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빨간 장미를 단 못생긴 여인

by Ajan Master_Choi 2010. 2. 5.

오랜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육군 중령 브라운은 시내 중심의 한 전철역에서 광장에 서 있는 시계탑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에서의 브라운은 누구보다도 용맹한 군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떨리고 긴장되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시곗바늘의 움직임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몇번이나 혼잣말을 되풀이 했다.

 

'얼마나 많은 날 동안 그리워했던 여인인가!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녀가 나타난다.'


1945년 6월 영국 런던은 전쟁의 승리로 기쁨과 희열이 넘쳐나고 있었다.
정말로 지난 3년간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끔찍한 전장에서 그녀는 그에게 무한한 힘과 용기를 주었다. 아직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 속에 여신과 같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사이 그는 지난일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1942년 5월 26일.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로멜 장군의 지휘아래 독일의 정예부대가 '테세우스'작전을 계시하여 가잘라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제8사단을 향해 맹공격을 퍼부었다.
독일, 이탈리아 연합군을 병력을 집중하여 영국군의 삼엄한 수비를 뚫고 토브룩 요새를 포위하였다.

이때 런던에서 소집되어 제8사단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장교 브라운은 토브룩 요세에 도착하자마자 절체절명의 위기게 빠졌다. 신참 장교인 브라운에게 하루 종일 하늘과 땅을 울리는 전투기와 대포소리는 매우 견디기 어려운 긴장과 공포감을 안겨다 주었다.
브라운은 결국 전쟁공포증에 걸리고 말았다.

​영국군이 사력을 다해 지킨 방어선이 무너졌다.
토브룩 요새의 병사들은 포로로 잡혔고 브라운 역시 느릿느릿 행진하는 포로의 행렬에 끼어 들었다.
독일군의 잔혹성을 익히 들어왔던 그는 장차 닥칠 위험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독일군이 행렬 안에서 어떤 사소한 소란을 진압하기 위해 기관총을 난사했는데 그때 브라운은 일부로 총에 맞은척하고 땅에 엎드려 있다가 탈출을 기도했다.
다행히 적군은 브라운을 발견하지 못했고 필사적으로 도망친 브라운은 가까스로 아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 브라운의 전쟁공포증은 더욱 심각해졌다.

하루 종일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는가 하면, 기관총 소리만 들어도 바들바들 떨면서 매일같이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심지어는 탈영도 생각했다.
브라운은 탈영까지 생각하는 자신이 너무 싫고 부끄러웠지만, 그 보다는 살고 싶다는 욕망이 더욱 간절했다.

​그러던 어는날 브라운은 자신의 전쟁 공포증을 단숨에 치로해줄 한권의 책을 만났다. 그날 점심시간 후 사단 참모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책을 한 아름 던져 주었다.

"책이다!"

한 병사가 외치며 앞으로 나서자 나머지 병사들도 일제히 사단참모를 둘러싸고 저마다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전선에 있는 병사들을 위해 영국 출판업계가 선발하여 보내준 책이었다.
책 중에는 첩보 소설과 러브스토리, 영국 문학을 비롯한 영국 역사상 유명한 애국자의 전기 등이 있었다.

브라운은 그 어떤 책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그 어떤 책도 자시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공포감을 없애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도중 브라운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책이 있었다.

"포성속에서 마음의 균형을 유지 하는 법"

브라운은 그 책을 집어 들자마자 온 정신을 집중해서 읽어 내려갔다.

그 책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부터 1936년 스페인 내전에 이르기까지 전쟁사 중의 실제 사례가 담겨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사례는 죽음에 임박하고 생사가 엇갈렸을 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에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실례가 풍부하고 논리가 분명한 이 책은 확실히 브라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브라운은 그 책을 반복해서 읽는 동안 점점 마음이 밝아지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점차 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해서 죽음의 신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단언하건데 그것을 부질없는 소망에 불가하다'

작가의 말에 브라운은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새로운 다짐으로 전쟁에 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맞아 아무리 죽음을 원치 않는다해도 전쟁에 참가한 이상 수많은 군인들이 묵슴을 잃을 수밖에 없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죽고 안 죽고는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지. 하지만 우리 영국이 적에게 유린 당하는 것을 막고 우리 부모님과 아이들을 지킨다고 생각하면 내 목슴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 설령 나의 죽음이 그다지 장엄하지 못해 그저 무명용사비밖에 남기지 못한다 해도 내 어머니의 가슴속에는 자랑스러운 아들로 남으리라.'

