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백성들이 죽을 힘을 다해 몽골과 맞서고 있을 때였다.
권력자 최이는 강화도로 왕실을 옮겨 놓고 개경에서보다 더 화려한 삶을 누렸고 그 권력은 한없이 튼튼했다.
최우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아들이라고는 서자 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쪽이 워낙 천한 신분이라 어지간히 문벌 따지던 고려 귀족 사회에서 행세하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정실 부인에게는 딸 하나였다.
최이는 김태서라는 이의 아들 김약선을 후계자로 점찍었고 그에게 딸을 시집보낸다.
그러다보니 아들 둘은 거치적거리는 존재.
최이는 아들 둘 머리를 깎아설랑 남도의 큰 절에 보냈는데 애초에 중 될 팔자들이 아니었다.
거기서도 무던히 사고를 치고 무리를 이끌고 백성들을 쥐어짜는 등 못된 짓은 골라 하고 다녀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데 사위 김약선 집안도 그다지 고귀한 집안이 못되었다.
그 아버지, 즉 최이의 사돈 김태서는 탐욕스럽게 재산을 긁어모으고 양민들의 땅을 갈취하여 그가 한 번 행차를 하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내 재산 돌려 주시오.”
“왜 우리 밥줄을 끊으십니까.”
울부짖을 정도였다.
참고로 말해 두면 이 사람이 전주 김씨의 중시조가 된다.
즉 오늘날 북한의 절대존엄의 조상이다.
그 아들이자 최이의 사위 김약선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꽤 헌헌장부였을 것이다.
그러니 최이가 덥석 사위로 삼고 후계자로까지 생각했겠지.
하지만 김약선도 제대로 된 인간은 아니었다.
그 딸, 즉 최우의 외손녀가 태자비가 됐으니 위세는 겹으로 올랐고 궁궐 출입할 때 예우도 사람들이 손가락질할만큼 대단하게 받았다.
이쯤 되면 알아서 점잖게 굴어도 한없는 떠받듬을 받겠는데 약선은 결국 그릇이 모자란 인간이었다.
가장 안된 버릇은 어여쁜 여자들을 골라서 질탕하고 음란한 잔치를 벌이는 일이었다.
공주보다 금지옥엽으로 자라났을 최이의 딸이 이 꼴을 어찌 두고 보았을까.
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가 방성대곡을 했다.
“아이고 제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고 말지 이 꼴을 어찌 보겠어요. 아버지 으어어어어어.”
최이도 꼭지가 돌았다.
“사위놈과 놀아난 처자들. 그걸 소개시켜 준 놈들 죄다 섬으로 귀양 보내 버리고, 그 놀았던 곳들은 다 허물어 버려라.”
김약선은 찍소리 못했다.
그런데 김약선에게 반격의 찬스가 왔다.
이 콧대 드높은 최이의 따님이 글쎄 노비 녀석과 바람을 피웠던 것이다.
거기다 그 현장을 딱 들켜 버리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항상 위기는 기회고, 기회는 위기와 연결된다.
드센 마누라 멱살을 완벽하게 거머쥘 기회였다 싶었겠으나 (최이의 딸을 내치지야 못했을 테니) 최이의 딸은 생판 황망한 대응으로 사태를 뒤집어 버린다.
아버지에게 달려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이 거짓말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남편이 바람을 피웠네 안피웠네 정도의 고자질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저격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아버지 자리를 일찍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던가, 바람 피웠던 여자 가문과 함께 아버지를 노린다든가 최우의 경계심을 한껏 자극할 수 있는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 합리적 의심의 근거는 최이가 보여 준 행동이다.
최이는 즉시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사위, 서자일망정 자신의 아들들까지 지방으로 돌리면서까지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김약선을 그냥 죽여 버린다.
치정에 얽힌 거짓말은 정치적 음모로 둔갑하여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았을 것이다.
최이의 딸은 김약선에게 씌운 누명을 고수하며 자신만의 ‘진실’을 늘어놓았겠지만 사람들이 입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 아버지 최이는 무신 정권 집권자 가운데 가장 정치력이 뛰어났다 할 최이였다.
최이는 곧 진상을 알아챈다.
“얘가 거짓말을 했구나.”
자신의 후계 구도를 스스로 망쳐 버린 셈이 됐던 최이는 분노한다.
딸의 애인이었던 노비를 쳐 죽였고 김약선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또 죽을 때까지 딸을 보지 않았다.
