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저널 '그 날' 이라는 역사프로에서 중, 고등학교 역사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역사 발전에 가장 안타까운 인물' 이라는 설문조사에서 소현세자가 압도적 1등을 찾이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
"소현세자가 청으로 인질로 잡혀 갔지만 청에서 접한 서구 문물을 자유롭고 개방된 생각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소현제자가 그런 열린 생각으로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은 일본보다 이 백년 앞서 서구문물을 접하고 서구에 개항을 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가 겪은 조선후기나 구한말 비극적인 참상을 없었을 것 입니다."
라고 하는데
저도 처음에는 윗 말에 공감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 제가 역사를 조금 더 깊이 알아가면 갈수록 의문이 듭니다.
소현세자가 세자로서 죽지 않고 왕이 되었더라면
조선은 어떻게 변해 갔을까?
역사 선생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조선이 일본보다 근 200년 가까이 일찍 개방되어 새로운 나라가 될 수 있었을까?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을 경우 조선에게는 훨씬 더 나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 현실을 생각하면 긍정적 생각보다는 부정적 생각으로 고개가 저어집니다.
당시 친명배금을 쿠테타 명분 중 하나로 걸고 조선을 장악한 서인출신 꼴통 조선사대부들이 소현세자가 청에서 접한 서구문물을 받아 들이자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소현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청에서 귀국하자마자 세 달 만에 의문사를 당한 것도 인조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 사대부들이 그런 세자 행태를 증오하여 독살했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치나 사회 개혁은 뛰어난 리더 한 인물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그 사회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기본적 시스템입니다.
당시 조선 사회구조로서는 소현세자의 앞서 가는 생각을 조선사대부들이 도저히 받아 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소현세자는 청에서 오랜 인질생활을 해서 조선에 자기를 지지하거나 동조하는 세력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리 왕조 사회라고 하지만 왕 혼자 너무 앞서 갔다가는 또 다른 반정 명분만 줄 수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된 이유로 일본보다 개항을 늦게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단순히 개방 시기의 차이만으로 분석하려는 것은 무리입니다.
조선과 일본 내부적으로 수 백 년간 누적된 여러 요인들 영향이 컸습니다.
우리는 일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호되게 당하고 나서도 그런 경향은 지속 되었지요.
현재에 와서도 일본은 세계 3대 경제 강대국으로 성장해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 보면 특히 유럽에서 일본인들에 대한 경외감과 호감도는 상상 이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 일본인들을 우습게 여기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한 역사적 여러 피해 때문에 의식적이라도 일본을 무시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을 넘어 克日을 하기 위해서는 知日을 해야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에 대해 정확하고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일본은 조선보다 남서방향으로 돌출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서구 세력과의 접촉이 조선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따라서 서구 문물에 대한 이해도도 당대 조선과 비교하면 월등하게 높은 상태였습니다.
일본이 임진왜란 이전에 포르투갈로 부터 조총을 받아들여 임진왜란 때 잘 활용했던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일본은 네덜란드와는 일본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쓰는 동안에도 꾸준히 통상을 하고 일본 국내에도 네덜란드상관(나가사키에인공섬 데지마 설치해서 사실상 무역특구 조성)을 두어 왔습니다.
일본과 네덜란드 교역은 단순히 몇몇 사치품을 들여오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 영향으로 정밀한 인체골격도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가라쿠리 로봇을 만들었으며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도자기나 우키요에같은 일본 문화예술이 유럽으로 건너가 자포네스크를 유행시키는 수준이었습니다.
에도막부 당시만 해도 이미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상당한 국력차가 존재했습니다.
일본은 조선보다 인구가 많았고 영토도 넓었습니다.
조선보다 덥고 습한 기후 탓에 넓은 지역에서 2모작이 가능한 농업 조건도 일본이 더 좋은 편이었습니다.
또 일본은 특이하게도 연교차가 크면서도 강수량은 고른 기후라서 농사 짓기가 대체로 수월한 편입니다.
반면 조선은 겨울이 일본보다 길고 건조해서 농사짓기에 매우 불리했습니다.
또한 일본은 화산지형이라는 지질학적 특성 상 지진 등 재해도 많았지만 은과 구리의 매장량이 많은 것도 일본의 큰 이점이었습니다.
에도막부 시절 본격적으로 개발된 '이와미 은광'의 은은 17세기 전세계 은 유통량의 30%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일본은 이 은과 구리를 이용해 네덜란드, 중국, 조선과 무역을 할 기초 자본을 축적하여 활발한 대외무역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미 은광의 은이 고갈 조짐을 보여 일본에서 은 수출을 감소시킨 것이 19세기 초 조선 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삼정의 문란을 촉발한 한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상공업의 측면에서도, 전국시대 이래 꾸준히 상공업이 발달해 이 시기에 많은 기업들이 출몰하였고 상인들이 득세하여 사농공상의 계급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생산계급 90%이상이 농민들이었고 상공업은 천시했습니다.
