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들어서면서 프로복싱은 북미와 영연방 국가들을 중심으로 성행하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그 체계나 질서가 완전히 자리잡힌 것은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시카고의 신문기자 루 하우스만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잭 루트>가 미들급으로서는 크고 헤비급에는 미치지 못하자 170파운드를 한계체중으로 하는 중간 체급의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는 1903년 4월 22일 루트와 키드 맥코이 간의 대결을 라이트헤비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으로 홍보했고 루트는 기대한대로 무려 7번의 다운을 빼앗으며 10R판정승을 거두고 첫 왕관을 차지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전함보다 작은 순양함을 빗대어 크루저급 또는 라이터헤비급(Lighterheavyweight)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1909년 NSC가 각 체급을 표준화하면서 한계체중 175파운드 이하로 상향 조정됐다.
1980년대 일부 복싱사가들에 의해 1899년 조 초인스키가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쉽을 걸고 지미 라이언과 싸워 승리했던 기록이 발견됐지만 그를 초대 챔피언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체코의 보헤미아 태생이었던 루트는 삼촌을 따라 미네소타로 이민와 정착했는데 비교적 파워가 출중한 싸움꾼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방어전에서 <조지 가드너>에게 3차례나 캔버스를 구르며 12RTKO로 패배한 뒤 마빈 하트와 헤비급 세계타이틀을 놓고 격돌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주로 미들급에서 활동했던 아일랜드의 가드너는 지칠줄 모르는 체력을 지닌 터프가이로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라이트오버핸드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고 헤비급 선수들과도 자주 글러브를 섞을 만큼 대범했으나 넉달 뒤 영국의 명장 <봅 피치몬즈>에게는 20R 판정으로 무릎을 꿇어 사상 첫 트리플 크라운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평소 다른 헤비급 선수들에 비해 체중이 가벼웠던 피치몬즈에게 라이트헤비급은 아주 놀기 좋은 체급이었지만 여전히 화려한 스킬에도 불구하고 이미 마흔이 넘은 나이 탓에 체력적인 부담이 컸다.
결국, 1905년 젊은 도전자 <잭 오브라이언>에게 시종일관 흠씬 두들겨 맞고 13R 종료 후 경기를 포기해 폐위되었다.
은퇴 후 도박과 사기에 휘말려 재산을 탕진하고 54살의 나이에 폐렴으로 쓸쓸히 사망했지만 복싱 실력만큼은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던 초창기 명복서 중 한명이었다.
필라델피아 출신인 오브라이언은 체구가 작은 대신 민첩하고 유연했다. 강타자는 아니었지만 레프트잽과 라이트오버핸드가 위력적이었고 수비능력도 좋은 편이어서 상대의 펀치를 피해 정확한 샷으로 요격했다.
그는 이듬해 헤비급 세계챔피언 토미 번스와의 대결이 성사되자 미련없이 타이틀을 버리고 월장해 이 체급에서는 단 한번도 방어전을 갖지 않았다.
오브라이언이 떠나면서 이 체급은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가 1914년 인디애나 출신의 <잭 딜런>이 배틀링 레빈스키를 꺽고 8년만에 새로운 챔피언으로 등장했다.
풍부한 스태미나와 타고난 맷집을 바탕으로 시종일관 상대를 몰아붙인 딜런은 리틀 잭 뎀프시로 불리울 정도로 들소같은 공격력을 자랑했다.
두달 뒤 뉴욕주가 세운 봅 모하를 꺽어 비로소 언디스퓨티드 챔피언으로 공인되었고 미들급을 넘나들며 싸우다가 라이벌 <배틀링 레빈스키>와의 재대결에서 원사이드한 판정패를 당해 3차방어에 실패했다.
한해 2~30회씩 링에 오를 정도로 철인이었던 레빈스키는 공격보다는 수비적인 복싱을 구사할만큼 디펜스와 맷집에 자신이 있었으나 해리 그렙과의 수차례 대결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하더니 1920년 무려 4년만에 나선 첫 방어전에서 <조르쥬 카르팡띠에>에게 4RKO패로 벨트를 풀었다.
프랑스 복싱의 여명기를 이끌었던 카르팡띠에는 핸섬한 외모에 스마트한 플레이로 인기가 높았고 민첩하고 유연한 움직임에 강력한 펀치력까지 겸비해 이미 유럽에서 3체급을 석권할만큼 정평이 나있었다.
이 때문에 당대 최고의 흥행사 텍스 리카드에 의해 헤비급 세계챔피언 잭 뎀프시의 호적수로 발탁됐지만 이듬해 8만여명의 대관중 앞에서 파워 차이를 실감하며 4R만에 무릎을 꿇었다.
이후 영국 원정에서 테드 키드 루이스를 1R에 초살시켜 첫 방어에 성공한 뒤 세네갈 태생인 무명의 <배틀링 시키>에게 예상밖으로 6RKO패를 당해 단명했다.
이들의 대결은 시키가 카르팡띠에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는 논란 속에 승자와 패자가 번복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이 체급 최초의 흑인챔피언 시키는 광폭하고 투박한 인파이터로 풍차스타일의 공격이 트레이트 마크였지만 사치와 향락에 빠지며 6개월만에 무관으로 내려앉았다.
조국 아일랜드의 내전 중에도 더블린에서 성 패트릭의 날 왕좌에 오른 <마이크 맥티그>는 앞손의 활용이 좋고 라이트훅이 위력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어깨를 활용한 디펜스가 인상적이었지만 2년 뒤 <폴 베렌바흐>의 강타 앞에 허를 찔려 역시나 첫 관문을 넘지 못했다.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난 베렌바흐는 독일계 레슬러 출신이었다. 아스토리아의 암살자로 불리울만큼 강력한 펀치력을 소유한 하드펀처로 보디샷이 탁월했고 몸싸움에도 능했다.
후일 챔피언에 오르는 지미 슬래터리와 헤비급을 오르내리던 영 스트리블링을 제압하고 순항했으나 형편없는 수비와 느린 움직임 때문에 숙적 <잭 딜라니>의 날카로운 펀치에 유린당하며 4차방어에 실패했다.
캐나다 퀘벡 태생의 딜라니는 화려한 움직임에 부드럽고 빠른 레프트잽을 소유했고 오른손은 원펀치 넉아웃이 가능할만큼 충분한 파워를 장전했다.
1년 뒤 헤비급 세계챔피언 진 터니를 겨냥해 타이틀을 반납하고 월장했으나 체급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정상 도전의 기회도 잡지 못한 채 사라졌다.
1927년 7월 이 체급은 사상 처음으로 복수의 챔피언 시대를 맞이했다. 먼저 <NYSAC>는 딜라니의 타이틀 반납으로 도전이 취소된 전임 <마이크 맥티그>를 별도의 결정전없이 챔피언으로 임명(?)했다.
6개월 전 베렌바흐를 설욕하고 자신감이 충만한 공격적인 스타일로 변모한 맥티그는 35살의 나이에도 적잖은 기대를 모았지만 이번에도 <토미 로프란>의 기교를 당하지 못해 3개월만에 왕좌에서 물러났다.
한편, 신생 기구인 <NBA>는 결정전을 통해 맥시 로젠블룸에게 승리한 <지미 슬래터리>를 독자적인 챔피언으로 세웠다.
비교적 영리한 아웃복서였던 슬래터리는 기량이나 펀치력 모두 만만치 않았으나 넉달 뒤 <토미 로프란>에게 압도되어 흡수 통일당했다.
아일랜드계인 로프란은 신통치 않은 펀치력에도 불구하고 풀라운드를 가동하는 부지런한 풋워크와 건실한 디펜스를 과시했다.
