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는 영원히 새로 돋는 외로움의 肝을 독수리로 하여금 쪼아 먹히는 고통속에서도 새로운 의지의 힘을 만들어 냈고, 시지푸스는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그리움의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 놓고 올려 놓아야 하는 부조리와 맞서야 했다.
고통과 부조리는 인간의 운명이지만 고통과 부조리를 이겨내는 것도 인간의 운명이다.
기꺼이 고통과 부조리를 감당하려는 의지와 용기 없이 생명의 불씨는 지켜지지 않고,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
고통의 크기만큼 부조리의 깊이만큼 생명의 간이 싱싱해지고 정상을 향한 열정의 힘은 커지는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세상은 강인한 의지와 마르지 않는 열정이 고통과 부조리한 현실을 넘어설 때 올 수 있는 것이다.
미리 정해진 올바른 삶의 방식이란 없다.
개인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면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관계앞에선 모순이고 부조리의 연속이다.
주관과 주관이 맞부딪히는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삶"의 근본은 합리적, 객관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
끝없는 심연에서 스스로를 건져 올려야 하는 프로메테우스와 시지프스의 운명 아베 마리아에서 휘감아 오는 비극의 아리아는 니이체의 운명애(amor fati), 인간의 삶이란 실존적 불안과 부조리이고 존재와 인식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지독한 몸부림일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와 시지프스의 비감한 운명을 보면서도 모순적 삶에 대한 죄의식은 사라지지 않고, 위선과 가식이 오히려 더 깊어지니 마치 그것이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부조리와 고통의 원천이다.
고통, 고통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은 일생에서얼마나 많은 고통의 굴레에 휘말리는지 모른다.
다가왔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다시 다가오고,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
누가 이런 고통을 만들었을까?
이런 고통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또 생각하고, 또 사색하고, 또 찾고 찾아도 고통을 만들어낸 사람은 찾아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한 번 또 한 번씩 순환하면서 우리를 에워싼 채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사람은 항상 기쁨만큼이나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고통을 다른 사람이나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런 고통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반성하면서 찾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괴로움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괴로움은 누가 만드는가?
사회의 구조적 원인일수도 있지만 그것은 공동화되고 소외된 표상의 하나일 뿐 대다수의 괴로움과 고통은 모두 자신의 잘못된 인식과 그릇된 마음에서 생겨난다.
자신의 삶에서 원하지 않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거기에는 뭔가 배울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어나는 부조리와 모순과 갈등은 우주가 우리에게 뭔가를 배우라고 보내는 신호이다.
거기에는 깨달음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인간관계에서 늘 같은 방식으로 고통을 겪거나, 반복적인 부조리와 갈등이 일어날 때는 관계를 맺는데 필요한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틀렸으니 다시 입력하라는 신호가 계속 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합리적 세계라면 좋은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나쁜 원인에는 나쁜 결과만 올 것이다.
우리의 선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잘 살면 된다. 좋은 원인만 만들면 된다.
하지만 삶이란 일직선도 아니고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것도 아니고 우연과 필연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혼돈일 뿐이다.
원초적 상태에 버려진 카오스의 세계다.
그러기에 삶에는 이길수 없는 것으로 이겨 내야만 하는 운명 같은 것이 있다.
운명애, 아모르파티
산다는 것은
부대끼는 삶 사이에
등대하나 세우는 일이다.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그의 어깨에 하늘의 천정을 메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니체가 운명에 대해 말할 때마다 썼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運命愛)’라고도 하는 이 말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설명 한다.
“운명은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닥쳐오지만, 이에 묵묵히 따르는 것만으로는 창조성이 없다. 오히려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서 전력을 다해 사랑할 때 비로소 인간 본래의 창조성이 발휘된다. 아모르 파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자존이 있는 사람은 풀빵을 구워도 행복하고, 자존이 없는 사람은 백 억을 벌어도 자살할 수도 있다.
매우 극단적인 비교지만 사실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결말은 정반대일 수밖에 없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삶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운명, 나의 실존과 존재를 사랑하기로 했다.
내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한 만큼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고 내가 정당했음에도 부당하게 취급받을 때도 있다.
그렇더라도 자기 자신의 실존의 중심을 잡고 존재의 주체가 되어 나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전진하는 자기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긍정'으로 향하는 새로운 길, 끔찍하고도 의문스러운 측면들에 대한 자발적 탐구,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 세계의 절대적 회귀와 영원의 소망, 충만과 과잉에서 탄생한 최고의 긍정, 고통과 죄 자체에 대한 긍정, 의문스럽고 낯선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 이 모든것을 포괄하면서도 넘어서는 것이다.
사람들이 항상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인생은 변화될 수 없는 것이고 한번 선택한 행로는 끝까지 따라야만 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환상적이야.
네가 구제될 수 없다고 믿는 바로 그때, 가장 큰 절망의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재빠른 돌풍이 모든 것을 변화시켜 버리고, 그 순간부터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이항대립적 사고의 편견을 깨버리고, 새로운 의식과 인간적 삶의 독립적 존재의미를 가질 때만 운명애 즉 아모르 파티는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독립적 존재의미로서의 자기의지이며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만나는 것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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