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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회관 휴게실/세상이야기

미당 서정주의 추억

by Ajan Master_Choi 2021. 2. 27.

ㅡ소설가 정종명의 ‘김동리-그리고 나’를 읽을 때 어김없이 서정주 시인이 생각났다. 왜 번번이 미당을 떠올리게 될까.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미당 서정주는 김동리와 함께 한국 문학을 이끌어왔고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한국 문학의 대부였다.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한국 최초의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기도 했다. 서정주 시인에 대한 추억이 밀려왔다.ㅡ

1996년 김동리 작고 1주기를 맞아 미당 서정주가 쓴 비문이다.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는 한국 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양 몸살을 앓던 탐미파 중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에 떠오른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무지개여”

미당이 세상을 뜬 그해 봄에(2000년) 나는 아내와 함께 남현동 미당의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함자를 대면 금세 알만한 미당의 수제자가 찾아가지 말라고 나에게 귀띔했다.

양주(兩主)가 그 우중충한 안방에서 우리를 맞았을 때 나는 퍼뜩 그 선배가 왜 우리의 방문을 만류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집안은 영락없이 어웅한 동굴 속 같았고 그나마 햇볕이 든 안방도 책상이 놓인 부분만 빼놓고는 냉기를 막기 위해 이불을 깔아놓았다.

멀찍이 떨어져서 깔아놓은 이불 위에 부인이 옹송거리고 앉아 있었다.
이런 안방으로 술상을 내왔을 때 나는 울컥 눈물이 났다.
산 낙지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계속 속으로 울먹이고 있었다.
이 초라한 남현동 미당의 집이 이 나라 최고 시인이 살고 있는, 말하자면 명작의 산실이었다.

그날 시간이 한참 흐르고, 맥주를 둬 잔 마시고 긴장된 분위기가 자못 부드러워졌을 때, 나는 왜 미당의 방문을 금기시했는지 비로소 어렴풋이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합석했던 아내는 주로 사진을 찍느라고 자리를 떴고 나만 미당과 마주앉아서 방문한 목적을 말씀드렸다.

“북반구에 첫 봄날이 찾아오는 2000년 3월 21에 유네스코한국위원회와 문화일보가 공동 주최로 유네스코세계시의날 선포기념 문화일보 제1회 시낭송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조정애 시인이 주관하고 제가 사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꼭 오셔서 축하말씀도 해 주시고 시도 낭송해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각별한 관심을 보이면서
초청한 시인들을 물었다.

“조병화, 구상, 고은 시인을 초청했구요. 펜클럽 김시철, 한국문협 성춘복, 그리고 정공채 민영, 황명걸, 정희성, 조병무, 김지향, 김후란, 유안진, 조정애, 나희덕. 윤강로 등 한국시협과 현대시협을 총망라하여 고루 초청했습니다. 범문단의 행사로 치르고 싶습니다.”

한껏 기분이 좋아졌을 때 아내가 미당에게 시를 한 편 낭송해 달라고 특별히 주문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시낭송을 녹음해 두려는 속셈이었다.

미당은 그 척척 달라붙는 걸쭉한 목소리로 ‘동천’을 두 번씩이나 낭송해 주었다.
그러나 좋았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고은 그 양반은 와서 뭘 할꼬”

“‘구월산’과 ‘화개장터’를 낭송할 겁니다. 좋은 말씀도 할 거구요”

순간 그의 눈에 어두운 빛이 스쳐갔다.
뭔가 몹시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불쑥

“아까 박지원도 온다고 했던가. 헹 그런 사람은 왜 불러”

나도 모르게 손을 저으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녜요, 문화부장관이구요,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도 낭송하고 축사도 하기로 돼 있거든요.”

“그 양반 김대중의 복심 아냐”

그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의 기색이 슬슬 변하고 있었다.

바짝 정신을 차리고 쳐다보니 어쩐지 미당이 뭔가 잔뜩 경계하고 불안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랬다.
일세를 풍미했던 문단의 거인, 올해 85세인 미당은 그 성취, 명성, 위세에도 불구하고 막다른 벼랑 끝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문턱에서 정체모를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의심 많고 겁에 질린,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노인에 불과했다.
그가 무엇을 저어하고 있는지를 그의 엉뚱한 언동에서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보게, 알아? 엘리자베스 여왕이 나를 초청했다고. 영국으로 살러 갈 작정이야.”

느닷없이 영국으로 이민을 가겠다고 했다.
그 나이에 어떻게 고국을 떠나겠다는 건지,
아들이 있는 미국이라면 몰라도,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직도 자기가 좋아서 부르는 나라가 있다고,
그것도 영국 여왕이 초빙했다고,
그는 사뭇 자랑하는 말투로 말했다.

얼핏 사람들에게 너무 헐뜯고 미워하지 말라고 애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생의 황혼녘에서 그가 극도의 피해망상과 자격지심에 시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초청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대화 도중에 계속 걸러온 전화를 받았다.
무슨 강연회에 초청하는 전화 같았다.