게다가 현대 복싱의 빠르고 정확한 카운터펀치까지 구사해 후대에 복싱의 기술적 진보를 가져온 선구자로 간주되었다.
1929년 미들급 최강 미키 워커의 도전을 뿌리친 데 이어 미래의 헤비급 세계챔피언 제임스 브래덕을 완파하고 통산 6차방어에 성공해 절정의 인기 속에 링매거진 최고의 복서로 선정됐다.
내친김에 타이틀을 반납하고 오랫동안 염원해온 헤비급 진출에 나서 4만 5천명이 꽉 들어찬 양키스타디움에서 잭 샤키에게 통한의 3RKO패를 당해 좌절하고 말았다.
2년 뒤 강호 막스 베어와 어니 샤프를 연파한 로프란은 마침내 1935년 당시 챔피언이었던 프리모 카르네라에게 도전했지만 역시 대차의 판정패를 당해 끝내 헤비급 정복에 실패했다.
로프란의 월장으로 타이틀은 다시 둘로 쪼개져 <NYSAC>에는 루 스코자의 거센 추격을 막아낸 <지미 슬래터리>가 왕좌에 복귀했으나 이번에도 <맥시 로젠블룸>에게 설욕을 당해 첫 방어에 실패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싸웠던 유대계 출신의 로젠블룸은 한달에 서너번씩 링에 올라 통산 300전 가까운 시합을 벌였던 체력왕이었다.
반면, 200번이 넘는 승리 중 KO로 이긴 것은 19번에 불과할 정도로 터무니 없는 솜주먹인 탓에 스틱 앤드 무브 스타일로 상대의 리듬을 방해하는 교묘하고 노련한 복싱을 구사했다.
레이더처럼 적의 공격을 예측하는 감각이 탁월했고 가드를 높이 세워 끊임없이 들락거리기 때문에 정타를 맞추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로 인해 전설적인 트레이너 커스 다마토에게 피커부 스타일의 영감을 주기도 했고 때때로 손바닥으로 상대를 가격하는 오픈성 펀치로 인해 슬랩시(Slapsie)라는 별명을 얻었다.
왕좌에 오른지 석달만에 <NBA>도 장외에서 벨트를 수여해 명실상부한 챔피언이 되었지만 에이비 베인을 상대로 첫 방어에 성공한 뒤 타이틀 방어에 소홀하자 NBA는 가차없이 타이틀을 박탈했다.
로젠블룸에게 타이틀을 회수한 <NBA>는 1932년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를 개최해 <조지 니콜스>가 최종전에서 데이브 마이어에게 엄청난 언더독을 극복하고 리벤지에 성공하는 파란을 연출했다.
이탈리아계 사우스포로 서두르지 않는 침착한 경기운영이 장점이었고 찬스 시 결정력도 좋은 편이었으나 왕좌에 오른 뒤 갑자기 연패에 빠지면서 방어기한을 놓쳐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논타이틀전에서 니콜스에게 승리한 덕분에 무혈입성한 <조 나이트>는 조지아 출신으로 비교적 스피드가 좋은 사우포스였는데 동향인 <봅 고드윈>의 무지막지한 압박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월등한 체력을 바탕으로 지칠줄 모르는 공격력을 자랑했던 고드윈은 나이트 전의 눈부상이 아물기도 전에 23일 뒤 <맥시 로젠블룸>과 격돌해 집요한 눈공격을 받고 4R에 경기를 포기했다.
두 번째 챔피언 단일화를 이루어낸 로젠블룸은 미키 워커와 나이트의 도전을 따돌리고 7차방어에 성공하며 롱런가도를 질주했지만 NBA는 돌연 로젠블룸의 잦은 오픈블로우가 복싱룰에 위배된다며 또 다시 타이틀 박탈을 결정했다.
이후 <NYSAC> 타이틀만 남게된 로젠블룸은 설상가상으로 <봅 올린>에게 잘싸우고도 편파적인 판정에 희생되며 무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헤비급을 욕심내지 않고 은퇴해 배우로서 왕성한 연기활동을 펼치며 미국민의 큰 인기를 끌었다.
롱런챔피언을 꺽은 덕분에 <NBA>에서도 챔피언으로 인정받은 올린은 저돌적인 인파이터였으나 기술적으로는 평범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논타이틀전에서 승패를 반복하며 맞이한 첫 방어전에서 신예 <존 헨리 루이스>에게 만장일치로 패배했다.
14살에 미들급으로 데뷔한 루이스는 영국식 업라이트 스타일로 복싱 지능이 높았고 타고난 스피드에 단단한 내구력을 갖춘 세련된 스킬의 소유자였다.
또한, 12전째 샘 테린을 사망에 이르게 할만큼 준수한 파워를 소유했고 상대의 펀치를 회피하는 능력도 탁월해 여러 면에서 신동에 가까웠다.
영국 최강 렌 하비의 도전을 적지에서 가볍게 일축한 뒤 1년반만에 재회한 전 챔피언 올린마저 8R만에 쓰러뜨려 전성기를 구가했다.
싸우는 챔피언으로도 유명해 왕좌 등극 이래 3년 간 42번을 싸워 고작 3패만을 기록했고 그마저도 몇 달안에 설욕할만큼 막강한 전력을 과시했다.
과거 뼈아픈 패배를 안겼던 에밀리오 마르티네스 4R만에 요절내고 4차방어에 성공했지만 NYSAC는 이 경기를 불인정하고 지명방어전을 이행하지 않은 루이스의 타이틀을 박탈해 버렸다.
알 게이너를 제물로 5차방어에 성공한 뒤 1939년 1월 헤비급 정벌에 나섰지만 챔피언 조 루이스의 번개처럼 빠른 강타에 3분도 채 되지 않아 쓰리 넉다운을 당하며 생애 첫 KO패를 기록했다.
하비와의 리매치를 준비하던 루이스는 양쪽 눈이 실명 수준으로 손상된 것이 확인돼 겨우 26살의 나이에 영원히 링과 작별하고 말았다.
시력에 문제가 없었다면 더 많은 업적을 남겼을 위대한 챔피언 중 한명이었다.
<NYSAC>의 챔피언 계보는 루이스가 흥행 저조를 우려해 대결을 꺼렸던 <타이거 잭 폭스>가 게이너를 꺽고 이어 나갔다.
어그레시브한 인상에 다채롭고 강력한 펀치를 구사했고 특히 레프트훅의 파워가 대단해 초반 KO승이 유독 많았다.
시간과 장소,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싸운 덕분에 그의 위닝 리스트에는 전 챔피언 로젠블룸과 올린은 물론 나중에 헤비급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저지 조 월코트의 이름도 등장한다.
3개월 후 <멜리오 베티나>의 레프트훅을 맞고 9R에 침몰했는데 경기 두달 전 한 여성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심장 쪽을 칼에 찔렸다고 전해진다.
아마추어 시절 토니 제일을 누르고 골든글러브 우승을 차지할만큼 잠재력이 풍부했던 베티나는 프로에 들어와 사우스포로 변신해 견고한 공수를 자랑했고 보기보다 터프해서 연타공격에도 능했지만 첫 방어전에서 빼어난 실력을 소유한 신예 <빌리 콘>에게 한계를 드러내 왕좌를 물려 주었다.
베티나 전을 통해 <NBA>에서도 챔피언으로 인정받은 장신의 콘은 16살에 라이트급으로 데뷔해 매우 빠르고 유연한 몸놀림을 과시했다.
이일랜드계답게 호전적이면서도 손이 많기로 유명했고 상대에 따라 경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탁월해 웰터급 시절 챔피언 클래스의 여러 선수들에게 굴욕을 안겨주기도 했다.
