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열심히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날 풍산 금산촌(소산리) 마을을 지나가던 어떤 노승이 학조의 관상을 보고는 학조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 아이를 제게 주시어 절로 보내야 할것 같습니다."
깜짝놀란 학조의 아버지 김계권은
"어찌 그리 말하십니까"
하고 그 까닭을 물으니 노승은 어린 학조를 가리키며,
"제 말이 미심쩍으시면 이 아이의 족상(발바닥의 금)을 보십시요. 이대로 속세에 두면 이 아이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큰 화를 면치 못할것 입니다."
하였다.
이에 학조의 아버지가 노승의 말대로 발바닥을 보니 과연 임금왕자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학조의 부모는 13세의 어린 학조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다고 전한다.
학조는 청음 김상헌( 영화 남한산성 예의 그양반)의 직계조상이었고,
애련사는 이미 학조가 득도하고 다시 입적한 사찰이 아닌가.
이미 학가산은 이 집안과 깊은 유대관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학가산 애련사는 절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어 왔다.
불교시대사 출판의「한국불교사찰사전」에는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정조 23년(1799)에 편찬된「범우고」엔 예련사라고 나와 있다.라고 언급했다.
처음부터 선암사라 하였으나 조선 중엽 고승 학조께서 애련암이라 고쳐 불렀다.
이는 학조 대사가 이 곳에서 수도하던 중 문득 깨달음을 얻자 기뻐서 춤을 추었는데 이 때에 연꽃 세 송이가 마당 건너편에 함박 피었다.
초겨울에 이상한 징조라 생각하고 그 연꽃을 신령스럽게 대하였다.
지금도 그 연못자리가 잡초지로 남아 있다.
업적 및 왕실 포교활동어린나이에 일찍이 안동 학가산 중대사와 애련사에서 출가하였으며, 현 안양시소재 삼성산(관악산) 삼막사 등곡대에서 득도하였다.
신미·학열 등과 함께 선종의 승려로서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459년(세조5년) 신미대사, 학열스님과 함께 월인석보을 간행하는 등 여러 고승들과 함께 많은 불경을 국어로 번역 간행하였다.
특히 스승 신미대사를 도와 훈민정음 창제 및 한글활용에 기여하였다.
1464년(세조10년) 속리산 복천사에서 임금을 모시고 신미·학열 등과 함께 대법회를 열었다.
1467년(세조13년) 세조의 명을 받고 금강산에 보내어 유점사를 중건하였다.
1468년에는 신미대사, 학열스님과 함께 설법을 하여 양반 사대부들 역시 불교에 귀의하거나 신봉하는 자가 나타났다.
그해 1월 역말을 받고 고성의 유점사로 파송되었으며, 그가 데리고 가는 장인 15인에게도 또한 왕실에서 역말을 내려 주었다.
홍길동과 인연
가출하여 떠돌던 의적 홍길동은 김천 황악산 직지사(사명대사가 출가한 절)에서 학조대사를 만나는데, 홍길동의 좌절과 억눌린 꿈, 그리고 희망을 본 학조대사는 학문과 무예에 남다른 홍길동을 직지사에 머물게 하면서 병법과 무술을 가르쳤다. 황악산인 이란 도호는 이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500년(연산군6년)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의 대장경 3부를 간행, 인쇄하고 직접 그 발문을 지었다.
여러 부패와 이권행위 개입 등으로 물의를 빚었으나 갑자사화와 무오사화의 칼을 피해 중종 반정 때까지도 살아 남았다.
그 뒤 1520년(중종15년) 왕명으로 다시 해인사 대장경 1부가 간인 되었다.
그가 국역한 불전을 살펴 보면,
《지장경언해》가 초기에 언해된 것으로 추정되며, 수양대군에 의하여 완성된 《금강경삼가해언해》를 자성대비의 명에 의하여 교정, 인출하였다.
세조때부터 중종때까지 왕과 왕실의 후원으로 무상으로 궁궐에 출입하였으나, 이권청탁과 궁녀와 하인들을 사적으로 이용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말년에는 스님이 출가한 사찰인 학가산 애련사로 다시 돌아와 입적하였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총애를 받던 학조에 대한 추문은 사림파의 불교 비판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학조가 왕실의 위세를 업고 해인사 주지를 자신의 수하로 갈아치운 사실을 기록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또한 학조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의 땅과 백성들을 사취한 사실도 문제가 된 기록이었다.
이는 논란거리를 불러왔으나 왕실의 무마로 없던 일이 된다.
학조의 부패, 월권행위가 문제가 된 것은 여러 건이었고, 사림파는 이를 근거로 부패한 승려와 정계의 유착, 왕실의 비호를
물고 늘어졌다.
왕실의 압력으로 일시적으로 문제를 덮었지만, 이 문제는 다른 문제와 함께 연산군 때 가서 다시 터지게 된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는 군장사란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학조와 사통을 했다.
무오사화 당시 이 사실도 사초에 들어 있었다.
그가 영응대군의 부인 대방군부인 송씨와 자주 접촉하다가 간통하게 되자, 평소 그를 혐오하던 김종직은 이를 비판, 조롱하였다.
이 사건은 후일 김종직의 제자들이 왕조실록에 기록함으로써 후일 무오사화의 원인을 제공한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총애를 받던 승려 학조에 대한 사초의 기록도 중요한 추궁사항 중의 하나였다.
학조가 대비의 위세를 등에 업고 해인사의 주지를 자신의 수하 인물로 갈아치운 사실을 기록했던 것이다.
학조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의 땅과 백성들을 사취한 사실을 기록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
세조 말년부터 관직에 진출한 사림파는 그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학조스님이 활동하던 시기는 세조대부터 중종대까지로 사림들의 정계진출이 본격화된 시점이었다.
사림들은 성리학을 통해 지배권을 강화해가고자 했지만, 세조와 정희왕후, 인수대비, 인혜대비 등 호불 성향의 왕과 왕비들로 인해 대놓고 왕실불사를 반대할 수가 없었다.
이에 조정의 관료들은 대군 부인들의 사찰 출입을 스님과의 스캔들로 둔갑시킴으로써 이들의 불사를 막고자 하였다.
박경은 김일손과 기맥이 통하여 홍인문 밖에서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을 했다'는 방문을 보고 알렸다가, 김일손이 사초에 적는 바람에 박경이 잡혀와 호된 고문을 당하고 겨우 살아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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