​1942년 10월 23일 영국 제8사단은 명장 몽고메리 장군의 지휘아래 이집트와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 이탈리아 연합군을 향해 맹공격을 개시, 유명한 '엘 알라메인'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약4개월 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 브라운은 큰 공로를 세워 대위로 진급했다.

이듬해 11월 또 다시 영국군과 '사막의 여우'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군 8사단은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 지휘아래서 로멜부대를 궁지에 몰아 넣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전쟁이 계속 되던 어느 날 잠시 휴식시간을 이용해 자신의 애장서를 펼친 브라운은 머리말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미 한 글자도 빠짐없이 책의 내용이 브라운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지만 그는 세삼 작가가 젊은 여성이라는 점에 강한 호감을 느꼈다.
​매번 책을 펼칠 때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매우 지적이고 이해심이 많은 여성 작가 주디스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러다가 그녀에게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운은 곧바로 감사의 편지를 썼다.
답장이 오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정확히 2주 후에 주디스의 답장을 받았다.
이때부터 브라운은 조금이라도 틈이 있을 때마다 주디스에게 편지를 썼고, 두 사람 사이에 편지 왕래가 시작 되었다.

​1943년 5월 초 상황이 호전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로멜장군은 부대를 버리고 독일로 도망쳤다.
이어서 5월 13일 지도자를 잃은 독일군 25만 명이 항복함으로서 격렬했던 아프리카 전쟁은 영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그 후 소령으로 진급한 브라운은 다시 유럽으로 가서 계속 전쟁에 참여했고, 물론 그 동안에도 주디와의 편지는 계속 되었다.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던 편지는 어느 덧 사랑 이야기를 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브라운은 궁금증을 참지못하고 그녀에게 사진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주디스는 브라운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질책하는 듯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지금까지 당신이 말해 왔듯이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정말로 저의 뚜렸한 개성과 뛰어난 재능과 깊이 있는 사랑이라면 무엇때문에 그토록 제 얼굴을 알고 싶어 하시나요? 당신이 줄곧 말해 왔듯이 정말로 저를 영원히 사랑하고 바다가 마르고 바위가 모두 닳을 때까지 사랑한다면, 제 얼굴이 아름답던 그렇지 않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만약 당신이 보시기에 제 용모가 너무 평범하다면, 혹은 추하기 짝이 없다면, 그래도 당신은 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브라운은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 뒤로 브라운은 더이상 사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종전과 같이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둘의 사랑은 갈수록 깊어 갔다.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하자 독일 파시스트가 투항함으로써 유럽 전쟁도 끝이났다.

브라운은 중령 계급을 달고 드디어 귀국하게 되었다.

정확한 귀국 날짜를 확인한 브라운이 가장 먼저 한 일을 주디와 만남의 약속을 정하는 일이었다.

 

​ '런던 전철역 1번 출구에서 제 책을 들고 서 계세요. 저는 가슴에 '빨간 장미꽃'을 꽂고 나갈 거예요. 하지만 제가 먼저 당신을 아는척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먼저 저를 알아보시고, 만약 제가 당신의 연인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모른 체 하셔도 됩니다.'

​브라운에게는 그녀와의 만남이 마치 전쟁보다도 더한 시험처럼 느껴졌다.

 

'이제 3분 뒤면 6시다!'

 

브라운 중령은 다시 광장의 시계탑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조금 일찍 나와 줄 수는 없단 말인가? 아, 정말 떨려서 미치겠군!'

숱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평혼하기만 했던 그의 가슴이 지금 이 순간에는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때 저 앞쪽에서 녹색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그를 향해 또박또박 걸어왔다.
깊고 푸른 눈, 붉은 입술과 하얀 치아가 돋보이는 금발의 여인은 전형적인 앵글로색슨계 미인이었다.
중령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넋을 잃고 가슴에 빨간 장미를 달았는지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다가 갔다.

그러나 그녀는 브라운을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대로 그의 앞을 지나쳐갔다.
중령은 그대로 멀뚱히 서 있다가 자기 머리를 탁탁 치면서 웃고 말았다.

​ '이런 장미꽃을 달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나서다니.'


그러면서도 브라운은 막연하게 주디스 또한 분명 방금 지나간 녹색 옷을 입은 여인에 못지않게 아름다울 거라고 굳게 밀었다.

1초, 2초, 3초...

시간이 지날수록 이 같은 근거 없는 믿음과 기대는 더욱 커졌다.

드디어 정각 6시, 저 멀리서 왼쪽 가슴에 붉은 장미를 단 여인이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듯 했다.