베티나와의 리매치를 가볍게 넘어선 뒤 강호 거스 레스네비치를 두차례 연파해 1940년 링매거진으로부터 최고의 복서에 올랐다.
1년 뒤 타이틀을 반납하고 17차방어의 헤비급 최강 조 루이스에게 도전해 무수한 펀치로 챔피언을 서너차례 흔들며 KO 직전까지 몰고갔으나 13R 좌우어퍼컷을 맞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경기는 역대급 명승부로 회자될만큼 난타전의 진수를 보여준 위대한 전투였고 당연히 팬들의 재대결 요구가 빗발쳤으나 이들의 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양자 모두 군에 징집되는 바람에 무려 5년이 걸렸고 첫 대결과 달리 맥빠진 경기를 전개한 끝에 루이스가 8RKO승을 거두었다.
콘의 월장으로 공석이 된 <NBA>에는 그리스의 <안톤 크리스토포르디스>가 재임을 노리던 베티나를 꺽고 왕좌에 올랐다.
프랑스를 주무대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넘어온 크리스토포르디스는 부실한 펀치력을 엄청난 활동량과 교묘한 경기운영으로 커버했다.
4개월만에 미국의 <거스 레스네비치>에게 바톤을 넘겼지만 맥티그 이래 미국 선수 일색이었던 이 체급에 오래간만에 유럽출신의 챔피언이 등장한 것은 의미가 있었다.
초창기 8체급 중 가장 늦게 출발한 이 체급은 헤비급 바로 아랫체급이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비인기 체급인데다가 수시로 챔피언이 바뀌면서 거의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1920년대 후반 로프란과 로젠블룸이 등장하면서 활기를 띠었지만 대체로 헤비급 도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라이트헤비급을 대표하는 챔피언의 탄생은 요원하기만 했다.
빌리 콘의 벽에 막혔다가 늦게 개화한 러시아 혈통의 <NBA> 챔피언 <거스 레스네비치>는 골든글러브 우승 직후 프로에 데뷔했다.
비교적 단신으로 접근전을 선호하는 터프가이답게 거리가 좁혀지면 여지없이 좌우훅이 폭발했고 주무기인 라이트어퍼컷은 항상 상대의 턱을 겨냥했다.
풋워크가 거의 없는데다가 공격 시 가드가 열리는 단점 때문에 공매를 허용하는 일이 잦았지만 뚝심 좋은 맷집으로 견뎌냈다.
1941년 첫 방어전에서 강호 태미 모리엘로와 격돌해 판정 논란 속에 <NYSAC>타이틀까지 거머쥔 후 재대결에서 압승을 거두고 우위를 입증했다.
역시 군입대를 피할 수 없었던 레스네비치는 제대 후 복귀가 불투명했지만 4년만에 영국으로 날아가 홈링의 프레디 밀스를 10R만에 요절내고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후 37연속 KO승의 강타자 빌리 폭스는 물론 전임 베티나와 라이벌 모리엘로를 모조리 KO로 눕혀 1947년 당당히 링매거진으로부터 최고의 복서에 선정됐다.
그러나 이듬해 6차방어전에서 재회한 <프레디 밀스>에게 초반부터 양쪽 눈자위가 커트되는 악전고투 끝에 참패해 7년만에 무관으로 전락했다.
마지막으로 나선 헤비급 세계챔피언 에저드 찰스와의 시합은 애초부터 승산이 없어서 7R 종료 후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겁없는 사내로 불리웠던 밀스는 기량 자체는 별볼일 없었지만 무자비한 압박과 맹렬한 논스톱 파이팅으로 자국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호기롭게 맞이한 지명도전자 <조이 맥심>과의 첫 방어전에서 치아가 세 개나 빠지는 중상을 입은 채 10RKO패를 당해 그대로 링을 떠났다.
아마추어 전미 챔피언 출신인 맥심은 파워복싱과는 담을 쌓았지만 타고난 감각과 건실한 디펜스를 갖추었고 자동소총같은 레프트잽을 앞세운 클레버 복싱으로 중량급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이듬해 오랜 숙적이었던 찰스를 상대로 헤비급 석권에 나섰지만 5번째 대결에서도 대차의 판정패로 역부족을 드러냈다.
첫 방어전에서 강타자 봅 머피를 아웃복싱으로 따돌린 후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 슈거 레이 로빈슨을 맞이해 체력전으로 3관왕을 저지하며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베테랑 <아치 무어>의 노도와 같은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 못해 3차방어에 실패했다.
타이틀 탈환에 실패한 뒤 미래의 헤비급 세계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에게 첫 패배를 안겨주었지만 이미 석양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은퇴할 때까지 100전 넘게 싸우면서도 KO패는 데뷔 초 한번에 불과할 정도로 놀라운 내구력과 견고한 수비를 자랑했다.
지금도 이 체급의 올타임 넘버원으로 손꼽히는 무어는 링커리어 28년의 엄청난 연륜을 자랑하는 리얼리티 파이터로서 1950년대를 지배한 프로복싱 역대 최다 KO승의 강타자였다.
단순한 하드펀처를 넘어서 닉네임 몽구스답게 싸우는 법을 아는 영리하고 교활한 테크니션이었다.
다부진 체격에 양팔을 교차한 크로스암 가드를 사용했으며 능숙한 슬리핑과 롤링을 통해 상대의 비어있는 안면을 사로잡는 능력이 탁월했다.
레프트잽에 이은 라이트스트레이트는 물론이고 강약을 섞어서 치는 좌우훅과 어퍼컷은 엄청난 기록의 근간이었다.
특히, 오른손의 파괴력이 대단해 초창기 화끈한 KO펀치로 연전 연KO승을 과시했다.
게다가 한번 발동이 걸리면 사정없이 몰아치는 폭풍같은 연타와 예리한 카운터펀치까지 장착해 공격만큼은 당대 최고의 마스터였다.
강한 턱에 비해 내구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도무지 믿기 어려운 회복력을 소유해 제아무리 힘 좋은 상대라도 무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너무도 강한 흑인이었기 때문에 정상 도전의 기회를 잡지 못하는 차별대우를 겪다가 프로데뷔 8년만에 잭 체이스를 꺽고 캘리포니어주 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3개월만에 설욕을 당했고 라이트헤비급으로 월장해 승승장구한 끝에 무려 36살이 돼서야 세계정상에 오를수 있었다.
이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듯이 맥심의 도전을 연거푸 돌려 세웠고 최고의 라이벌 해롤드 존슨에게는 역전 KO승을 거두며 우위를 입증했다.
이후 호시탐탐 헤비급을 노리며 톱랭커 니노 발데스를 꺽고 교두보를 마련한 뒤 1955년 마침내 헤비급 최강으로 군림했던 챔피언 록키 마르시아노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2R 기습적인 라이트훅으로 선제다운을 빼앗아 잠시 기대를 모았지만 6R 이후 마르시아노의 강타 앞에 도합 4차례의 다운을 허용한 채 9R만에 무릎을 꿇었다.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이들의 대결은 6만여명의 관중이 운집할 정도로 팬들의 관심이 높았고 양 선수 모두 커리어 최고의 수익을 올린 빅매치였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무어는 이듬해 욜란드 폼페이와의 5차방어전을 제외하고 대부분 헤비급으로 싸운 덕분에 마르시아노의 은퇴로 공석이 된 타이틀을 놓고 21살의 영건 패터슨과 격돌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5R 레프트훅 일발에 무너지며 끝내 헤비급 정복에 실패하고 말았다.
제자리로 돌아온 무어는 닉네임 몽구스 앞에 ‘올드’(Old)라는 형용사가 붙을 정도로 더욱 노련하고 전략적인 공수를 앞세워 연승가도를 달렸다. 비록 적지에서 이본 듀렐에게 KO패의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세차례의 방어전을 모두 KO승으로 쓸어담아 불혹의 나이를 무색케 했다.