또한 일본은 지방에 할거하는 영주들이 전략적으로 성하도시(조카마치)를 거점화하면서 도시화율도 더 높았으며,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대외 무역도 활발해 이미 에도중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시장 경제를 이룩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공학, 수학, 천문학, 음악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다 중기에 접어들며 그 학문적 유연성을 잃고 유교, 그 중에서도 송의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에 치중하였습니다.
한족 왕조인 명이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세워지자 조선의 유학자들은 소중화 사상을 내세우며 단순한 예법부터 세계를 인식하는 범위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의사결정 방식을 철저히 성리학적, 중화적 질서에 근거하여 구축해나갔고, 이에 역행하는 시도를 보이는 자들은 사문난적으로 몰아갔습니다.
반면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 등의 일련의 경쟁 과정을 통해 형이상학적이고 일관된 학문을 추구하기보다는 실리적이고 포괄적인 학문 추구 경향을 보였습니다.
전국시대의 축성술 부터 난학에 이르기까지, 전국시대~에도막부 시기의 일본은 자체적인 문물의 발전 뿐 아니라 직접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 교류하며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막부의 사실상 수도였던 에도는 막부의 정책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인구가 100만에 육박하는 당시 세계에서 매우 큰 도시 중 하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발전한 자기 생산 및 은광 개발 등 상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경제적으로 획기적으로 번영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증가도 꾸준했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정치시스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중앙집권의 조선과 달리 수십개의 번국으로 구성된 봉건제 국가였습니다.
왕이 군림하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관리를 파견해 전국을 직접 통치하던 조선과 달리 일본은 근대화 직전까지 쇼군이 이끄는 중앙정부(막부)가 전국의 지방 유력자인 영주(다이묘)들에게 각지의 통치를 맡기는 간접 통치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전제주의 국가에서 중앙집권체제는 장점이 많았지만 단점도 있었습니다.
18세기 일본 에도막부(중앙정부) 권한은 조선만큼 강하지 못했습니다.
일본 지방영주들이 마치 중앙정부의 정책과 별개로 어느정도까지는 무역, 외교, 군사, 정치 등 다양한 면에서 독자성을 꾸려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조선중앙정부와 마찬가지로, 일본중앙정부 역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쇄국을 표방하며 외국과의 교류를 엄금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지방세력은 시대 흐름을 감지하고 독자적으로 서양문물과 여러 개혁가들 주장을 받아들여 그들이 가진 모든 분야의 시스템을 근대화 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근대적인 신정부를 구성하여 일본을 근대화 시키겠다는 목표를 정하며 에도 막부(중앙정부)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신정부를 지지하는 세력과 에도 막부를 지지하는 세력이 수 많은 내전을 벌인 결과 결국 신정부를 지지하는 지방세력이 신식 군대의 힘으로 승리하여 메이지 유신을 이뤄냈습니다.
조선은 그에 비하면 서양과의 직접적 교류는 아예 전무했으며 조정은 외척에 의해 시달려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사회적으론 빈곤과 삼정의 문란에 의한 반란, 신분계층의 동요가 지속되어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일본은 조선에 비해 이미 서양과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외교 경험을 쌓아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급동하는 제국주의 시대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이
"조선도 일찍 개방 했으면..."
하고 아쉬워 하지만
그냥 문 연다고 해서 근대화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문을 여는 순간 되돌아갈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대격변을 견뎌낼 수 있는 국내적으로 쌓여진 내공이 있어야 합니다.
일본도 위에 말한 것처럼 상당한 내공을 갖추었지만 개국을 하고 엄청난 시련을 많이 겪습니다.
무너질뻔 했던 그 시련들을 잘 넘기고 서구열강과 같은 대열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과연 문을 일찍 열었다고 해서 근대화에 성공했을지는 의문스럽습니다.
또한 조선은 붓의 문화, 일본은 칼의 문화로 표현됩니다.
19세기 세계는 약육강식제국주의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는 붓 보다 칼이 더 우선합니다.
조선과 일본의 차이가 19세기 조선과 일본 운명을 갈랐다고 평가합니다.
조선인과 일본인 특유의 민족성 차이도 있는데 이 차이는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먼저 칼의 문화는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서 나왔습니다.
일본 사무라이 문화는 일본에서 아주 오랫동안 지속 되어 왔고 일본인들 특성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일본 사무라이들에게는 즉결처단권이 있었습니다.
사무라이들은 일반백성들이 맘에 안들면 그 자리에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가능한 밖에를 잘 나가지 않았고 밖에를 나가도 하루종일 긴장하면서 최대한 조심하고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무라이들 때문에 일본인들이 남에게 절대 폐를 끼쳐서는 안되는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고 조심하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격동의 시기에 일본에는 조선에 비해 농민반란 등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조심하고 겸손해하는 일본인들 모습은 외국인들 눈에는 당연히 일본인들 태도가 맘에 들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외국에 나가 보면 특히 유럽에서 일본인들에 대한 경외감과 호감도는 상상이상입니다.