노비를 애인삼아 남편처럼 즐겨 보려던 여인의 거짓말 하나가 일파만파를 불러온 셈이었지만 이 거짓말의 후폭풍은 남아 있었다.
최이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중으로 만들었던 아들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가 최항이다.
그러나 최이의 처, 즉 딸의 생모였던 대씨 부인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억울하게 죽은 사위의 아들이면서 자신의 외손자 김미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권력은 비정했다.
최항은 집권 후 자신의 어머니라 할 대씨를 독살해 버린다.
그 뿐이 아니었다.
김약선의 동생은 제1차 몽골 침입 당시 귀주성에서 피어린 격전 끝에 몽골군을 격퇴했던 천하의 용장 김경손이었다.
아버지도 형도 졸렬한 인간이었으나 이 김경손 만큼은 군계일학에 낭중지추였다.
오죽하면 반란군들조차
“김경손을 모셔 사령관으로 삼겠노라.”
고 나댈 정도였을까.
그 억센 몽골군들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두려워했을 김경손은 이 권력 다툼에 휘말려 그만 바다에 던져져 백령도 앞바다의 외로운 혼이 되고 말았다.
형 김약선이 살아 있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약선의 아들 김미도 유배된 뒤 이후 기록이 끊기니 제 명에 죽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두고 보면 한 여인의 치정에서 비롯된 거짓말이 어느 정도의 풍파를 몰고 왔고 얼마나 험악한 사태를 불러왔는지가 여실하게 들여다보인다.
남편을 죽였고 그 집안을 말아먹었고 자신의 어머니도 독살당하게 했고 아들도 생사를 불명으로 만들었다.
역사는 거창하고 진지한 것들에 의해서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남사스럽고 우세스럽고 차마 말하기도 민망한 상황들, 동네 아줌마나 아저씨 바람 피운 허리 아래 이야기들도 상황에 따라 관계된 인물에 따라, 그리고 그를 받아들이는 당시의 사회상과 권력 구조에 따라 환골탈태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분수령처럼 솟아날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불륜을 소리소리지르면서 내가 저 사람과 애인으로 지냈고 아주 황홀하기도 했으며 가끔은 생각도 나는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니 명예훼손이라고 우기고 어디에 점이 있네 없네 하면서 한 정치인의 발목을 물어뜯고 있는 한 배우를 보면서, 최이의 딸 생각이 났다.
나는 그 배우가 애인 삼았다는 정치인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다.
그러나 허리 아래 이야기를 빌미로, 그것도 자신과의 불륜을 인정하라며 한 사람을 정치적으로 저격하는 것은 최이의 딸이 했던 정체불명의 거짓말만큼이나 사악한 일이고, 한 남자의 신체 부위에 점이 있고 없고가 화제가 돼 ‘검증’을 받는 사태는 우리 사회 전체를 '덩달이'로 만들어 버리는 악재라고 생각한다.
몸 어디에 점이 있다는 말에 “대박이야!!” 를 부르짖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그렇고, 문제의 정치인이 미워도 너무 미워서 이 배우의 발언들을 마이크로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무슨 삼국지의 ‘푸른 하늘은 죽었고 노란하늘이 서리라.’( 蒼天已死 黃天當立 )는 시절도 아니고 어떻게 21세기 한국을 이렇게 ‘옐로우’로 뒤덮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무슨 이익을 얻고 어떤 교훈을 삼겠다는 것인지.
최이의 딸이 한창 설치고 다닐 즈음을 개탄하는 한시가 있어 소개해 둔다.
背偶作假蛤嚼蟹(배우작가합작해)
짝을 배신하고 거짓 지어내니, 저 대합 조개, 게를 씹어 버렸구나
別訴鸞莫避愚妹(별소란막피우매)
따로이 용왕에게 호소하되 저 어리석은 여인을 피할 길이 없다 하였으나
拒其愛串踵限命(거기애관종한명)
(용왕의 조개에 대한) 사랑에 거역함은 양 발꿈치 뚫리고 목숨 줄이는 일.
慷龍惜信暝難來(강용석신명난대)
분노한 용이 슬퍼하노라. 믿음이 저물고 어려움 닥쳤구나
대합조개는 최이의 딸, 게는 김약선, 용왕, 즉 천자의 수레(鸞)는 최이, 분노한 용은 김약선을 의미한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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