다음 방어전이 늦어진 탓에 1960년 NBA 타이틀을 박탈당한 뒤 논타이틀전에서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 귈리오 리날디를 리벤지하고 통산 9차방어에 성공했다.
>이후 연령적으로 한계에 이르면서 타이틀을 반납한 채 한때 자신이 지도했던 젊은 무하마드 알리와의 사제 대결을 끝으로 사실상 링에서 내려왔다.
평생의 소원이었던 헤비급 정복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한 패배를 당해 오늘날 과소평가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체급을 10년 가까이 철권 통치한 그의 복싱 인생은 대단한 수작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의 공식기록은 매체마다 차이가 있지만 위키피디아 기준 220전 186승(132KO) 23패 10무 1NC의 통산전적을 남겼다.
은퇴 후에는 연예계 활동과 함께 조지 포먼 등의 트레이너로 뛰면서 청소년 선도사업에도 나서 원로복서로서 추앙받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무어를 권좌에서 밀어낸 <NBA>에는 제시 바우드리를 9R만에 가라앉힌 미국의 <해롤드 존슨>이 새로운 챔피언으로 등장했다.
그동안 무어의 그늘에 가려 있었던 존슨은 펀치력과 스킬을 겸비한 테크니션으로 빠른 스피드에 교과서적인 공수를 갖추었고 날카로운 레프트잽과 그림같은 라이트스트레이트는 탄성을 자아낼만큼 아름다웠다.
왕좌에 올라 펄펄 날며 두차례 방어에 성공한 후 무서운 신예 더그 존스를 꺽고 <NYSAC>로부터도 공인받아 리니얼 챔피언으로 우뚝 솟았다.
그 뒤 베를린에서 미들급 유렵챔피언 구스타프 숄츠를 물리쳐 4차방어에 성공하며 롱런이 기대됐지만 기교파 <윌리 패스트라노>에게 석패해 브레이크가 걸렸다.
헤비급의 알리와 함께 안젤로 던디의 손에서 키워진 패스트라노는 빼어난 풋워크에 훌륭한 레프트를 소유한 전형적인 재버(Jabber)였다.
그러나 상대의 타격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만큼 자신도 상대를 크게 몰아치지 못했다.
게다가 파워 부족은 중량급에서 성공하는데 치명적인 약점이었고 훈련 대신 파티를 즐긴 대가로 그의 재능은 일찍 시들고 말았다.
놀랍게도 두 번의 방어전을 모두 KO승으로 장식한 뒤 3차방어전에서 <호세 토레스>의 보디공격에 시달리며 9R만에 백기를 들었다.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는 3번째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토레스는 멜버른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로서 커스 다마토의 애제자답게 피커부 스타일의 인파이터였다.
단단한 가드 속에 좌우훅과 라이트어퍼컷으로 이어지는 컴비네이션이 조화를 이루었고 강력한 라이트오버핸드와 레프트보디샷은 무서운 필살기였다.
지명도전자 웨인 손튼을 가볍게 일축한데 이어 베테랑 에디 코튼을 맞아 치열한 난타전을 펼치며 1966년 최고의 시합을 연출했다.
그러나 미들급에서 올라온 <딕 타이거>의 맹공에 후반을 내주면서 4차방어에 실패한 후 리매치에서 선전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판정에 울어야 했다.
은퇴 후에는 강연과 저술활동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고 1990년 WBO 회장으로 선출돼 당시 마이너에 불과했던 WBO를 메이저기구로 올려 놓는데 이바지했다.
미들급 챔피언 출신으로는 봅 피치몬즈 이래 66년만에 처음으로 라이트헤비급을 정복한 타이거는 38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화산같은 전투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복서로서는 이미 환갑이 지난 터라 3차방어전에서 한창 물이 오른 지명도전자 <봅 포스터>의 역대급 레프트훅을 맞고 4R만에 실신하며 생애 첫 KO패를 기록했다.
1970년대 전반기 라이트헤비급을 호령했던 포스터는 무어에 필적할만한 위대한 챔피언 중 한명이었다.
발군이었던 아마추어를 거쳐 프로에 데뷔해 초기에는 헤비급에 야심을 품었으나 잇달아 좌절을 경험한 후 자신에게 최적인 라이트헤비급에 정착해 연승가도를 달렸다.
무엇보다 험상궂은 인상과 190cm가 넘는 높이에 왼팔을 늘어뜨린 비스듬한 자세가 싸우기 전부터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긴 리치의 레프트잽과 후려치는듯한 라이트스트레이트는 상대로 하여금 접근을 불허했고 레프트훅은 일발필도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뿜어냈다.
장신이지만 상체를 수그린 채 위를 향하는 레프트잽은 적중률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빠른 스피드를 동반해 매우 위협적이었다.
또한, 공격 시 페인트와 패링을 적절히 활용해 일순 상대의 밸런스를 무너뜨린 후 충격을 배가시키는 지능적인 플레이도 구사했다.
다만, 체력에 비해 맷집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공격적인 스타일상 클린치워크에 능하지 못했다.
황금의 레프트훅을 앞세워 4차례의 방어전을 모두 KO로 싹쓸이한 뒤 여세를 몰아 1970년 헤비급을 통일한 조 프레이저에게 도전했지만 헤비급의 높은 벽을 실감한 채 230초만에 격추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WBA가 요구한 지명방어전을 거부해 라이트헤비급 타이틀마저 반쪽으로 갈라졌다.
<WBA>는 곧바로 챔피언 결정전을 지시해 베네수엘라의 <비센테 론돈>이 약물 논란을 일으킨 지미 듀프리를 6RKO로 눕히고 왕좌에 올랐다.
미들급 시절 루이스 로드리게스와 베니 브리스코에게 역전승을 거두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론돈은 중남미 출신답게 반사신경이 뛰어나고 풋워크도 빠르고 좋은 편이었다.
레프트잽이 잘 돌았고 라이트어퍼컷과 레프트훅이 위력적인 반면 가드가 엉성해 늘 불안감을 주었다.
두달 간격으로 방어전에 나서 불과 6개월만에 4차방어를 달성한 뒤 포스터와 조우했으나 두라운드를 버티지 못하고 레프트훅에 실신해 메이킹 챔피언의 한계를 드러냈다.
여전히 <WBC>로부터 챔피언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포스터는 타이틀 방어에 전념하며 1971년 한해동안 4명의 도전자를 돌려세워 8차방어에 성공한 후 이듬해 론돈을 꺽고 언디스퓨티드 챔피언으로 복귀했다.
그 뒤 무패의 마이크 쿼리를 환상적인 레프트훅으로 실신시킨데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크리스 피네건과 치열한 난타전 속에 14RKO승을 거두고 11차방어에 성공했다.
이 경기는 홈링의 피네건이 두차례 다운을 당하면서도 최후까지 고군분투해 링매거진으로부터 1972년 최고의 경기에 선정되기도 했다.
더 이상 적수가 없었던 탓에 또 다시 북미챔피언 알리를 상대로 헤비급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동안 우려됐던 낮은 가드와 한쪽으로 기울어진 스탠스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7번의 다운을 허용한 끝에 8RKO로 완패당했다.
꿈을 잃은 포스터는 피에르 푸리를 두차례 판정으로 꺽고 건재를 과시했으나 확실히 전보다 생기가 떨어져 있었고 1974년 호르헤 아우마다와 무승부를 기록하자 이제는 물러날 때가 됐다며 스스로 하야를 선택했다.
