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스페인은 파시스트 성격을 지닌 절대 권력자를 지도자로 맞게 되는데 이때만 해도 프랑코가 36년간이나 스페인을 철권통치하리고는 상상못했다.
반란과 내란이 끊이지 않았고 권력자도 무수히 바뀌었지만 왕이 아닌 권력자가 이렇게 오래 절대 권력을 휘두른 것은 스페인 역사에 없었던 일이었다.
최고 권력자가 된 프랑코는 권력을 굳히기 위해 정적과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사냥에 나선다.
수많은 반대파들이 고문,사형,암살되고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강제 노동을 하게 되거나 아니면 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정당은 해산됐고 언론은 검열을 받아야만 했다.
스페인으로 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하던 바스크,카탈루니아 지방은 이를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여 이들의 언어인 바스크어와 카탈루니아어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처럼 파시스트적이고 강압적이며 잔혹한 프랑코 정권이 무려 36년간이나 지속된 것은 내란,전쟁,폭동,반란 등의 계속되는 폭력에 지친 국민들이 어떠한 권력이든 안정을 우선으로 여겨 강력한 프랑코 체제를 체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또 정적과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극도로 심해 반대세력은 숨도 쉬지 못하고 숨어있어야만 했다.
내란 전까지 스페인은 정치과잉으로 모두가 정치 싸움에 편 갈라서서 서로 상처를 주는 비극을 연출했기에 국민들은 정치에 염증을 느꼈고 정치로부터 관심을 거두었으며 國外의 프랑코 반대파는 서로 반목해서 단합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이 프랑코는 지지세력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바탕으로 36년간 절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같은 해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세계 대전 동안 스페인은 명목상 중립을 지키지만 처음엔 내란 때 도움을 받은 독일과 이탈리아에 협조를 해주다가 이들에게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엄정한 중립으로 다시 돌아선다.
독일 무기생산업체에게 수출하기로 약속한 광물을 실은 배는 어떻게 된 건지 영국의 항구에 나타났다.
양다리를 걸친 것이다.
1945년 연합국의 승리로 세계대전이 끝나자 스페인은 국제적인 왕따가 돼버린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로 상징되는 파시스트 세력은 무너지고 자본주의,공산주의 계열로 양분된 세계 정세 속에서 스페인은 1946년 UN가입도 거부당한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파시스트 정권이라고 대사들이 쫓겨나고 대사관은 문을 닫아야만 했으며 공산권에서는 반공정권이라 적대시해서 같은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내전으로 국토는 파괴되고 생산은 전쟁 전의 5분의 1로 줄어든데다 국고는 비었으며 실업자는 거리에 넘쳐흘러 스페인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진다.
자본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정면충돌한 이 전쟁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자본주의 국가들은 친자본주의 국가이며 철저한 반공국가인 스페인에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고 스페인도 친서방정책을 펼친 결과 이제서야 스페인은 국제고아신세에서 벗어나 서방세력의 하나로 참여할 수 있었다.
스페인은 1955년 UN에 가입한 뒤 親서방 정책을 채택하면서 1957년부터 경제도 개방체제로 전환됐다.
스페인은 관광산업에 눈을 돌렸고 1970년대에 벌써 1년 방문객이 3.000만 명이 넘는 관광대국으로 발전한다.
관광산업에 붐이 일면서 스페인 사회도 크게 변화하는데 전통적인 농업국가인 스페인에서 인구가 대도시와 휴양지로 이동하여 농민은 더욱 가난해지고 해변의 어민은 내륙으로 밀려나고 그들의 터전엔 고급 호텔,리조트가 들어선다.
이와 함께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해서 독재권력을 굳히기 위해 정치에 관심 갖는 언론은 철저히 검열하고 영화,라디오,TV 등 인기프로를 많이 제작해 국민의 관심을 돌렸는데 특히 축구를 크게 활성화해서 지역대결을 대리 충족시켰다.
스페인같이 지방색이 강하고 지역마다 심한 경쟁의식을 갖는 나라에서 축구는 대리 전쟁과 같았다.
엄격한 통제와 감시 속에 스페인에서 가두시위,파업이 사라졌고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지만 경제발전은 반드시 민주화 욕구를 건드리게 마련이고 1956년 마드리드에서 첫 학생시위가 일어난 이래 사회불만도 커지더니 1970년대 들어오자 파업,시위 등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는 세상을 떠난다.
프랑코는 생전에 그의 후계자를 직접 지명했는데 스페인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1세가 바로 그 사람이다.
프랑코가 세상을 떠난 이틀 뒤인 11월 22일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한다.
