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은 몸 속에 살고 있는 영원 불멸의 생명 원칙이다.
그것은 정신과 혼동되어서는 안되는 종교적 개념이었다.
문화, 기억, 상상력은 정신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잠들어 있는 사람과 취객과 미치광이는 그들의 정신 상태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또한 살아있는 동안 몸 속에 갇혀 있는 신의 불꽃이다.
이러한 것이 적어도 플라톤 주의와 신플라톤 주의가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개념이었다.
그 개념은 육체에 의하여 영혼에 강요되는 물질적 속박, 공간과시간속에 처해있는 육체의 지금 여기의 상황, 육체의 나약함, 노화, 욕구, 병을 강조했다.
육체는 먹여 주어야 하고 입혀 주어야 하며 돌보아 주어야 한다.
게다가 그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며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는가!
다른 관점에 따르면
-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 연구와 더불어 만개한 관점
- 인간의 육체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연구 대상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연의 법칙을 잘 가르쳐 준다.
우리의 육체가 우리의 몸 안에서 그 법칙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를 연구해 보면 우리는 감탄과 경이를 금할 수가 없다.
고대의 조각은 육체의 외적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해부학과 생리학은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놀랍도록 잘 정비되어 있는 기계 장치인가를 알려 준다.
인간의 육체가 외부의 공격에 약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약한 이유는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질적 세계 안에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손해를 입는 위험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영혼은 구체적인 삶 속에 편입되기 위해서 그렇게 정확하게 작동하는 도구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틀림없이 기뻐했을 것이다.
그래서 육체가 죽는 날, 그처럼 동료와 헤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애통해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영혼은 기수(영혼)가 말(육체)을 돌보듯이 자기 몸을 아끼고 보살피는 것이다.
장-자크 루소는
" 육체가 약할수록 이래라 저래라 하며 강할수록 순종한다"
고 말했다.
이 '육체-말(馬)'의 개념은 육체를 도덕적으로 복권시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에테르'같은 영혼과 조잡하고 어쩔 수 없는 욕구로 가득 차 있는 쇠공처럼 무거운 이미지가 동물처럼 순진하고 착하고 건강한 육체를 걸터타고 있는, 타락하고 사악한 자기 피괴적인 영혼의 이미지로 바뀌게 된다.
육체가 알코올이나 마약 또는 니코틴 따위에 중독되는 것은 영혼이 이런 결함들을 육체에 짊어지웠기 때문이 아닐까?
순결하기만한 육체가 알코올이나 담배 또는 마약을 처음으로 접하면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바로 육체가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육체가 이러한 타락을 견뎌내고 좋아하도록 만들려면 영혼이 육체를 길들여야만 한다.
이 육체의 복권은 '육체의 부활' 이라는 기독교 교리를 통해서 정당화 된다.
이 교리에 의하면 시간의 종말에 죽은 자들 모두가 성바오로가 영광스러운 몸(고린도전서 15장) 이라고 부른 바 있는,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신학자들은 이 새로운 육체에게 네 가지 속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 육체는 빛나고 가벼우며 미묘하고 고통을 모르는 육체이다.
내가 인식하게 되는 점은 양대 극점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 있는 이성(머리)과 감성(몸)의 대비이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공론화' 되어진 규칙과 질서가 자리잡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오방난장(五方亂場)이라면 전쟁 밖에 달리 할 것이 없지 않을까?
오방난장이 되지 않고 세상이 온전히 돌아가려면 머리로 대변되는 이성으로 이끄는 규칙이 우세해야 하며 그 이성의 이면(裏面)에-부재의 현존이랄 수 있는 몸의 감성 또한, 분명하게 자리잡아야 함이- 곧 현명한 삶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다.
표면의 규칙속에 심층의 감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머리도 중요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우리에게 한계를 설정해서 깨닫게 해주는 몸이라는 존재를 우리는 늘 견인해야만 삶이 지속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렸을 때 부터 나는 차분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던 거 같다.
그래서 평상시에 감정에 이끌려 객관적인 판단을 못하는 사람을 보면 속으로 존중하는 마음이 덜했다.
성장해서는 심리학자이며 정신과 의사인 체게 융(C. G. Jung) 의 '심리학적 유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굳이 그것을 빌려서 판단해 보지 않더라도 나는 늘 원초적으로 직감하게 되기를 좌뇌 유형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앞에 나가 발표를 해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지나치게 심장이 쿵쿵거리는 무대공포증이 생겼다.
좌뇌형인 나의 약은 머리로는 분명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깨닫고 있는데 그 논리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바보가 되고 상황의 노예가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분별력이 많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이런 현상이 참 많이 자존감을 다치게 하고 상처가 깊었지만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원인이라면 너무 균형없이 한 쪽으로만 치우쳤던 것이다.
감정을 존중받지 못했고 스스로도 정서를 너무 무시하고 살았었다.
그래서 내 안의 감성이 화를 내며 화를 조절하지 못하고 나의 똑똑한 이성에게 마구 휘두름을 행사하고 있어서 머리로 이해한 논리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이었다.
*(여기서 논하는 것과 약간 내용의 주제가 다르지만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면에서는 같은 경우라고 볼 수
있는 예로서 'B 사감과 러브레터' 라는 소설에 나오는
B사감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사람' 에 나오는
간호사도 균형을 져 버리고 감성을 너무 무시한 나머지
이성적으로 똑똑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이성으로 통제가 되지 않아서 갈등을 겪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 온라인 상에서는 '좌뇌우세형'인지 '우뇌우세형'인지를 알아보는 테스트를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의 하나는 거기에 나와 있는 발레리너의 모형이 오른쪽으로 돈다고 인식하게 되는지?
또는 왼쪽으로 돈다고 인식하게 되는지?
에 대한 테스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힘이 있고 균형이 잡힌 사람은 마음대로 양쪽으로 다 돌게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른쪽으로 돈다고 인식하는 판(版)에 갇힌다든지
왼쪽으로 돈다고 인식하는 판(版)에 갇힌다든지
하는 경우가 없다.
이렇게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힘을 가지면서도 질서있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현존해야 하는 이성과 함께 그 이면에서 활동하는 감성이 이성을 주춧돌처럼 받치고 있는 형태가 현명한 삶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블랙홀이라는 영역에서는 어떤 한가지 만을 주장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닌 표면에 나타나 있는 한 가지의 이면(裏面)에서 여러 가지가 표면의 한 가지를 견인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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