얼마 후 이를 번복하고 컴백했지만 왕년의 레프트훅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미 모든 것이 녹슬어 있었다.
호쾌하면서도 전율적인 KO펀치로 6년 간 무려 14차방어에 성공한 그는 이 체급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끝내 헤비급 정복에 실패했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평가를 깍아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친 외모와 달리 인간적으로도 나무랄데가 없어서 은퇴 후에는 보안관이 되었고 나중에 고향 앨버커키에서 유능한 경찰관으로 복무했다.
명장 무어의 등장과 함께 팬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이 체급은 1960년대 개성이 뚜렷한 실력파 챔피언들을 잇달아 배출하며 미들급과 헤비급 사이에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뒤이어 출현한 포스터는 거의 매경기 강렬한 KO씬을 연출하며 난공불락의 아성을 구축해 라이트헤비급은 포스터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다만, 끊임없는 도전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헤비급 정복에 줄줄이 실패해 평가절하된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杓)
1974년 봅 포스터가 스스로 하야하면서 이 체급은 그동안 기회를 노리던 아마추어 출신의 신성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먼저 <WBC>에는 영국의 기교파 <존 콘테>가 강호 호르헤 아우마다를 판정으로 꺽고 왕좌에 올랐다.
아마추어에서 영연방 선수권을 제패한 콘테는 빠르고 민첩한 테크니션으로서 매우 지능적인 복싱을 구사했다.
레프트잽으로 기어를 올린 뒤 순간적으로 안쪽을 파고드는 능력이 탁월했고 레프트보디샷과 라이트오버핸드는 만만치 않은 화력을 뿜어냈다.
전성기 시절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은 호세 나폴레스를 연상케 했고 앞손과 뒷손의 연결도 아주 부드러웠다.
순조롭게 3차방어에 성공하며 롱런이 기대됐으나 지명방어전을 거부해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후 세차례나 정상 탈환을 위해 도전했지만 끝내 왕좌 복귀를 이루지 못했다.
후임에는 콘테에게 거부당한 아르헨티나의 <미구엘 쿠엘요>가 제시 버네트의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대관했다.
오랜 아마추어 생활로 뒤늦게 프로에 뛰어든 쿠엘요는 단신의 인파이터로 수비는 허술했지만 레프트훅만큼은 위력이 대단했다.
첫 방어전에서 아마추어 시절 숙적이었던 유고슬라비아의 <마테 팔로프>에게 9RKO패로 무너진 뒤 자취를 감춰버린 미스테리한 챔피언이었다.
냉전시대 공산주의 국가 최초의 세계챔피언으로 이목을 끌었던 팔로프는 아마추어에서 300전이 넘는 커리어를 쌓으며 뮌헨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석권한 발군의 사우스포였다.
탄탄한 기본기에 치고 빠지며 싸우는 영리한 아웃복싱을 구사했고 스피디한 잽과 스트레이트는 물론 찬스 시 터지는 좌우연타도 돋보였다.
전임 콘테의 도전을 뿌리치고 프로에서도 가능성을 높였으나 미국의 <마빈 존슨>에게 일찌감치 안면이 붉어진 채 10R만에 레퍼리 스톱이 걸려 1년여만에 낙마했다.
이듬해 신설된 WBC 크루저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마빈 카멜과 두차례 격돌해 패배하자 미련없이 링을 떠났다.
은퇴 후에는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아 LA올림픽에서 조국이 역대의 최고의 성적을 거두는데 공헌했다.
타고난 감각과 뚝심을 자랑한 존슨 역시 뮌헨올림픽 동메달리스트로서 사우스포치고는 드물게 익사이팅한 파이팅을 즐겼다.
파워펀처는 아니었지만 쉴새없는 압박과 폭발적인 연타를 앞세워 상대를 두들겼고 원투스트레이트에 이은 어퍼컷이 장기였다.
첫 방어전에서 <매튜 프랭클린>과 재회해 드라마틱한 승부를 전개한 끝에 8RTKO로 물러났지만 존슨의 커리어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이들의 8라운드는 링매거진이 1979년 최고의 라운드로 선정할만큼 불꽃튀는 난타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잦은 왕좌 교체를 겪었던 WBC와 달리 <WBA>에는 아르헨티나의 <빅토르 갈린데스>가 렌 허친스를 12RTKO로 꺽고 입성해 장기집권을 획책했다.
네모진 얼굴에 다부진 체격을 소유했고 두둑한 배짱과 활력이 넘치는 파이팅으로 팜파의 레오파드로 불리웠다.
초기에는 이렇다할 기술이 없어 승패를 반복했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밸런스가 안정되고 공수도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접근전을 선호해 항상 머리를 붙이고 펀치를 주고받으면서도 힘을 앞세워 자신의 페이스대로 경기를 조율했다.
딕 타이거 못지 않은 사나운 공격력을 소유했고 일발필도의 파워 부족은 끈질긴 연타로 보완했다.
레프트잽으로 조준한 뒤 있는 힘껏 내지르는 좌우훅과 어퍼컷이 트레이드 마크였고 헤드슬립은 물론 위빙과 보빙에도 능해 수준급의 디펜스 능력을 보여주었다.
잦은 눈부상과 출혈은 언제나 걱정거리였지만 강인한 정신력과 터프니스로 버텨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경제 파탄으로 원정방어를 밥먹듯이 나가면서도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장기전에 특출난 재능을 보였고 갈수록 자신감이 더해져 적지에서 거침없는 방어행진을 펼쳤다.
말년의 봅 포스터를 괴롭혔던 피에르 푸리와 호르헤 아우마다를 처단한 뒤 신성 리치 케이츠와 육탄전을 벌인 끝에 최종회 KO승을 거두고 5차방어에 성공하며 롱런가도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로 주전장을 옮긴 갈린데스는 서서히 감량고에 시달리면서 8차방어전에서 알바로 로페즈의 아웃복싱에 고전하더니 매번 근소한 차의 판정승으로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결국, 두자릿수 방어기록을 돌파한 뒤 지나친 감량으로 미국의 <마이크 로스먼>에게 13RTKO패를 당해 11차방어에 실패했다.
라이트헤비급 사상 최고의 이변을 연출한 로스먼은 레프트잽이 출중했던 복서파이터로 날카로운 원투컴비네이션을 소유했지만 유연성이 부족하고 상대적으로 부실한 내구력도 문제였다.
2차방어전에서 절치부심 재기를 노리던 <빅토르 갈린데스>의 거센 압박에 굴복해 7개월의 짧은 재임기간을 마감했다.
깨끗이 복수에 성공한 갈린데스는 톱랭크와 계약하며 새출발을 다짐했지만 과거의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첫 판부터 지명도전자 <마빈 존슨>의 강타 앞에 턱이 깨지는 수모를 겪으며 11RKO로 무릎을 꿇었다.
이듬해 크루저급 부활에 실패한 후 1980년 평소 즐겨왔던 포뮬러 자동차 경주에 나섰다가 불행히도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겨우 31살이었다.
비록 스펙타클한 KO승이 많지는 않았지만 모두 적지나 제3국에서 순도높은 도전자들을 상대로 용감무쌍한 활약을 보여준 방랑의 무법자였다.
필라델피아 태생인 프랭클린은 <WBC> 왕좌에 오르자마자 무하마드 알리에게 영향을 받아 이슬람교에 귀의하며 우리에게 친숙한 매튜 사드 무하마드로 개명했다.
지독한 슬로우 스타터로서 부실한 디펜스와 피를 부르는 터프니스 때문에 위태로운 승부를 자주 펼쳤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은 근성과 불굴의 투지를 발휘해 일류로 성장했다.
