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29일
태평양 전쟁 말기였다.
이미 일본은 태반의 해공군력을 잃고 일본 본토로 죄어들어오는 미군의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후덥지근한 초여름 밤 경성부내는 어둠에 휩싸였다.
등화관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고 집집마다 검은 커튼이 내려졌던 것이다.
그 어둠 속에서 한 노인이 일어났다가 소변을 보고 다시 누웠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기척이었다.
전화가 없던 시절 그 아내는 눈물을 삼키며 자신이 아는 남편의 지인들의 대문을 두드리며 남편의 부고를 전했다.
소문은 경성부내에 퍼졌고 그를 아는 사람들이 기묘하게 북향으로 지어진 고인의 집으로 향했다.
고인은 남쪽의 총독부가 꼴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것이다.
고인의 이름은 만해 한용운이었다.
만해 한용운.
그는 여러 모습을 지닌다.
우선 불교유신을 주창한 승려였고 지금도 수험생들을 괴롭히는 시 "님의 침묵" 등을 쓴 시인이었고 소설가이기도 했고 두번 결혼하고 자손도 꽤 남긴 아버지였다.
그리고 하나 더 그 누구보다 꼬장꼬장하고 비타협으로 일관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홍성은 예로부터 인물이 많은 고장.
고려말의 최영과 사육신 성삼문이 이곳 출신이고 동시대에도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이 홍성 출신이었다.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기울어가는 나라에 대한 염려의 마음을 이어받았던 그는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을미사변의 소용돌이를 목도하며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된다.
그 와중에 유명한 도사를 찾아 오대산 월정사로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설악산 백담사를 찾았다가 연곡스님의 가르침을 얻어 불제자의 길을 걷게 된다.
설악산 땅 곳곳을 차지한 재벌사찰 신흥사나 전두환의 방을 보존하고 있는 백담사나 지금은 위풍당당한 사세를 자랑하지만 당시에는 금강산 건봉사의 말사였다.
당시 건봉사는 유학승들이 많이 거쳐간 곳이었고 한용운은 그곳에서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된다.
젊은 날의 한용운은 바야흐로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밟아보기 위해 세계일주를 계획할만큼 엉뚱하고도 직정적이었다.
첫 기착지였던 블라디보스톡에서 한국 교포들에게 일본 앞잡이라는 오해를 받아 죽을뻔한 뒤 두만강 건너 돌아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던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인맥도 넓히지만 나라는 점점 기울어 급기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그 무렵 해인사 주지 이회광은 조선 불교를 일본 조동종과 통합하려는 일종의 한일불교합방을 추진하는데 한용운은 조선 승려 대회를 주도하여 '종문난적' 이회광을 성토한다.
그러나 결국 일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자 만주로 건너간다.
그런데 참 운도 없는 것이 여기서도 밀정의 의심을 받아 청년들이 그에게 총을 쏘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다.
아무래도 그의 할 일은 국내에 있었던 것 같다.
1913년 그는 '불교유신론'을 발표한다.
그 한 대목은 불교에는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그 울림이 크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이다. 천하에 어머니 없는 아들이 없다는 말은 하되 파괴없는 유신이 없다는 말은 알지 못한다."
그는 조선 불교의 은둔과 부패를 통렬하게 비판했고 혁신 즉 유신이란 살을 찢는 산고를 겪고서야 가능함을 외쳤던 것이다.
그의 일생은 이런 꼬장꼬장한 발걸음으로 점철되거니와 그는 일제강점기를 관통하여 살아낸 인물 중에서 그 지조와 기개를 끝까지 유지한 인물 중의 하나로 남는다.
3.1운동 당시 기독교계의 지도자였던 월남 이상재가 무모한 희생을 이유로 독립선언 참여를 거절하고 독립청원서를 내자고 제안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뿐 아니라 일생 동안 이상재를 보지 않았고 이상재가 죽은 후 장례위원에 오르자 그 이름을 박박 지워 버렸다.
3.1 독립선언 후 체포된 민족대표 중 일부가 "내란죄로 사형설"이라는 풍문을 듣고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거나 낙심하는 모습을 보이자 똥통을 둘러 엎으면서 그들을 꾸짖었다.
"나라 잃은 주제에 죽는 게 서러우면 당장 그만둬라 이 화상들아."
일본인 판사가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고 질문하자 그는 대답한다.
"육신이 사라지면 그 정신만이라도 남아 계속할 것이다."
이상재에게 보여 준 것처럼 그는 일단 그의 눈밖에 나거나 변절했다고 보이는 자들을 상종을 하지 않았다.
기미독립선언서의 작성자이지만 끝까지 견결하지 못했던 최남선을 만났을 때 짐짓 모르는체 하면서 "내가 아는 육당 최남선은 죽어 장례를 치른지 오래요."라고 눙을 쳤고 옛친구 최린이 찾아와 어린 딸에게 돈을 쥐어주고 가자 득달같이 달려가 최린의 집 마당에 던져 두고 돌아왔다.
그리고 일제에 협력하던 조선 불교 31본산 주지들이 모임을 갖고 한 말씀을 청했을때 그는 한국 독설사에 길이 남을 코멘트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은 똥. 하지만 더 더러운 것은 썩고 있는 송장이요. 똥 옆에서는 밥을 먹어도 송장 옆에서는 밥을 못먹겠더란 말이지. 그런데 그보다 더 더러운게 있소. 그건 바로 31본산의 주지 너희놈들이야."
한때 위업을 남긴 인물은 많다.
젊어서 창대한 빛을 내뿜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 위업이 시들지 않고 평생을 푸르른 사람은 적으며 젊어서의 빛을 숨 거둘때까지 바래지 않게 간직한 이들은 더욱 적다.
한용운의 이름은 그래서 소중하다.
독립선언을 하면 희생이 따를테니 독립청원을 하자는 이상재의 면전에서 바람 소리 나게 홱 돌아섰던 그, 최린을 사갈시하고 최남선을 송장으로 봤던 그의 철저함은 그 자신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생애 끝까지 그 날이 무뎌지지 않았기에 우리 역사 속에서 더욱 진귀하다.
1944년 6월29일 해방을 1년 앞두고 만해 한용운 그 님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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