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애써 치켜세우려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드는 업적(?)은 그가 6.25 전쟁을 이끌며 견결히 공산당과 투쟁하여 이 나라의 적화를 막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의 존재로 인해 이 나라의 적화가 방지되었다기보다는 이승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가 보존된 쪽이 더 사실과 이치에 부합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 중 행동은 이 사람이 전쟁에 승리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를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전쟁 초반 혼자 대전으로 내뺀 뒤 서울사수를 부르짖은 사기극, 전쟁에서 금싸라기보다도 소중한 장정들을 소집하여 생으로 굶겨 죽이고 얼려 죽인 국민방위군도 그렇지만 압권은 부산 정치파동이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당시 제도에서 자신의 재선 전망이 어두워지자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 안을 내놓는다.
이를 국회가 부결하자 전국과 피난수도 부산은 갑자기 구름같이 일어난 ‘민의’(民意)에 뒤덮이고 만다.
이 민(民)은 진정한 의미의 민(民)이 아니었다.
관(官)에 의해 조작된 세력이었고 자신들의 주장을 즐겨 폭력에 실어 전개했던 깡패들도 다수 끼어 있었다.
이름도 무시무시한 ‘땃벌떼’ (땡벌도 아니고)‘백골단’ (후일의 사복체포조의 이름은 이때 쓰였던 이름이 수십년 뒤 부활한 것으로 보인다) ‘민중자결단’ 등이 이승만 박사 만세를 부르짖고 도심을 누비고 다녔다.
이승만은 마침내 1952년 5월 25일 부산 경남 전남북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부산에 2개 대대 병력을 투입할 것을 육군본부에 명령한다.
그 다음날 이승만은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헌병대로 하여금 끌고 가 버리게 한 뒤 남은 사람들로만 직선 개헌을 하는 5.26 정치 파동을 일으키니와 그를 위해 한 사람이 아쉬운 전투 병력을 빼돌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명령은 뜻밖의 장애물을 만난다.
이종찬 참모총장이었다.
그는 육군 훈령 217호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하와 같은 정치변동기에 승하여 군의 본질과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고 의식 무의식을 막론하고 정사(政事)에 관여하여 경거망동하는 자가 있다면 건군역사상 불식할 수 없는 일대 오점을 남기게 됨은 물론 누란의 위기에 있는 국가의 운명이 일조에 멸망의 심연에 빠지게 되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것이니.....”
즉 군대를 부산으로 출동시키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승만은 길길이 뛰며 이종찬을 부산으로 불러들인다.
“귀관은 어찌하여 나라에 반역하고 내 명을 거역하는가.”
여기서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개입은 있을 수 없다고 버틴다.
그러자 이승만은 더욱 황당한 명령을 내린다.
육군참모차장을 불러
“이종찬을 즉시 포살하여 전군의 모범으로 하라.”
고 악을 쓴 것이다.
한창 전쟁 중인 나라의 대통령이 자기가 다시 대통령이 되기 위해 날치기 개헌을 준비하는 와중에 전쟁 수행 중인 병력을 부산에 출동시킬 것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한 육군의 수장을 포살하라는 것이었다.
이러고도 이승만이
“적화를 막은 대통령”
인가?
이종찬 장군은 가계로 따지면 정통 친일파 집안이었다.
한일합방 당시 법부대신이었고 작위도 받았던 이하영의 손자였고 그 자신 일본군 소좌로 복무하던 중 남태평양 최전선 뉴기니에서 해방을 맞는다.
반민특위에도 불려갔지만 일본군 복무 경력 이외에는 별다른 친일 행적이 나타나지 않아 별 일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이종찬은 자신과 집안의 친일경력을 무척 부끄러워했고 3년 동안 건군(建軍) 과정 참여를 사양한다.
그의 속내는 후일 육사 교장을 선택할 때 드러난다.
“그래도 신생독립국가의 초대 4년제 육군사관학교장인데. 저 같은 일본군 출신이나 만주군 출신을 임명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초대육군사관학교장은 대한민국의 얼굴인데. 당연히 광복군출신이 교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다 안춘생장군은 안중근의사의 사촌동생이니까요. 나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안중근 의사같은 사람이 한 명만 배출되어도 육군사관학교의 교육은 성공했다고 봅니다.”
일본군에 복무했던 그는 일본군이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일본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군의 개입이 왜 위험한가를 절감하고 있었다.
“군 최후의 목표는 적을 섬멸하는 것이다. 군이 정치에 개입할 때 반대세력을 섬멸하려는 충동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정치에 개입한 군인에게 자제해야 할 최후의 선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랬던 그도 이승만을 계속 봐주기란 어려운 일이었던지 정치 파동 후 미국 대리 대사 라이트너를 찾아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승만과 내무부장관, 그리고 계엄사령관(원용덕)을 피 흘리지 않고 가택연금한 뒤 구속 의원을 석방하고 다음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습니다.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던 상관하지 않겠으며 또한 정권을 인수할 생각도 없습니다.”
이승만 외의 대안을 발견하지 못한 미국의 거절로 이 제안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이종찬 장군은
“다시는 나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
면서 스스로 권좌에 앉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촌동생을 중령 진급에서 일부러 누락시킬 만큼 정실 인사에 반대했던 군인, 야당에서의 영입 제의도, 박정희의 쿠데타 제의도 완강하게 거부하며 군의 정치 개입 거부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전 육군참모총장, 그를 아버지처럼 따르던 김재규의 권유로 유신 시대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내지만
“내가 세상에 나와 가장 잘못한 것”
이라고 한탄했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파동 때는 반대 의견을 표명하며 후배 군인 독재자의 광기에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걸어 보려고 노력했으며 박정희가 죽은 다음에는 여섯 번이나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던 한 노병의 불운한 생애는 후세에도 시사하는 바 클 것이다.
1952년 5월 25일
“군은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
는 단순하지만 소중한 신념을 위하여 한 장성이 대통령의 명령에 정면으로 거부한 날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물론 상관의 부당한 명령으로부터 자신의 임무를 보호해야 하는 모든 공무원들이 기려야 할 날이다.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을 수사 중이던 경찰 간부가 범죄자들처럼 증거 인멸을 기도하고도 실수라고 우기는 희한한 꼬락서니 앞에서 61년 전 대통령의 명령 앞에서도 휘하 병력에
“경거망동하지 말라!”
를 부르짖고 포살 위기까지 겪어야 했던 한 군인의 모습은 더욱 빛을 발한다.
5.26 정치파동 때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는 외신 논평이 등장한다.
그러나 장미꽃은 쓰레기통 속에서도 싹을 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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