특히, 긴 리치에서 뻗어 나오는 강렬한 라이트스트레이트와 레프트어퍼컷이 치트키였고 오금이 저리는 난타전의 명수답게 한번 잡은 찬스는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다.
전형적인 기브 앤드 테이크 형으로 발을 멈추고 상대와 철저히 치고 받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인파이터였다.
첫 방어전부터 콘테와 피범벅이 된 얼굴로 사투를 벌인 후 로페즈와의 4차방어전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장렬한 타격전을 전개한 끝에 14RTKO승의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이 경기는 1980년 링매거진 최고의 경기로 손꼽혔고 익사이팅했던 8라운드 역시 최고의 라운드에 선정될만큼 올타임급 세계타이틀전 가운데 하나였다.
놀라운 하이 페이스로 7연속 KO방어를 질주하며 당대 최강으로 군림했지만 이듬해 연말 9차방어전을 앞두고 체중조절에 애를 먹더니 동국의 <드와이트 브랙스턴>의 맹공에 10RTKO로 물러났다.
세련된 기교나 스마트한 복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잦은 역전승으로 긴장감이나 몰입도 측면에서 최고였고 링 위에서 보여준 처절한 승부는 고아로 자라나 불우했던 자신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장강도 출신으로 제임스 스코트와 형무소에서 복싱을 익힌 브랙스턴은 166cm의 단신으로 헤비급의 조 프레이저를 닮은 저돌적인 인파이터였다.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거친 사자몰이로 시작해 거리가 좁히지면 여지없이 폭발하는 좌우훅과 스트레이트가 거의 살인적이었다.
빠른 스피드에 흑인 특유의 유연성을 갖추었고 감각적인 슬리핑으로 상대의 펀치를 흘린 뒤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꽂아 넣는 카운터펀치도 무척 위협적이었다.
2차방어전에서 전임 무하마드를 요절낸 후 역시 이슬람으로 개종해 드와이트 무하마드 콰이로 이름을 바꾸고 강호 에디 데이비스를 넘어서자 WBA 챔피언 마이클 스핑크스와의 통합타이틀전이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신장과 리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한차례 다운까지 내주며 만장일치의 판정패로 고개를 숙였다.
이후 크루저급으로 올라가 2년만에 WBA 챔피언 피에트 크루스를 11RKO로 함락시키고 2체급을 석권하는 수훈을 세웠다.
갈린데스의 장기 집권을 종식시킨 <WBA> 챔피언 존슨은 기대와 달리 불과 4개월만에 동국의 <에디 그레고리>에게 11R만에 침몰해 이번에도 1차관문을 넘지 못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뛰어난 기량을 과시한 그레고리는 블랙 무슬림으로 활동하며 에디 무스타파 무하마드라는 링네임으로 뛰었다.
레프트잽의 스냅이 부족했지만 라이트펀치의 위력은 헤비급 수준이었고 파괴적인 카운터펀치와 원투스트레이트 역시 일품이었다.
그러나 3차방어전을 앞두고 감량 실패로 지명도전자 <마이클 스핑크스>의 젊음과 패기에 압도당해 브레이크가 걸렸다.
은퇴 후에는 명트레이너로 활동하며 제임스 토니와 채드 도슨같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헤비급 세계챔피언 레온의 동생인 스핑크스는 골든 글러브에 이어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면서 일찌감치 엘리트 복서로 주목받았다.
189cm의 장신임에도 세미 크라우칭 스타일에 흐늘거리는 스탠스 때문에 다소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긴 리치를 이용한 공격력은 상당한 위압감을 주었다.
스핑크스 징크스라고 불리운 라이트스트레이트는 일발필도의 파워를 장착했고 상체의 탄력을 이용한 레프트훅은 주된 공격 루트였다.
게다가 강약이 고루 분배된 리드미컬한 연타 역시 상대에게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레프트 가드가 높고 단단해 상대의 라이트펀치를 맞을 일이 없었고 부드러운 몸놀림을 이용해 절대로 공매를 허용하지 않았다.
경기의 기복이 심한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였지만 상대의 약점을 간파해 철저히 부순 뒤 연타를 퍼부어 마무리했다.
다만, 스윙이 지나치게 세고 스웨이나 더킹 동작도 커서 공수 분리의 경향이 뚜렷한 것은 단점이었다.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세계챔피언에 오른 스핑크스는 불과 1년여만에 다섯 명의 도전자를 모조리 KO로 눕혀 스타대열에 합류했다.
이 즈음 아내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에도 불구하고 1983년 <WBC> 챔피언 브랙스턴에게 클래스의 차이를 보여주며 포스터 이래 9년만에 단독 집권 시대를 열었다.
이후로도 스핑크스의 방어 행진은 거침이 없었고 신설기구 <IBF>로부터 벨트를 수여받은 뒤 블랙스턴의 부상으로 리매치가 무산되자 전인미답의 고지였던 헤비급 정상을 겨냥했다.
결국, 1985년 두차례의 방어를 더해 10차방어의 위업을 달성한 스핑크스는 48연승 무패의 IBF 헤비급 챔피언 래리 홈즈에게 도전해 예상과 달리 근소한 차의 판정승을 거두고 사상 최초로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이 헤비급을 정복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들의 대결은 지루한 범전이었지만 역사적 의미가 매우 컸고 링매거진으로부터 그 해 최고의 이변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감칠 맛이 없는 무덤덤한 복싱을 구사한데다가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보지 못한 탓에 실력에 비해 복싱계의 대접이나 팬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1970년 중반들어 이 체급은 WBA 챔피언 갈린데스의 정처없는 롱런과 WBC 챔피언의 잦은 교체로 인해 팬들의 관심이 초라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프랭클린의 하드코어를 방불케하는 승부사적 기질에 잠시 열광했지만 두 무하마드 간의 파이널매치로 이어가지 못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나마 1980년대 새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른 스핑크스가 양대기구 통일과 함께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헤비급의 꿈을 실현한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마이클 스핑크스가 헤비급으로 진군하자 1985년 <WBC>에는 아마추어 전미 챔피언 출신인 <J.B. 윌리엄슨>이 가나의 프린스 마마 모하메드를 판정으로 누르고 왕좌에 올랐다. 비교적 큰 키에 공수가 안정적이었지만 선이 가늘고 맷집도 약해 첫 방어전에서 영국의 <데니스 안드리스>에게 석패한 뒤 저니맨의 길로 들어섰다.
가이아나 태생의 안드리스는 이렇다할 주무기가 없었고 공격 시 밸런스도 형편없었다.
그러나 경쾌한 스텝과 함께 긴 리치를 거미처럼 능숙하게 사용했고 찬스 시 끈질기게 몰아치는 저돌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첫 방어전에서 노장 토니 십슨을 침몰시켰으나 두 체급을 뛰어 넘은 <토머스 헌스>의 매서운 강타 앞에 6번이나 다운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단명에 그쳤다. 175파운드에서도 히트맨의 면모를 과시한 헌스는 한때 통합타이틀전을 모색하며 활기를 되찾았지만 팬들의 관심이 적고 마땅한 라이벌도 없는 이 체급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다.
때마침 슈거 레이 레너드가 WBC 미들급 타이틀을 반납하자 백어택에 나서 후안 도밍고 롤단을 때려잡고 전인미답의 4관왕 고지에 올라섰다.
후임에는 캐나다의 골든보이 <도니 라론데>가 에디 데이비스에게 시작부터 맹폭을 가해 2R만에 요절내고 화려한 대관식을 치렀다.
스피드나 테크닉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폭발적인 라이트스트레이트와 레프트훅을 앞세운 인파이팅으로 어필했다.
