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동안 논쟁거리
거북선이 철갑선(鐵甲船)인지 여부는 1880년대 이래 130여 년 동안 가장 인기 있는 토론 주제 중의 하나였다.
초창기 거북선 연구자들 중에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다고 주장한 사람 중에 다수는 특이하게도 한국인들이 아니라 서양인들이었다.
1.거북선은 철갑선이라고 주장한 서양인
미국인 선교사 겸 동양학자였던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1843~1928)는 1882년에 펴낸 [은둔의 나라, 한국 Corea, The Hermit Nation]에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조선군의 군함을 설명하면서 "금속으로 표면을 감쌌다(covered with metal)"라고 설명했다.
미국인 선교사였던 호머 헐버트(1863~1949)는 미국의 [Harper’s New Monthly Magazine]의 1899년 6월호에 거북선을 거북배(tortoise-boat)라고 표현하면서 철판(Iron Plate)으로 감싼 구조라고 명시했다. 헐버트는 거북선을 ‘철갑선(Ironclad)’의 일종이라고 간주하면서, “한국은 철갑선과 금속 활판 기술을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발명한 국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1929년에는 세계 유수의 백과사전인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4판에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 군함(first Ironclad war vessel)"이라는 설명이 실리면서 철갑선 주장은 한 때 자명한 사실처럼 간주되기도 했다.
1979년 작성된 해군사관학교 1대1 복원 거북선 설계도면 중 일부.
나무판 위에 얇은 금속판을 덮는 구조로 설계도를 작성했다.
2.거북선은 단순한 장갑선?
하지만 이 같은 와중에도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다.
도쿠토미 이이치로(1863~1957)를 비롯한 20세기 초반의 일본 연구자들은 거북선의 개판에 대해 단순히 판(板)이라고 설명할 뿐, 철판이라고 명시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단재 신채호 선생이 1931년 [조선상고사]를 통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장갑선이라고 볼 수는 있어도 철갑선이라도 볼 근거는 없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1890~1951)가 1933년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분과지]에 실린 논문을 통해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명확한 문헌적 근거는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는 주장은 좀 더 체계화되기 시작한다.
광복 이후 서울대 조선공학과의 김재근 교수가 1957년 철갑선 여부에 대해 단정하기는 힘드나 거북선을 철갑선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고 주장하면서 거북선 철갑선을 부정하는 견해가 힘을 얻게 된다.
이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최영희 선생이 1958년 [귀선고]라는 논문을 통해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문헌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면서 거북선 철갑선 설은 힘을 잃게 된다.
한산도 충렬사에 소장된 통제영 거북선 채색화.
철갑이 뚜렷하게 식별되지 않는다.
한산도 충렬사에 소장된 전라좌수영 거북선 채색화.
3.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철갑선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 자체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이어지고 있는 새로운 철갑선 주장은 거북선의 철갑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
최석남 전 육군통신감이나 고 박혜일 서울대 교수는 거북선의 철갑이 조선 시대 성문처럼 나무에 얇은 쇠판을 붙이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생각했다.
전통 무기 연구가인 신재호도 1998년 일본 전통 선박도 방패에 철판을 덧씌우는 사례가 많다는 점을 참고해, 거북선 개판에도 철판을 얇게 만들어 나무판에 붙이는 방식을 적용할 수 있고, 이 경우 전체적인 무게에는 변동이 없으므로 복원력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란 주장을 내놓았다.
1999년에는 교토대 물리학과 교수인 사쿠라이 다케오 교수가 거북선 복원 설계안을 기초로 복원력을 실험한 결과 2~8mm급 철판을 개판에 덧붙여도 거북선의 복원력에 별문제가 없다는 계산 결과를 발표해 철갑선 주장의 생명력을 이어갔다.
4.철갑선, ‘Ironclad’의 의미
사실 철갑선 논쟁의 이면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갑선이란 단어가 서양의 ‘Ironclad'를 의미하는 것이란 점을 먼저 알아야 한다.
'Ironclad'는 1800년대 중엽 무렵 유럽에서 출현한 해군 함정의 한 양식으로 선체를 보호하기 위해 철판을 덧댄 것이 특징이다.