“또 무슨 일야, 글쎄 알겠다니까, 3월 21일이랬지, 꼭 가겠네.”

21일은 우리의 시낭송회가 열리는 날이다.
깜짝 놀라 날짜를 다시 상기시켰더니,

“허허, 그래야만 더 전화하지 않을 게 아닌가. 시낭송회는 몇 시부턴가?”

그제야 시낭송회 참석을 확답한 셈이었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그만 최악의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무심코 내가 말했다.
아내는 녹음할 태세를 취했다.

“과거 자료도 좀 주시고 이번 기회에 꼭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해 주세요.”

“무슨 자료? 그리고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그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과거자료’ ‘하실 말씀’ 이런 말에 그가 과민반응을 보였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친일시와 전두환 송시 같은 것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게 분명했다.

수백척의 비행기와/대포와 폭발탄과/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우리의 땀과 목숨을 뺏으러 온/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그대/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송정오장 송가 중에서.

여기서 병정은 영미연합군이고
그대는 한국인 카미카제 인재웅이다.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전두환 56회 생일날 송시

그는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를 ‘구국의 결단’이라고 치켜세웠고 전두환의 웃는 얼굴을 보고 ‘세상을 구제하실 미륵의 미소’하고 찬미했다.

그가 갑자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이렇게 일갈해놓고 나서
난데없이 미국 대통령 클린턴을 끌어내어
심하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젊은 놈이 그렇게 건방지고 비열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뭔데 우리를 괴롭히는 거야. 김영삼을 어떻게 그리 막 대할 수가 있어. 천하에 불량하고 부도덕한 놈 같으니라고! 생각할수록 이가 갈린단 말이야”

완전히 횡설수설이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국 쌀시장 개방을 둘러싸고 미국이 보였던 태도를 비난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클린턴에게 그토록 독설을 퍼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인격의 분열(split personality)? 그는 갑자기 스키조가 돼 버렸다.
아아, 영락없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상처 입고 으르렁거리고 있는 맹수 같았다.

그때 멀찍이 앉아 있던 부인한테서 신호가 왔다.
부인은 손가락을 가만히 입술에 댄 채 다른 손을 몇 번 위로 추켜들어 보였다.
조용히 끝내고 떠나라는 표시였다.
부인은 요동치고 있는 남편의 기색을 훤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참석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나서 황급히 남현동 미당의 집을 떠났다.
예상했던 대로 미당은 시 낭송회에 나오지 않았고 그의 ‘육성녹음’이 대신 ‘동천’을 낭송했다.

그로부터 아홉 달 후,
200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미당은 세상을 떠났다.

2000년 10월에 아내 방옥숙 여사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쓰러졌고 곡기를 거부한 채 산소호흡기를 쓰고 투명하다가 12월 24일에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기 한 달 전 11월에 TV에 나와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 질문을 받자

“거 뭐, 잘들 봐달라고 해.”

하고 끝내 사죄를 거부해 버렸다.
사후에도 그의 친일문학과 친전두환 행적을 두고 뜨거운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의 시는 국어교과서에서 쫓겨났고 미당문학상은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다.
그렇다면 미당의 시와 문학상을 나는 어떻게 요절낼 것인가.
실제로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나의 결론을 대신하고 싶다.

2000년 어느 가을날 조선일보가 주관한 동인문학상 시상식에 가본 적이 있었다.
친일문학상이라고 황석영이 걷어차 버린 상을 이문구가 받았다.
고뇌로 일그러진 이문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관촌수필’이 눈앞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얼마나 나에게 다감하고 겸손했던 친구인가.

“상이 무슨 죄라고”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날 밤 아내와 유난히 달빛이 출렁이는 창경궁 돌담길을 지나서 혜화동로터리로 시인들을 찾아갔다.
민영, 김지향, 윤강로 시인 등을 만나서 밤 깊도록 술을 마시며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윤동주 서시정(序詩亭)에 오를 때마다 이상하게도 미당의 시가 떠올랐다.
서시를 비롯해 윤동주 시를 무척 좋아하지만 어쩐지 그의 시적성취가 미당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겨졌다.

왜 미당의 시를 좋아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묘한 갈등을 나는 느꼈다.

엇구수하고,
감칠맛 나고,
살아 펄떡이고,
발칙하고,
당돌하고,
생뚱맞고,
영롱하고,
아름다운 그의 서정시가,
나의 모국어가 그리워서 문득 목이 메곤 했다.

나의 머리와 가슴은 그래서 늘 충돌하고 있었다.
머리는 훼절한 기회주의자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골백번 매도하고 있었지만 가슴은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감동의 기척대로 그의 시를 변함없이 사랑했다.
그랬다.
폄척(貶斥) 서정주,
그러나 나는 그를 하염없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글. 소설가 오태규 페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