헌스와의 다관왕 경쟁에 뛰어든 <슈거 레이 레너드>에게 간택(?)되어 1988년 신설된 WBC 슈퍼미들급까지 두 체급의 타이틀을 걸고 싸웠지만 초반 선전에도 불구하고 9R만에 실신해 2차방어에 실패했다.
어거지로 5관왕을 달성한 레너드는 애초부터 무리였던 L.헤비급을 버리고 숙명의 라이벌 헌스와의 리매치를 겨냥해 슈퍼미들급으로 돌아갔다.
팬들의 비난으로 홍역을 치룬 WBC에는 <데니스 안드리스>가 무패의 토니 윌리스를 5RKO로 꺾고 2년만에 왕좌에 복귀해 전천후 파이터임을 입증했다.
그러나 호주의 샛별 <제프 하딩>과 다운을 주고받는 격투 끝에 최종회 KO패를 당해 이번에도 넉달만에 왕좌에서 물러났다.
극적인 막판 뒤집기로 정상에 오른 하딩은 좌우펀치 모두 파워를 장착한 강타자였는데 준수한 외모를 갖춘데다가 항상 투지 만점의 익사이팅한 파이팅을 전개해 인기가 높았다.
두차례 방어전을 모두 KO로 쓸어 담아 기대를 모았지만 1년 후 전임 <데니스 안드리스>와의 리매치에서 7R만에 굴복해 아직은 설익은 풋내기였음을 자인했다.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한동안 잊혀졌던 34살의 <마빈 존슨>이 레슬리 스튜워트를 7RTKO로 물리치고 무려 5년만에 세 번째 정상에 오르는 놀라운 저력을 과시했다.
한때 스핑크스에게 턱이 날아가 좌절하기도 했지만 마치 회춘이라도 한 듯이 연승가도를 질주하더니 불사조처럼 되살아난 것이었다.
강타자 장 마리 에메베를 13RTKO로 꺽고 처음으로 수성에 성공했으나 더 이상은 힘에 부친 듯 15개월만에 재회한 <레슬리 스튜워트>에게 1R부터 캔버스를 구르며 일방적으로 난타당한 끝에 8R 종료 TKO패로 물러났다.
라이트급의 클로드 노엘에 이어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으로는 두 번째 세계챔피언에 오른 스튜워트는 장신의 인파이터로 공격적 스탠스에 날카로운 잽과 스트레이트를 자랑했다.
하지만 불과 석달 후 <버질 힐>에게 빈틈을 보이며 레프트카운터펀치에 침몰해 일찍 저물고 말았다.
LA올림픽에서 우리나라의 신준섭에게 금메달을 놓쳤던 힐은 아마추어에서 다져온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치고 빠지는 아웃복싱에 능했던 장기전의 명수였다.
중량급 치고는 체격이 왜소하고 펀치력도 약했지만 놀라운 핸드스피드를 앞세운 레프트잽과 전진과 후진이 구분된 능숙한 발놀림을 통해 경기의 흐름을 장악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다소 어색했던 라이트와 달리 스튜워트를 가라앉혔던 레프트펀치는 끊어치는 맛이 예리했고 체력과 맷집도 좋은 편이어서 몸싸움에도 능했다.
또한, 뛰어난 동체시력과 감각적인 디펜스를 소유해 웬만해서는 상대의 펀치를 허용하는 일이 없었다. 다만, 단신의 핸디캡 때문인지 장신의 아웃복서들에게 때때로 고전해 경기력의 기복을 나타낸 것은 단점이었다.
존슨을 괴롭혔던 복병 에메베를 격침시킨 뒤 5차방어전에서 IBF 챔피언 출신의 강호 보비 체즈마저 따돌려 롱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프로복싱의 메카 라스베이거스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힐은 고향인 비스마르크에서 고만고만한 도전자들을 상대로 방어행진을 고집하며 홈타운 히어로에 머물러 아쉬움을 주었다.
게다가 1990년을 전후해 4대기구 체제가 들어선 탓에 두자릿수 방어기록에도 불구하고 그의 챌린저리스트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더 이상 상대가 없자 한때 타이틀 통합에 관심을 가졌지만 결국, 1991년 L.헤비급을 재침공한 <토머스 헌스>의 긴 창에 찔려 11차방어에 실패하며 1차 왕조를 마감했다.
한편, <IBF>에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슬로보단 카차르>가 WBA 챔피언 출신의 에디 무스타파 무하마드를 판정으로 꺾고 왕좌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카차르는 장신의 재버였으나 명장 안젤로 던디의 지도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 시절 업라이트 스타일이 몸에 배어 첫 방어전에서 <보비 체즈>의 비정한 레프트카운터펀치에 5R만에 격추되고 말았다.
비행기 추락사고에서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을 소유한 체즈는 키가 작은데 비해 레프트잽과 좌우훅을 잘 쳤고 내구력이 좋아 뛰어난 터프니스를 발휘했다.
항상 선제공격을 통해 상대의 플레이를 미리 차단했고 보기보다 유연한 몸놀림으로 위빙과 더킹에도 능했다.
3명의 도전자들을 모조리 KO시키며 물만난 고기처럼 펄떡였으나 후커 특유의 와이드 오픈을 극복하지 못한 채 <찰스 윌리엄스>의 무수한 잽 공격에 오른쪽 눈이 크게 부어 9R 종료 후 레퍼리 스톱이 걸렸다.
두 차례 왕좌 복귀에 실패한 뒤 크루저급에서 WBA 타이틀을 획득해 2관왕에 올랐다.
장신의 윌리엄스는 리드 펀치가 좋아 자신의 페이스대로 경기를 조율하는 능력이 탁월했고 빠른 발을 이용한 아웃복싱으로 유리턱을 감추었다.
특히, 레프트잽이 송곳처럼 날카로웠고 라이트로 이어지는 컴비네이션은 상당한 파괴력을 드러냈다. 3차방어전에서 체즈에게 우위를 입증한 뒤 대서양을 넘나들며 쾌속항진을 이어가 한때 링매거진의 L.헤비급 넘버원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독일 원정에 나선 9차방어전에서 홈링의 <헨리 마스케>에게 예상밖의 난조를 보이며 브레이크가 걸려 낙마했다. 슈퍼미들급으로 내려가 제임스 토니에게 도전했다가 충격적인 KO패를 당한 뒤로는 예전의 솜씨를 잃어버린 채 완전히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한편, 제4의 기구로 출범한 <WBO>에는 크롱크짐의 유망주 <마이클 무어러>가 1988년 램지 핫산을 5RKO로 눕히고 창단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프로 데뷔 9개월만에 벨트를 감은 무어러는 사우스포의 강타자로서 리드미컬한 공수를 시전했다.
접근전에서 레프트훅의 회전력이 빠르며 라이트펀치의 위력도 대단해 장래성이 엿보이는 예비스타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아직은 공격이 단조로운데다가 사이드스텝이 없고 슬리핑에도 서툴러 디펜스에 허점이 많았다.
평균 두달에 한번씩 방어전을 치르는 놀라운 하이페이스로 9차방어에 성공한 뒤 더 큰 꿈을 위해 헤비급으로 월장했다.
<WBC> 챔피언 안드리스는 존슨과 더불어 이 체급에서 세 번째 정상에 오르면서 뒤늦게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37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력적인 파이팅으로 세르히오 메라니의 턱을 부수어 버렸고 호주로 날아가 적지에서 가이 워터스를 압도해 2차방어에 성공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러나 홈링으로 불러들인 <제프 하딩>과의 러버매치에서 중반 이후 급격한 체력 저하를 드러내며 판정으로 패배해 벨트를 돌려 주었다.
이후 크루저급으로 월장해 나이를 잊은 듯 40대 중반까지 현역으로 뛰었으나 더 이상 기회는 없었다.
