를 세우고 있음을 확인하고 조정에 보고한다.
그때가 조선 조정이 부당하게 연해주를 상실한 것을 비로소 인지한 시점이다.
●삼각기둥 국경비엔 적막만 감돌아
러시아 하산역에서 내려 호수를 끼고 돌아가면 철조망 바로 안쪽에 삼각기둥 모양의 러시아-중국-북한 국경비가 있다.
어른 키 높이의 이 국경비는 3개국을 향한 각 면에 ‘조선 ’ ‘中國 ’ ‘РОССИЯ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하산 국경비에서 북한쪽을 바라보면 멀리 산들의 능선만 눈에 들어온다.
중국 쪽 팡촨(防川) 지역에는 강원 고성군의 통일전망대와 비슷한 망루가 우뚝 서 있다.
망루 부근에는 청과 러시아를 가르는 투쯔파이(土字牌)가 서 있다.
하산과 팡촨, 북한의 두만강역이 한데 모이는 3개국 접경지역엔 동북아 영토분쟁의 불씨가 잠복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무거운 적막이 감돈다.
크라스키노와 중국의 접경도시 훈춘(琿春)을 잇는 도로에는 이따금 국경을 넘나드는 버스가 눈에 띌 뿐이다.
●중소 영토분쟁과 꺼지지 않은 불씨
1969년 우수리강에 있는 전바오(珍寶) 섬을 소련이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촉발된 중소영토분쟁은 무력 충돌로까지 비화했다.
통행이 자유롭던 크라스키노와 훈춘 사이의 국경은 그때 굳게 닫혔다가 다시 열렸으나 예전의 활기는 회복하지 못했다.
강택민
1991년 당시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아무르강과 아르군강의 3개 하중도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키로 합의했으나 아직까지 국경선 갈등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1990년 국경조약을 체결한 북한과 러시아 사이에도 얼마 전까지 신경전을 계속했다.
북한이 두만강변에 제방을 쌓으면서 강줄기가 러시아 땅을 침식해 들어간 것이 원인.
그 때문에 강변의 러시아 국경수비대 초소가 무너지기도 했다고 한다.
●탈베그 원칙과 북-러 국경선의 기준
북한과 러시아간 국경선의 기준도 논란거리.
노계현 전 방송통신대 교수는 북한과 러시아는 ‘ 탈베그(Thalweg) 원칙’에 따라 두만강의 가장 깊은 부분인 최심선(最深線)을 국경선으로 정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경선 설정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탈베그원칙이란 배가 운항할 수 있는 하천의 경우 가장 깊은 부분을 기준으로 국경을 정하고 항해가 불가능한 하천은 중앙선을 기준으로 국경을 정하도록 한 것.
반면 취재 도중 만난 한 러시아 학자는 두만강의 중앙선이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이라고 주장한다.
노랫말에도 나오듯이 옛날엔 두만강을 배로 건넜으나 요즘은 두만강을 운항하는 배를 보기가 쉽진 않다.
●무효인 베이징조약이 문제의 출발
북한과 러시아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회담을 갖고 국경문제를 마무리했다고 러시아 현지의 관계자들은 전했다.
전문가들은 두만강 수로 변화에 따른 국경선 재조정에 관한 협약을 맺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출발점은 베이징조약이다.
노영돈 인천대 교수는 “베이징조약은 아무 권한도 없는 청이 조선의 영토를 임의로 처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베이징조약은 국제법적으로 한국에 대한 구속력이 없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는 “중국도 베이징조약으로 러시아에 연해주를 넘긴 것은 잘못됐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동북공정에 ‘중-러 변경’ 과제를 포함시켜 연구 중”이라고 설명했다.
베이징조약이 원천무효라면 연해주 문제는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남북한의 통일을 기다리는 연해주
러시아 태평양지리연구소는 낙후된 연해주를 9개 권역으로 나눠 개발하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보다는 한국의 손길을 기다린다.
연해주 현지 언론에는 “중국에 연해주를 빼앗긴다”는 경계성 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기도 한다.
강대국 일본의 자본도 내키지 않는다는 분위기다.
“우리는 개발 준비가 돼 있다. 남북한의 통일을 기다릴 뿐이다.”
이 같은 러시아인들의 태도는 빼앗긴 땅에 대한 우리의 회한을 더욱 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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