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는 새로운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과 역사적 진보에 대한 꿈을 우리의 삶에 부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더 좋은 대안적 사회 체제'로서 유토피아의 문제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과 사회과학의 중심주제 였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러한 더 좋은 대안적 사회 체제로서 유토피아는 물론 공산주의 사회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롯한 기존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공산주의 사회를 내세웠다.
공산주의 사회는 해방된 공동체이며 여기서는 억압이나 착취와 같은 기존 사회의 문제들이 모두 해소되어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유토피아적 열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생시몽, 푸리에, 오웬과 같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유토피아론을 공상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적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저작에는 '더 좋은 대안적 사회 체제'로서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이 총괄적으로 제시되지 않은 채 단지 단편적으로만 산재해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역사적 유물론에 토대하여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것과 관련이 깊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기존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에만 치중하였으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미래상을 기획하는 작업을 불필요하거나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이것을 '과학적 사회주의'의 주요과제에서 제외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비롯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 곳곳에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을 통해서 공산주의 사회의 이념이나 목적 및 운영 원리를 개괄적으로 그려볼 수는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내세웠던 해방의 공동체로서 공산주의가 추구했던 가치나 이념은 무엇이고,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이나 사회의 운영 원리는 무엇인가?
이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사회주의와 공신주의의 일반적인 차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모순을 일정하게 해소하고 사회 발전의 새로운 단계의 사회구성체가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최초의 단계이다."
이에 비해
"공산주의는 사회주의 사회의 인민독재를 해소하는 두 번째 단계를 이른다."
즉,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체에 대립하는 공산주의적 사회 구성체는 두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단계는 자본주의적 형태가 아직도 남아 있는 사회주의 사회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이러한 사회주의가 좀더 높은 형태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행해지고 있으며, 이에 비해 공산주의 사회는 좀더 높은 단계로서 모든 계급이 사라지고 필요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이러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개념적 구분은 레닌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인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지만 곧바로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없고 일정 기간 동안 과도기적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러한 구분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사회 구성체의 두 단계를 구분하기는 하였지만, 이 두 단계를 가리키기 위해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구분하여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와는 달리 레닌은 실제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라는 당면한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론적 상상속에서 유토피아를 구성하는 것과 실제로 현실에서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사상에서 단편적으로 엿볼수있는 공산주의 사회의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공유의 개념이다.
공유는 단순히 생산수단이나 생산물을 함께 소유하거나 나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생산수단이나 생산물에 자연적 환경과 마찬가지로 공공성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이 사적소유에 기인하는 것이기에 이를 철폐하고 공유를 확대하는 것이야말로 공산주의 내지 유토피아의 전제조건이다.
이 공유의 개념은 이미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바 있다.
그것이 바로 원시 공산제 사회다.
오래전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원시공산제 사회에서는 인간생존의 조건들인 동,식물,토지,물, 등을 포함한 모든 자연적 조건은 공유였다.
물론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공유의 개념이 원시공산제 사회에서의 공유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가장 큰 차이는 잉여 생산물이 존재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산력과 생산수단의 존재 유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생존의 조건들에 대해서 그것을 공유한다는 개념에서는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공유의 개념은 사회주의 사회의 국유화와는 다소 다른 개념이다.
국유화는 인민지배라는 과도기적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축소하고 유토피아적인 공유의 사회로 향해가는 과도기적인 과정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은 공유의 확대 과정에 다름아니다.
원시공산제 사회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자연환경에 대한 공유만으로 불평등이 해소될 수 있었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연환경과 더불어 생산수단에 대한 공유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생산수단의 증가는 그 사회의 생산력에 의해 좌우되는데, 생산력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의 유산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불평등과 차별의 본질은 바로 전체 사회가 공유해야 할 생산력의 수혜를 소수가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유화의 과정을 넘어 공유의 확대야 말로 유토피아의 전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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