라이벌 안드리스로부터 벗어난 하딩은 과거에 비해 침착한 모습으로 적지 프랑스에서 강호 크리스토프 티오조의 2관왕을 저지하는 수훈을 세웠다.
하지만 갑자기 복싱에 흥미를 잃어 공백이 길어지더니 잠정챔피언 <마이크 맥컬럼>의 노련한 플레이에 근소한 차로 무릎을 꿇어 3차방어에 실패했다.
불과 28살에 링을 떠난 하딩은 알콜 중독의 수렁에 빠져 오랫동안 헤어나오지 못하는 불행을 겪었다.
3체급을 석권한 맥컬럼은 감량고에서 해방돼 커리어 막판 뜨거운 불꽃을 피웠으나 프랑스 원정에 나선 2차방어전에서 홈링의 <파브리스 티오조>에게 판정패로 물러나 지는 해의 서글픔을 맛보았다.
이듬해 잠정타이틀을 놓고 한창 물이 오른 로이 존스 주니어와 격돌했지만 완패당했고 구원의 숙적 제임스 토니에게도 패배하자 링을 떠났다.
훌륭한 기량을 갖고 있으면서도 시대를 잘못 타고나 전성기 시절 번번이 빅매치를 놓쳤던 불운한 챔피언 중 한명이었다.
은퇴 후에는 라스베이거스에 정착해 트레이너로 후진 양성에 매진하는 모범적인 삶을 영위했다.
두 번째 정상 도전에서 크리스토프와 형제 챔피언의 꿈을 이룬 티오조는 다부진 체격에 비해 레프트잽의 활용이 좋고 과감한 원투스트레이트와 레프트훅 컴비네이션이 위력적이었으나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만큼 아무래도 수비에는 빈틈이 많았다.
첫 방어전에서 에릭 루카스를 대차의 판정으로 꺾은 뒤 타이틀을 반납하고 크루저급으로 올라가 내리 2체급을 석권해 일약 프랑스의 스타복서로 떠올랐다.
6번째 왕좌에 오른 <WBA> 챔피언 헌스는 오랜 스승이었던 엠마누엘 스튜워트가 은퇴를 권유할 정도로 전성기가 지났고 더 이상 뚜렷한 목표도 없었다.
7체급 석권을 기치로 잠시 크루저급 진출을 겨냥했지만 대전료 문제로 포기하고 복수를 다짐했던 IBF 슈퍼미들급 챔피언 <이란 바클리>와 격돌해 이번에도 한차례 다운을 내주며 퉁퉁부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헌스의 천적임을 입증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바클리는 1992년 링매거진 최고의 컴백에 선정되는 찬사 속에 검은 표범을 방불케하는 공격 본능으로 다시 한번 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슈퍼미들급으로 돌아가 라이벌 제임스 토니에게 초반부터 난타당하며 9R만에 경기를 포기해 두 개의 벨트를 모두 잃는 우를 범했다.
바클리가 내놓은 WBA 타이틀은 전 챔피언 <버질 힐>이 2관왕을 노리던 올림픽 메이트 프랭크 테이트를 판정으로 누르고 차지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2차왕조에서도 여전히 피스톤처럼 빠른 잽과 풋워크로 링을 장악한 힐은 매 경기 압도적인 펀치스탯을 과시하며 1993년 한해에만 다섯 차례의 방어에 성공해 팬들의 관심을 끌어 당겼다.
이듬해 부상으로 방어 간격이 다소 벌어졌지만 그 누구도 힐의 스피디한 공수를 뚫어내지 못할 만큼 굳건한 철옹성을 구축했다.
9차방어에 성공한 뒤 L.헤비급 통일에 나서 적지에서 IBF 챔피언 헨리 마스케를 사로잡고 양대기구를 석권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러나 1997년 WBO를 철권 통치했던 <다리우슈 미할체프스키>의 끈질긴 공격에 힘의 차이를 드러내며 오히려 흡수 통일을 당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후 3관왕 로이 존스 주니어의 라이트보디샷에 생애 첫 KO패를 경험했지만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크루저급으로 진출해 두차례나 정상에 오르는 집념을 보여주기도 했다.
재임 중 포인트 위주의 안전운행과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팬들의 외면을 자초했지만 두 차례에 걸쳐 통산 20차방어에 성공한 실적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뚜렷한 스타가 없던 시절에 맞지 않는 복싱은 생명이 길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준 매력적인 챔피언이었다.
동독 출신의 <IBF> 챔피언 마스케는 올림픽은 물론 월드컵과 세계선수권을 모두 석권하며 아마추어 최강으로 군림했다. 덕분에 프로 데뷔는 다소 늦었지만 장신의 사우스포로서 젠틀하고 깔끔한 복싱을 구사해 당시 통일을 이룬 독일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비록 펀치력은 보잘 것이 없었지만 동구권 복싱 특유의 안정된 공수에 상대의 가드를 파고드는 레프트어퍼컷과 스트레이트가 일품이었고 라이트훅으로 이어지는 컴비네이션도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선수비 후공격 스타일로 인해 경기 자체는 대체로 지루한 편이었고 박진감이 떨어지는 시합이 대부분이어서 자국 이외의 평가는 높지 않았다.
전형적인 안방챔피언으로서 3관왕의 바클리에게 압승을 거두며 5차방어에 성공한데 이어 올림픽 리벤지를 노리던 에저튼 마커스마저 돌려세워 롱런가도에 들어섰다.
동국의 라이벌 그라지아노 로치지아니에게 허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엄청난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두자릿 수 방어기록을 돌파해 1930년대 헤비급 세계챔피언 막스 슈멜링 이래 독일 최고의 복싱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1996년 고별전 상대로 선택한 WBA 챔피언 힐과의 통합타이틀전에서 2-1의 판정으로 석패하며 사라 브라이트만과 안드레아 보첼리의 ‘Time To Say Goodbye’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성대한 은퇴식을 가졌다.
이후 저명 인사로 다방면에서 활동했던 마스케는 10년만에 돌연 컴백해 유일한 패배를 안겨준 힐과 노인정 매치를 벌여 끝내 복수에 성공했다.
객관적인 전력이나 스타일과 달리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언론의 과대 포장으로 부풀려진 메이킹 스타 중 한명이었다. <WBO> 쪽은 이번에도 무명에 가까운 미국의 <리온저 바버>가 1991년 적지에서 톰 콜린스의 왼쪽눈자위를 잘라내고 불과 12전만에 정상에 올랐다.
근육질의 바버는 보기와 달리 레프트잽이 예리했고 힘이 실린 라이트스트레이트와 레프트어퍼컷은 일발필도의 위력을 발휘했다.
기본적으로 밸런스가 좋아 슬리핑에 능했지만 공수 분리의 경향이 뚜렷해 디펜스 자체가 견고한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든든한 내구력을 앞세워 상대를 압박해 부수어가는 패턴은 크롱크짐의 선배들과 다르지 않았다.
신생기구 챔피언이었던 만큼 타이틀 방어를 위해 적지를 마다않고 날아다녔으나 5차방어전에서 격돌한 지명도전자 <다리우슈 미할체프스키>의 지칠줄 모르는 공격을 받고 두손을 들었다.
1980년대 후반 이 체급은 레너드와 헌스의 다관왕 경쟁의 제물로 쓰이며 잠시 팬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전성기가 한참 지난 하위 체급 선수들에게 번번히 유린당할 만큼 챔피언들이 허약했다.
사실상 암흑기나 다름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WBA 챔피언 힐의 장기집권과 WBC 챔피언 안드리스-하딩 간의 릴레이 매치가 화제가 되었을 뿐이고 신설기구였던 IBF와 WBO쪽은 그들만의 챔피언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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