이는 1939년 그의 祖父 알폰소 13세의 퇴위 이후 44년만에 다시 왕을 맞이하게 된 것이며 부르봉 왕조의 재건이기도 했다.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세계의 이목이 '프랑코 이후의 스페인'에 집중된 가운데 스페인의 민주화는 빠르게 진행되는데 1978년 민주화된 헌법을 새로 제정하고 바스크,갈라시아,카탈루니아 등 지금까지 금지됐던 '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했고 프랑코 시대 내내 금지되고 탄압받던 노동조합,정당 활동이 헌법으로 보장되었으며 정당정치의 틀을 확립해서 쿠데타를 막는 장치가 마련됐다.
스페인의 민주화가 빠르게 진행되자 세계가 스페인을 보는 눈도 크게 달라지고 이제 스페인은 당당하게 서유럽 선진국 대열로 올라서게 된다.
1981년 2월 스페인 의회에서 신임 수상 인준문제를 논의하고 있던 중 쿠데타가 일어나 현재 진행 중인 민주화를 즉각 중단하고 프랑코같은 절대 권력자의 선출을 요구한다.
軍은 불안한 정치판을 뒤엎고 군정을 위해 봉기한 자신들을 지지해줄 것을 국왕에게 요구했으나 카를로스 1세는 다음 날 새벽 군통수권자인 총사령관 복장으로 TV생중계를 통해 단호한 어조로 민주절차를 힘에 의해 저지하려는 어떠한 세력과의 싸움에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을 선언한다.
국왕의 단호하고 확고한 민주 수호 의사에 기가 꺾인 반란군은 스스로 물러났고 이 사건으로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완전히 뿌리내렸으며 더 이상의 쿠데타,반란,폭동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스페인은 이 날을 '23-F' 민주주의의 중요한 이정표의 날로 기억하고 있다.
스페인은 1982년에서야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고 1986년에는 유럽 경제 공동체(EEC)회원이 되어 이웃 유럽 나라들과 교류를 크게 확대했는데 이 기구는 1993년 EU로 발전했다.
프랑코 시대에 파쇼 독재정권으로 배척당하고 따돌림당하던 스페인은 유럽에서는 독일,프랑스,이탈리아에 이은 유럽 4번째의 경제대국이 됐다.
1492년 카스티야-아라곤 왕국에 의해 통일 스페인을 건설했지만 그 후에도 사실상 연합왕국이었을 뿐 각 왕국은 자치적이고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해왔다.
특히 바스크지방과 바르셀로나가 속해있는 카탈루니아 지방은 언제나 자치 독립 문제로 카스티야와 싸워왔다.
이러한 지역적 특징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스페인은 하나의 나라라기 보다는 여러 나라의 연합으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레알 마드리드,FC바르셀로나 같은 세계적인 축구 클럽,투우,플라멩고
스페인이 지금의 대국으로서 자리잡은 것은 불과 2~30 여년 전 부터입니다.
서울 올림픽 다음 번으로 치뤄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프랑코 독재 이후 달라진 스페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올림픽 이후 지역 감정이 상당히 완화되었으며 개최도시였던 바르셀로나는 인지도가 높은 관광지가 아니었으나 올림픽 이후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발돋움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만 다뤘지만 스페인은 오랜 역사동안 부침을 반복했죠.
유럽 최고의 富國이었던 적도 있었고 그 이전에는 오랜 기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야 했으며 근대에 들어와서는 유럽에서도 2류국가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의 스페인의 상황들을 우리 나라와 비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전 이전 상황도 그렇고 내전의 발생도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첨부한 영상은 프레디 머큐리와 스페인의 소프라노 가수 몽세르 카바예가 부르는 'Barcelona'입니다.
정장 차림의 말쑥한 모습의
프레디 머큐리의 모습이 오히려 낯설죠?
프레디 머큐리는 몽세르 카바예의 팬이었죠.
프레디 자체가 세계적인 스타였지만 몽세르 카바예를 만날 수 있게 되자 얘들처럼 좋아했다고 합니다.
몽세르 카바예는 자신의 고향인 바르셀로나에 대한 노래를 구상해서 프레디에게 작곡을 요청했고 프레디는 이 명곡을 작곡합니다.
이때가 1987년.
아직 서울올림픽도 개최되기 전입니다.
프레디 머큐리와 몽세르 카바예가 듀엣으로 부른 이 노래는 큰 인기를 끌어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공식주제가가 거의 확정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가 1991년 AIDS로 사망했고 조직위원회에서는 공식주제가로 지정은 안했지만 개회식에서 이 노래를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조직위원회에서는 계속 우기고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반대하는 상황에서 결국 급히 공식주제가를 만들었고 ,스페인 출신 테너 호세 카레라스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르는 Amigos para siempre(영원한 친구)가 공식주제가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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