흔히 철갑선이라고 하면 미국 남북전쟁 당시 철제 장갑함을 연상하기 쉽지만 꼭 그 같은 양식의 배가 아니라도 목제 선체에 철제 장갑판을 덧댄 정도의 배도 철갑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철체 선체 철갑선(Iron Hull-Ironclad)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제 선체 철갑선(Wooden Hull-Ironclad)도 존재했다.
결국 거북선 철갑선설이란 것도 목조 선체를 가진 배에 부분적으로 철판을 장갑으로 덧붙인 배를 의미할 뿐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구조라고 추정한다.
진주성 성문에 철판을 씌운 방식.
거북선 철갑선 긍정론자들은 거북선의 철갑도 이와 비슷한 구조라고 추정한다.
해군사관학교 1대1 실물 복원 모형의 거북선 개판.
얇은 금속제 판이 붙어 있다.
5.철갑은 필요했나? 화공 문제
사실 어쩌면 보다 중요한 것은 철갑이 필요했는지 여부라고 할 수 있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란 직접적 증거가 없다고 생각했던 언더우드 조차도 1933년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분과지]에 발표한 그의 논문(Korea Boats and ships)에서 “거북선 개판의 두꺼운 나무판자만으로도 충분히 일본군의 조총 사격은 막을 수 있겠지만, 적의 화공에는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의문을 표시했다.
거북선의 경우 판옥선 같은 통상적인 형태의 선박과 달리 외부 공간 출입이 제한된다.
개판에 십자로로 길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경사가 있는 개판 위를 해상 항해 중에 걸어 다니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적이 개판에 불화살 공격을 가한다면 불을 끄기 쉽지 않다.
즉 거북선 같은 밀폐 구조 갑판을 가진 목제 함정은 통상적인 형태의 목선에 비해 화공이 가장 결정적인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물에 젖은 이엉이나 거적을 거북선 개판 위에 덮는 방법이 있지만 쉽게 떨어질 수 있고, 해가 강한 계절에는 짧은 시간 안에 말라 버릴 수 있어 일종의 임시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거북선 개판에 얇은 철판이 씌워져 있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거북선의 철갑이 방어력 강화 목적이 아니라 적의 화공 방지용이라고 생각한다.
6.철갑선일 가능성은 있나?
그렇다면 거북선이 철갑선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거북선 3층 구조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결정적인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북선 철갑선 긍정론자들도 명백한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거북선 철갑선 지지자들은 흔히 일본 기록을 근거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임진왜란 해전 관련 기록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전체를 철로 요해한 배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일본 측 기록이 바로 철갑선의 근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선전기]의 철로 요해했다는 표현은 철침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을 주제로 한 조선 시대 문헌에 거북선의 개판을 철판으로 만들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 문제다.
1898년 무렵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시대 [무기재고표]에는 거북선의 철덮개를 의미하는 귀선철개(龜船鐵蓋)라는 부품이 등장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서 이것이 거북선의 철갑을 지칭하는 것인지 불확실하고, 임진왜란 당대의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아니어서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거북선 내부 구조 논쟁과 마찬가지로 철갑선 논쟁도 여전히 끝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1800년대 말 이래 무려 10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거북선 철갑선 논쟁이나 1970년대 이래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거북선 내부 구조 논쟁은 거북선의 정확한 형태를 복원해 내고자 하는 열망과 열정을 담은 채 지금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거북선 전체가 철로 요해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일본의 고려선전기.
7.100년 넘은 논쟁의 이면
이처럼 거북선을 놓고 장장 130년 넘게 국내외 학자들이 기나긴 논쟁을 벌인 것은 그만큼 거북선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이 높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편으로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 이후에도 거북선을 계속 보유했고, 그 같은 수군이 공식적으로 1895년에 해산된 점을 생각하면 이 같은 논쟁은 아쉬운 측면도 있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이 외국에서 제기될 때는 조선에 거북선이 남아 있거나 최소한 실제 거북선을 목격한 사람이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 해군 원정대가 1885년 거문도를 점령하기 2년 전인 1883년 한국을 찾았다가 거북선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1884년에는 미국의 포크 해군 대위가 경남 고성에서 거북선 잔해를 목격한 기록도 남아 있다.
유길준이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병선이라고 주장한 [서유견문]을 펴낸 해도 바로 1895년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실제 조선 수군 근무 경험자를 만나 그들의 목격담을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았다.
거북선의 정확한 진실을 알려줄 수 있는 결정적 기회는 그렇게 아쉽게 사라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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