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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삶 이야기

안목에 대하여

by Ajan Master_Choi 2018. 3. 5.

 

우리 모두가 갖고 싶어하는 것중에 하나가 안목이다.

다만 뭐에 대한 것인가만 조금씩 차이가 날 뿐.

하지만 누구나 사람에 대해서는 안목을 갖고 싶기도 하고, 아마 또 나름 모두가 자신이 이 사람에 대한 안목은 있다 자부할 것이다.

살아 오면서 제일 많이 본게 사람이고 젤 많이 겪은게 사람이니, 어찌 그런 안목에 대한 자신감이 없겠나.

촉이든 감이든 뭐라 부르건 다들 나름의 "사람보는 안목"에 대한 나름의 이론과 감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평균적으로 다 그 안목이란 것이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사회가 괜찮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비슷비슷하고 평가를 위한 가치관이란 것이 아마 대체로 공유될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가끔, 아니 꽤 자주 그 확신하는 안목에 배신당하게 된다.

왤까?

우리의 안목은 왜 우리를 배신할까?

무엇이 우리를 제대로 사람을 못보게 만들까?

 

몇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첫째는 자신의 편견이다.

좁다좁은 가치관이다.

가지고 있는 현미경이, 망원경이 너무 왜곡되어 있다.

자신이 갖게된 렌즈가, 인생의 경험과 여러 책을 통해 단련된 그 렌즈가 너무 좁은 범위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수준이다.

친절한 것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한 그 모양이 너무 피상적일 것이다.

요란떨며 잘해주는 사람말고 은근히 진정 자신을 돕는 사람은 볼 수 없는 수준의 렌즈이다.

어린 여학생의 시선정도에서 남자를 판단하는 것이다.

마음을 읽어 낼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이 다 보고있다고 확신한다.

그렇다.

그 확신이 원인이다.

자신의 렌즈에 대한 맹신.

만약 맹인이라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대상에 대해 물어볼 터인데, 스스로 보인다 생각하니 신중한 맹인보다 더 못보게 되는 것이다.

 

때론 아프다는 것이, 그 트라우마가 형편없는 안목을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 아픔을 치료해주는 듯한 사람에게 과도한 우호적인 마음이 생기고, 그것으로 모든걸 다 편향되게 우호적으로 판단하고, 그 사람과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에겐 이유없이 과한 분노를 생산해내는 행위를 한다.

그야말로 "자기 사람"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을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론 안목을 가진 척 해야 하는 압박감이 원인이다.

그저 알지도 못하는 일에 아는척을 해야하는 내적, 외적 원인의 결과물이다.

우리나라에서 뭐든 모르면 바보취급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옹색하게 자신의 소소한 안목을 과하게 부풀려 내놓다가 결국 필연적인 실패를 맞게된다.

사실 가장 민망한 파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안목의 문제는 그저 시각의, 감각의 판단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그것을 내놓는 주체자인 자신의 욕망의 문제이고, 그의 삶에 대한 철학의 문제이고, 어떻게든 이루어야 하는 어떤 인생의 목적과 관련된 문제이다.

내가 감당하겠다는 결심이 선다면 아무리 후진 물건, 사람이라도 그것에 장기적인 안목을 보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선택은 달라지는 것이다.

내 "용인(tolerance)의 그릇"이 얼마나 큰가에 따라 나의 안목의 수준과 방향, 장기성, 그 대상의 잠재력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당신의 안목은 출중한가의 질문은 결국 당신의 그릇은 얼마나 큰가를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당신이 용인할 수 있는 범위가 좁다면 당신의 안목은 그만큼 낮아 지는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빵 한조각이 있으면 그것을 친구에게 얼마나 내줄 수 있고 자신은 얼마만큼이면 만족하는가?

 

당신은 정말 뛰어난 안목을 가졌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