놀랍게도 그를 행해 걸어오고 있는 여인은 못 생기다 못해 흉측한 모습의 여인이었다.
한쪽 다리를 잃은 그녀는 한족 팔만으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나머지 한쪽 팔은 붕대를 감고 있었고 얼굴 반쪽은 심한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모른 채해도 된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군. 아, 어쩌면 좋지? 정말 그녀를 모른채 해야 할까?'

짧은 시간 동안 브라운은 심한 갈등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껏 무수한 전쟁을 치른 그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이렇게 생가해선 안 돼! 원망해야 할 상대는 독일 파시스트지 이 여인이 아니야. 이 연인은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잖아. 괴링이 지휘한 독일 공군이 런던에 밤낮없이 퍼부은 폭격으로 얼마나 많은 영국 아가씨들이 팔다리를 잃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서 험악한 모습이 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었는가. 그런데 이제와서 내가 가장 절박할 때 큰 힘이 되어준 그녀를 모른척한다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야. 무려 천일 동안 그렇게 깊은 사랑을 쌓아놓고 이제 와서 그녀를 모른척한다는 것은 정말로 비겁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야!.'


​이렇게 생각한 브라운은 황급히 몸을 돌려 이미 그의 앞을 지나친 '흉측하기 짝이 없는 모습'의 여인에게 달려갔다.

"잠깐만요!"

그녀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자 그는 웃으며 그녀의 책을 들여보였다.

"제가 바로 브라운이에요. 당신은 주디스 양이시죠?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우리 우선 저녁을 먹으로 가면 어떨까요?"

"아니에요. 저는 주디스가 아니라 패니에요. 저도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군요. 조금 전에 녹색 옷을 입은 한 아가씨가 제게 빨간 장미를 달아주고는 이 앞을 자나가 달라고 하더군요. 만약 당신이 먼저 아는 척하면 그때 사실을 말해주라고 했어요. 그런 뒤에 '당신은 이미 전쟁보다도 어려운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고 전해주라더군요. 그리고 자신은 맞은편 식당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그녀의 말에 브라운은 방금 전 보다 더 놀라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패니가 거듭 재촉해서야 그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맞은편 식당을 향해 달려갔다.

주디스는 환한 미소로 브라운을 맞이했고, 더불어 그에게 한가지를 부탁했다.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당신과 나의 진실한 사랑은 우리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만족해요. 그럴 수 있죠? 만약 이런 일로 작가인 저나 중령인 당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은 우리의 순결한 사랑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은 가요?"

​브라운은 기꺼이 승락했다.
그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오른 손을 펴 들어오리며 선서의 자세를 취했다.

"군인으로서 명예와 엄격한 군령으로 당신의 명령을 평생토록 이행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 뒤로 두 사람이 사랑의 결실을 맺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패니도 또한 둘의 좋은 벗이 되었는데, 둘은 패니에게도 두 사람의 비밀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몇 년 뒤 패니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기자인 사촌동생 밥에게 두 사람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다만 패니는 주인공이나 브라운의 소속부대의 이름을 허구로 만들어내고 주요 장면을 간략하게 축소해 사람들이 진정한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없도록 하는 배려를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소설화 되기도 했고 영화화 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실제 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두 사람이 죽기전까지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대 날 사랑해야 한다면 아무런 바람 없이 사랑을 위해서만 사랑해 주세요

"그녀의 미소와 미모, 부드러운 말씨 때문에, 그런 날엔 편안한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한다."

 

고 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수놓은 사랑은 그렇게 사라질 수도 있답니다.
​1996년 5월 3일 존 브라운이 세상을 떠난지 몇 시간 뒤 그의 아내 주디스도 그 뒤를 따랐다.
일생동안 깊을 사랑을 나눈 이 두 노인은 죽는 날까지도 같이 했다.

 

장례식이 진행 되는 날 두 노인의 몇십년 지기인 패니가 장차 모든 사람들이 놀랄만한 이야기를 공개하기 위해 지팡이에 의지한 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천천히 단상에 올랐다.

"오늘에서야 지난 50년 동안 비밀로 지켜왔던 이야기를 공개하려 합니다."

그녀는 지난 수십년간 영국과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 널리 알려진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 '빨간 장미를 단 못생긴 여인' 의 숨겨진 내막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 "바로 여기 누워 있는 이 두사람이야 말로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입니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lizabeth Batter Browing)

'제왕회관 휴게실 > 세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 세대의 초상화, 위대한 ‘빡서’의 추억  (0) 2010.02.10
학조스님 이야기  (0) 2010.02.09
디강(River Dee)  (0) 2010.01.29
소나기 이야기  (0) 2010.01.28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  (0) 2010.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