사실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들어가서 사고하면 국가 이기주의적 경향이 강하지만 개인적으로 일본인들을 만나보면 남을 배려하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아주 강합니다.
우리는 일본인 이런 행세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해 이를 '혼네' 라 하며 그들이 하는 말은 진심인지 겉치레말인지 구별해야 한다며 비하하지만 사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 민족은
대인관계에서 사실 너무 무례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민족을 비하하고 일본민족을 치켜세우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수 천년간 역사 속에서 부대껴 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임진왜란 직전부터 이야기 일 뿐입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모든 면에서 앞 서 있었습니다.
조선 일본 긴 역사 속에서 서로 부침이 있었고 민족성도 장단점은 있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 성격이 여러 이유로 형성 되었겠지만 그 중 온돌방과 다다미방 차이 때문에 두 나라 사람들의 성격이 어렸을 때 부터 변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일본의 다다미는 아주 어렵게 만들어지고 귀하고 비쌌습니다.
그러나 모든 집안에 깔려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가보처럼 아꼈습니다.
그래서 일본 엄마들은 다다미방을 더렵혀지지 않게 아이들을 아주 엄하게 키웠습니다.
특히 옛날에는 기저기도 없어 아이들이 다다미에 대, 소변이라도 보게되면 아이들을 죽지 않을 만큼 팼습니다.
다다미에 대,소변이 스며 들게 되면 쓰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대소변도 맘대로 못보고 항상 주눅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온돌방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방에 대, 소변을 봐도 개를 불러 먹게 하거나 걸레로 한번 쓱 닦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방에서 맘대로 놀면서 자유롭게 커서 조금은 자유분방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일본인과 한국인을 보면
일본인들은 어딘지 모르게 항상 주눅이 들어 있는 거 처럼 보이고 한국인들은 필요이상으로 자신감에 차 있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필요이상으로 자신감에 차 있는 한국인 부분에 우리는 소리내어 웃기는 했지만 외국에 나가 보면 사실입니다.
비싼 양주를 통채로 내놓고 먹는 인종은 한국남자들이 유일 하다고 하니까요^^
현재에 와서도 일본에는 우리 처럼 회식이나 집단 놀이 문화도 거의 없습니다.
가라오케가 일본에서 나왔지만 그 기기가 빛을 본 것은 우리나라 노래방입니다.
일본은 우리나라 처럼 노래방은 있지만 그리 많지도 않고 우리와는 많이 다릅니다.
노래방 비용도 우리 처럼 방 별로 받는 것이 아니고 사람 수로 받습니다.
그러니 큰 방도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일본인들은 단체로 노래방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그런답니다.
일본인들은 직장을 끝마치면 거의 집에 틀어 박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휴일 날 산에 가거나 계곡을 찾지도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직장을 끝 마치거나 휴일 날 집에서 정원관리를 하거나 다른 취미를 가지고 어떤 작품에 빠져 감상하는 것을 즐깁니다.
한국, 중국, 일본인들이 프랑스 루블 박물관을 가면 세나라 특성이 확연하게 납니다.
한국인은 들어 가자마자 휙 한번 둘러 보고 가장 빨리 밖으로 나와 있고 중국인은 떼로 몰려 다니면서 작품을 보면서 시끄럽게 떠들어만 대고 일본인은 집에서 홀로 감상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어 그런지 모르지만 혼자 조용히 서서 작품을 오랫동안 지긋이 바라보며 감상합니다.
일본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 사회는 개미들 사회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해내는 수많은 개미들 처럼 일본인 대다수는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일본이라는 큰 기계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모든 부품이 제 자리를 제대로 찾아가 돌아 가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국내관광을 할 때도 가이드가 들고 있는 깃발 뒤만 쫒아 다닙니다.
앞서 말한 문화의 차이 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어떤 점이 더 좋고 나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서로에게 배울 것은 분명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게 임진왜란처럼 침략당하고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점은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지만 그것은 국가적인 문제이고 지금 일반 일본인들까지 우리가 무작정 증오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점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일 미래를 위해서라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친일파라는 말이 지금처럼 쓰여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일본인, 한국인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일본인 중에는 한국인보다 더한 한국인도 많고 한국인 중에서도 일본인 특성을 가진 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일본이 우리에게 한 짓은 잊지는 말자입니다.
일본을 감정적으로 너무 지나치게 증오의 눈으로만 보지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에 대해서 정확하고 제대로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이고 차이 만큼이나 닯은 점도 많고 피도 가장 많이 섞여 있는 민족입니다.
일본이 변하지 않는 것은 안타갑지만
그러한 것은 일본정권이지 일본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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